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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자!

사순절 조회 수 11889 추천 수 76 2007.04.01 15:51:18
성경본문 : 이사야 50:4-9 
mms://wm-001.cafe24.com/dbia/070401.MP32007.04.01. 사 50:4-9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자!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 50:4-9절을 쓴 사람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사야가 아니라 그보다 1백50년 쯤 후대에 활동한 제2 이사야입니다. 그가 활동한 6세기 중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비참했던 시기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한 후 남유대마저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된 기원전 587년부터 50년 동안 이어지는 바벨론 포로기가 바로 그가 활동한 시기입니다. 우리의 한일합방과 식민시절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가 살던 시절이 고달팠기 때문인지 제2 이사야서에는 4편의 ‘종의 노래’가 담겨 있습니다. 42:1-4, 49:1-6, 50:4-9, 52:13-53:12이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종의 노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당하는 고난을 주제로 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절기인 사순절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읽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이 종은 어떤 사람일까요? 제2 이사야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까요? 그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요?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사람은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전해야할 사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야훼로부터 말씀을 들었습니다. 야훼께서 “아침마다 내 귀를 일깨워주시어 배우는 마음으로 듣게 하신다.”고(4b) 말합니다. 말씀을 받아 선포하는 걸 신탁(神託, oracle)이라고 합니다. 구약성서에는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신탁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문적으로 전하는 예언자들만 아니라 크게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약속이나 명령을 들은 사람들도 모두 여기에 포함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이런 신탁을 경험했습니다. 신약성서에도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많습니다. 바울은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환상 가운데 만났으며, 요한은 밧모섬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환상을 경험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사야는 아침마다 무슨 말씀을 들은 걸까요?

참 예언과 거짓 예언
예언자들은 영적으로 놀랍도록 예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건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여섯 살 때부터 작곡을 했다는 모차르트 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소리와 음악의 세계에 일찌감치 들어갔습니다. 이런 일들은 여러 곳에서 일어납니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어릴 때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떼이야르는 어느 날 어머니가 머리카락을 태우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손에 놓여 있던 머리카락이 불에 타자 순식간에 연기로 사라진 것을 보고 ‘존재의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 손에 놓여있던 머리카락이 어디로 간 것일까 하는 깊은 궁금증에 빠졌습니다. 이처럼 예언자들은 고유한 영적 감수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고, 눈에 보였습니다. 본문의 이사야도 ‘아침마다’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늘 새롭게 말씀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사실 신탁은 위험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언자들이 거짓 신탁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히면 거짓 신탁을 받게 마련입니다. 인류 역사에 얼마나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출몰했는지 모릅니다. 대표적으로 히틀러 같은 사람입니다. 게르만민족을 중심으로 신성로마제국을 건설하겠다는 그의 외침에 수많은 사람들이 호응했습니다. 그에게는 대중을 선동할만한 신탁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런 정치 선동가들만이 아니라 종교인들 중에서도 거짓 신탁에 사로잡힌 이들은 많습니다. 기독교의 수많은 사이비 교주들이 그렇습니다. 전도관의 박태선 씨나 통일교의 문선명 씨도 그런 유의 사람들이 아닐까요? 오늘 이 순간에도 참된 예언자들만이 아니라 거짓 예언자들이 강력하게 활동합니다.
여러분들은 청중들이 왜 거짓 예언자들을  추종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겁니다. 참된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분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참 신탁과 거짓 신탁은 어떤 점에서 종이 한 장 차이로만 구분됩니다. 청중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본인들 자신이 그것을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마치 음악을 잘 모르면서도 음악을 가르치거나, 자기의 음악경험을 절대화함으로써 학생들의 참된 음악경험을 방해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겉으로는 인격적인 것처럼 보여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 신탁에 사로잡히는 일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신탁이 가장 심층적인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표면적으로 일어나는 것만을 보고 판단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기만 하면 그것이 곧 참된 신탁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포퓰리즘은 우리의 진리 인식을 가로막는 원인입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가 부흥하기만 하면 그것을 성령의 활동으로 인식한다는 말입니다. 돈을 많이 벌기만 하면 그 사람을 능력이 많은 사람으로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신탁이 위험한 둘째 이유는, 참된 신탁은 대중으로부터 외면 받을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신탁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걸 대중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거의 대부분 민중들로부터 별로 큰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오죽 했으면 엘리야가 로뎀나무 밑에서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 하고 한탄했겠습니까?(왕상 19:4) 예레미야도 그 당시에 민중들로부터 완전히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2 이사야는 훨씬 노골적인 비난을 받았습니다. 6절 말씀에 따르면 사람들이 그를 때리고, 수염을 뽑고, 욕설을 퍼붓고, 침을 뱉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모욕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예언자가 존경을 받지는 못할망정 모욕을 당했다는 것이 이상해보입니다.
그러나 그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 당시 민중들이 특히 악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의 신탁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모른다는 말은 단순히 모른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예언자의 신탁이 민중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민중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고 합니다. 당신들은 착하다, 복 받는다, 좋은 일이 많을 거다, 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아내들이 남편들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듯이 말입니다. 민중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의 신탁에는 열광하지만 다른 것을 전하는 예언자들의 신탁은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민중들로부터 거부당했습니다. 민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기대에 부합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승리자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삶에 혜택을 가져다주기를 바랐습니다.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주고, 복을 가져다주기 바랐습니다. 민중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정치, 경제적인 정의를 실현해주기를 바랐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가 이 세상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강력한 카리스마로 이 세상의 모든 악을 일소해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오히려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각각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중들은 예수님을 더 이상 따라갈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실망하고, 더 나아가서 기만당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런 점에서 가룟 유다의 배신행위는 단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가담한 제사장, 바리새인, 빌라도는 바로 우리를 포함한 모든 인류, 모든 민중들의 대리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고난과 시련을 증오하고 승리자가 되기만을 꿈꿉니다.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나름의 고난과 시련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런 시련과 고난이 없다면 무언가 신앙이 잘못된 것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시련과 십자가는 곧 이 세상의 ‘걸림돌’(스캔들)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신학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작동되는 이 세상을 향해서 “그렇지 않다.” 하고 시비를 겁니다. 초기 기독교는 그 당시 당연시했던 황제숭배를 거부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세상과 충돌하다가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황제숭배는 어쩌면 자본만능주의, 경쟁력 및 성공지상주의일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기독교 신앙은 오늘의 황제숭배와 투쟁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이 세상에서 고난과 시련을 당할 수밖에 없겠지요.
오해는 마십시오. 기독교 신앙이 고난과 시련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자학과 금욕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의도적인 고난과 시련은 복음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입니다. 고난과 시련은 목표가 아니라 예수의 삶을 구체적으로 뒤따르는 과정에서 받게 되는 결과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시련과 고난은 단지 물질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고독일 수도 있고, 냉대일 수도 있습니다. 바른 신앙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유리한 조건들을 포기하기도 하고, 여러 어려움을 감당하기도 해야 합니다.
지금 샘터교회에 출석하는 교우들은 이런 점에서 시련을 당하는 분들일지 모르겠군요. 어느 교회를 다니시는데요, 교회당은 있나요, 신자는 몇 명이나 되는데요? 주변에서 이런 질문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정말 시시한 교회에 다닌다는 눈총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외롭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그것이 바른 신앙과 바른 영성에 충실하기 위해서 받는 눈총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여러분은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여러분이 고난과 시련의 길을 예언자 전통에 참여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제가 지금 작은 교회가 무조건 선하다거나 큰 교회가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 참된 신탁을 따라가다 보면 시련과 고난이 없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제2 이사야도 이런 고난과 시련을 크게 받았습니다. 그의 처지는 주인이 물건처럼 다루는 종과 같았습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사람들은 그를 때리고 침을 뱉고 욕을 했습니다. 그는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그가 7절에서 “나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다.”거나 “차돌처럼 내 얼굴빛 변치 않는다.”고 외쳤다는 것은 곧 그가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는 사실을 거꾸로 표현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민중들이 그의 설교에 귀를 닫고 있습니다. 시시한 소리 집어치우라고 아우성입니다. 민중이 외면하고 거부하면 자신의 신탁에 자신이 없어집니다. 그는 자신의 설교에 불안합니다. 그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을지 모릅니다.
며칠 전에 어떤 목사님이 편지와 함께 자신의 설교가 담긴 씨디를 보내왔습니다. 그는 몇몇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활동하다가 적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결국 임지도 결정하지 못한 채 쫓겨났다고 합니다. 담임 목사가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문제를 지적하는 일이 잦다가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네요. 그는 자신의 처지가 비참한 것 같다고 하면서, 자신의 설교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한번 지적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의 설교는 괜찮았습니다. 그렇게 연락을 주자 그는 고맙다고 하더군요. 얼마나 불안했으면 저에게 그런 부탁까지 했을까 하는 생각으로 제 기분이 착찹했습니다.
극한의 모욕과 냉대를 받은 오늘 본문의 예언자는 거기서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7,9절에서 연달아 “주 야훼께서 나를 도와주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부끄러움이 없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법정으로 가자.”고 자신 만만하게 나섭니다. 거기서 시비를 가려보자는 것입니다. 이 법정은 곧 하나님의 법정입니다. 그것은 곧 진리 논쟁을 의미합니다. 외적인 권위가 아니라 진리의 차원에서 따져보자는 것입니다. 이런 외침은 참된 신탁에 사로잡힌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작은 시련과 고난을 만나기만 해도 크게 흔들리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노예처럼 조롱받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위로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자.”고 외친 이 예언자를 보십시오. 고난과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부활의 생명을 얻었습니다. 고난주간을 맞는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자.”고 하는 깨달음과 용기와 믿음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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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April 01, 2007
*.150.83.147

롬 8:33-34 누가 나를 송사하리요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이사야가 신탁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고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말씀을 대언하였던 것처럼 여호와의 종이신 그리스도께서도 그리하였으니 우리도 예언(대언)의 은사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선포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삶을 살 때에 누가 나를 송사하리요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송사하고 정죄하는 자들아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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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April 02, 2007
*.109.125.151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한결같이 본 글을 "이사야"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실것으로 생각되는 교수님께서 본문의 저자를 제2 이사야로 확정 하고 계신데 사도들의
의견을 뒤집을 만한 학문적인 근거가 있으리라 봅니다.. 설명 부탁 드립니다..

아래는 신약의 저자들이 이사야서의 후반부도 모두 이사야의 글로 간주하는 여러 구절들을
요약해 놓았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인용한 요한복음 12:38~41절을 보면 이사야서 6장과
53장을 동시에 언급 하면서 이사야전체를 한 저자 이사야의 것으로 확정하고 있는 명백한
증거라 저는 생각하는데 ...

굳이 여러차례에 걸쳐 제2 이사야라고 강조하시는 이유가 무었인지 궁금합니다..

설명좀 부탁드립니다..

============================================
마태 12 : 17-21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사 42:2-4 인용
================================================
사도행전 8 : 28-33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중략--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이사야 : 53 7-8 인용
===============================================
로마서 10 : 16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이사야 53:1절 인용
===============================================
요한복음 12 : 38 - 39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 53:1 그리고 이사야 6:9-10 동시에 인용하여 동일인으로 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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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April 02, 2007
*.109.125.151

그리고 본문은 이사야 49장 에서 57장에 이르는 후반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부분에서는 "종"으로 표현된 인물은 본질적으로 저자자신
(교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제2 이사야가)이 아니라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생각이며
해석 이라 생각 합니다. 그러나 교수님의 설교는 본문에 대한 사도들의
시각과 해석과는 달리 "제2 이사야"로 해석하므로써 본문의 본질이 흐려
지고 있다는 생각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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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PeterLim

April 02, 2007
*.96.219.42

코람데오님!
여기 정목사님의 설교가 많이 올라와 있는데
'정용섭 목사의 설교 비평'의 글을 한번 써 보시는 것도 좋을듯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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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가을소풍

April 03, 2007
*.79.237.76

'이 시대의 목자들이여, 하나님의 소리와 사람들의 요구 사이에서 진정 어느 길을 갈 것인가?' 로 요약할 수 있는, 정목사님의 일관된 소명의식이 뜨겁게 전달되는 감동적인 설교에 다시한번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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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수우

April 05, 2007
*.9.81.85

제목만 읽어도 가슴이 뜨거워 집니다. 설교 홍수 시대 에 살고 있습니다만 정작 목마름은 해결이 되지 않은
불행한 시대 입니다. 왜 이런 불행을 안고 살아 가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그래도 살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주님 께 감사 하면서 오늘 이어서 14번째 설교 를 듣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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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06, 2007
*.150.14.138

위에 대글을 남겨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가을소풍 님,
"소명의식이 뜨겁게 전달되는 감동적인 설교"라는 표현이
웬지 어색하게 들리네요.
오랜 만에 듣는 덕담이라서요.
말씀 선포의 용기를 내라는 뜻으로 새겨듣겠습니다.
수우 님은 "오늘 이어서 14번째 설교"를 듣고 있다고 하셨네요.
똑같은 설교를 열네번이나 들었다는 뜻?
그렇게 들으면 설교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텐데요.
한 두번으로 그치는 게 현명할 겁니다.
모든 분들께 문자 이전에 소리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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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April 06, 2007
*.236.169.31

목사님 똑같은 설교를 열네번이나 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14주째 들어셨다는 뜻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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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 성탄절 하나님의 영광과 아기 예수 [8] 2008-12-25 16952
304 대림절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 [7] 2008-12-22 11973
303 대림절 광야의 ‘소리’를 넘어 [18] 2008-12-15 14425
302 대림절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8] 2008-12-08 14371
301 대림절 마지막 ‘때’ [11] 2008-12-01 12992
300 성령강림절 깨어 있으라! [10] 2008-11-23 16281
299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776
298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614
297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501
296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738
295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3592
294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623
293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649
292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0966
291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512
290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104
289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1966
288 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9] 2008-08-31 13172
287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789
286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74
285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544
284 성령강림절 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9] 2008-08-03 13253
28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 [8] 2008-07-27 13241
28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 [10] 2008-07-20 15286
281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와 예수 [23] 2008-07-13 15868
280 성령강림절 말씀은 성취된다 [10] 2008-07-06 17949
279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538
278 성령강림절 경계를 넘어서 [5] 2008-06-22 16329
277 성령강림절 이삭의 하나님, 이스마엘의 하나님? [8] 2008-06-15 25764
276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6899
275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446
274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270
273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하나님 [6] 2008-05-18 27826
272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0789
271 부활절 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8] 2008-05-04 25607
270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7763
269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379
268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353
267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282
266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707
265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2024
264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198
263 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 2008-03-23 15541
262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389
261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777
260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851
259 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13] 2008-02-24 16084
258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8792
257 사순절 악마의 유혹 앞에서 [14] 2008-02-10 15740
256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697
255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248
254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458
253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317
252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4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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