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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 2월12일

기타 조회 수 13122 추천 수 52 2006.02.12 19:19:33
성경본문 : 마가복음 1:40-45 
http://wms.kehc.org/d/dabia/06.02.12.MP32006. 2.12.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막 1:40-45)

나병 치유
오늘 본문이 보도하고 있는 나병치유 사건은 모든 공관복음서가 다루고 있습니다. 각각의 복음서가 이 사건을 초반부에 배치한 걸 보면 아마 예수의 공생애 초기에 일어난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가 초기 공동체 안에서 잘 알려져 있었다는 의미이겠지요. 특히 마가는 예수의 메시아성에 관한 일련의 보도인 1-3장 안에 이 이야기를 배치했습니다. 예컨대 마가복음 1:21-28에는 악령 들린 사람을 고친 이야기가, 1:29-34에는 열병 걸린 시모의 장모를 고친 이야기를 비롯해서 많은 환자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친 이야기가, 1:35-39에도 역시 회당에서 전도하시며 마귀를 쫓아낸 이야기가 나옵니다. 2:1-12에는 중풍병자 치유사건, 3:1-6에는 손 오그라든 사람 치유사건이 나옵니다. 이렇게 마마복음 1-3장에는 주로 질병 치유와 축귀 사건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나병환자의 치유 사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에게 와서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이 나병환자가 어떤 연유로 예수를 찾아왔는지 궁금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병은 고대인들에게 아주 저주스러운 병이었습니다. 요즘은 한센씨 병이라고 불리는 나병은 천형이라는 말이 붙은 병인데, 이스라엘에서는 죽은 사람과 다를 게 없다고들 여겼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습니다. <벤허>라는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나병환자들은 아주 외딴 곳, 사람들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절벽 아래에 모여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어쩌다가 마을로 들어오려면 사람들이 미리 피할 수 있도록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윗수염을 가린 채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하고 외쳐야만 했습니다.(레 13:45,46). 왜 이스라엘 사회에 이런 율법전통이 세워졌는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병이 그만큼 두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나병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지난날에는 자기 가족이며, 친구였을 겁니다. 그러니 완전히 정을 끊을 수 있나요? 이런 정에 끌려서 조금씩 만나다 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병에 걸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여기서 나병의 전염성 여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병과 악성 피부질환을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두려운 병일뿐입니다.
이런 상황에 놓인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에게 온 것입니다. 그는 예수에 관한 소문을 친구나 가족에게서 전해 들었겠지요. 이 사람이 예수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고 합니다. 나병환자가 성한 사람인 예수에게 가까이 온다는 것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의 주변에 아무도 없었을까요? 마태복음에 따르면 그때 군중들이 예수를 따랐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의 상황도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이 상황은 매우 급박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일반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었던 사람이지만 여하한 연유로 그는 성한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 나타나 예수에게 고쳐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본문은 예수의 반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 단계로 나뉩니다. 첫째, 예수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둘째, 그에게 손을 갖다 대셨다. 셋째, 깨끗이 되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각각 마음의 움직임, 몸의 움직임, 말의 움직임으로, 혹은 마음의 동일시, 몸의 동일시, 말의 동일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지 예수는 나병환자의 요구에 전폭적으로 응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에 따라서 결국 나병 증세가 사라지고 깨끗이 나았다고 합니다.

침묵 요구
우리는 그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 중에도 나병환자 치유가 실제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고,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본문을 사실보도로만 생각한다면 나병이 분명히 치료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 텍스트는 그런 사실 여부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치료행위 자체만 갖고 우리가 논란을 벌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오해는 마세요. 나병치유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다른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사건입니다. 그 어떤 다른 사실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치유 사건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병 증세가 사라진 이 사람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네가 깨끗해진 것을 그들에게 증명하여라.”(44절). 마가는 예수가 아주 엄하게 이르셨다고 묘사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 일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 둘째, 사제에게 몸을 보이라. 셋째, 예물을 드려서 깨끗해진 것을 증명하여라. 예수가 병을 치료한 후에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런 건 흡사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고 처방한 다음에, 혹은 수술을 끝낸 후에 준수해야 할 규칙을 설명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런 궁금증이 생깁니다. 예수는 왜 이 사건을 숨기시려 했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나병환자를 고쳤다는 사실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구약성서에도 간혹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미리암의 치유입니다. 모세의 권위에 반항했다가 나병에 걸린 미리암을 위해서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일주 일만에 미리암의 나병이 치료되었습니다.(민 12:4-6). 다른 하나는 엘리사가 시리아 장군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준 사건입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한 다음에 치유되었습니다.(왕하 5:8-14). 학자들은 예수의 나병 치유 사건을 엘리사 전승의 배경에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는 카리스마적인 치유 능력을 지난 종말론적 예언자라는 의미입니다. 이렇듯 예수의 능력을 나타내는 사건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예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음 같은 설명이 가능합니다. 첫째, 예수는 나병환자의 입장에서 일을 처리한 것인지 모릅니다. 이미 나병이 나았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일입니다. 그래야만 이 사람이 마을로 돌아와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일단 제사장에게 가서 치료된 사실을 인정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그를 제사장에게 보낸 것입니다. 만약 자기가 치료된 것을 먼저 떠들어댄다면 중간에 무슨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죠.
둘째, 조금 더 타당한 이유는 예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나병환자를 치료하긴 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예수가 정작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이 사람이 예수의 말을 듣지 않고 나발을 불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는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나병 치료된 사건이 알려진 일과 예수가 동네에 들어가지 못한 일과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사람들이 몰려들면 피곤하다는 게 그 이유일까요? 아니면 이런 일로 인해서 바리새파와 제사장들에게서 요시찰 인물로 선정될까 염려한 것일까요? 무엇이 실체적 진실인지 우리가 지금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나병 치유 사건이 지금 알려지는 걸 예수가 원치 않았다는 건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감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이런 감춤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를 과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히려 자신을 숨기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이신 예수님은 시작부터 이런 감춤의 방식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아무도 모르는 어떤 날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이 그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을 눈치 챈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마태복음은 동방박사들을 이야기하고, 누가복음은 목동들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아름답게 꾸며진 일종의 전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오심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출생만이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도 역시 그렇습니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그 십자가가 곧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부활 사건도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그 사건은 원래 은폐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진리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요즘도 참된 것은 숨겨져 있다고 보아야합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의 예술적 능력을 인정받기도 하지만, 그 시대에 인정받지 못하는 예술가도 많습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죽은 예술가와 문학가들도 많습니다. 과학의 세계도 역시 그럴지 모릅니다. 황우석 사태에서 그 면모를 약간 엿볼 수 있지만, 겉으로 굉장한 업적인 것 같아도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원자폭탄을 만든 과학자의 능력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수십만 명의 생명을 파괴했다는 점에서 진리와는 거리가 멉니다. 실제로 생명을 살리는 과학은 아직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살아가나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어떻게 증거되고 있나요? 오늘 우리는 신앙마저도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교회도 역시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만 추구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메시아적 사건마저 감추려고 했던 예수의 생각과 달리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자기를 드러내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미 앞에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그 대답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은폐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일치하지 않으면 우리는 대신 자기 자신을 내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공허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만나는 기쁨, 사랑, 평화의 힘이 나를 지배하지 않으면 결국 자기를 내세우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드러남
하나님 나라는 기본적으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흡사 땅 속에 묻혀 있는 보물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닙니다. 땅에 묻혔어도 보물은 보물로 남아있습니다. 그것이 어느 날 드러납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에 의해서 보물은 사람들에게 알려집니다. 이 드러남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속성입니다.
예수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나병환자의 입을 엄하게 단속했지만 그는 예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는 물러가서 이 일을 널리 선전하며 퍼뜨렸기 때문에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께 모여 들었다.” 이 사람이 예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은 잘못일까요, 아닐까요? 이런 질문은 의미 없습니다. 성서 기자도 그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잘못이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이 나병치유 사건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이 사건이 알려지자 예수는 외딴 곳으로 피하셨다고 합니다. 외딴 곳은 바로 나병환자들이 가야할 곳입니다. 이제 나병환자는 동네서 나발을 불고 다니는 반면에 예수는 외딴 곳으로 물러나셨습니다.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곳까지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왔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는 예수의 감춤과 드러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교를 들은 여러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 어쩌라는 말인가? 여러분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감춤이며 동시에 드러남인 것처럼, 어느 때는 숨은 방식으로, 어느 때는 보이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삶에 개입할 것입니다. 그것을 분간하는 것은 모두 여러분 각자의 몫입니다. 때로는 보이지 않은 방식으로, 때로는 보이는 방식으로 우리를 찾아오는 참된 기쁨과 평화와 사랑의 세계를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참여할 수 있는지, 그것은 여러분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러분의 인생 전체는 바로 이것을 분간할 수 있는 영성의 심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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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권요안

February 16, 2006
*.234.141.165

예전에 같은 본문에 대한 강일상 목사님의 해석을 기독교사상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제 기억에 예수께서 나병환자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다만 예물을 드려 깨끗해진 것을 증명하라고 명하신 이유를 말로만 깨끗해졌다 하지 말고 삶의 실천으로 깨끗해졌음을 증명하라는 의미로 해석하셨던 것 같습니다. 나병의 치유는 죄의 씻김, 예물 드리는 것은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지요. 나병환자가 그 명령을 지키지 않은 덕분에 예수께서는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 곳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는데 오늘날도 예수에 대해 떠들어대는 교회 덕분에 정작 예수께서는 드러내놓고 다닐 수 없는 처지에 놓이지 않았는가라는 신랄한 비판 앞에서 뜨끔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런데 이 침묵 명령은 지금도 여전히 매우 엄중한 명령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 자신이 입을 벌려 무언가 말하면 말할수록 드러나는 것은 나 자신일 뿐이고 예수는 감춰지는 것 같습니다. 결국 "자기를 내세우는 방식"의 삶에 불과하겠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만나는 기쁨, 사랑, 평화의 힘이 나를 지배하"게 되면 나 자신은 감춰지고 자연스럽게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게 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누구보다 요즘의 저에게 요구되는 것이 침묵이 아닐까 생각하던 중에 감춤과 드러남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해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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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김인범

February 16, 2006
*.146.246.1

본문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을 추출하며 오늘 우리들의 삶이 곧 그 나라의 백성들로 마땅히 그 나라 속성에 어울리도록 감추임에 익숙해져야 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감춤만으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수가성의 여인처럼)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신앙생활로, 성숙해 가는 한 모습들로 설명하시는 것에 무릎을 칩니다. 아 그렇구나! 그렇게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의 시각은 상당히 좁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서 숲을 보면서 동시에 나무를 보아야 하는데, 늘 신경을 쓴다고 하면서도 나무에만 너무 시선이 머물러 전체적인 맥락을 놓치는 경우가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저도 그 본문으로 설교를 했던 기억이 있는데
저는 세번에 나누어서 설교를 하면서
첫번째로는 그 어려운 악조건 속에서도 그것을 극복하면서 모험이라고까지 보일 정도로 용기를 내는, 그러나 그 용기가 우리가 아는 그런 일반적인 것이 아닌, 오히려 그 약점이 복이 되는 모습을 통해 우리 성도의 복됨을 보면서 그 복은 일반적인 개념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적 개념으로 자신의 치명적 약점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으로 출발하는, 곧 기독교의 기독교 됨의 복됨이 바로 이것이라는 비약을 통해, 자신이 나둥병자 일 수 있다는, 아니 그렇다는 그 처절한 자기 확인이 곧 진정한 복, 곧 주님을 만나며 치유를 받을 뿐아니라 천국백성이 되는 길임을 강조했으며
두번째로는 주님의 태도에서 굳이 손을 대시며 치유하시는 모습을 근거로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생각하면서,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의 치유가 일반적인 의사들의 어떤 치료 방법과 같은 의미가 아닐 것이고 그것은 우리 주님의 성품으로 보아 치명적 존재와 자신을 동일시하시는(침을 밷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거나, 만지시는 모습들) 것으로 천국민의 모습 또는 성품으로 자기 비하로부터 비약해서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설명했고
세번째는 엄히 경계하셨다는 말씀을 근거로 많이 비약해서, 신앙은 기적과 어떤 원하는 것을 얻은 응답으로 다가 아니라 그것을 말씀과 전통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신앙이 그저 일반 종교에서처럼 기복적으로 흐르거나 무속적으로, 그래서 오늘에 만연된 부정적 모습인 결과 만능주의로 흐르거나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저 우리만 좋으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 말씀을 목사님의 말씀과 비교하게 되니
너무 비약이 심했던 것 같이 느껴지고
또 어떤 나름의 의도를 전제하고 그 분문을 거기에 맞추어 적용했었다 싶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목사님을 통해 그 말씀을 새롭게 볼 수 있어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부탁을 드리는 것은
그런 말씀들의 적용을 설명하며 지지하는 다른 성경 구절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해 주셨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을 실제적으로 설명하는 성구들을 말이죠. 하긴 그것은 제가 찾아야겠죠. 물론 이런 부탁은 설교를 해야하는 제 입장에서 하는 소립니다.

이렇게나마 함께 말씀을 나눌 수 있어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계속 은혜 속에 교제가 영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되고 마침내 삼위 하나님과 하나되도록.....
profile

[레벨:100]정용섭

February 16, 2006
*.249.178.23

김인범 목사님,
좋은 댓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본문을 세번에 걸쳐서 설교하셨다구요.
위의 설명을 통해서 그 내용을 파악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셔도 크게 문제는 아닐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스스로를 성찰하기 때문에
비약이 있더라도 크게 엇나가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본 것이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구요.
성서 텍스트는 그게 진리라고 한다면
종말론적 지평을 선취적으로 담고 있다고 봅니다.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에게 텍스트는 그걸 조금씩 열겠지요.
목사님이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는 어떤 의도를 갖고 성서 텍스트를 요리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신자들을 신앙적으로 훈계한다거나
또는 설교자의 실존적인 신앙을 반영하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텍스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 관건인데,
이건 곧 바른 해석학을 통해서 열리지 않을까요?
제 설교에서 참조 성구가 미진하다고 말씀하셨군요.
이게 저의 가장 취약한 부분입니다.
조금 게으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기도 하구요.
성서 텍스트와 설교의 본질을 진지하게 생각하시는 분의
댓글을 받고 보니
기분이 좋군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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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 대림절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8] 2008-12-08 14368
301 대림절 마지막 ‘때’ [11] 2008-12-01 12991
300 성령강림절 깨어 있으라! [10] 2008-11-23 16280
299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776
298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613
297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501
296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738
295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3589
294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623
293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649
292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0966
291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512
290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103
289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1965
288 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9] 2008-08-31 13172
287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787
286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73
285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542
284 성령강림절 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9] 2008-08-03 13252
28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 [8] 2008-07-27 13240
28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 [10] 2008-07-20 15284
281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와 예수 [23] 2008-07-13 15867
280 성령강림절 말씀은 성취된다 [10] 2008-07-06 17949
279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538
278 성령강림절 경계를 넘어서 [5] 2008-06-22 16328
277 성령강림절 이삭의 하나님, 이스마엘의 하나님? [8] 2008-06-15 25764
276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6899
275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446
274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268
273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하나님 [6] 2008-05-18 27824
272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0785
271 부활절 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8] 2008-05-04 25605
270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7763
269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373
268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352
267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281
266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706
265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2023
264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197
263 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 2008-03-23 15539
262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388
261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776
260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850
259 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13] 2008-02-24 16083
258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8791
257 사순절 악마의 유혹 앞에서 [14] 2008-02-10 15739
256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697
255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247
254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457
253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316
252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4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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