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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부활절 조회 수 25569 추천 수 39 2008.05.04 15:5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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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태복음 17: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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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5.4. (마 17:14-20)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 17:14-20절에는 간질병에 걸린 아들을 둔 사람이 나옵니다. 그의 아들은 간질이 발작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 들어갔습니다.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불문가지입니다. 그는 아들의 치료를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공교롭게도 그 시간에 예수님은 다른 곳에 출타 중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앞 대목이 보도하듯이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안 계시자 어쩔 수 없이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아이를 보였지만 제자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와 그들 앞에 나타나자 대뜸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간의 형편을 말씀드리면서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졌을까? 내가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살며 이 성화를 받아야 한단 말이냐? 그 아이를 나에게 데려 오너라.”(17절) 이 말씀 후에 예수님은 마귀에게 호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나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믿음이 없는 세대, 둘째는 예수님이 성화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 셋째는 아이를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별 큰 의미가 없습니다. 간질병을 고치려면 아이를 앞에 세워야 하니까,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둘째도 크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이런 병을 치료하는 건 제자들이 알아서 해야 할 텐데, 일일이 예수님이 나서야 하는 상황이 마뜩치 않다는 뜻이겠지요.
첫째 말씀이 조금 까다롭습니다. 책망의 뜻이 강합니다. 예수님은 그 세대를 믿음이 없으며 비뚤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누구를, 무엇을 책망하고 있으신가요? 제자들인가요, 아니면 간질병 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인가요, 아니면 거기 모였던 사람들인가요, 또는 그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인가요? 우리는 그런 것을 정확하게 분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이 간질병 아이를 고치지 못했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이 문제를 믿음의 차원에서 설명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연결해서 본다면, 결국 믿음이 없어서 간질병을 고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는 제자들의 물음에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하는 예수님의 답변을 보더라도 간질병 치료와 믿음 사이에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게 분명해집니다. 이 믿음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충해서 설명했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20b)

믿음의 능력?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다니엘의 믿음, 스데반의 믿음은 오늘 우리 모든 기독교인이 흠모하는 대상입니다. 성서에서만이 아니라 실제의 신앙생활에서 많은 신자들이 믿음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불치병에 걸렸던 사람이 믿음으로 감쪽같이 치료되었다는 간증을 심심히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의사가 4개월 시한부 진단을 내렸는데, 10년 이상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부도에 몰렸다가 믿음으로 재기에 성공했다는 말들도 흔하게 듣습니다. 심지어 <긍정의 힘>의 저자 오스틴 목사 같은 사람은 믿음으로 기도하니 꿈에 그리던 전원주택을 구입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편견 없이 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믿음으로 간단히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은 아무리 믿음으로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죽을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믿음으로 치료받는 사람의 숫자나 자연적으로 치료되는 사람의 숫자나 제가 보기에는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신자들이나 다른 종교인들이나, 또는 아무런 종교를 갖지 않는 사람이나 이 세상에서는 똑같은 크기로 시련을 당하기도 하고, 행운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는 방식은 편애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신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 5:45)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자연법칙에 변함없다는 내용을 다루는 C.S. 루이스의 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야구방망이로 사람을 치려고 할 때 하나님이 그것을 갑자기 꽃으로 바꿔버리면 세상은 큰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비록 선한 사람이 그 방망이에 맞아서 죽는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창조질서를 훼손시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고 당할 일이 생기면 사고를 당하고, 죽을 일이 생기면 죽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이 세상살이에서는 아무런 특권이 없습니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믿음 만능론에 빠져 있습니다. 믿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가르치고, 그렇게 따르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현실 앞에서 “믿습니다!”를 외치고 있습니다. 아주 공허한 외침입니다. 그게 지나치면 광신으로, 더 나아가서는 광기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약간 온건한 경우에는 세상의 일을 아전인수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여우와 포도”라는 이솝우화와 비슷합니다. 포도를 먹고 싶은 여유는 키가 작아서 포도를 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포도는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이런 자기 합리화는 믿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어리석음입니다.
믿음을 그렇게 강조했던 바울이 이 믿음을 어떻게 말했는지 보십시다. “내가 ...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고전 13:2) 여기서 그가 말하는 사랑은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거나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드는 것이 아닙니다.(고전 13:3) 그 사랑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여기서 믿음을 절대적인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믿음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능력에 속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키워나가야 할 ‘카리스마’, 즉 은사입니다. 어떤 사람이 피아노 연주를 잘하는 것처럼 믿음도 역시 각자에게 소중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피아노 연주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가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그 모든 것은 의미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강렬하다 하더라도 그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설명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믿음 생활 잘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고전 13장에서 확인했듯이, 바울이 믿음과 하나님을 구별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믿음은 우리의 인식이며, 우리의 노력이며, 우리의 업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에 묶이지 않습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어떤 피아니스트의 연주기술 너머에 존재하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조차 넘어서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믿음에 관해서 주신 주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은 분명히 믿음이 없는 그 시대와 믿음이 약한 제자들을 질책하셨습니다. 간질병을 고치지 못한 근본 원인이 믿음의 부족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 말씀을 정확하게 읽어보십시오.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졌을까?”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가 무엇을 믿지 않으려 한 것일까요? 아이의 간질병이 치료되리라는 것을 믿지 못한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간질병 아이의 아버지나 제자들이 그것을 믿지 못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믿지 않았다면 예수님에게 오지도 않았겠지요. 더구나 그건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우리가 그걸 믿을 수는 있지만 믿는다고 해서 간질병이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생로병사 같은 문제들은 믿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믿음은 간질병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약하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신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과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까이 임했으니 회개하라고 선포한 바로 그 하나님의 나라, 그의 통치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간질병의 증상에만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믿지 못하면, 즉 그 나라가 온다는 사실을 불안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간질병을 일으키는 마귀를 쫓아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겉으로 드러난 간질병에만 관심을 둡니다. 간질병이 치료되는가, 아닌가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간질병을 직접 고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방식으로 기독교의 우월성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간질병 자체는 핵심이 아닙니다. 그런 간질병을 제어하는 예수님의 능력이 핵심이었습니다. 그 능력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그 통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의 그 능력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려면 간질병이 언급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간질병이 실제로 하나님 나라와 대립하는 마귀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간질병 든 아이
간질병을 마귀의 소행이라고 생각한 고대인의 생각을 무조건 무시하면 곤란합니다. 그들의 세계관이나 의학지식이 비록 오늘 우리에게 비해서 턱없이 미숙하긴 했지만 근원에 대한 인식은 우리보다 못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개인과 역사에 임하는 악의 현상을 존재론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한 인간이 당하는 불치병이나 대재앙에는 훨씬 근원적인 힘이 작용한다고 말입니다. 의로운 자의 고난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욥기서에는 사탄이 등장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욥을 심하게 괴롭힙니다. 한 순간에 정신을 읽고 입에 거품을 물며 자기 몸을 헤치는 간질병 환자를 보았을 때 고대인들이 마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사람은 이 마귀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마귀나 사탄의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그를 제어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의 나라, 그 하나님의 통치만이 개인과 역사를 파괴하는 마귀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구약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적인 세계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는 간질병은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마성적 힘의 표본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제어하기 어려운 그런 마성들은 오늘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우리나라에서 매년 5월은 청소년의 달, 또는 가정의 달로 지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른 아침부터 밤 12시가 넘을 때까지 수능 공부에 열을 올리고 요즘 청소년들을 보면서 간질병에 걸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삶의 경이로움과 신비, 그리고 사랑과 평화를 마음과 몸으로 배워서 생명을 풍요롭게 경험해야 할 그 나이에 닭이나 소처럼 사육당하고 있으니, 무슨 말을 더 보탤 필요가 있겠습니까? 교육마저 기업처럼 경쟁력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이런 현상이 훨씬 강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피폐해진 공교육은 이제 형식만 남고 사교육이 완전히 점령할 태세라고 합니다. 전인교육은 완전히 포기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아이들은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자기 생명을 훼손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간질병 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국사회는 지금 믿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믿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임박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생명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짧은 소견과 방식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정의와 평화와 인간적 연대성을 가르치는 게 생명 경험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능점수가 조금 낮아도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행복하게, 더 나아가서 남을 위해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포함해서 오늘 이 시대는 오직 경제 성장만이 생명을 담보해줄 것처럼 확신하고 있습니다. 적자생존의 원칙이 우리의 모든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결과가 어떨는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사실 사회를 향해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처지도 못됩니다. 교회도 세상 못지않게 이런 경제 논리에만 푹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성장 지상주의가 바로 한국교회를 견인해가는 절대이념이 되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바로 믿음의 척도처럼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입니다.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야만 믿음이 좋은 교회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 사회의 경제지상주의와 한국 교회의 성장지상주의는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양쪽 모두 꿩 잡는 게 매라는 논리를 신앙고백으로 삼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을 다시 돌아보십시오. 이 세대가 왜 믿으려고 하지 않는가, 하고 한탄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약한 탓이라고 질책하셨습니다. 그 세대와 제자들이 모두 믿음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마음을 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만 생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실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신념에 묶여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간질병은 치료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에서 벌어지는 반생명적 현상들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오늘 참된 믿음이 요청됩니다. 이건 바로 여러분과 세상을 살리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통치에서만 우리의 생명이 보존되고 완성된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런 믿음에서만 여러분은 간질병을 대항해서 투쟁할 수 있으며, 그런 투쟁의 역사에서 하나님은 간질병의 원인자인 마귀를 내어 쫓으실 것입니다. 18절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마귀에게 호령하시자 마귀는 나가고 아이는 곧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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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slowneasy

May 04, 2008
*.127.177.137

학회로 주일을 지키지 못하고 늦은 시간... 다비아에서 목사님 말씀으로 보충수업하며 힘을 얻습니다.
간질병 환자로 사육당하는 저희 아이들 생각에...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는 저의 믿음 없음에... 화가 나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좋은 가르침 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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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May 06, 2008
*.99.193.27

하나님의 말씀이 깨어있어 운동력이 있음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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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LordHeReigns

May 09, 2008
*.153.206.153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불치병의 치유든 거대한 산의 소멸이든 골리앗의 패배이든 믿고 구하면 구하는대로 이루어 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정욕에 의한 구함이나, 남을 해하기 위한 구함이 아니라면요. 좀 더 '논리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자연 법칙에 거스른다' 는 말 자체에 어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 법칙 자체가 인간의 과학 지식에 기반하여 규정되어 지는 것이니까요. 고대인들에게 암이라던가 전염병은 자연법칙이 아니었습니다(그들이 꿈틀거리는 그 쪼매난 생명체들의 존재를 직감하기 전까지는...) 그것들은 하늘의 저주였지요. 물론 요즘도 그것은 사탄의 저주로 생각되기는 합니다만, 대상에 대한 이해의 깊이 자체가 판이하게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과거에는 순전히 저주에 불과했고, 지금은 사탄이 병균과 바이러스를 이용해서 우리에게 저주를 내리는 것이 되었으니까요. 즉 이제 전염병은 저주이기전에 자연법칙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즉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생로병사 같은 문제들은 믿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는 말씀은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는 백번 이해하겠으나 틀린 말씀으로 생각됩니다(물론 이러한 관점이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정당화 시키는데에 사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본질이 자연 법칙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만이 시간이 흘렀을 떄 자연법칙으로 판정되는 것이지 애초부터 거짓인 것이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자연법칙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믿음으로 여전히 산도 옮길 수 있지 않을 까요? ^^;; 올바르게 구한다면, 믿음은 곧 만능한 것이 아닐런지요? 물론 목사님의 말씀의 무게중심이 여기에 실려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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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nostal

May 11, 2008
*.127.228.207

설교내용을 음미해보면 믿음의대상과 본질은 오직 하나님나라 통치에대한 믿음과 하나님 세계를 향한 믿음을 강조 하고자 하는것이고 이런 믿음이 없다고 예수님이 질타 하셧고 이러한 믿음이라도 세상 자연법칙을 초자연적으로 바꾸는것 즉 병고치는것 사업부도 안나게 하는것 성공 부자되는것 등등과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있을수 없다는것을 말씀하셨는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환자 고치실때 네믿음이 네병을 고쳤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네 믿음이란 어떤믿음을 말하는지요 ?그때 환자의 상황에서보면 하나님 나라 통치에대한 믿음은 가지고 있지는아닌것 같고 단순히 자기병고칠수 있다는 믿음 밖에는 없는것 같은데 어떻게 병을 고쳤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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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2]자유의꿈

May 11, 2008
*.126.179.235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이 수없이 많았음을 생각해볼때
성경에 나온 기적의 진술은 오히려 소수의 사람만이 병고침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요?

막 5장에서 예수님을 에워싸고 미는 군중들도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하고자 했을 것이지만
병고침을 받은 것은 혈루증을 앓던 여인뿐이었고 예수님은 네 믿음이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문제를 예수님의 능력으로 해결받고자 모여 있는 군중 앞에서 혈우증을 앓던 여인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신것은 기적이 아닌 믿음을, 자기 욕망이 아닌 올바른 믿음을
강조하시려고 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올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소수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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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11, 2008
*.181.51.93

노스탈 님,
안녕하세요?
다비아 서울 오프에서는 자주 뵈었는데,
이런 온에서는 오랜 만인 것 같습니다.
오늘도 주일을 잘 지내셨지요?
주신 질문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군요.
특히 한국교회라는 배경을 놓고 본다면 거의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로 우리 자신의 믿음과
그것으로 인해서 벌어진 어떤 사건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요.
오늘 이 문제를 자세하게 다루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군요.
다른 건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일단 성서읽기에서,
특히 복음서 읽기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이 무엇이냐, 하는 건 짚어야겠습니다.
이런 관점이 각각의 모든 텍스트 읽기와 해석에 연관되는 거니까요.
아마 제가 다른 글에서 짚은 내용일 겁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을 때 복음서 기자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것을 기록한 복음서 기자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서는 예수의 언행과 사건과 가르침을
완전히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기록한 게 아니랍니다.
복음서 기자의 영적 눈높이에서 해석된 진술이랍니다.
또는 초기 기독교에 의해서 해석된 진술이지요.
여기에는 아무 복잡한 전승의 역사가 담겨 있어요.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그 본문으로 결정되기 까지
정말 많은 역사가 개입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신학적으로 전문적인 거니까 줄이고
믿음과 치유에 관한 문제를 직접 말씀드리겠어요.
성서기자는 치유받은 사람의 믿음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닙니다.
치유의 능력을 보인 예수님이 관심의 대상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말씀에서
'네 믿음'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이 중요한 거에요.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변증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믿음을 거론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 당시에는 치유, 축귀 등이 신적인 능력의 징표로 받아들여졌거든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시죠?
어떤 사람이 믿음을 병을 고쳤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아니라
그렇게 고친 예수님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게 그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예를 들자면
요셉의 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기아로부터 건져내신
그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요셉의 꿈에 방점을 찍는 건
기본적으로 성서의 중심으로부터 이탈하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의 믿음을 강조하는데,
그것도 성서가 가르치는 기본으로부터의 이탈입니다.
제가 지금 믿음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과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이 험악하고 잠정적이고 허무한 세상에서
궁극적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소용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의 믿음에 제한받지 않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아버지를 향한 어린아이의 믿음에
아버지의 사랑이 제한받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더구나 여기서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게 중요하겠지요.
노스탈 님이 구체적으로 말했듯이
하나님의 통치보다는 자기의 병이 나으리라는 믿음을 가진 환자를
예수님이 고친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그의 믿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믿음을 인정한, 그리고 병을 고친 예수님이 중요합니다.
이 둘은 분명히 다른 겁니다.
복음서 기자들의 관심은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의 믿음이 아니라
그들을 대한 예수님 자체였습니다.
앞에서 한 이야기를 제가 반복한 것 같군요.
마지막으로,
한국교회 현실에서 볼 때
신자들의 믿음이 과도하게 강조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믿음도 사실은 자기연민과 종교적 욕망에 가깝기도 하구요.
그 믿음 마저 율법적으로 작동되고 있지요.
자기의 믿음 마저 내려놓고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통치하시는지,
예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무엇인지에
우리의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이런 설명이 노스탈 님의 질문에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군요.
좋은 주일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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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LordHeReigns

May 11, 2008
*.153.206.153

설마 '생 병'과 '사업'과 '전원주택'을 두고 기도드리는 자들이 '자신의 믿음' 을 '믿고' 기도드리는 것이겠습니까...
당연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심을 믿고 기도드리는 것이겠지요... 물론 개중에는 말씀하신 것처럼 탐욕에 휩싸여 성경도 제대로 안 읽어보고 '믿음'을 도구인양, '기도'를 주술인양 여기는 자들도 분명 있겠습니다만은...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믿고 세상의 시각으로는 불가능한 것들에 대해 절박한 마음으로 간구하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는 잘못 읽히면 큰 모욕이 될 수도 있는 글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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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12, 2008
*.150.14.168

LordHeReigns 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군요.
90년 생이면 내 막내딸과 동갑이네요.
고3지요?
대학입시로 정신 없을 텐데,
다비아에 들어와서 이런 설교까지 읽다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혹시,
아들 이름으로 가입하신 부모님이신가요?
어쨌든지 주신 충고를 고맙게 생각합니다.
순수한 신앙 자체를 매도하는 건 아니랍니다.
그런데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신천지를 비롯한 많은 사이비 이단들의 신앙행태도
모두 아름다운 거랍니다.
사실 그런 쪽에 있는 분들이
기존의 기성교회 신자들보다 순수성으로만 보자면 더 우월하지요.
그리고요,
글을 조금 쉽게, 명백하게 써주세요.
예를 들어 첫번 대글의 마지막 대목에 이런 표현이 있네요.
<본질이 자연 법칙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만이 시간이 흘렀을 떄 자연법칙으로 판정되는 것이지 애초부터 거짓인 것이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자연법칙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너무 어렵네요.
이해는 할 수 있는데,
그리고 틀린 말은 아닌데,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군요.
다시 궁금해지는군요.
대글을 다신 분이
위의 회원정보에 올린 바로 유인수 학생 맞아요?
어쨌든지 재미 있네요.
약간만 쉽게 대글을 달아주세요.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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