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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전승에 관해서

성령강림절 조회 수 10076 추천 수 25 2008.09.14 14:2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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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애굽기 1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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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전승에 관해서
2008.9.14. (출 16:1-15)

만나 이야기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뛰쳐나온 때가 기원전 1290년경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광야를 횡단해야만 했습니다. 그 광야는 신, 수르, 미디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전체적으로 시나이 반도라고도 합니다. 광야를 횡단하는 일이 간단하게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에게는 지금처럼 교통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기껏해야 낙타나 수레가 조금 있었을 텐데, 그런 것으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두 실어 나를 수는 없습니다. 민 11:21절에 따르면 그들이 최소한 60만 명 이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젊은 남자들이었다면 씩씩하게 걸어갈 수 있었겠지만, 그들 중에는 노약자들, 장애인, 불치환자도 많았습니다. 광야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여러 부족들도 이스라엘에게는 위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탓인지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이나 배회했습니다. 성서의 보도에 따르면 여호수아와 갈렙만 제외하고 20살 이상 되는 사람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광야에서의 삶이 그렇게 어려웠다는 뜻이겠지요.
가장 큰 어려움은 뭐니 뭐니 해도 마실 물과 양식입니다. 광야는 생활조건이 사막과 비슷합니다. 거기에는 오아시스를 제외하면 물이 없습니다. 물이 없기 때문에 광야가 된 것이기도 하구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오면서 어느 정도의 식수를 준비하기는 했겠지만, 그리고 어쩌다 내리는 빗물을 받아놓기는 했겠지만, 그런 방식으로 수십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살아서 건널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전에 살던 이집트는 물이 많았습니다. 나일강은 바로 이집트 문명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으로서 어쩔 수 없는 서러움을 받기는 했지만 물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광야생활을 시작하니 당장 식수가 문제였습니다. 출 15:22절 이하의 말씀에 따르면 홍해를 건넌 그들이 사흘 동안 물을 구하지 못하다가 겨우 도착한 오아시스 마라에는 물이 모두 썩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불평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모세가 야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나무 한 그루를 물에 던지자 물이 마실 수 있게 변했다고 합니다. 그 나무가 아마 해독작용을 했던 것 같습니다.
식수 문제를 그렇게 해결하고 다시 길을 떠난 이스라엘은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는 이집트를 떠난 지 한 달째 되던 보름이라고 하는데, 먹을거리가 다 떨어져갔습니다. 바로 앞에서 마시는 물 문제로 한 바탕 난리를 쳤는데, 이제 다시 먹을거리 때문에 또 난리가 벌어집니다. 그게 바로 오늘 구약본문인 출 16:1절 이하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불만을 쏟아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야훼의 손에 맞아 죽느니만도 못하다. 너희는 거기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출 16:3)
이들의 불평이 나오자 야훼께서 매일 먹을거리를 주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먹을거리가 그 유명한 ‘만나’입니다. 그 내용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야훼 하나님이 먹을거리를 해결해주겠다고 말씀하신 뒤 어느 날 저녁에 메추라기가 날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진을 친 곳을 덮었다고 합니다. 메추라기는 철새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새들을 잡아먹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안개가 자욱했고, 안개가 걷히자 광야 지면에 마치 “흰 서리가 땅을 덮듯이, 가는 싸라기 같은 것”이 덮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무엇인지 몰라서 서로 “이게 무엇이냐?”하고 물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것은 야훼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시는 양식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곧 만나입니다. 만나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이게 무엇이냐?” 하는 발음에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캥거루라는 영어 이름도 그 짐승 이름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받은 호주 원주민이 “난 널 모른다.”는 뜻의 발음에서 온 것처럼, 만나도 그와 같습니다.  
만나는 지금도 시나이반도에서는 흔하게 발견됩니다. 거기에 살고 있는 유목민들은 ‘만’이라고 발음한다고 합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연지벌레의 침을 통해서 나오는 분비물이 나뭇잎에 맺혔다가 땅에 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기온이 내려가는 밤에 딱딱하게 굳어져서 사람들이 손으로 모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그것이 대기의 온도가 조금 오르면 녹기 때문에 이른 아침에 모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만나는 어느 정도 단맛이 있어서 요즘에도 먹을거리가 부족한 광야의 유목민들에게는 인스턴트 먹을거리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만나가 그렇게 흔한 먹을거리였다고 한다면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초자연적으로 준비한 것이라는 성서의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는 말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몇 년 전에 저는 이 본문으로 설교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간단히 그 요점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거리가 떨어져서 모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모세는 야훼 하나님에게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만나를 기억나게 했습니다. 모세가 누굽니까? 그는 지금 이스라엘이 횡단하고 있는 광야에서 40년이나 목동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어디에 만나가 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그쪽으로 끌고 갔겠지요. 또는 광야 어느 곳에서나 지천으로 널려 있던 만나를 보통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이런 위기상황에서 먹을거리로 사용할 수 있도록 야훼 하나님이 모세의 영적 시각을 열어주셨겠지요. 어떤 방식이든지 생존의 위협을 받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먹을거리를 제공해주셨다는 사실이, 만나를 먹을거리로 삼은 영적 통찰이 중요합니다.

불평하는 이스라엘
저는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이 본문으로 만나 주제에 관한 설교를 이미 한 적이 있어서 다른 본문으로 설교를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더라도 본문을 다시 한 번 더 읽어는 봐야지 하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때 잘 눈에 들어오지 않던 대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대목은 바로 이스라엘의 광야 역사만이 아니라 그 뒤로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신앙과 더 나아가서 기독교 신앙에서도 역시 중요한 영적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만나 사건이 이스라엘의 ‘불평’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좋은 믿음이 있을 때 주어지는 것인데, 만나는 왜 그것과 정반대되는 불평이 쏟아질 때 주어진 것인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나 전승을 보도하는 오늘 본문(출 16:1-15절)은 이스라엘이 불평했다는 사실을 한 번도 아니고 다섯 번에 걸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2, 7, 8, 9, 그리고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서기자는 전체적으로 이 불평을 결코 좋게 평가하지 않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는 어조로 이 문제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8절에 따르면 모세를 향한 불평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한다는 것은 가장 불신앙적인 행동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그들의 불평을 들으신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주셨다고 합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12절을 읽겠습니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그들에게, ‘해거름에 고기를 먹고 아침에 떡을 실컷 먹고 나서야 너희는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 하고 일어주어라.”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은 왜 이들의 불평을 그대로 용납하시고, 더 나아가서 그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근본 문제를 해결해주신 걸까요?
일단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을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의 조건들이 나빠지면 불평하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뛰쳐나온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집트에서의 삶이라는 게 그렇게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생존의 위협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광야생활을 시작한지 한 달 만에 먹을 게 다 떨어졌습니다. 자식과 노부모들이 굶어야 할 지경입니다. 그런데다가 가나안에 도착하리라는 약속은 별로 이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을 핑계로 자신들을 생존의 막다른 골목으로 끌어낸 사람이 누구냐, 책임을 져랴, 하는 식으로 인민재판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사실 오늘 우리에 비해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은 양반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들처럼 생존의 위기에 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불평을 쏟아냅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현재의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했다는 것은 바로 먹고 살기 힘드니까 경제를 살리라는 대한민국 민중들의 불평이 그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 신앙도 모두 잘 사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얼만 전에 기독교 티브이로 오스틴 목사의 설교를 잠시 시청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감사하라는 설교였습니다. 감사한 삶을 강조하는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문제는 감사한 삶의 결과가 곧 출세와 직결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남보다 지위도 빠르게 올라가고, 집도 빨리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장 아무개 목사와 신 아무개 목사의 설교 동영상이 종교편향 문제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모두 가난하고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는 잘 산다는, 아주 비정상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이런 모든 발언들은 삶에 대한 불평에서 나온 것입니다. 정말 생존이 위태로운 사람들의 불평이라면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끝없는 물질적인 욕망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정신적인 질병 현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은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불평을 들으시고 만나를 내려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불평이 하나님의 응답을 불러내는 통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만나는 야훼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12b) 그 앞대목인 만나를 거둬들이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장면에서도 아침에 내리는 만나가 곧 야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사실이 지적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만나 전승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야훼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를 바꿔 말하면, 먹을거리가 없어서 죽겠다, 왜 우리를 끌어냈느냐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평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며, 야훼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만나 전승은 민수기에도 보도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전승은 출애굽기 전승과 약간 다릅니다. 민수기의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만나를 먹고 있었습니다. 매일 똑같은 만나만 먹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에 질려버렸습니다. 이집트에서 먹던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 싶어 했습니다. “아, 고기 좀 먹어 봤으면” 하면서 엄살을 부렸다고 합니다. 모세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하나님께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러자 야훼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야훼께서 바람을 일으키어 메추라기를 몰아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에 잔뜩 쌓이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이틀 동안 메추라기를 거뒀습니다. 메추라기가 얼마나 많았든지 적게 거둔 사람이 열 섬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의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그들이 고기를 한창 뜯고 있을 때 야훼의 진노가 내려서 그들을 치셨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민 11:31-34)

야훼는 하나님이다
민수기는 먹을거리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데 반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본문은 간접적으로 비판합니다. 민수기는 하나님의 진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었다고 하고, 오늘 본문은 만나 사건은 곧 야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조금 다르게 전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경험한 만나 사건은 야훼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신앙을 경고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식수와 먹을거리의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이집트로 돌아가야 한다거나 이집트를 뛰쳐나온 것이 잘못이라는 주장이 그 증거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하는 생존의 위기가 별 거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실업자가 되거나 사업이 망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 전에 자살한 연예인 안재환은 사업실패와 사채독촉에 시달렸던 같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사업실패가 인간에게 가장 강렬한 삶의 의욕마저 파괴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이 인간을 파괴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불평을 쏟아냈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불신앙입니다. 야훼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잘못입니다.
야훼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 약속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그곳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문제는 가나안은 미래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현재는 삶이 피곤할 수밖에 없는 광야입니다. 가나안 땅을 향한 약속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광야에서의 고난으로 인해서, 물론 힘이 들기는 하겠지만 불평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도 역시 광야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나안 땅을 향한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미래입니다. 지금 우리 손에 구체적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런 생명이 아예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힐 때도 있습니다. 광야의 목마름과 굶주림이 현재 우리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을 잘 떠서 주변을 살펴보십시오. 영적인 만나가 보일 겁니다. 영원한 생명의 씨앗들이 지천에 널려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부분적으로라도 드러났습니다. 생명의 현실들이 거울로 보는 것일지라도 드러났습니다. 그것을 경험하는 기쁨이 여러분에게 있지요? 그래서 불평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한 생각들이 여러분을 끌어가고 있겠지요? 그럴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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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유목민

September 15, 2008
*.247.68.147

가시적인 만나를 원하는 시대에 영적인 만나는 소화하기 어려운 내공의 말씀입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처럼
목마름과 굶주림의 광야에서 영적인 만나를 경험하는 기쁨이 가득하길 원합니다.
한가위 보름달은 보셨는지요.
전주는 비가 내려 무월광이었습니다.
늘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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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2]머리를 비우고

September 15, 2008
*.146.226.235

목사님.... 원고로만 보면 목사님께서 부흥회 하시는 거 같습니다.
나쁜 의미는 아니고요...
마지막 단락에 목사님의 제시하는 부분을 좀 빨리 읽어 보니 그렇다는 겁니다.
영적인 호소라고 할 까요? 평소와는 다른... 가슴 뛰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목사님도 감성적(?) 설교를 하실 때가 있는거 같습니다. 약간의 충격이...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라는 말이 ...
내 삶이 그런거 같아 참... 부끄럽습니다...
마치... 중국집 가서 짜파게티 먹었단 소리 같이 처량하기도 하고...

불평의 때에 주어진... 만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먹을 때마다 부끄러웠을까요?

인간의 수고가 돋보이는 배부른 이집트 보다
하늘만 보고 살며 배고픈 가나안이 더 풍성한 곳이라는
신명기 11장의 모세의 모순된 호소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어떻게 받아들여 졌을까요?
저에게도 이건 참 따르기도 어렵고 이해도 안되는 슬픈 현실일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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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5, 2008
*.181.51.93

임영웅 목사님,
오늘 뿌연 하늘에 뜬 달을 보았습니다.
달의 지금은 지구의 4분의 1이라고 하네요.
달에서 지구를 보면 4배로 크게 보이겠지요.
50억광년 떨어진 어느 별에 붙은 행성에
지적인 생명체가 지구와 달을 보고 있지는 않을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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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5, 2008
*.181.51.93

머리를 님,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부끄러움을 느꼈을지 모른다는
머리를 님의 멘트가 사태의 정곡을 찌르고 있군요.
지천에 널려 있는 것을 못 보고,
삶의 매너리즘에 빠진 채 자극적인 요구하는 그들,
그리고 우리들,
그렇게 인류 역사가 흘러갑니다.
"... 모순된 호소가 이스라엘 백성에겐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하고
궁금하게 생각이 드나요?
그렇다면 이제 머리를 님은
성서텍스트 내면으로 들어갈 준비가 된 겁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고유한 어떤 세계를 만나겠지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성령만이 가르쳐주는 그 세계를요.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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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September 16, 2008
*.234.121.208

집사람이 추석 전날에 애기 출산하는 바람에, 주일 날에는 교회를 못가고 목사님 설교를 읽고는 가슴 뜨끈 뜨끈 했습니다... 지난 번 설교하신 것과도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위의 댓글에서도 이야기 하듯이 이 번엔 더욱 더 실제적으로 다가옵니다...

광야와 만나... 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처럼... 광야같이 팍팍한 "인생" 속에서 만나라고 하는 "의미"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 의미란 것이 다른 무언가가 아닌, "궁극적인 생명" 에 잇닿아 있는 것이어야만 우리의 유한한 삶마저도 영원으로 이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연예인의 안타까운 죽음에서도 보여지듯이 그 의미란 것이 진정한 궁극에 잇닿아있는 것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한 사람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갈 수도 있는 "절망" 으로 돌변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복실 안에 들어와서 집사람에게 목사님 설교를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굉장히 공감을 많이 하면서, "나에겐 오빠가 내 인생의 만나" 라고 하는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답니다... 너무 너무 기분 좋았습니다... 반바지 입고, 슬리퍼 신고, 머리는 안 감아서 횡가르마의 2박 3일의 구류생활 같은 간병생활이었지만, 정말 천국같은 며칠간이었습니다...

목사님 좋은 말씀 너무 너무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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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희망봉

September 16, 2008
*.82.136.189

출산을 축하드립니다.^^.
산모도 건강하신걸루 보이구요.
아기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귀한 삶으로 축복하시길...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16, 2008
*.181.51.93

와 하하하....
"오빠는 내 인생의 만나에요!"
첫날처럼 님,
출산 축하해요.
아들, 딸?
내가 전해 들은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네요.
예쁜이 사진을 올려주세요.
주의 은총이.
profile

[레벨:38]클라라

September 17, 2008
*.216.132.238

첫날처럼 님,
출산 축하드립니다.
후훗.. 부인이 참 멋진 분이군요^^
함빡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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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September 17, 2008
*.234.121.208

닭살 행각 죄송합니다. -ㅡ ㅡ;; 암튼 다들 축하해주셔서 감사하구요... 머스마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아빠를 닮지 말라고 했건만, 씨도둑은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예쁩니다... ㅋㅋㅋ... 이 번엔 다행히도 3시간만에 초고속 순산했습니다... 지난 번 하윤이는 밤 12시부터 그 담날 오후 4시까지 16시간동안 고생했었거든요...

"오빠는 내 인생의 만나"라는 말... 사실은 협박(?)을 통해서 진술 받아낸 겁니다... 흑흑흑... 옆에서 간병 안하고 혹시라도 도망가면 답답하거든요...

저는 "만나" 라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보잘 것 없는 아주 소박한 것이라는 것에서 더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의미" 는 뭔가 대단한 것, 웅장한 것이 아닌 아주 일상적이고 소박한 곳에서 발견되니까요...

암튼 다들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 아기 사진은 사진빨 좀 받을 때 올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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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사순절 무엇이 구원의 표적인가? [13] 2009-03-16 14862
317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29] [4] 2009-03-09 14371
316 사순절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22] 2009-03-02 16829
315 주현절 창조의 빛, 인식의 빛 [15] 2009-02-23 19853
314 주현절 바울의 두려움 [12] 2009-02-16 11957
313 주현절 예수와 귀신 [44] 2009-02-09 14316
312 주현절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9] 2009-02-02 11950
311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9] 2009-01-25 10706
310 주현절 무화과 나무와 하늘 [9] 2009-01-19 11421
309 주현절 성령과 세례에 대한 질문 [6] 2009-01-13 13883
308 성탄절 크게 기뻐하라! [11] 2009-01-05 12409
307 기타 생명 상실의 두려움을 넘어서 [2] 2009-01-01 10725
306 성탄절 종이냐, 자녀냐 [26] 2008-12-29 12268
305 성탄절 하나님의 영광과 아기 예수 [8] 2008-12-25 16800
304 대림절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 [7] 2008-12-22 11657
303 대림절 광야의 ‘소리’를 넘어 [18] 2008-12-15 14112
302 대림절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8] 2008-12-08 14043
301 대림절 마지막 ‘때’ [11] 2008-12-01 12699
300 성령강림절 깨어 있으라! [10] 2008-11-23 16258
299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743
298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572
297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473
296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709
295 성령강림절 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28] 2008-10-19 23489
294 성령강림절 재림의 주, 구원의 주 [9] 2008-10-12 9602
293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606
292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0942
291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485
»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076
289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1929
288 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9] 2008-08-31 13131
287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756
286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46
285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509
284 성령강림절 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9] 2008-08-03 13233
283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 [8] 2008-07-27 13209
28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 [10] 2008-07-20 15248
281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와 예수 [23] 2008-07-13 15827
280 성령강림절 말씀은 성취된다 [10] 2008-07-06 17890
279 성령강림절 율법을 넘어서 [2] 2008-06-29 18502
278 성령강림절 경계를 넘어서 [5] 2008-06-22 16293
277 성령강림절 이삭의 하나님, 이스마엘의 하나님? [8] 2008-06-15 25713
276 성령강림절 하나님과의 평화가 답이다 [6] 2008-06-08 16868
275 성령강림절 의인과 죄인에 대한 질문 [3] 2008-06-01 20411
274 성령강림절 대재앙 앞에서 [8] 2008-05-25 18233
273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의 하나님 [6] 2008-05-18 27791
272 성령강림절 영적인 사람 [11] 2008-05-11 20749
271 부활절 간질병과 믿음 (마 17:14-20) [8] 2008-05-04 25568
270 기타 메시야니즘의 기초 [1] 2008-05-01 17644
269 기타 참된 안식 [1] 2008-05-01 17253
268 부활절 사랑과 계명 [7] 2008-04-27 16322
267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249
266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678
265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1994
264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145
263 부활절 부활의 오늘과 내일 [15] 2008-03-23 15464
262 사순절 하나님을 찬양하라! [34] 2008-03-16 16356
261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754
260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798
259 사순절 하나님과의 다툼 [13] 2008-02-24 16044
258 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11] 2008-02-17 18757
257 사순절 악마의 유혹 앞에서 [14] 2008-02-10 15715
256 주현절 예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7] 2008-02-03 17643
255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212
254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435
253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285
252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4859
251 성탄절 예수는 예언의 성취! [5] 2007-12-30 15246
250 성탄절 성탄에 참여하는 길 [18] 2007-12-25 19262
249 대림절 임마누엘 예수 [17] 2007-12-23 20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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