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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예배, 참된 예배

성령강림절 조회 수 15598 추천 수 156 2007.11.11 16: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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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이사야 1:10-17 
mms://wm-001.cafe24.com/dbia/071111.mp3거짓 예배, 참된 예배
2007.11.11. 사 1:10-17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샘터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바쁜 세상살이에서도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을까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기만 하면 되지 굳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정한 시간과 정한 장소에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단절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특별히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참된 관계를 맺으면서 사람의 정체성을 확보해나가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건 예배가 잘못이 아니라 예배를 향한 자기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예배는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 들어가는 가장 귀중한 통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은 이 예배, 즉 제사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한 뒤 광야생활을 하면서 이동이 가능한 성막을 세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가나안 정복 시대를 거쳐 예루살렘에 솔로몬 성전을 건축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사장이 입을 옷, 성전에서 사용할 기구, 제사 드리는 절기와 방법 등등, 제사에 관한 수많은 규정이 구약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제사를 향한 그들의 열정이 조금씩 차이가 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제사가 소홀하게 다루어진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전쟁에서 크게 패해 나라를 잃었을 때는 물론 제사를 드리지 못했지만 나라를 회복하기만 하면 가장 먼저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제사 행위에 놓였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거짓 예배
그러나 아무리 귀한 제사, 즉 예배행위라 하더라도 본질을 잃고 형식에 떨어지면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렇습니다. 깨끗한 것은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조금만 게을리 하면 더 더러워집니다. 거룩한 행위도 조금만 게을리 하면 더 추해집니다. 이사야가 살던 기원전 8세기의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행위가 바로 그랬습니다. 이사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소돔 관원들아, 야훼의 말씀을 들어보아라. 고모라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 보아라.”(10절)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 시대에 파괴된 도시입니다. 그들의 부도덕성에 대해서는 창세기 기자가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지금 유다와 예루살렘이 소돔이나 다를 게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사야는 11절 말씀부터 예루살렘 주민이 자랑하고 있는 제사행위를 노골적으로 비판합니다.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숫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 초하루와 안식일과 축제의 마감 날에 모여서 하는 헛된 짓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14절에서도 야훼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들이 모여 드리는 제사행위가 귀찮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들의 예배를 귀찮아 하셨는지 여러분은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황소와 숫염소의 피, 그리고 제물의 타는 냄새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그들이 근동 지방의 이방 신들에게 드려지는 그런 제사를 흉내 내서 드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사 드리는 방식이 잘못된 게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본문에 열거된 모든 내용들은 이미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사야가 비판하고 있는 그 당시만이 아니라 지난 역사에서 이스라엘은 늘 그런 방식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드리는 제사 행위자체가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어떻게 살든지 예배를 잘 드리는 것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두 해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는 지금 그걸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는 1:2절 이하에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 탈선한 민족, 불의로 가득 찬 백성, 사악한 종자, 부패한 자식들. 야훼를 떠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기고 그를 배반하여 돌아섰구나.” 이사야의 이런 지적을 들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기분이 나빴을 겁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백성이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거든요. 그들은 이렇게 반론을 폈습니다. 자신들의 삶에 문제가 많지만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화려하게 잘 드리고 있으니 괜찮지 않느냐 하고 말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모범적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안식일, 매월 초하루, 유월절, 초막절, 오순절 등등, 많은 종교절기를 그들은 성실하게 지켰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마다 아무 흠도 없고 깨끗한 짐승을 잡았습니다. 그 짐승은 부위에 따라서 제사장의 몫도 있고,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몫도 있습니다. 최선으로 예배를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이 자신들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지 않겠느냐 하는 게 바로 그들의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도 그것만 놓고 보면 크게 잘못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둘째 치고 그런 노력만으로 우리 개인과 공동체가 온전하게 정의로워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태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자 원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과 원칙은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순식간에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업적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살린다는 신앙의 본질이 신앙 편이주의에 떨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게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생각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 자기가 편하게 살기 위해서 믿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늘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한다는 뜻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곧 우리 삶과 직접 연관됩니다.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무엇을 가볍게 여겨야 하는지, 우리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이 세상의 고난에 우리가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이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어떻게 일구어가야 하는지와 연관됩니다.
지금 이사야가 비판하고 있는 예루살렘 고관들과 백성들의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것으로 모든 종교행위가 완성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거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본문 10절에서 야훼의 말씀을 들어보아라, 하느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보라라, 하고 외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제사를 화려하게 드렸지만 말씀은 외면했습니다.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의 뜻은 외면했습니다. 이를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기 시부모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한 며느리가 있습니다. 이 며느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명절마다 큰 선물 보따리를 싸들고 시댁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시부모님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이렇듯이 이사야 당시에 예루살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 채 제사행위에만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곧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배우고, 그래서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인데, 예배와 말씀이 분리된다는 게 무엇인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 시간에 듣는 설교마저 하나의 종교적 형식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엄밀하게 구분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예배와 하나님 말씀이 단순히 종교적 자기만족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 삶과 전혀 연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영적인 힘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를 숨기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은 형식적으로 예배에 더 적극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겉으로는 아주 열정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속이 비어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오늘 이사야가 말하듯이 거짓 예배입니다. 이사야는 오늘 본문에서 이런 거짓 예배를 하나님이 싫어하신다고 선포합니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더 나아가 15절에서 이사야는 그들이 아무리 두 손을 모아 빌어도 하나님이 듣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참된 예배
이사야의 비판과 달리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과 거기에 참여한 백성들은 자신들의 멋진 예배를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예배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기도했겠지요. 멋진 성가대의 찬양도 있었습니다. 밤을 새우는 기도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외면하시는데도 하나님을 향해서 울부짖었다는 말이 됩니다. 시부모님들이 전혀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잔치를 베풀고 자신이 효부라는 걸 나타내는 며느리와 비슷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한국교회의 예배를 들으실까요? 우리처럼 지극정성으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이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처럼 교회 행사가 많은 교회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사야 시대에 황소를 잡고 숫양을 잡아 하나님께 바쳤듯이 우리처럼 많은 헌금을 드리는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처럼 기도를 열정적으로 많이 드리는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심지어 특별새벽기도회를 정기적으로 엽니다. 또는 서울 시청 앞에서 반공, 반김정일, 반핵 기도회를, 또는 사학법 반대 집회나 동성애자 차별반대법안 반대 집회를 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기도를 받아주실까요? 저는 이사야처럼 영적 경지가 높은 사람이 못되기 때문에 이렇다, 저렇다 단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무리 뜨거운 예배를 드리고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소외된다면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답이 주어졌습니다. 문제는 예배 형식이 아니라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의 태도, 즉 그들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태도와 삶이 참된 예배와 거짓 예배를 구분할 수 있는 잣대입니다. 이사야는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이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외쳤습니다.(15b) 그들을 향해서 몸을 정결케 하고 악한 행실을 버리고 악에서 손을 떼라고 말합니다.(16절)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전에 바른 삶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제시하는 바른 삶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는 것입니다.(17절)
여기서 억눌린 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세상살이에서 억눌릴 수밖에 없습니다. 복지제도가 없었던 고대사회는 가난으로 인해서 인간의 삶이 쉽게 파괴되었습니다. 때로는 어린자식을 남에게 주기도 하고, 노예로 팔기도 했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할 사람들은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았습니다. 약간 다른 처지이긴 하지만, 지금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분명히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는 억눌린 사람들입니다. 장애인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고대사회에서 고아와 과부들의 처지가 어땠을는지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사회적인 약자들입니다. 이사야는 이들의 삶을 사회가 책임지라고 외치는 중입니다.
사회적인 약자들의 삶을 책임지라는 이사야의 예언은 단순히 휴머니즘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는 사람들의 마땅한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 바로 창세기를 기점으로 모든 성서가 말하는 중심 사상입니다.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들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그런 것을 외면한 채 황소와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면 하나님이 어찌 기쁘게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이 완전히 정의로워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감히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재산을 구제 하는 데 내어놓아야만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사회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불의를 일소하고 완전하게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삶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빠져 있는 삶의 태도를 벗어나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억눌린 자, 고아, 과부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지 눈을 뜨게 됩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으로 바른 길을 찾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만 사로잡혀 있지 말고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 이 역사를 향해서 우리의 삶을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야말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 참된 예배입니다. 그런 예배야말로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한 여자에게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요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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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자

November 12, 2007
*.7.13.27

아멘!
오늘은 제가 일등으로 읽습니다 귀한 목사님의 설교에 가슴을 치면서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늘 하시는 사역에 주님의 평강과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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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청동거울

November 12, 2007
*.119.133.86

언제부터인지 예배를 드리면서 집중하지 못하는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내가 아는 것과 다르다는 것과 저 본문을 저렇게 밖에 풀어 내지 못하나? 하는
생각으로 집중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예배에서 말씀의 비중이 크겠지만 그것이 다가 아닐텐데 전 다른 것은 접어두고
말씀이 내 마음에 들면 만족한 예배라 생각하고 다르면 불평하면서 교회문을 나서는
저를 보았습니다.
물론 목사님께서 깊은 영성으로 본문에 충실하게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나의 예배의 태도가 바르지 못하다는 것은 핑계가 아닌가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외부적인 것에 내가 끌려감이 아니라 깊은 영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내 삶이 산 제사로 온전히 드려지기를 원하며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며 진리안에서
자유로워지며 구원의 기쁨을 경험하는 그 날을 기대해 봅니다.
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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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소리

November 13, 2007
*.57.247.242

역사에 지평에 열려 있는 영성!
성경이 말하는 예배의 가르침과 우리의 현재 모습과의 괴리감이 너무 깊네요.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목사님! 이제 추워진다는데~ 건강 유의하시고~ 앞으로도 저희들을 마니 마니 흔들어 깨워주세요!
저부터 시작해서, 주님께 눈을 뜨기 보다는, 나를 성공시키기 위한 도구들을 붙잡고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많은깐요. ^^*
profile

[레벨:3]코람데오

November 13, 2007
*.247.154.188

좋은 말씀 잘 읽었습니다.
과연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우리는 손에 피가 가득하지 않을까요?
이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자신이 손에 피가가득한 삶을 살고 있음을,
당대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우리 자신의 모습임을 뼈져리게 느끼기에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생각 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완전히 정의로와 지라 그리고 모든 재산을 구제하는데 쓰라는
것 이며^^. 그것이 삶의 지표이며 나가야 할 방향 아닐까요?

주님은 우리에게 온전할 것을 그리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줄 알고
남은 모든 것으로 구제할 것을 명령 하셧습니다..

참된 예배는 상한 심령의 예배라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온전하라는 명령과 내 가진 모든것으로 구제와 선한 사업에 입해야 할것을
확실히 선포할 수 있어야 그렇지 못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상한 심령의
예배가 드려 질 수 있을거란 생각 입니다..
profile

[레벨:33]달팽이

November 14, 2007
*.152.178.158

집에 인터넷을 설치하지 않아서 매주 월요일 회사에서 프린터하여 주중에 새벽에 말씀을 묵상합니다.
매주 산청에서 진주로 주일예배를 보러 가는데 하루 하루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하려고 중심을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 주일에 예배를 드릴때에 하나님앞에 더 친밀하게 다가가지 못하는 현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이름이 '작은교회'입니다. 세례교인 17명 아이들 10명정도 입니다. 교회당 건물없이 주일에 쉬는 기관을 이용(진주 YMCA, 어린이집, 지금은 저희교회 사모님이 지국장으로 일하고 있는 웅진씽크빅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 사실 교회 목사님은 교회 개척초기 부터 공동체에 관한 비전으로 말씀을 일대일 가르치고 공적인 신앙고백을 교회앞에 고백하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평신도이지만 저희 교회 교우들 웬만한 주석이나 강해서로 말씀을 공부합니다. 참고적으로 저희 목사님은 '국제성서주석을' 바탕으로 주일 말씀을 준비합니다. 개척교회를 한지 15년쯤 되어 가는 것 같은데..
지금 제가 느끼는 교회의 분위기는 신실한 신앙고백의 바탕위에 하나된 마음과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교우들의 삶이 집중되지 않아 보입니다. 지금 저희 교회가 처한 상황이 한 가정을 선교사 파송을 위해 미국에 어학연수에 있고, 많은돈을 들여 공동체 부지를 구입한 상태에 있습니다. 지금 교회당 건축과 공동체를 꾸려 나가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저희 교회는 탈진상태에 있는 것 같은데,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깊은 인도하심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은데, 예배 시간에 흐르는 전체적인 냉대함이 크게 자리잡는 것 같습니다. 이런 가운데 제가 주중에 말씀을 묵상하고 하루를 생활 할때는 힘을 얻지만 교우들과 예배들일 때 왜 하나님앞에 더 깊이 있는 교제로 나아가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태도와 삶이 없어 보입니다. 처음의 믿음의 고백은 사라지고 희미해지는 서로의 삶을 볼때 마음이 아파오고 주의 몸된 교회를 어떻게 세워나가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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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November 15, 2007
*.126.124.165

어제 크게 비중을 두지 않고, 설교를 읽고 집으로 퇴근했습니다.
저녁 뉴스를 보다가, 불현듯 목사님의 설교가 매우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배를 훼손하는 내 자신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물과 헌신을 하여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강력한 경고의
말씀에 섬뜩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지체를 훼손한 모습이 보였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관심한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설교의 강력한 메세지를 마음에 담아 두고 오늘 종일 다시한번 고민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에 대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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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harris

November 16, 2007
*.151.112.84

목사님이 올리신 설교내용을 프린트해서 꼼꼼히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됩니다.
8명 남짓 모여 예배드리는 작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읍니다만 저 자신 오래전 부터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고 떡만 같이 떼다간 돌아오곤합니다.
예배때마다 성령받아야 천국(하나님의 나라의 진정한 의미가 아닌?)가고 매일 새벽기도,삼일예배-금요예배 참석해야 복을 내리 받고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저희 목사님 설교 말씀에는 귀를 막고 싶은 심정입니다.
요즈음 영적예배,영적설교,참된 영성의 진정한 뜻이 뭔가를 생각해봅니다.
오래전 부터 "성령 받아라,방언 받고 기도해라,두 시간 넘게 기도해야 기도끈을 잡을 수 있다"라고 하시는 목사님 말씀에 '아,큰일 났구나,천국문이 닫히고 이를 갈며 슬피울면 어떡하나,빨리 방언 연습해서 성령받고 남이 천국갈때 따라 붙여야지'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이건 아닐 것이다-황소잡고 염소잡고 다 천국가면 형편이 안되서 암소 못잡고 열심히 살아가시는 분들은 어떡하나? 믿되 건강하게 믿고 내 생활도 더 충실히 하자.새벽기도도 찜찜한 마음에 하지말고 '라고 나름대로 다짐해봅니다만 힘이 드는게 사실입니다.워낙에 저희 교회가 작다보니 가계저주론 성격의 영성치유집회,지옥구경하신 어떤 분의 집회(한복입고 창,칼 같은 소도구 사용해서 증언) 이런 황당한 일에 휩쓸리곤합니다.한번 문제점을 말씀드렸더니 목회자 비방하면 저주 많이 받더라라는 내용의 설교를 주일예배시간에 설교하시더군요.기독교티비 틀면 같은 내용의 설교를 하시는 부흥목사님들이 수 없이 많으니 그 말씀이 많는 것 같기도하고 시험에 든 것 같기도하고 잘 모르겠습니다.
다비안에 올라온 많은 글들을 읽고 많은 위로도 되고 또한 힘도 얻게됩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말씀을 구절 위주로 읽지않고 오분전 오분 후의 방식으로 읽게되었다는 점입니다.전후 좌우의 맥락(지평이라고 써도 되는지요?)을 살피는 훈련이겠지요.그래서 송아지 대신에 변화된 모습,이웃사랑을 드려야 참된 예배라는 점 깊이 깨닫게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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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5 성령강림절 그리스도의 가난과 우리의 부요 [23] 2009-07-13 19625
334 성령강림절 “그는 누군가?” [18] 2009-07-06 14696
333 성령강림절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다 [24] 2009-06-29 15131
33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구원 섭리 [33] 2009-06-22 16186
331 성령강림절 생명의 날 [17] 2009-06-15 13549
330 성령강림절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 [7] 2009-06-08 16728
329 성령강림절 성령의 중보기도 [21] 2009-06-01 15357
328 부활절 그리스도인의 이중 실존 [8] 2009-05-25 15308
327 부활절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22] 2009-05-18 13856
326 부활절 ‘여호와 이레’의 믿음 [23] [39] 2009-05-11 25328
325 부활절 예수는 왜 선한 목자인가? [11] 2009-05-04 19417
324 부활절 죽임, 살림, 증인 [25] 2009-04-27 16267
323 부활절 복된 믿음 [29] 2009-04-20 13954
322 부활절 죽음을 무너뜨리리라! [7] 2009-04-13 13325
321 사순절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26] 2009-04-06 19443
320 사순절 그날이 오리라! [12] 2009-03-30 12862
319 사순절 구원의 신비와 선한 일 [11] 2009-03-23 13764
318 사순절 무엇이 구원의 표적인가? [13] 2009-03-16 14903
317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29] [4] 2009-03-09 14426
316 사순절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22] 2009-03-02 16864
315 주현절 창조의 빛, 인식의 빛 [15] 2009-02-23 19914
314 주현절 바울의 두려움 [12] 2009-02-16 11996
313 주현절 예수와 귀신 [44] 2009-02-09 14370
312 주현절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9] 2009-02-02 11995
311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9] 2009-01-25 10735
310 주현절 무화과 나무와 하늘 [9] 2009-01-19 11475
309 주현절 성령과 세례에 대한 질문 [6] 2009-01-13 13931
308 성탄절 크게 기뻐하라! [11] 2009-01-05 12527
307 기타 생명 상실의 두려움을 넘어서 [2] 2009-01-01 10879
306 성탄절 종이냐, 자녀냐 [26] 2008-12-29 12421
305 성탄절 하나님의 영광과 아기 예수 [8] 2008-12-25 16981
304 대림절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 [7] 2008-12-22 12053
303 대림절 광야의 ‘소리’를 넘어 [18] 2008-12-15 14512
302 대림절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8] 2008-12-08 14436
301 대림절 마지막 ‘때’ [11] 2008-12-01 13062
300 성령강림절 깨어 있으라! [10] 2008-11-23 16287
299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786
298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623
297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515
296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745
295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3614
294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634
293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655
292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0970
291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516
290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108
289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1974
288 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9] 2008-08-31 13179
287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798
286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81
285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550
284 성령강림절 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9] 2008-08-03 13259
28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 [8] 2008-07-27 13253
28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 [10] 2008-07-20 15292
281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와 예수 [23] 2008-07-13 15881
280 성령강림절 말씀은 성취된다 [10] 2008-07-06 17959
279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550
278 성령강림절 경계를 넘어서 [5] 2008-06-22 16338
277 성령강림절 이삭의 하나님, 이스마엘의 하나님? [8] 2008-06-15 25777
276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6906
275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456
274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284
273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하나님 [6] 2008-05-18 27841
272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0797
271 부활절 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8] 2008-05-04 25617
270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7798
269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411
268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359
267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288
266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715
265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2030
264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204
263 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 2008-03-23 15548
262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398
261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785
260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858
259 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13] 2008-02-24 16088
258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8800
257 사순절 악마의 유혹 앞에서 [14] 2008-02-10 15747
256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703
255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259
254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466
253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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