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8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해

성령강림절 조회 수 11643 추천 수 56 2007.08.05 16:02:35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070805.mp3 
성경본문 : 골로새서 1:15-20 
mms://wm-001.cafe24.com/dbia/070805.mp3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해
2007.08.5. 골 1:15-20

아프가니스탄 사태
요즘 한국교회는 지난 130년 역사 이후로 가장 큰 시련기에 놓여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으로 단기선교에 나섰던 샘물교회 젊은이들이 탈레반에게 인질로 잡혀 있습니다. 현지 가이드를 포함해서 23명이 피랍되었는데, 그중에 이미 2명이 살해당했습니다. 우리는 피랍된 젊은이들이 겪어야 할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가족들이 견뎌내야 할 창자를 끊어내는 듯한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피를 말린다고 밖에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 젊은이들은 직접적인 기독교 선교가 아니라 봉사를 위해서 위험한 그 지역에 갔습니다. 개인적으로 경제적인, 시간적인 부담이 있었겠지요. 좋은 뜻으로 일정한 자기희생을 담당한 채 아프가니스탄에 건너간 이들의 목숨이 지금 경각에 달렸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요?
탈레반이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요. 자신들과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민간인을 인질로 삼는 그들의 행위는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나름으로 할 말은 있을 겁니다. 이건 아주 복잡한 국제 정세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쉽사리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거칠게 한 마디만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탈레반은 미국 9.11 테러가 일어난 후 그 배후로 지목되어 미국으로부터 공격을 받기 전까지 아프가니스탄의 합법적인 정권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재 미국의 비호를 받는 아프가니스탄 정권과 내전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은 테러와 인질 납치의 방식이 아니면 자신들의 목표를 관철시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미국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죽이고 현재도 수감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지만 미국 민간인도 아니고 한국 민간인을 납치해서 살해하고 정치적 흥정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미국을 원망합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과 이라크 전쟁을 지적하면서 탈레반보다 미국의 책임이 더 크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해서는 변호할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세계의 평화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훨씬 많은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 인질로 잡혀 있는 분들의 목숨을 구하는 일에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할 이 순간에 미국을 탓한들 여기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저는 문제를 일으킨 탈레반이 나쁜 놈들이야, 또는 원인을 제공한 미국이 문제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정치학자들이 전문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서 한국사회가 한국교회를 향해서 쏟아내고 있는 분노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 저에게 중요합니다. 이런 사태의 뉴스 꼭지마다 저주에 가까운 악풀이 쉬지 않습니다. “당해 싸다.”는 식의 논조가 강한 악플들입니다. 도대체 한국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기에 한국사회가 한국교회를 이렇게 냉소적으로,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걸까요?
기독교를 향한 그들의 분노는 일단 기독교의 배타적 선교태도에 놓여 있습니다. 이들이 보이는 분노는 전혀 터무니없는 건 아닙니다. 일전에는 길거리에 앉아서 탁발수행하고 있는 스님의 머리에 한손을 올려놓은 어떤 축호전도인의 사진이 신문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손에 대형 십자가를 잡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배타성과 자기 우월적 사고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었습니다. 그런 몰상식한 행동을 한 사람은 물론 정상적인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교회 밖의 일반 사람들은 그를 기독교과 일치해서 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영락교회에서는 사학법 재개정을 위한 특별집회와 심지어 삭발도 행해졌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몇몇 대형교회 목사님들은 노무현 정권이 기독교를 핍박한다는 말을 설교 시간에 노골적으로 쏟아냅니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그런 건 아닙니다만 한국사회를 향해서 매우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을 보인 교회와 교회 대표자들이 한국교회 안에서 일정한 세력을 얻고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경제 논리처럼 정상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고 이처럼 기독교 패권주의에 사로잡힌 교회들은 밖으로 많이 나타납니다. 결국 세상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욕구불만에 가득하거나 자기 힘을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람보처럼 생각하겠지요. 그것이 이번 사태로 드러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도대체 무엇이게 이런 비통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오늘 본문인 골 1:15-20절은 그리스도 찬양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면서 그 당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불리던 이 찬송을 인용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그리스도 찬양은 단지 골로새 교회만이 아니라 그 당시 전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일단 접어놓고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찬양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자이십니다. 이 만물은 땅과 하늘을 모두 포함합니다. 하늘에는 태양과 별이 있습니다. 땅에는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생명과 강, 산, 숲 등, 이 세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이 세상의 만물을 화해시키셨습니다.
이 말은 곧 그 이전에는 하나님과 만물이 불화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불화가 없었다면 화해니 뭐니 하는 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친구 사이, 또는 부부 사이에도 화해가 필요할 때는 그들이 반복, 불화할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물과 불화한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앞서 말한 아프가니스탄 사태도 역시 그렇지요. 단순히 탈레반이 나쁜 놈들이라거나 미국이 뻔뻔스런 나라라고 본다고 해서 이런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탈레반처럼 독한 사람들이나 미국처럼 뻔뻔한 나라가 없다고 해서 이 세상에 이런 험악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는 게 아닙니다. ‘밀양’이라는 영화의 배경이 남편의 죽음과 아들의 유괴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들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이런 문제들은 작게는 동네 꼬마들의 관계에서도 일어나고 크게는 국제관계에서도 일어납니다. 개인의 영혼에서도 일어납니다. 지나친 욕망과 불안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심지어 우주의 차원에서도 일어납니다. 공룡이 멸망한 이유 중의 하나가 소행성의 지구충돌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앞으로 언젠가는 지구의 모든 생명을 멸종시킬 수 있는 소행성이 날아올 겁니다. 제가 일부러 기분 나쁜 예만 들었는지 모르겠군요. 하늘과 땅에는 물론 좋은 일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그렇게 안전하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지 않을까요?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런 세상과 삶의 중심에 하나님과의 불화가 놓여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화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그렇게 부정적인 사고방식에 찌든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의 주요 관심은 훨씬 적극적인 화해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자라는 사실을 노래했습니다. 그리스도가 화해자라는 말은 곧 그에게서 모든 것들이 통일되었다는 뜻입니다. 그에게서 생명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세계 창조의 완성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과 만물이 화해했으며, 그래서 그리스도가 바로 창조의 완성자라고 한다면 그는 만물의 근원자라는 말도 됩니다.
오늘 본문의 그리스도 찬양은 바로 이 사실을 15-17절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만물보다 먼저 태어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만물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습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16b,17) 2천 년 전에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가 33년 동안 살다가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이 만물보다 먼저 태어났다는 말이 여러분에게 이상하게 들리시겠지요. 이런 찬양은 수학공식과는 다릅니다. 실험실에서 실험해서 증명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남자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합시다. 이 남자는 그날부터 이 세상이 무지개색깔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목적은 바로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한 것으로 믿어졌습니다. 이 여자로 인해서 이 남자의 모든 삶이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예수님에게서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났습니다. 그를 통해서 만물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보다 먼저 태어나신 분이라는 찬양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찬양을 부릅니다.
이기서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신앙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초기 기독교인들은 무슨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자라고 했을까요? 그 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20b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예수의 십자가가 곧 궁극적인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는 곧 진정한 평화를 가리킵니다. 이런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이 예수 이외에 많은데 왜 예수의 십자가만이 궁극적인 평화의 토대가 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유다인들에게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였습니다.(고전 1:23,24)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자리는 바로 이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든지 못하든지, 또는 동의하든지 못하든지 우리는 바로 이 사실에 우리의 신앙과 우리 삶을 걸어야 합니다. 이것을 선포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 이외에 우리가 세상을 위해서 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조금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부스러기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의 피가 평화를 이루었다는 말씀을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린 사람은 수없이 많습니다. 남을 위한 희생의 피는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청계천 피복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서 분신한 전태일 씨의 피를 그리스도의 피처럼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전태일의 피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다릅니다. 생물학적으로는 똑같겠지요. 남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한다는 점에서는 전태일의 피도 역시 예수의 피 못지않게 숭고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이 대목에서 길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리는 박애주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게 아닙니다. 예수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만물 보다 먼저 태어나셨고, 그를 통해서, 그를 위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그가 흘린 피를 믿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그 증거를 대라, 하실 분이 있겠지요. 그 증거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부활입니다. 부활의 증거를 대라고 다그치시겠어요? 여기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길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본질 중의 하나인 사도성이 바로 여기에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신앙이 옳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공산당원들이 칼 마르크스의 프로레타리아 혁명사관이 옳다고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증언들을 믿는 데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이 왜 옳은지를 종말 때까지 증명해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
일단 여기까지는 우리가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궁금증은 실제로 이 세상에 평화가 일어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충만함이 이미 예수의 부활에서 일어났는데, 실제로는 생명의 파괴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 초미의 관심사인 아프가니스탄 사태도 역시 생명파괴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들의 목숨이 국제정치공학의 도구가 되어버렸습니다. 탈레반은 이런 책임을 어떻게 지려고 하는 걸까요? 그리스도의 평화는 요원해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거짓말인가요? 실제가 아닌가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궁극적인 역사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만물의 화해가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바로 화해와 평화로 가득한 궁극적인 생명사건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역사에서 증명해나가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만물과 화해하며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 하면 됩니다. 이미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믿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요.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 땅에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믿고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 뒤의 모든 책임은 하나님이 지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물’이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 만물에는 타종교도 역시 포함됩니다.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역시 우리가 화해와 평화를 나눌 분들입니다. 우상숭배자들과 무슨 화해이며, 무슨 평화냐 하고 생각하는 분들은 골로새서의 그리스도 찬양을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며, 메시야이십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슬람교도들마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과 하나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것은 여러분이 풀어야 할 신앙적 숙제입니다.

profile

[레벨:21]유목민

August 06, 2007
*.116.73.53

기독교 패권주의.
유시민은 '괴물'이라고 표현을 했죠.
"주님, 우리의 독선을 용서하소서."
교회가 '이해와 함께'라는 말을 배우기 원합니다.
profile

[레벨:0]사오정

August 06, 2007
*.74.17.75

아멘!
profile

[레벨:1]가난한 심령

August 06, 2007
*.192.198.176

감사합니다
profile

김한국

August 07, 2007
*.204.70.4

"이슬람교도들마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과 하나입니다."

목사님의
은혜가 넘치는 말씀에 감동 먹고 갑니다.
그런데 위의 말씀은 설명이 좀 더 필요한 것 같아서
질문을 드립니다.
그냥 타종교인들과도 친하게 지내시오라는 의미보다는
더 깊은 속뜻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런 부분에서는 좀 둔하거든요.
넌지시 애둘러 표현하면 잘 알아 듣지 못합니다.
우선, 화해라면 일방이 아닌 양방의 관계성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목사님의 위의 표현은 현실성이 약간 없어 보여서요.
이슬람교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뜻인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이 이슬람교도들에게까지 은총이 미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그런 표현을 쓰신 것인지...
십자가 사건과 그리스도의 은총이 교회에만 한정되는 게 아닌 건 분명합니다.
현재로선 십자가 사건을 인식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런대 아직 세상은 하나님과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세계가 화해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게
쉬워 보이지 않군요. 인간과 다른 종들은 둘째치고서라도
지금 교회 바깥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나, 타종교인들이나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과 화해로 인식하고 있는가 하고 물어보면
아니오! 라는 생각이 훨씬 더 강하게 들거든요.
그래서 위의 표현
<이슬람교도들마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되었습니다>는
말씀을 한 번 더 설명부탁드립니다.
좀 더 알고 싶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August 07, 2007
*.181.51.23

김한국 님,
이미 질문 속에 답이 들어있네요.
이슬람교도들이 명시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해야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잘 지켜나가는 게 좋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론적 구원 사건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구원 은총이
이슬람교도들에게까지 미친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든지 않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복음의 우주론적 지평을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이것은 배타주의도 아니고 우월주의도 아니며,
초기 기독교 동공체의 신앙고백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아직 현실화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짊어져야 할 영적인 짐일지 모르겠군요.
종말에 명백하게 드러날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론적 구원 은총이
아직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는 말입니다.
제 설교의 결론에서 말한 것 같은데,
우리는 성서기자들의 신앙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이 왜 이슬람교도들에게까지 미치는지
신학적으로 해명, 해석해 나갈 뿐만 아니라
(이런 점에서 신학은 여전히 과정 중에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화해와 평화의 삶을 꾸려가야겠지요.
(이런 점에서 우리의 행위는 늘 잠정적입니다.)
그때(종말)가 오면
우리가 미처 다 깨닫지 못했던 이 희미하고 어둡던 실체들이
모두 드러날 것입니다.
이슬람교도들이 그들의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 안에 들어있다는 이 역설이
환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마라나타,
주여, 오소서!
profile

김한국

August 07, 2007
*.204.70.4

이슬람교도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그대로 지켜나가야 한다는 목사님의 주장과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이슬람교도들에게까지 미친다는 말씀은
위의 세 명제 각각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셋을 종합해 보면 조화보다는 상충하는 듯 합니다.
목사님께 한 번만 더 설명을 요청해도 될까요?
profile

[레벨:2]푸른적토마

August 07, 2007
*.84.242.135

목사님의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질문를 드립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잘 지켜나가는 게 좋을 겁니다." 라는 부분인데요, 그러면 소위 이단으로 규정되어
있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위의 명제는 적용될 수 있는 건가요?
따질려고 질문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요즈음 하나님의 교회(안산홍증인회)에 출석하고 있어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이런 말씀은 저를 무척 당혹하게 합니다.
마치 목사님의 말씀은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말씀처럼 들리거든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August 07, 2007
*.181.51.23

김한국 님,
세 명제가 상충되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와 '아직 아님'의 변증법적 긴장을 유지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서로 상충하는 겁니다.
우리가 상충된다고 보는 이유는
세 명제의 어떤 부분이 아직 그림자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건 기독교 신앙 안에 지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며 '정의'라고 합니다.
사랑과 정의는 상충됩니다.
이런 관계를 자로 선을 재듯이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가능한대로 합리적으로 설명하면서
최종적인 답은 종말로 열어두어야겠지요.
또는 우리의 인식론적 깊이가 심화되기를 기다려야겠지요.

키리에엘레이송 님,
이단 문제는 여기서 조금 논외로 쳐야겠군요.
이슬람교는 이단이 아니라 타종교이거든요.
특히 구약성서를 뿌리로 하는 타종교지요.
유대교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통일교나 전도관, 신천지, 위에서 예로 드신 안산홍증인회 등은
소위 이단입니다.
이들과는 이단논쟁을 벌여야겠지요.
그런 과정에서 기독교의 진리가 드러나지 않겠어요?
이런 데서도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단의 기준 자체가 모호할 때가 있거든요.
참고적으로,
이스람교도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가게 하는 게 좋다는 내 말이
그들의 신앙이 옳다는 차원의 말은 아닙니다.
지금 저는 비교종교학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총을 거론하는 중입니다.
그것의 우주론적 지평을 말하는 거지요.
그걸 전제하고
타종교와의 진리논쟁이나
사이비 이단들과의 이단논쟁은 또 다른 차원에서 벌여나가야겠지요.
감사.
profile

[레벨:13]콰미

August 09, 2007
*.54.206.14

와 서목사님 꼬리글 달으셨당 우와~
profile

[레벨:28]첫날처럼

August 10, 2007
*.211.211.129

정 목사님은 매주 설교에 쫓겨서, 설교를 해야하니깐 설교를 하시는 분이 아니시네요... 이번 설교도 그 멧세지가 가슴 깊숙이 울립니다... 가슴 속에 파문이 너무 큽니다...
profile

[레벨:5]권요안

August 10, 2007
*.188.103.10

예전에는 설교를 읽고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고, 주먹이 불끈 쥐어지기도 했는데 요즘은 영... 머리만 쥐어뜯게 됩니다. '하나님나라'.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엔 인식의 한계를 절감하게 될 뿐 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건인 십자가, 부활, 구원 등의 신비 앞에서 인간의 이성이 초라하다는 것만 거듭 확인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해하고 누리고 나누는 숙제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는 생각의 틀을 깨뜨리는데서 실마리를 풀어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시공을 초월한 인식의 가능성은 '영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 보는데, 영성도 워낙 여러가지가 난무하다보니 말 꺼내기가 좀 조심스럽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것이 존재론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인식론적으로는 어느정도 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만 그러다보면... 아우~ 머리 아퍼~~

어쨋든 머리 아픈 만큼 신앙도 성숙해지리라 믿~쒸미다. 덥고 습한 날씨에 건강을... 쿨럭~ㅜ.ㅜ;
profile

[레벨:100]정용섭

August 10, 2007
*.181.51.23

권요안 님,
"아무리 생각해도 ... 인식의 한계를 절감..."
그렇습니다.
성서기자들도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신학자들도 마찬가지구요.
그래서 창조와 종말을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권요안 님에게 무언가 좋은 조짐이 보이는군요.
"머리 아픈 만큼 신앙도...."
그것도 옳습니다.
생각하기 싫은 사람은 그런 정도의 신앙으로 살면 되고,
골치 아파도 생각하려는 사람은 또 다른 신앙의 깊이를 맛보며 살게 되겠지요.
그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자!!
profile

[레벨:3]삶에서..

August 11, 2007
*.106.177.186

아프간 사태를 보면서 제가 가진 질문이 기독교 신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아니던가라는 자문자답이었죠.
그리고 그 고민을 지난 청년여름수련회때 청년들에게 던져주었습니다.(서울신대 한참 후배녀석 전도사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돌아보자..라는 거였습니다.

아프간 사건으로 울기도하고 맘이 쓰리기도 하고 도대체 어찌해야하는건가?라는 수많은 고뇌와 고민이 있었습니다. 사실 아직도 답답하고 맘이 아픈데 이곳 저곳에서 계속해서 들려오는 쓰라린 소리뒤에 들려진 목사님의 설교라 그런지 제게 큰 은혜가 되었던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2]양손잡이

August 12, 2007
*.31.137.141

매일 매일 아프칸의 소식을 들으며 아파하고 답답해 하던 요즘이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에도,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삶의 현실들이 여전히 괴로웠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는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그는 과연 살아 계시는가?” 그렇게 불경스런 의문을 던지던 중, 목사님의 이 말씀이 계시처럼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만물과 화해하며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 하면 됩니다. 이미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믿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요.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 땅에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믿고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 뒤의 모든 책임은 하나님이 지십니다.”

우리의 무기력으로 인해 무기력해지신 하나님이 이렇게 답을 하시는군요.
"너는 어디에 있느냐?",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너는 살아있느냐?"
profile

[레벨:0]이반

August 16, 2007
*.178.129.6

안녕하세요!

정목사님의 해석은 정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결과는 우주적입니다.
구약에서 약속하고 예언된 바가 그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으로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성취는 당연히 우주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익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성취된 구속은 완성된 구속을 기다립니다.

이미 성취된 구속의 은총을 받는 조건이 있습니다.
이 조건은 예수님을 구세주와 개인의 주로 믿고 영접하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이런 신자는 완성된 구속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이미 가집니다.

그렇다면 타종교인들은 성취된 구속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여건 아래 있을지 모르나
그 안에 아직 들어가진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들 타종교들은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이들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 있어도 예수님을 구세주와 개인의 주로 모시고 신뢰하며 살지 않는 신자들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정목사님의 말을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럼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해야 할 세상을 이리들이 득실 되는 곳으로 설명했다(마10:16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세상을 대적으로 알고 힘써 싸울 것을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가운데서도 복음을 지혜롭게 전하라고 권했다.
이 권면은 교회가 세상을 적(敵)으로 알고 미워하기보다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보인다.

이런 가르침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부활 사건을 목격한 후 제자들은 자신의 스승 예수님이 구세주와 만유의 주됨을 뜨겁게 믿었다.
그러나 이 열렬한 신앙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하는 세상을 정죄하고 세상과 싸우며 이들은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기쁘게 순교를 당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이들과 우리 사이 시기상 차이가 있다.
자신의 시대 제자들은 예수님이 구세주와 주님 됨을 만 천하에 외쳐야 했다.
예수님이 구약에서 약속한 인류의 메시아였음을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즉 이 당시 제자들은 기독교 복음의 배타성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강력하게 주장해
만인에게 예수님의 구세주됨과 주님됨을 다급하게 전해야 했다.

이 점에서 오늘날 교회는 다른 시대에 속한다.
오늘날의 다원화 시대에 기독교는 종교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포스트모던니즘 때문에 사람들은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진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시대 기독교 교회들이 복음의 배타성과 예수님의 유일한 구주 됨을 대외적으로 쉽게 주장한다면
비웃음만 당한다. 이 결과 교회는 복음의 접촉점도 잃을 것이다.

반면 기독교의 배타성은 근본적으로 대내적인 신앙고백이다.
처음부터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로 신앙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신앙 고백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엡2:8, 살후3:2절).
그러므로 기독교 교회는 복음의 유일성을 대내적(對內的)으로만 주장하고 신자들을 가르쳐야 한다.

그럼 기독교 신자들은 다른 종교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들 종교들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 아래 생성된 것들이다.

달리 말한다면 주님의 주권에서 벗어나 이들 종교들이 저절로 발생될 수 없다.
부활 주님과 창조주 하나님이 만유의 주이기 때문이다.

그럼 무슨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이들을 종교들을 허용했는가?
인류의 양심에 바탕한 윤리도덕의 도움으로 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시키고자 함이다.
이들 종교들은 구원과 무관한 그래서 완전치 못하지만 선(善)을 촉구하고 악(惡)을 통제하는 나름의 역할(권선징악)을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잘 전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개입 결과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교회는 이들 종교들을 무조건 배타적으로 대하면 안 된다.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위해서라면 이들과 협력하고 도와야 한다.
이 협력은 신앙이 아닌 상식 선에서 같이 한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특별 은총 영역이 아닌 일반 은총 영역 안에서이다.
다시 말해 일반 은총 영역아래 기독교는 타종교들과 협력해야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 교회는 어떻게 복음의 유일성과 배타성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가?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답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3-16절)

소금은 그 맛으로 썩음을 방지하고 맛을 돕는다.
마찬 가지로 빛도 비춤으로 어둠을 쫓아내고 밝음을 준다.

그럼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잘못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기독교 신자들은 소금의 맛과 등불의 빛을 전도의 열정이라는 행위로만 해석했다.
그러나 이젠 삶이나 인격을 통해 증명해 보여야 한다.

대부분의 한국 목회자들과 신자들은 인격보다 열정적인 신앙 행위에 치중한다.
도달하기 쉽지 않은 인격적인 성숙보다 종교적 행사를 통해
자신의 열정을 쉽게 그리고 잘 증명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열정은 선교 현장에서 선행을 위해서라면 불법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게 만들고
그리고 그렇게 선교지의 문화나 정서를 무시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인 종교 행사에 치우치다 보면 신앙 성숙은 더욱 더뎌지고
마침내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된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대내외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듯이...
이런 소금은 종국적으로 버려진다고 성경은 경고한다.

한국 교회가 우선 순위를 잘못 정한 결과이다.
말로만 기독교의 배타성을 열정적으로 주장할 것이 아니라 이젠 신앙 삶과 인격을 통해 증명하자!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는 비웃음을 살 것이며 그 결과 교회 부흥을 더 이상 불가능할 것이다.

이 시대 종교간 보이지 않는 전쟁이 수행되고 있다.
이 전쟁은 말이 아닌 삶과 인격으로 치러진다.
누가 더 나은 윤리 수준을 보이는가가 자신이 속한 종교의 우월성을 증명해 보이는 방법이다.
이 점에서 한국 교회는 산 위에 있는 동네와 같다(마5:14절).

이제 한국 교회의 사고 전환이 요구된다.
양(量)에서 질(質)로…
그렇지 않으면 한국 교회의 수가 늘어날수록 사회의 비편을 그만큼 더 많이 들을 것이며 그리고 선교사들을 많이 보낼수록 선교지에서 더 복잡한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하나님은 아프카니스탄 사태를 통해 한국 교회를 향해 회개 즉 사고의 대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문제의 해답들은 한국 교회의 의지에 의해 찾아질 것이다.
profile

[레벨:0]폴김

August 20, 2007
*.210.244.97

정목사님의 성서해석이 옳다면,
그러면 그 만물 속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들어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요?

그리고 예수님이 직접 하신 아래의 말씀들은 목사님이 해석한 예수님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10:14-15)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마23:16)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5-16)

목사님의 설교는 세상과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성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 하군요.
사도 바울이 본문을 과연 목사님의 생각과 같은 의미로 기록하였을까요?
목사님의 해석이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바라보는 하나의 견해는 될 수 있겠으나,
성경적인 관점이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는 것 같네요.
profile

[레벨:0]이반

August 23, 2007
*.178.129.6

쫄김님!

질문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복음서들과 사도들의 서신들이 구속사적인 배경이 다름을 알면 답을 금방 얻을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은 그 대상면에서 선민 유대인과 이들 종교지도자들에게 한해야 합니다.
구약의 예언대로 선민 가운데 메시아가 왔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저주 형식의 말씀을 남겼습니다.
이 저주대로 주후 30년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예루사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그 결과 선민 이스라엘은 이 지상에서 거의 2천년 동안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막16:15-16절과 사도들의 서신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의 구속 사역이 이미 성취된 상태를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은 선민 유대인만 아니라 만민을 대상으로 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이스라엘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경 본문을 분석할 때 구속사의 어느 시기에 속하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본문의 시대를 무시한 묵상이나 적용은 큐티식 묵상이 범하는 실수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정목사님이 사도 바울의 본문으로 아프카니스탄 사태에 적용한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만인의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예수님은 인류와 하나님 사이 화해의 모든 조건들을 조성해 놓았습니다.
복음 전파로서 이 화해는 현실화될 것입니다.
교회와 신자들이 무엇보다 먼저 복음 전파에 몰두해야 할 이유입니다.
복음으로 화해가 가능하다면 인류는 저절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세상은 여전히 타락한 상태에 있습니다.
복음을 통한 화해 운동에 반대하는 세력이 이 세상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만유의 주라는 믿음에서 나온 순수한 열정도 중요하지만
이 세상의 악을 염두에 두는 뱀의 지혜도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이 지혜가 아프가니스칸사태와 같은 사건들을 앞으로 방지시킬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모든 만민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취된 화해가 완성된 화해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화해가 이루어졌는가라는 판단은 하나님께 맡깁시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47
347 성령강림절 지혜와 평화 [9] 2009-10-05 10857
34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과 등 [11] 2009-09-28 17239
345 성령강림절 닫힘과 열림 [21] 2009-09-21 12780
344 성령강림절 믿음과 행함의 긴장관계 [25] 2009-09-14 18738
343 성령강림절 성찬의 신비, 생명의 신비 [17] 2009-09-07 15579
342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꿈 이야기 [27] 2009-08-31 18160
341 성령강림절 말의 주체, 말의 능력 [10] 2009-08-24 14083
340 성령강림절 그날의 평화 공동체 [9] 2009-08-17 10082
339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의 밥이다 [22] 2009-08-10 18172
338 성령강림절 믿는 자는 성전이다 [13] 2009-08-03 13362
337 성령강림절 요한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 [17] 2009-07-27 18341
336 성령강림절 승리주의를 넘어 생명으로 [20] 2009-07-20 12989
335 성령강림절 그리스도의 가난과 우리의 부요 [23] 2009-07-13 19581
334 성령강림절 “그는 누군가?” [18] 2009-07-06 14671
333 성령강림절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다 [24] 2009-06-29 15098
33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구원 섭리 [33] 2009-06-22 16135
331 성령강림절 생명의 날 [17] 2009-06-15 13510
330 성령강림절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 [7] 2009-06-08 16693
329 성령강림절 성령의 중보기도 [21] 2009-06-01 15322
328 부활절 그리스도인의 이중 실존 [8] 2009-05-25 15278
327 부활절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22] 2009-05-18 13811
326 부활절 ‘여호와 이레’의 믿음 [23] [39] 2009-05-11 25259
325 부활절 예수는 왜 선한 목자인가? [11] 2009-05-04 19313
324 부활절 죽임, 살림, 증인 [25] 2009-04-27 16214
323 부활절 복된 믿음 [29] 2009-04-20 13876
322 부활절 죽음을 무너뜨리리라! [7] 2009-04-13 13272
321 사순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26] 2009-04-06 19363
320 사순절 그날이 오리라! [12] 2009-03-30 12809
319 사순절 구원의 신비와 선한 일 [11] 2009-03-23 13727
318 사순절 무엇이 구원의 표적인가? [13] 2009-03-16 14863
317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29] [4] 2009-03-09 14371
316 사순절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22] 2009-03-02 16829
315 주현절 창조의 빛, 인식의 빛 [15] 2009-02-23 19856
314 주현절 바울의 두려움 [12] 2009-02-16 11958
313 주현절 예수와 귀신 [44] 2009-02-09 14318
312 주현절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9] 2009-02-02 11950
311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9] 2009-01-25 10706
310 주현절 무화과 나무와 하늘 [9] 2009-01-19 11421
309 주현절 성령과 세례에 대한 질문 [6] 2009-01-13 13883
308 성탄절 크게 기뻐하라! [11] 2009-01-05 12411
307 기타 생명 상실의 두려움을 넘어서 [2] 2009-01-01 10726
306 성탄절 종이냐, 자녀냐 [26] 2008-12-29 12272
305 성탄절 하나님의 영광과 아기 예수 [8] 2008-12-25 16801
304 대림절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 [7] 2008-12-22 11661
303 대림절 광야의 ‘소리’를 넘어 [18] 2008-12-15 14115
302 대림절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8] 2008-12-08 14045
301 대림절 마지막 ‘때’ [11] 2008-12-01 12701
300 성령강림절 깨어 있으라! [10] 2008-11-23 16259
299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744
298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573
297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474
296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710
295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3491
294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602
293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607
292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0944
291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485
290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076
289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1930
288 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9] 2008-08-31 13132
287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756
286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46
285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509
284 성령강림절 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9] 2008-08-03 13234
28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 [8] 2008-07-27 13210
28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 [10] 2008-07-20 15250
281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와 예수 [23] 2008-07-13 15827
280 성령강림절 말씀은 성취된다 [10] 2008-07-06 17892
279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503
278 성령강림절 경계를 넘어서 [5] 2008-06-22 16294
277 성령강림절 이삭의 하나님, 이스마엘의 하나님? [8] 2008-06-15 25713
276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6868
275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412
274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235
273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하나님 [6] 2008-05-18 27791
272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0750
271 부활절 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8] 2008-05-04 25570
270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7650
269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253
268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323
267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249
266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680
265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1996
264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145
263 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 2008-03-23 15465
262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356
261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757
260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799
259 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13] 2008-02-24 16045
258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8759
257 사순절 악마의 유혹 앞에서 [14] 2008-02-10 15715
256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643
255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212
254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436
253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285
252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4860
251 성탄절 예수는 예언의 성취! [5] 2007-12-30 15247
250 성탄절 성탄에 참여하는 길 [18] 2007-12-25 19262
249 대림절 임마누엘 예수 [17] 2007-12-23 20169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