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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기타 조회 수 11576 추천 수 66 2006.01.08 14:29:36
성경본문 : 창세기 1:1-5 
http://wms.kehc.org/d/dabia/06.01.08.MP32006. 1.8.          
창 1:1-5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한 처음
창세기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 약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어 내신 것을 누가 보고 이렇게 기록했을까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건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먼 훗날 하나님이 성서 기자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성서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이 이 창조 사건을 인간에게 알려준 것이라는 말이 맞기는 하지만, 이런 알림이라는 게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듯이 직접적으로 전해준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틀렸습니다. 성서기자들은 어떤 사건의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것을 그대로 보도한 게 아니라 전승된 이야기를 편집해서 전달했다는 게 성서읽기에서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성서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스스로 진리를 깨우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가 소통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인간의 사유는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이 바르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낼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마귀의 말을 전달하게 되겠지요. 우리는 성서 기자들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전달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창세기 기자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창세기 기자는 오늘 하나님의 창조 사건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한 처음”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고 말합니다. 한 처음이 언제일까요? 현대 물리학은 우주의 나이를 120억년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기자가 말하는 이 한 처음은 120억년 이전의 어느 한 순간을 가리키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서는 물리학과 생물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서가 기록될 때의 사람들은 태양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몰랐으며, 그것에 대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다만 태양이 그렇게 빛나고 있었다는 사실 앞에서 당혹스러워했으며, 거기서 그것을 만든 어떤 분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구약성서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한 처음’은 창조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어떤 명확한 시점을 구분하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하신 일이 바로 하늘과 땅의 창조였다는 사실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 창조가 일어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실 이게 우리 인간이 감수해야 할 인식의 한계입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의 차이를 우리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 책 한권이 있다고 합시다. 이 책을 불에 태웠습니다. 그러면 불에 타기 전에는 이 책이 ‘있는’ 거고, 불에 타버리면 ‘없는’ 거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불에 타기 이전과 이후는 단지 책이라는 형태만 바뀐 거지 존재 자체가 달라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의 상태를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걸 무(無)라고 말할 뿐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지금 이 우주의 정확한 시점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행하신 사건은 곧 하늘과 땅의 창조라는 사실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우리는 하늘과 땅을 포함하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사건으로 믿습니다. 우리가 지금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 세상은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이 말은 곧 어느 순간에도 우리는 이 세상을 부정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악한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세상을 긍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 이 모든 것은 곧 하나님이 ‘한 처음’에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둠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드셨을 때 이 세상은 혼돈 상태였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어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우리는 이 문장을 실증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도 ‘땅’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이유를 잘 모릅니다. 어둠이 깊은 물 위를 덮고 있었다는 것도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따갈 수 없습니다. 고대인들은 바다 밑바닥에도 땅이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겠지요. 어쨌든지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시긴 했지만 그것이 아무 형태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혼돈 상태에서 구체적인 창조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세계가 어떤 질서를 잡아나가는 순서겠지요. 흡사 어머니 뱃속의 배아가 일정한 시간이 지난 다음부터 구체적인 인간의 형태를 갖는 것처럼 말입니다.
가장 처음으로 형태를 갖춘 것은 ‘빛’이었습니다. 성서 기자는 3절에서 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고 설명합니다. 고대인들에게 빛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실 고대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빛은 여전히 절대적인 힘입니다. 모든 사물들은 빛이 있어야만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빛은 생명의 힘입니다. 식물의 탄소동화 작용은 기본적으로 빛의 활동입니다. 그것이 곧 지구에서 벌어지는 먹이사슬의 가장 아래층에 놓여 있는 생명현상입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빛이 없다 하더라도 물이 있기만 하면 생명작용이 가능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빛이 곧 생명의 기초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이 빛을 하나님의 구원사건과 연결해서 생각했습니다. 단적인 예로 성탄절이 바로 그렇습니다.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동지가 지난 며칠 후, 그러니까 낮의 길이가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는 12월25일을 성탄절로 지키게 된 게 그런 이유입니다. 유대교의 거룩한 날인 안식일이 아니라 로마에서 태양의 날로 지키는 일요일을 예배드리는 주일로 삼은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빛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했습니다(요 1:1-18).
오늘 창세기 기자가 말하는 이 빛은 단순히 태양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태양과 달은 한참 뒤인 4일째 만드셨습니다. 이게 좀 이상합니다. 빛은 당연히 태양의 힘이어야 하는데 성서는 그 둘을 일치시키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스라엘 신앙이 로마, 이집트, 잉카 문명의 종교와 구별됩니다. 이들 고대 문명은 태양 자체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태양이 없으면 그들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물론 이런 생존의 차원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라고 해서 태양의 힘을 느끼지 못했겠습니까? 그러나 창세기 기자는 그 태양이라는 사물 자체보다는 빛의 세계에 주목했습니다. 태양은 단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그 빛의 세계를 지배할 뿐입니다. 이 빛은 태양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생명의 근본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태양과 상관없이 낮과 밤을 근원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5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고 합니다. 낮은 빛의 세계이며, 밤은 그 빛이 없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일단 빛을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에너지라고 생각하긴 합니다만, 오늘 말씀에 의하면 그 빛이 아닌 어둠의 세계도 역시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을 만드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고 합니다. 즉 빛을 만드셨다는 것은 어둠까지 만드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밝음과 어둠을 나누시고, 밝음을 낮이라 하고 어둠을 밤이라 했으니까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빛과 낮만이 아니라 어둠과 밤도 역시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서 똑같이 중요합니다.
현대인들은 지금 빛의 과잉 속에서 살아갑니다. 전기를 통해 일어나는 빛을 발명한 인간에게 이제 밤은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티브이와 컴퓨터는 곧 빛의 작용입니다. 이렇게 어둠과 담을 쌓고 일방적으로 빛에 둘러싸인 현대인들이 정상적인 건가요? 이런 게 문명의 발전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겠지만 창세기의 증언에 따르면 그것은 빛의 반쪽에 불과합니다. 어둠을 모르면 빛을 온전하게 아는 게 아니까요.
여러분은 요즘 어둠을 경험하시나요? 제가 어렸을 때는 밤을 친구처럼 살았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만 아니라면 밤늦도록 친구들과 밖에서 놀았습니다. 칠흑같이 어둔 밤에 술래잡기를 하거나, 동네패싸움 같은 것도 했습니다. 함께 놀다가도 별들이 촘촘히 박힌 밤하늘을 쳐다보았을 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생명의 신비를 경험하곤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빛의 반쪽인 어둠은 어디로 갔나요?
이 빛의 반쪽인 어둠은 철학적인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 세상은 빛에 속한 사람들만으로 구성될 수 없습니다. 어둠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어울릴 때 그게 온전한 인간 공동체가 됩니다. 예컨대 장애인들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보십시오. 파렴치한 사람들, 부도덕한 사람들, 조폭들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현실적으로 시작하지 않는 한 그런 세상은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행복한 세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밝음과 어둠이 함께 어울려야 정상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제가 여기서 이 세상의 악을 정당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어둠은 우리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으며, 더 궁극적으로 그런 것 까지 포함할 때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과 이성
오늘 설교가 약간 까다롭지요? 또는 그게 오늘 우리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나,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앞에서 전한 말씀을 잠시 정리해보지요. 저는 앞에서 두 가지 요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세기 기자의 고백은 이 세상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긍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빛의 창조가 어둠을 포함한다는 것도 역시 우리 눈에 어둠으로 보이는 것까지 긍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기독교가 말하는 창조론은 진화론과 대치되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을 긍정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한 세상은 그 하나님의 뜻대로 굴러갈 테니까 안심하고 살아도 되는가, 하고 말입니다.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창조가 선하다는 사실을 믿고 안심하셔도 됩니다. 인간의 문명이 이 생태계를 파괴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창조의 하나님이 새로운 방식으로 이끌어 가실 겁니다.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이 세상을 낙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낭만주의는 아닙니다. 어떻게 잘 되겠거니 하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한 명백한 인식과 판단이 필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빛을 창조했다고 증언합니다. “빛이 생겨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의 근원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은 마술사가 까만 주머니에서 비들기와 토끼를 꺼내듯이 세상을 창조한 게 아니라 언어를 통해서 창조하셨습니다. 이걸 기독교 신학에서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고 말합니다. 어떤 재료를 사용해서 손으로 제작한 게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말씀’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기자는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1:1)고 설명합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모든 것이 생겨났습니다. 이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입니다. 언어라는 뜻도 있고 이성이라는 뜻도 있는 단어입니다. 아마 고대인들은 언어를 이성적인 능력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건 정확한 해석입니다. 문명이 발달한 곳일수록 언어가 발달하게 되지요. 어린아이가 지능이 발달하면 말을 하게 되고, 공부가 깊어지면 당연히 언어의 깊이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지금 이성적인 사람들인가요? 우리는 지금 합리적인 사람들인가요? 황우석 사태 앞에서도 우리가 이성적인 사람들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요? 순교의 각오로 사학법을 저지하겠다고 나선 기독교 단체는 과연 이성적인 사람들인가요? 오늘 우리는 언어를 바르게 사용하고 있나요? 이성과 언어는 창조의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창조의 능력이 주어졌다는 게 아니라 이성과 언어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창조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이성과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창조 행위를 계속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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