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

나의 자랑 예수의 십자가

성령강림절 조회 수 13356 추천 수 82 2007.07.15 15:03:50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070715.mp3 
성경본문 : 갈라디아서 6:7-16 
mms://wm-001.cafe24.com/dbia/070715.mp3나의 자랑 예수의 십자가
2007.07.15. 갈 6:7-16

갈라디아의 상황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세 주일 전 설교본문과 같은 갈라디아서입니다. 그때의 본문은 갈 2:15-21절이었고, 오늘은 갈 6:7-16절입니다. 이 두 본문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세 주일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기원후 50-55년경의 기독교는 아직 유대교에서 독립한 상태가 아닙니다. 교회와 유대교의 관계가 별로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유대교의 전통인 율법과 할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대하는 대표자는 바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바로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갈라디아는 어떤 한 도시가 아니라 소아시아 중앙지역을 가리킵니다. 그곳에는 바울이 개척한 여러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교회에서 율법과 할례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그 지역을 떠났습니다. 얼마 뒤에 율법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 나타나서 바울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갈라디아 교인들은 처음에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겠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에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의 기분이 어땠을는지는 불을 보듯 훤합니다. 오늘의 상황과 비교하면 어떤 사람이 교회를 개척한 뒤 사정이 있어서 떠났는데 그 교회가 신천지 이단에 빠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경우와 비슷합니다.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넘어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무식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나름으로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믿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도 예수님을 믿는 건 똑같았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벌어진 문제의 발단은 부도덕한 행위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예수님을 믿어도 갈라디아 교회에 이런 인간적인 잘못들이 계속 나타났습니다. 이때 율법주의자들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게 아니다. 봐라. 우리에게 이렇게 죄가 나타나지 않느냐. 그러니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종교적으로 교양을 갖추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을 설득하고 회유했습니다. 그들은 세련된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으로 고상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조상인 유대인들은 그런 노력으로 수많은 율법을 만들었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으며, 이방민족과 구별되는 할례의 전통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갈라디아 신자들이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설득 당했다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에게 복음을 가르친 바울은 그곳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부도덕한 일들이 자꾸 벌어집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이런 순간에 율법이 바로 교회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말을 들었으니, 어찌 따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은 오늘도 비슷합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과 할례를 다시 따라가는 식입니다. 교회의 법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지요? 헌금으로부터 시작해서 금주금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할 법들은 곧 2천 년 전 갈라디아 교인들이 당면했던 율법이나 할례와 똑같습니다. 그것은 곧 사람들이 종교적 업적을 구원의 길로 여기는 것입니다. 조금 건전한 사람들은 두 가지 다 잘하면 좋은 게 아니냐 하고 생각할 겁니다. 법도 잘 지키고 믿음의 본질도 잘 지키면 된다고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술 담배 일절 하지 않고, 십일조 잘 내며, 교회 봉사 잘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된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서 바울의 가르침에 반대했던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되 율법과 할례도 지키자는 것입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매력적이고 현실적이었습니다. 결국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차츰 율법과 할례까지 겸해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율법의 한계

바울도 원래는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골수 바리새파였습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철저하게 율법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이제 그 율법종교로부터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갈라디아 신자들이 율법과 할례를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억장이 무너졌겠지요. 그는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지 약간 풍자적인 방식으로 11-13절에서 설명합니다. 이게 갈라디아서의 결론입니다. 그가 ‘큰 글자’로 쓴다는 것은 강조한다는 뜻이겠지요. 바울이 볼 때 율법과 할례는 종교적 ‘겉치레’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려고 그것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강요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만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요.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13절 말씀을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실상 할례를 받은 사람들도 자신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 다만 여러분에게 외형적인 할례를 시켰다는 것을 자랑하려고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할례주의자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은 사람이 근본적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는 지키지도 못할 법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들은 억지로 율법을 지켜보려고 노력하겠지요. 율법을 조금 더 잘 지킨 사람은 우쭐하고, 못 지킨 사람은 주눅이 들겠지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이런 상황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십일조, 금식, 사회봉사를 자랑하는 기도를 올렸고, 세리는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적으로 살지 못한 세리를 오히려 칭찬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인간이 잘못되었고, 세리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중심의 삶이 만들어내는 파괴적인 현상을 지적하는 것뿐입니다. 요즘도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잘 나오는 사람과 가끔 주일도 빠지는 사람이 교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돌아보십시오. 내신과 수능으로 학생들을 평가하는 것도 역시 율법중심의 질서입니다. 이런 질서에는 경쟁이 최고의 가치가 되고 맙니다. 이 세상이야 그렇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생명사건에 집중해야 할 교회마저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구원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설명하다보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저는 율법이 근본적으로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은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한 인간, 한 공동체, 한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울타리입니다. 법, 윤리, 도덕이 없으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예컨대 학교에는 학칙이 있습니다. 일 년에 몇 번 결석하면 상급학년으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시험 점수가 몇 점 이하면 낙제합니다. 노력을 많이 한 학생에게는 상장도 줍니다. 이런 게 모두 학칙과 율법입니다. 이걸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교회의 법과 질서를 잘 지켜서 신앙생활 하는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율법과 율법주의를 구분해서 보아야 합니다. 율법은 선하고 필요하지만, 그것이 절대화하면 율법주의가 됩니다. 율법을 얼마나 잘 지켰나 하는 것으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런데 율법과 율법주의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바르게 사는 것과 바르게 사는 것을 자랑하는 것을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기도를 정말 정직하게 잘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자기가 기도를 많이 하는 것 자체에 만족하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율법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은 순식간에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율법의 한계이면서 본질이기도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아무리 율법주의에 문제가 있다하더라도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게 그나마 덜 악한 공동체를 만드는 길인가요? 그것은 바로 갈라디아에서 바울을 반대한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오늘 수많은 목회자들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억지로 전도하게 만들고, 억지로 헌금하게 만들어서라도 좋은 신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공동체로 남아야 할까요? 이런 입장이 바로 바울의 가르침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 폐기론자가 아닙니다. 그는 율법의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할 뿐이지 인간의 선한 행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본문 7-10절에서 바울은 율법의 문제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성령론적인 해석입니다. 9,1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선을 행합시다. 꾸준히 계속하노라면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합시다. 믿는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선을 꾸준히 행하라는 말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율법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노력을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8절에서 바울은 “성령에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둔다.”고 말합니다. 그는 선을 인간의 노력과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억지로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우선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면 그는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율법주의에 의한 선과 성령에 의한 선이 어떻게 다른지, 아무래도 학생의 경우를 들어서 설명해야겠군요. 여기 두 학생이 있습니다. 한 학생은 다른 학생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다른 한 학생은 공부 자체가 놓아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현실에서는 아마 공부 자체를 좋아하는 학생을 찾아보기 힘들겠지요. 그러나 신앙생활에서는 그게 분명해야 합니다. 공부 자체가 좋은 학생이 곧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잘난 척하지도 않습니다. 자기만족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생산해내지 못하는 성령만이 이 사람의 삶을 끌어갑니다. 우리도 정말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내가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게 아니라 흡사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나는 새들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면서 꾸준히 선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화끈한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할까요? 방언을 받아야 할까요? 저는 잘 모릅니다. 바울의 가르침만 여러분에게 전하겠습니다.

성령과 예수의 십자가

율법주의의 특징은 ‘자랑’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랑입니다. 자기의 기도, 자기의 전도, 자기의 비전이 자랑거리입니다.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자기의(義)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아주 순수하고 이타적이고 열정적으로 보여도 그 내부에는 ‘자기’가 가득합니다. 이와 달리 바울은 자랑할 게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14a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바울의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그가 이룬 것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미 그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 3:7) 하나의 예외만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것만이 자랑입니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바울의 이 고백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와 닿습니까? 쉽지 않을 겁니다. 사람은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모두가 연극의 주인공처럼, 공주와 왕자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자기의 것만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공허하게 들립니다. 겉으로는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아도 그것마저 자기연민이며, 그것마저 자기의(義)입니다.
바울의 뒤이은 진술을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바울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바울은 율법주의와 투쟁하는 중입니다. 세상에서 얻으려는 모든 업적을 단절해낸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면 당연히 율법을 통한 구원과는 단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바로 성령의 경험입니다. 바로 이 사건에서 여러분은 참된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세상의 업적의(義)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자유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로 인해 주어지는 그 자유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이런 성령의 자유를 맛본 사람은 결코 낙심하는 법 없이 꾸준히 선을 행합니다. 이럴 때만 인간의 선한 행위는 의미가 있으며, 이럴 때만 인간의 선한 행위는 사람을 파괴하지 않고 살립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십자가만이 나의 자랑입니다. 아멘.  




profile

[레벨:21]유목민

July 15, 2007
*.116.73.53

주님의 의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의 의는 쇠하여야 하리라.
profile

[레벨:14]순둥이

July 15, 2007
*.235.184.154

공부 자체가 좋아서 공부를하는 학생..공부 자체가 좋은 학생이 곧 성령의 사람...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게 아니라 흡사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나는 새들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면서 꾸준히 선을 행할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말씀 페부에 깊숙히 와 닿습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의 사람!!!
profile

[레벨:0]求道者

July 15, 2007
*.241.161.130

주님!
성령이 주시는 자유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저희들 자신을 맡긴채
꾸준히 善을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profile

[레벨:1]앵이

July 16, 2007
*.48.118.220

오뚜기처럼 자기 의를 회복하는 자기 중심주의, 그 지독한 죄성을 늘 내 안에서 봅니다.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님 만이 주님의 의를 제 안에 회복케 하십니다.
그러한 경험 속으로 깊이 인도하소서. 아멘..
profile

[레벨:13]아침햇살

July 16, 2007
*.108.188.106

참 많이 생각해 보고
참 많이 찔림을 받고
참 많이 깨닫게 되고
참 많이 자유를 얻고
참 많이 평안을 찾고.............
벙어리 삼용이 같았던 시절을 벗어나
조금씩 조금씩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귀에 들리며 한발짝 한발짝 샘터교인이
되어 가는 듯 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16, 2007
*.150.14.86

아침햇살 님,
대글을 시처럼 쓰셨네요.
산만한 저의 설교가 귀에 들린다고 하니
성령의 도우심이 분명합니다.
그걸 그렇고,
내일 소풍 가는 것 기억하시지요?
비가 와도 갑니다.
비바람, 천둥만 없으면요.
내일 뵙겠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16, 2007
*.150.14.86

앵이 씨,
잘 있었어요?
요즘도 신랑과 알콩달콩 재미있게 놀고 지내지요?
<주간기독교>에 게재하는 탐방 기사를 통해서
앵이 씨의 활동을 잘 알고 있어요.
이제 방학이니까 서울 오프에서 한번 볼 수 있는지.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16, 2007
*.150.14.86

순둥이 님,
위에서 제가 설교를 그렇게 해도
꾸준하게 선을 행하지 못해서 부끄럽습니다.
그게 참으로 이상해요.
뭐 이상할 것도 없지요.
사람을 이해하는 것 자체도 쉽지 않답니다.
그래도 나를 축소시키고
성령의 통치에 나를 맡기는 것 말고는
그리스도교 영성에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profile

[레벨:14]순둥이

July 17, 2007
*.206.90.24

목사님 반갑습니다^^*
주님의 가르침 대로 완벽하게 살아 간다면
하나님이 에녹처럼 엘리야 처럼 데리고 가버리시면
목사님 설교는 어디서 듣나요?ㅎㅎㅎ
이렇게 좋은 설교 메세지를 남겨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 합니다..
목사님이 한번씩 하시는 그 말씀이 정답 인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성도의 변화를 위해 간섭하기 보다는
저희들에게 성서가 나타내고저 하는것을 바르게 기르치는것...
그다음은 하나님께 맡기는것...
한번씩 목사님이 말씀 하시고저 하는 요지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ㅎㅎ
주여 무지한 저를 깨우쳐 주소서!
profile

[레벨:14]순둥이

July 17, 2007
*.206.90.24

에고고.. 위에 댓글에 가르치는것을 기르치는것 으로 오타를 쳤네요...죄송해요...아직 컴이 서툰가 봐요^*^
목사님 수고 하세요!
















profile

[레벨:33]달팽이

July 17, 2007
*.145.168.101

때론 삶의 무게와 어쩔수 없는 인생에 대한 처절한 나약함이 있지만 복음이 주는 참된 자유와 해방은 그것을 초월하여 매일 매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내 안에서 솟아나는 기쁨과 감사가 오늘도 이 하루를 채워감을 느낌니다. 같은 믿음의 길을 바라보고 공유하고 마음에 새기는 말씀을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영적예민함으로 말씀의 깊이와 넓이 가운데 주의 영의 도우심을 늘 의지합니다.
profile

[레벨:1]가난한 심령

July 19, 2007
*.141.106.69

목사님, 성령을 경험하기위하여 십자가 사건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인데, 십자가 사건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씀하시는것인지 궁금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19, 2007
*.181.51.23

가난한 심령 님,
정말 중요한 질문을 하셨군요.
기독교 신자들은 대충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런 걸 은혜롭다 할지 모르지만 별로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지요.
질문을 잘 하셨구요,
그런 질문을 받아야만 말하는 저도 어디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답니다.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성령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말씀이지,
이 자리에서 그렇게 해야한다거나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도 큰 그림만은 그려야겠지요.
성령은 교회가 독점하고 있는 어떤 주술적이고 비의적인 마력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고 생명의 영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진리로 끌어들이는 힘이 성령이지요.
그런데 아직 우리는 진리를 다 아는 게 아니기 때문에
성령도 다 아는 게 아니랍니다.
우리는, 특히 기독교인들은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 근거해서 진리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힘이 성령이지요.
다시, 성령은 딱 끊어서 "이거다' 하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은 것만큼 우리는 성령을 알아간다고 말할 수 있지요.
자꾸 말이 옆으로 나갔군요.
십자가 사건과 연결해서 설명해야지요.
특히 십자가 사건 안으로 들어가는 사태를 설명해야겠군요.
보세요.
우리는 세례받을 때 십자가에 대해서 전달받은 정보가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그것을 믿으면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우리가 구원받은다고 말입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기초에요.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구구단입니다.
구구단을 외우는 게 수학의 기초이지만
그걸 수학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이해하려면,
그것이 곧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구원, 하나님 등등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에게 발생했던 십자가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갑니다.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이 역설, 이 모순을
우리는 쉽제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교리문답으로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신앙의 총체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바로 제가 위에서 말한
십자가 사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과정이 단지 이해에 머물리 않고
자기 삶과 일치되어야겠지요.
그런 일치의 경험, 거기서 나오는 신앙의 힘을 영성이라고 합니다.
이제 그런 사람은 예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이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됩니다.
이런 영성의 깊이로 들어가는 건 바로 성령의 도우심이지요.
성령체험은 다른 게 아니라 진리, 생명 체험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진리와 생명 문제를 이 세상의 보편적인 문제가 아니라
주로 예수 사건에서만 설명하려고 할까요?
예수 사건이 바로 우주론적인 진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가난한 심령 님 덕분에 저도 새롭게 생각했고,
다른 분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감사.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9564
350 성령강림절 은혜의 보좌 앞으로! [28] 2009-10-26 18949
349 성령강림절 재물과 하나님 나라 [22] 2009-10-19 14597
348 성령강림절 번제의 길 [22] 2009-10-12 15968
347 성령강림절 지혜와 평화 [9] 2009-10-05 10876
34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과 등 [11] 2009-09-28 17265
345 성령강림절 닫힘과 열림 [21] 2009-09-21 12806
344 성령강림절 믿음과 행함의 긴장관계 [25] 2009-09-14 18787
343 성령강림절 성찬의 신비, 생명의 신비 [17] 2009-09-07 15600
342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꿈 이야기 [27] 2009-08-31 18202
341 성령강림절 말의 주체, 말의 능력 [10] 2009-08-24 14117
340 성령강림절 그날의 평화 공동체 [9] 2009-08-17 10094
339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22] 2009-08-10 18206
338 성령강림절 믿는 자는 성전이다 [13] 2009-08-03 13401
337 성령강림절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17] 2009-07-27 18366
336 성령강림절 승리주의를 넘어 생명으로 [20] 2009-07-20 12999
335 성령강림절 그리스도의 가난과 우리의 부요 [23] 2009-07-13 19614
334 성령강림절 “그는 누군가?” [18] 2009-07-06 14690
333 성령강림절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다 [24] 2009-06-29 15123
33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구원 섭리 [33] 2009-06-22 16167
331 성령강림절 생명의 날 [17] 2009-06-15 13541
330 성령강림절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 [7] 2009-06-08 16722
329 성령강림절 성령의 중보기도 [21] 2009-06-01 15347
328 부활절 그리스도인의 이중 실존 [8] 2009-05-25 15299
327 부활절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22] 2009-05-18 13842
326 부활절 ‘여호와 이레’의 믿음 [23] [39] 2009-05-11 25316
325 부활절 예수는 왜 선한 목자인가? [11] 2009-05-04 19377
324 부활절 죽임, 살림, 증인 [25] 2009-04-27 16256
323 부활절 복된 믿음 [29] 2009-04-20 13946
322 부활절 죽음을 무너뜨리리라! [7] 2009-04-13 13308
321 사순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26] 2009-04-06 19424
320 사순절 그날이 오리라! [12] 2009-03-30 12843
319 사순절 구원의 신비와 선한 일 [11] 2009-03-23 13756
318 사순절 무엇이 구원의 표적인가? [13] 2009-03-16 14894
317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29] [4] 2009-03-09 14414
316 사순절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22] 2009-03-02 16857
315 주현절 창조의 빛, 인식의 빛 [15] 2009-02-23 19901
314 주현절 바울의 두려움 [12] 2009-02-16 11988
313 주현절 예수와 귀신 [44] 2009-02-09 14355
312 주현절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9] 2009-02-02 11984
311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9] 2009-01-25 10728
310 주현절 무화과 나무와 하늘 [9] 2009-01-19 11457
309 주현절 성령과 세례에 대한 질문 [6] 2009-01-13 13915
308 성탄절 크게 기뻐하라! [11] 2009-01-05 12500
307 기타 생명 상실의 두려움을 넘어서 [2] 2009-01-01 10846
306 성탄절 종이냐, 자녀냐 [26] 2008-12-29 12391
305 성탄절 하나님의 영광과 아기 예수 [8] 2008-12-25 16944
304 대림절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 [7] 2008-12-22 11972
303 대림절 광야의 ‘소리’를 넘어 [18] 2008-12-15 14418
302 대림절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8] 2008-12-08 14368
301 대림절 마지막 ‘때’ [11] 2008-12-01 12991
300 성령강림절 깨어 있으라! [10] 2008-11-23 16280
299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776
298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613
297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501
296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738
295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3589
294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623
293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649
292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0966
291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512
290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103
289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1965
288 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9] 2008-08-31 13172
287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787
286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73
285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542
284 성령강림절 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9] 2008-08-03 13252
28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 [8] 2008-07-27 13240
28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 [10] 2008-07-20 15284
281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와 예수 [23] 2008-07-13 15867
280 성령강림절 말씀은 성취된다 [10] 2008-07-06 17949
279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538
278 성령강림절 경계를 넘어서 [5] 2008-06-22 16328
277 성령강림절 이삭의 하나님, 이스마엘의 하나님? [8] 2008-06-15 25764
276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6899
275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446
274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268
273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하나님 [6] 2008-05-18 27824
272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0785
271 부활절 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8] 2008-05-04 25605
270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7763
269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373
268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352
267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281
266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706
265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2023
264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197
263 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 2008-03-23 15539
262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388
261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776
260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850
259 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13] 2008-02-24 16083
258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8791
257 사순절 악마의 유혹 앞에서 [14] 2008-02-10 15739
256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697
255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247
254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457
253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316
252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4886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