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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의 불

성령강림절 조회 수 9837 추천 수 107 2007.06.10 14:5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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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열왕기상 18:20-40 
mms://wm-001.cafe24.com/dbia/070610.mp32007.06.10. 왕상 18:20-40
야훼의 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아합 왕이 북이스라엘을 다스리던 기원전 9세기 중엽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당시 북이스라엘은 국제 무역에 힘입어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정치적으로는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신앙적으로는 여로보암보다 훨씬 더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야훼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배격하고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을 싸고돌았습니다. 이런 일은 시돈 공주 출신으로 아합의 아내가 된 이세벨로 인해서 훨씬 심각해졌습니다. 아합이 이세벨을 끔찍이 사랑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처가 쪽과의 정치적 흥정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합은 반(反)야훼 친(親)바알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의 궁정에는 이제 야훼를 섬기는 예언자들이 모조리 쫓겨나든지 죽고, 모든 종교 직책은 바알 예언자들의 차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친바알 정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나선 사람이 엘리야입니다. 그 싸움이라는 게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습니다. 지금 엘리야가 처한 상황은 그야말로 고군분투, 고립무원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지금 이상하게 생각하겠지요. 아합과 이세벨이 아무리 야훼의 예언자들을 배척했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은 엘리야를 지지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백성들은 단순합니다. 자기들이 살기 편하면 왕을 지지하고 불편하면 지지를 철회할 뿐이지 야훼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별로 깊지 않았습니다. 아합이 철권통치를  펼친다고 하더라도 경제를 발전시켰으니, 백성들이 그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민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배부르게만 해주면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군사독재의 상징인 박정희 전(前) 대통령을 오늘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민중들과 달리 아합의 정치와 그 위험성을 정확하게 꿰뚫어볼 수 있었습니다. 비록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아합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초창기에 그는 오랫동안 아합을 피해 다녔습니다. 아합에게 발각당하는 날에는 다른 야훼 예언자들처럼 무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3년여 동안 피해 다니던 엘리야는 급기야 정면 승부를 하기로 작정하고 아합에게 야훼가 참된 하나님인지 바알이 참된 하나님인지 겨뤄보자고 제안합니다. 아합은 바알이 참된 하나님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모르지만 엘리야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흡사 K1 격투기 같은 시합이 가르멜 산에서 개최됩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그 내용은 이 시간에 자세하게 드릴 필요는 없겠지요. 간단히 요약만 합시다. 이 시합의 방식은 간단합니다. 바알의 제단에 오른 황소가 불에 타는지, 아니면 야훼의 제단에 오른 송아지가 타는지 겨뤄보자는 것입니다. 바알의 제단에 모인 450명의 예언자들이 심지어 자해를 하면서까지 기도를 올렸으나 하늘로부터 아무런 기척도 없었습니다. 야훼의 제단에서 기도를 올리는 예언자는 엘리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도를 올리자, 성서의 보도에 따르면 “야훼의 불길이 내려와 제물과 함께 나무와 돌과 흙을 모두 태웠고, 도랑에 괴어 있던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말려버렸다.”고 합니다.(38절) 승부는 분명하게 끝났습니다. 그곳에 모였던 백성들은 “야훼께서 하느님이십니다. 야훼께서 하느님이십니다.”하고 소리쳤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키손 개울로 끌고 가서 죽였습니다.

야훼의 불
여러분들은 이런 일이 과연 있었을까, 이게 역사적인 사실일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겠지요. 바알의 제단은 아무 변화도 없는데, 야훼의 제단을 야훼의 불길로 몽땅 불타버리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런 일이 지금도 일어나는지 한번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군요. 반대로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무조건 믿고 받아들이는 게 바로 신앙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여러분들은 어느 쪽이신가요?
구약성서에는 이런 이상한 현상들이 자주 보도됩니다. 집에서 사고를 치고 형을 피해 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하란으로 가던 도중에 벧엘이라는 곳에서 하늘까지 닿은 사다리와 천사들을 봅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가시떨기가 타지 않는 불길을 만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하나님이 이끌어주시는 증거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본문 조금 뒤에는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승천하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야훼의 불길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현상적으로만 본다면 야훼의 불길은 번개입니다. 엘리야가 준비한 제단을 번개가 때렸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보통 벼락이라고 합니다. 벼락이 제물인 송아지, 나무, 돌, 흙을 모두 태웠고, 물 한 방울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광야를 횡단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산폭발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번개를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번개가 하필이면 바로 그 순간에 내리친 것인가,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이런 설명이 조금 힘듭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건들을 잘 이해하려면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이것이 신문기자의 현장보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전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바알 선지자들과 엘리야가 한 자리에서 이렇게 대결한 것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에서 바알 선지자들은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이 직접 대화하는 장면이 없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이 엘리야의 대화 상대자로 등장합니다. 바알 예언자들은 엑스트라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핵심은 야훼 하나님이 바알 예언자들의 제물이 아니라 엘리야의 제물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성서기자는 양측이 현장에서 직접 대결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르멜 산은 바알 제단이 설치된 곳이었습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은 이세벨이 아합에게 시집오면서 지참금으로 가져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이세벨은 친정 나라인 시돈에서 많은 바알 예언자를 대동했고, 이곳에 자기의 친정에서 섬기던 바알 제단을 차렸습니다. 바알신앙과 싸우는 엘리야와 그의 추종자들은 가르멜 산의 바알 제단을 때려 부수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야훼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 순간에 하늘로부터 번개가 내려 제물을 살랐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곧 바알이 아니라 야훼가 참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야훼의 불은 어쩌다가 일어난 자연현상인 번개에 불과하지 야훼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여러분, 궁극적으로 본다면 이 세상에서 모든 번개는 야훼의 불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게 옳다면 번개도 역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건 당연합니다. 문제는 야훼 하나님이 엘리야의 제단에 바로 그 시간에 맞추어 번개를 내리셨는가, 하는 거겠지요. 누가 그것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는 그런 성서의 증언들을 신앙적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는 구약의 다른 사건과 비슷합니다. 미디안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 먹을거리는 자연현상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바로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내린 먹을거리로 믿고 받아먹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엘리야의 번제물을 불살라버린 번개를 야훼의 불길로 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그들에게 엘리야가 섬기는 야훼가 바로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실증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실증이었던 것처럼 이 벼락사건도 역시 야훼가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실증이었습니다.

야훼 하나님
오늘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의 관심은 성서기자가 흡사 동화 같은 방식으로 전하려는 메시지의 중심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미 그 대답은 여러분이 찾으셨을 겁니다. 엘리야의 기도에도 나와 있고, 백성들의 부르짖음에도 나와 있듯이 야훼가 하나님이라는 것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너무 뻔한 대답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 뻔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 엘리야가 생사를 건 싸움에 나섰나 하고 생각하시나요? 아닙니다. 야훼가 하나님이라는 명제는 그렇게 간단한 대답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처럼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왜 그런지를 좀더 깊이 이해하려면 바알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야훼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야만 합니다.
바알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풍요의 신입니다. 그 신은 농경신입니다. 그들은 바알이 농사에 필요한 자연환경을 지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알을 잘 섬겨야만 풍년을 약속받을 수 있고, 자손들이 번성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는 것만을 목표로 신앙생활을 유지했습니다. 이런 신앙은 그렇게 이상한 게 아니라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바알신앙은 아주 일반적인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엘리야가 목숨을 담보하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야훼 신앙은 그런 물질적인 풍요를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목표로 했습니다. 말씀은 곧 약속입니다. 물론 이 약속에는 물질적인 내용이 포함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주신 약속이 땅과 후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물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켰을 주어지는 것이지 신앙의 목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 두 신앙이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바알신앙은 물질적인 풍요가 목적이라고 한다면, 야훼신앙은 그것을 끊임없이 상대화합니다. 바알신앙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지만, 야훼신앙은 그것과 상관없이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약속만을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언자들은 바로 이 사실을 줄기차게 붙잡으려고 노력한 집단입니다. 이에 반해서 정치가들인 왕들은 적당하게 타협했습니다. 구약학자 부르지만이 지적하듯이 구약성서는 바로 두 집단의 대결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보이지 않는 야훼 하나님의 약속에 전적으로 의존하라고 외치는 예언자들과 물질적인 토대로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 왕권을 확립하려는 왕의 대결입니다. 그 사이에서 거짓 예언자도 출몰하고, 거짓 제사장들도 나타났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왕과 거짓 예언자의 결탁에 의해 지배당했습니다. 그런 힘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총체적으로 바알신앙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재테크가 오늘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자본이 중심으로 작동되는 자본주의가 오늘의 바알이라는 사실을 제가 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30년 전에 비하면, 오늘 우리는 모두 갑부처럼 살아갑니다. 웬만한 집에는 승용차가 없는 집이 없습니다. 됫박으로 쌀을 사다먹는 사람들도 거의 없습니다. 물론 노숙자와 결식자들이 여전하고, 돈이 없어서 제 때에 병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실하게 노력하기만 한다면 지금 우리가 그 어느 시대보다 큰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전혀 만족할 줄 모릅니다. 한미 FTA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지지자들이나 반대자들이나 한결같이 물질적인 풍요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없이 그것만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곧 바알신앙이 지금도 기승을 부린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이 시대 안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이런 바알신앙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교회마저 성장지상주의에 빠져 있는 마당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기원전 9세기 북이스라엘 민중들이 모두 바알신앙에 취해버렸듯이 오늘 우리 모두 그렇게 사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절망적이라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야의 제단을 불사른 야훼의 불을 보십시오. 온 백성이 그 광경을 보고 땅에 엎드려서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야훼께서 하느님이십니다.” 엘리야의 제물을 불사른 야훼의 불을 본 사람은 야훼 하나님에게 삶의 근거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야훼의 불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닐까요? 예수님의 부활이 아닐까요? 야훼의 불은 바로 오순절에 임한 성령의 불이 아닐까요? 우리의 영적인 눈을 밝혀줄 야훼의 불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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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0, 2007
*.181.51.23

설교듣기에서 나오는 소리가 뭔가 궁금하게 생각할 분들을 위해서
미리 설명을 드려야겠네요.
설교 시작하면서 곧 바로 위층에서 드릴 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곧 그치리가 기대했는데,
끝까지 계속되었네요.
그래도 상관없이 설교를 하고 듣기도 했습니다.
현장에서는 소리가 더 컸는데,
엠피쓰리에서는 약간 줄었네요.
아마 앞으로 아파트 입주가 다 끝날 때까지,
몇달 동안 계속 이런 잡소리가 나올 각오로 예배를 드려야겠네요.
좋은 주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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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살군

June 10, 2007
*.211.143.117

영적인 말씀선포에 많은 은혜를 받고갑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에겐 하나님이 '있다' 라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가 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문제를 다 해결해주시고
어떤것을 주어야지만 그런 하나님을 찬양하는것 같습니다.

더불어 지교회중심주의자들은 세상과 하나님의 분립을 선언하고는
교회안에서 주어지는 신의 축복을 현세적 부의축복과 동일선상에
놓는 모순적인 양상을을 보고있으면

기독교 신앙의 세속성은 필요하지만
물질적으로 세속화된
세속주의의 신앙의 모습이 참으로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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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수우

June 10, 2007
*.9.81.38

설교 잘 듣고 있습니다.
드릴소리가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 같고 방해 를 놓지만
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망대 위 의 기상 나팔 소리 같습니다.
이 시대의 바알신앙과 싸우고 있는 고독한 영혼은 오늘의 말씀이 단비 같을 것 입니다.
profile

무심

June 10, 2007
*.175.172.216

감히 반론을 한다는 것이 용납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만 글은 읽었고. 읽고 나니 생각이 생겼서 .
그냥 생각을 올려 봅니다..

윗글의 전체 내용은 바알 신앙 곧 물질을 숭상 하는 것과 야훼 신앙 곧 정신을 숭상하는 것의 대결이
중심인데
이글은 어쩜 이른 늬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습니다
곧 물질을 초월하는 것이 궁극이다...물질을 초월하면 참 신앙이다....

여기서 저의 생각을 말해 보면 위대한 기독교는 물질과 상대할 저급한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이란 이미 기독교의 상대로 보기에 하찮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 철학과 윤리학에서 이미 물질에 대한 무가치를 얼마나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위대하고 거룩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가 그까짓 하잘것 없고 무가치한
물질과 <<대결>>할 만큼 가치가 낮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물질추구는 무가치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기독교의 대결 상대로
본다는 것은 어쩜 기독교를 낮춧는 것 같은 느낌이 짙게 느껴 진다는 것입니다...


마침 물질에서 자유하는 자는 구원을 이룰수 있다 라는 늬앙스가 느껴 진다는 것입니다
순수 저의 사견임을 다시 한번 밝히며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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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소피

June 15, 2007
*.71.223.153

수우님은 목사님의 설교가 기상나팔처럼 들리시네요
저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처럼 들리는데요..^^
쉐마!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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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성령강림절 이삭의 하나님, 이스마엘의 하나님? [8] 2008-06-15 25713
276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6868
275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410
274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232
273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하나님 [6] 2008-05-18 27791
272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0748
271 부활절 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8] 2008-05-04 25565
270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7643
269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251
268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322
267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249
266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678
265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1994
264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145
263 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 2008-03-23 15464
262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355
261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753
260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796
259 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13] 2008-02-24 16044
258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8757
257 사순절 악마의 유혹 앞에서 [14] 2008-02-10 15715
256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643
255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212
254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435
253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284
252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4859
251 성탄절 예수는 예언의 성취! [5] 2007-12-30 15246
250 성탄절 성탄에 참여하는 길 [18] 2007-12-25 19261
249 대림절 임마누엘 예수 [17] 2007-12-23 20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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