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

두 여자의 만남

대림절 조회 수 14688 추천 수 67 2006.12.24 15:48:25
성경본문 : 누가복음 1:39-56 
http://wms.kehc.org/d/dabia/06.12.24.MP32006.12.247. 눅 1:39-56
두 여자의 만남

예수님의 출생에 관해서 보도하고 있는 복음서는 마태와 누가복음입니다. 마가와 요한복음은 그 이야기 없이 다짜고짜로 예수님의 공생애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똑같이 보도하고 있는 복음서가 이렇게 조금씩, 또는 적지 않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그 복음서가 형성된 시기나 배경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마태복음은 마태공동체의 눈으로 본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고, 요한복음은 요한공동체의 눈으로 본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태와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출생 이야기에도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성령의 능력을 통한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누구에게 알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천사가 요셉에게 알리는 반면에 누가복음은 마리아에게 알립니다. 또한 마태복음에는 동방박사들이 등장하지만 누가복음에는 목동들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요셉 가족들이 신생아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하는 이야기와 헤로데가 어린아이들을 참살하는 끔찍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반해서 누가복음에는 오늘 우리가 읽은 것처럼 두 여자가 산골에서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어떻게 다른지 벌써 드러나지요? 누가복음은 약한 사람들, 여자들, 어린아이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정말 그림처럼, 동화처럼 아름답습니다. 그 이야기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실까요?

엘리사벳과 마리아
제사장 스가리야의 아내인 엘리사벳은 자식을 낳지 못한 늙은 여자였는데 뜻하지 않게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누가복음 1:5절 이하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각했으리라는 건 불문가지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남편인 스가리야는 이걸 문제 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기야 임신 안 되는 게 반드시 여자에게만 책임이 있는 건 아니니까 스가리야가 투정을 부리지 않은 건 당연합니다. 생리학적으로 임신능력이 없는 이 여자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달리 젊은 여자였습니다. 그 당시 결혼 풍습에 따르면 마리아는 15,16세 정도 되었을 겁니다. 마리아의 마음고생도 엘리사벳 못지않았습니다. 어쩌면 마리아의 처지가 더욱 딱했다고 보아야합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요셉과 법적으로 결혼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동거하기 전에 임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칫 이 어린 여자는 부도덕한 여자로 낙인찍힐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임신 못해서 고통스러웠던 반면에 마리아는 임신해서 곤란했습니다. 어쨌든지 마리아는 자기에게 닥친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그걸 극복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눅 1:26절 이하에 자세하게 보도되었습니다. 엘리사벳보다 6개월 늦게 아기를 갖게 된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이 대목부터 시작됩니다.
41,42a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에 그의 뱃속에 든 아기가 뛰놀았다. 엘라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 큰 소리로 외쳤다.” 이 구절을 읽은 여러분은 궁금한 게 많을 겁니다. 궁금하게 여기지 않으면, 그것 자체가 이상한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뱃속의 아기가 뛰놀았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엘리사벳의 뱃속의 아기와 마리아의 뱃속에 있는 아기 사이에 텔레파시가 통했다는 것일까요? 성서의 이런 표현은 기본적으로 문학적 기법입니다. 우리가 시를 쓸 때 비유법, 과장법을 사용하듯이 성서기자들도 그런 문학적 수사기법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엘리사벳은 늙은 여자지만 영적으로 민감했기 때문에 그런 영적인 힘들이 태아에게 전달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현대 의학도 산모의 마음이 태아에게 전달되는 걸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생리적인 문제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적인, 신학적 사실에 대한 묘사입니다. 말하자면 엘리사벳은 태중의 아이가 반응을 보일 정도로 마리아의 방문을 기뻐했다는 뜻입니다.
성령을 가득히 받아 외쳤다는 말씀도 똑같습니다. 성령은 바로 생명의 영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한 영입니다. 그 영은 곧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을 가득히 받았다는 말은 아주 실제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임신한 여자보다 더 실질적으로, 더 절실하게 생명의 영에 사로잡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기 몸 안에 또 하나의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온 영혼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이 어디 있으며, 그것보다 더 큰 영적인 사건이 어디 있습니까? 임신 사건은 지구가 45억년 동안 걸어온 전체 생명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걸 깊이 생각하고 그걸 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성령을 가득히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젊은 여자들은 이런 생명의 영을 소홀하게 여깁니다. 임신한 사람이 아기를 낳기도 전에 자기 외모나 걱정하고 교육비 걱정한다면 그는 성령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겠지요.
늙은 몸으로 임신한 여자가 생명의 영에 사로잡혀 자기와 똑같이 임신한 젊은 여자를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엘리사벳은 43절에서 이렇게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본문으로만 본다면 이 구절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아기가 인류를 구원한 메시아라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사벳은 그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다는 말인가요? 오늘 본문을 읽는데 이런 질문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실제로 중요한 건 이 엘리사벳의 고백이 개인에게 머무는 게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전체에게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어머니”라는 말은 그리스도교 전체의 신앙고백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잉태했습니다. 마리아의 구체적인 몸 안에, 그녀의 자궁 안에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서 바로 그 사실이 선포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마리아의 찬양
누가복음 기자는 엘리사벳의 고백에 이어 마리아의 찬양을 46-55절에 보도합니다. 이 찬양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분이 주님이라는 엘리사벳의 신앙고백에 대한 해명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소녀티를 갓 벗은 마리아가 이런 신학적인 깊이가 담긴 노랫말을 쓸 수가 있었을까요? 바이올리니스트인 장영주와 첼리스트인 장한나는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연주회를 가질 수 있었듯이 마리아도 영적으로 성숙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런 찬양을 부를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문이 마리아라는 개인에 머무는 게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라는 사실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마리아라는 여자의 입을 통해서 이런 신앙을 간직했습니다. 특히 이 장면은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만나고 있는 순간입니다. 이들이 만나는 순간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찬송으로 울려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저는 2005년 12월18일에 이 본문으로 설교한 적이 있기 때문에 오늘 그 찬양의 내용을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고 간단하게 정리하겠습니다.
51-53절이 이 찬양의 핵심입니다.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주님이 하실 일이 여기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교만한 자들과 권세 있는 자들을 물리치고 보잘 것 없는 자를 높이신다는 이 찬양이 옳은가요? 그 일이 우리에게 이루어졌나요? 옛날에 비해서 오늘의 삶이 편리해지고 정치적으로도 민주화되었지만, 그래서 무언가 계몽되고 개량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 변한 건 없습니다. 지금도 잘난 사람은 잘난 척하고, 못난 사람은 기가 죽습니다. 세계화의 물결이 뒤덮고 있는 21세기는 이런 현상이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찬양은 비현실적인, 몽상적인 자기 독백에 불과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본질을 조금 세밀하게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보이는 권세와 교만은 아주 강한 것 같습니다만 그 중심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교만한 자와 권세 있는 자는 모든 관심을 자기에게만 둡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자기가 그렇게 확실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런 방식으로 결코 참된 평화와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이런 상태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내침을 받은 것입니다. 반면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자기를 내세울 게 없기 때문에 불안하지도 않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낮추면, 자기를 완전히 비우면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평화가 그를 채우고, 그럴 때 그는 생명의 기쁨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태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높임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원하지 세상의 권세를 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보잘 것 없는 자리에 가 있는 사람을 높인다는 마리아의 찬양은 바로 이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판단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다른 방식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예수님보다 낮은 자리에, 더 수치스러운 자리에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로 우리는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습니다. 저주받은 십자가는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바로 그 사건을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올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건 자체입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이렇게 질문할 겁니다. 십자가로부터 부활에 이른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믿을 수는 있지만,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나, 하고 말입니다. 이런 질문에 쉬운 답을 줄 수 없습니다. 콜라를 좋아하는 어린이들에게 콜라보다는 물이 몸에 좋단다, 하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 아이가 그걸 인정하기 힘든 것과 비슷합니다. 이 아이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물맛을 알아야겠지요. 콜라 맛에 길들여진 아이는 물맛을 알기가 조금 힘듭니다. 더디더라도 천천히 연습해야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권세와 교만의 자리가 아니라 자기를 온전히 낮추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평화를 경험하게 될 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거꾸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과 일치하면 결국 자기를 내세우는 교만과 권세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평화와 통치가 임할 수 있도록 자기를 낮추게 됩니다.  

두 여자가 만날 때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가장 오래된 찬양의 노랫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런 찬양을 어린 여자의 입으로 노래하게 했습니다. 더구나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이 바로 이 노래의 배경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여자의 만남에서 위대한 신앙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렇게 중요한 신앙고백을 임신한 늙은 여자와 임신한 젊은 여자의 만남에서 기억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가부장적이고 여성 차별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거의 사회혁명에 가까운 내용을 가진 이 찬양이 늙은 여자 엘리사벳과 어린 여자 마리아의 만남에서 울려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면 그런 비판은 오해임에 분명합니다. 이런 새로운 세계를 향한 찬양이 여자들의 입에서 불린다면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정말 세상을 바꾸는 누룩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교회에서 여자들은 모여 무얼 합니까? 목사, 장로의 잔심부름이나 하나요? 권사가 되기 위해서 모든 힘을 쏟나요? 이런 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자들이 동창이나 이웃 여자를 만나서 무얼 합니까? 무슨 노래를 부릅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여자, 나름으로 마음고생이 많았던,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순종한 엘리사벳과 마리아에게서 위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이 싹을 텄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두 여자에 의해서 예수는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이 두 여자가 없었다면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두 여자가 만날 때” 새로운 역사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이런 크고 작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profile

[레벨:23]브니엘남

February 13, 2007
*.236.169.24

두 여자는 정말 영 안에서 서로 교통하였군요. 이것이 바로 참된 교제의 의미입니다. 사람들,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냥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나 신변 잡기를 한다면 그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교제가 아닌 것입니다. 교제는 영 안에서 교툥하는 것입니다.
51-53절의 찬양은 산상수훈의 첫 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영 안에서 가난한자)에 대한 말입니다. 우리가 영 안에서 가난하여야 51-53절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9418
350 성령강림절 은혜의 보좌 앞으로! [28] 2009-10-26 18943
349 성령강림절 재물과 하나님 나라 [22] 2009-10-19 14590
348 성령강림절 번제의 길 [22] 2009-10-12 15962
347 성령강림절 지혜와 평화 [9] 2009-10-05 10870
34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과 등 [11] 2009-09-28 17261
345 성령강림절 닫힘과 열림 [21] 2009-09-21 12800
344 성령강림절 믿음과 행함의 긴장관계 [25] 2009-09-14 18774
343 성령강림절 성찬의 신비, 생명의 신비 [17] 2009-09-07 15599
342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꿈 이야기 [27] 2009-08-31 18197
341 성령강림절 말의 주체, 말의 능력 [10] 2009-08-24 14107
340 성령강림절 그날의 평화 공동체 [9] 2009-08-17 10089
339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22] 2009-08-10 18199
338 성령강림절 믿는 자는 성전이다 [13] 2009-08-03 13394
337 성령강림절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17] 2009-07-27 18364
336 성령강림절 승리주의를 넘어 생명으로 [20] 2009-07-20 12998
335 성령강림절 그리스도의 가난과 우리의 부요 [23] 2009-07-13 19603
334 성령강림절 “그는 누군가?” [18] 2009-07-06 14688
333 성령강림절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다 [24] 2009-06-29 15116
33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구원 섭리 [33] 2009-06-22 16162
331 성령강림절 생명의 날 [17] 2009-06-15 13536
330 성령강림절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 [7] 2009-06-08 16717
329 성령강림절 성령의 중보기도 [21] 2009-06-01 15340
328 부활절 그리스도인의 이중 실존 [8] 2009-05-25 15294
327 부활절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22] 2009-05-18 13837
326 부활절 ‘여호와 이레’의 믿음 [23] [39] 2009-05-11 25303
325 부활절 예수는 왜 선한 목자인가? [11] 2009-05-04 19367
324 부활절 죽임, 살림, 증인 [25] 2009-04-27 16251
323 부활절 복된 믿음 [29] 2009-04-20 13936
322 부활절 죽음을 무너뜨리리라! [7] 2009-04-13 13305
321 사순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26] 2009-04-06 19419
320 사순절 그날이 오리라! [12] 2009-03-30 12836
319 사순절 구원의 신비와 선한 일 [11] 2009-03-23 13750
318 사순절 무엇이 구원의 표적인가? [13] 2009-03-16 14889
317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29] [4] 2009-03-09 14407
316 사순절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22] 2009-03-02 16856
315 주현절 창조의 빛, 인식의 빛 [15] 2009-02-23 19893
314 주현절 바울의 두려움 [12] 2009-02-16 11983
313 주현절 예수와 귀신 [44] 2009-02-09 14350
312 주현절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9] 2009-02-02 11981
311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9] 2009-01-25 10721
310 주현절 무화과 나무와 하늘 [9] 2009-01-19 11452
309 주현절 성령과 세례에 대한 질문 [6] 2009-01-13 13911
308 성탄절 크게 기뻐하라! [11] 2009-01-05 12491
307 기타 생명 상실의 두려움을 넘어서 [2] 2009-01-01 10832
306 성탄절 종이냐, 자녀냐 [26] 2008-12-29 12376
305 성탄절 하나님의 영광과 아기 예수 [8] 2008-12-25 16925
304 대림절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 [7] 2008-12-22 11943
303 대림절 광야의 ‘소리’를 넘어 [18] 2008-12-15 14389
302 대림절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8] 2008-12-08 14337
301 대림절 마지막 ‘때’ [11] 2008-12-01 12973
300 성령강림절 깨어 있으라! [10] 2008-11-23 16278
299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766
298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605
297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494
296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729
295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3580
294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621
293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640
292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0959
291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507
290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099
289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1952
288 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9] 2008-08-31 13167
287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782
286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67
285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536
284 성령강림절 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9] 2008-08-03 13249
28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 [8] 2008-07-27 13232
28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 [10] 2008-07-20 15277
281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와 예수 [23] 2008-07-13 15862
280 성령강림절 말씀은 성취된다 [10] 2008-07-06 17940
279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530
278 성령강림절 경계를 넘어서 [5] 2008-06-22 16321
277 성령강림절 이삭의 하나님, 이스마엘의 하나님? [8] 2008-06-15 25754
276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6892
275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441
274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264
273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하나님 [6] 2008-05-18 27821
272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0777
271 부활절 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8] 2008-05-04 25596
270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7742
269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357
268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344
267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276
266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697
265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2021
264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189
263 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 2008-03-23 15530
262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378
261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775
260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845
259 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13] 2008-02-24 16073
258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8782
257 사순절 악마의 유혹 앞에서 [14] 2008-02-10 15735
256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688
255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242
254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456
253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311
252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4882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