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

기도와 말씀 선포

기타 조회 수 15158 추천 수 36 2004.06.30 22:41:57
성경본문 : 사도행전 6:1-7 


기도와 말씀 선포
 행6:1-7

1. 오늘의 말씀은 기독교가 시작될 아주 초기의 상황입니다. 예수를 믿는 무리들이 많아졌습니다. 식구가 몇 명 없을 때는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대충 넘어갈 수 있지만 많아지면 불평과 불만이 늘게 마련입니다. 이런 인간들의 모습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본토 출신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한 이유는 자기들의 과부들이 매일 구제를 받지 못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기독교회는 유대교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고아나 나그네, 혹은 과부들을 돕는 일을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수파인 헬라 유대인 과부들이 대접을 별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일들이야 흔히 일어납니다. 사람이 일을 하다보면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할 때가 있기도 하고, 편파적으로 일을 처리할 때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 헬라파와 히브리파가 있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여기 모이신 여러분은 대개 알고 있겠습니다만, 혹시나 해서 잠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아주 고대부터 주변의 여러 나라들에 흩어져서 살았습니다. 이집트나 로마의 여러 지역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여러 형편 때문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자 고향이 그리운 사람들이 있겠고, 남편이 죽거나 해서 생존이 위태로워진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이스라엘의 절기에 맞추어 성지 순례차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제 교회의 식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비록 이스라엘 사람들이지만 히브리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지금도 미국에서 사는 교포 2,3세들 중에서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이들과 비슷합니다. 거의 평생, 혹은 태생적으로 외국에 살던 이들이었기 때문에 비록 조국에 돌아왔지만 여러 면에서 불편했습니다. 이제 교회에서 과부들을 위해서 매일 먹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고의였든지, 실수였든지 이 헬라파 과부들이 그런 일에서 빠지게 되자 이 문제를 거론하게 된 것입니다.

2. 열두 사도들은 교회 안에서 뜻하지 않게 벌어진 이 사건을 놓고 해결책을 찾아 나섭니다. 아마 베드로나 야고보 같은 이들이 주동이 되어서 자초지종을 알아보고 여러 번 토의를 벌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모든 제자들을 불러서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2절). 예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일을 전하는 것을 밀쳐놓고 식탁에서 봉사하는 게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직접 만나고 함께 생활했으며,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었던 이들 사도들은 그저 믿음만 강조하면서 주먹구구식으로 교회를 이끌어간 게 아니라 매우 합리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식탁에서 봉사하는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시간을 빼앗겨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사도들은 일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게 지혜입니다. 무조건 열심을 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의 순서를, 그 질서를 가려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의 교회에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있는데, 어떤 것에 우선권을 두어야 하는지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지혜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본질적인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의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혜가 없는 사람들은 늘 허둥지둥 합니다. 무엇을 먼저 해야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할지 구분하지 못하고 그저 일에 파묻혀 있거나, 그러다가 결국에는 아무 일도 바르게 처리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이런 원리가 작용됩니다. 가정 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도, 부모와 자녀 사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우리 가정의 가장 우선 순위에 자리 매김했습니까? 사람은 한 가지 일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을 마시면서 숨을 쉴 수는 없습니다. 피아노를 치면서 요리를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습니다만, 그런 것은 그저 휴식을 취할 때나 가능하지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공평하신 것 같습니다. 시간도 똑같이 주셨으니까 말입니다. 똑 같은 시간 안에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도들의 현실적인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3. 사도들은 제자들 중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면서 그들에게 섬기는 일을 맡기겠다고 했습니다(3절). "성령"과 "지혜"가 선택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영적인 사람이면서 또한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교회의 일군은 영적이기만 해서도 안되고 지혜롭기만 해서도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영적이기만 한 사람은 교회 앞에 나서서 일하는 것보다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지혜롭기만 한 사람은 생각하는 게 늘 한계가 있습니다. 무슨 교회 문제를 헤쳐나가는 일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잘 내기는 하지만 그런 차원을 넘어서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들은 일군을 선택하면서 이 두 가지 요소를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들이 하던 일들 맡겼습니다.

사람은 원래 독점욕이 있어서 자기의 일을 남에게 맡기지 못합니다. 특히 어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도 자기가 모든 일을 다 해야만 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욕심이 있기도 하지만 남을 의심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른 이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사심이 적고 하나님의 일에 자신을 온전히 헌신할 때 가능합니다. 특히 목사들은 이런 점에서 자신을 많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목사의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이런 생각이 확고하다면 남에게 일을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특징 한 가지를 말씀드려볼까요? 담임 목사가 주일 예배의 설교권을 독점한다는 것입니다. 양들에게 꼴을 먹인다는 사명감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욕망과 의심 때문인 경우도 있습니다.

4. 일곱 집사에게 봉사의 일을 맡기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선포"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합니다.(4절). 이 일이 바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1) 기도에 대해서는 제가 부연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 중요성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흔히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 영적인 호흡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우리가 거룩하게 하고 영적이게 합니다. 그런 상태에 도달하지 않으면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분과 대화하려면 당연히 우리가 영적인 차원으로 올라가든지 그런 상태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칼 바르트는 <복음주의 신학 입문>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학작업의 가장 우선적이고 기본적인 행위는 기도다. 기도는 신학에서 논의될 모든 내용의 기초를 이룬다.... 말하자면 신학작업은 하늘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의해서 열려졌으며, 하늘과 이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을 향하여 열려 있다. ... 신학작업이란 예배 같은 행동의 형태를 띤 하나님께 대한 부름과 기도로써 시작되고 진행되고 완성되어야한다."
오늘 우리에게 기도가 없다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가 중언부언한다는 것도 역시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매우 빈약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영적인 깊이에서 경험하고 오늘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적인 직관이 없다면 우리는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학작업은 곧 기도행위라는 바르트의 지적은 옳습니다. 또한 사도들이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 봉사의 일을 집사들에게 위임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목사가 심방은 좀 적게 하더라도 기도를 많이 해야한다고 말입니다. 기도할 수 있기 위해서 영적인 세계가 훨씬 심화되어야 된다고 말입니다. 현대 교회의 목회가 너무나 많은 일들로 뒤범벅이 되어 있기 때문에 목사들이 깊은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쉬운 예로, 교회당을 짓는다고 이리 저리 뛰어다니면서, 때로는 은행 융자를 얻으러 다니면서 영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은 다른 제자들이 감당해야 하고 목사는 기도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영적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그런 시간을 늘려 잡아야 합니다.

2) 말씀 선포는 사도들의 고유한 임무였습니다. 이 일이 아니라면 굳이 사도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에게 일어난 일을 전하기 위해서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목사가 사도의 직무를 이어받았다고 한다면 이 말씀 선포는 결코 유보될 수 없는 절박하고 본질적인 행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대로 이 임무가 얼마나 소중했으면 이 일을 위해서 다른 일은 일체 다른 제자들에게 위임하겠다고 결정했겠습니까?
말씀을 선포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본 사람이어야 합니다. 실제로 사도들은 예수 사건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었습니다. 본 것을 가르쳐야만 권위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나는 본 것을 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씀 선포를 곧 가르침이니까 우선 자기의 경험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위에서 본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이것은 곧 체험했다는 의미입니다. 말씀과 그 사건을 체험한 사람만이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바르게 배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말씀의 세계를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배운다는 것이 반드시 신학적 소양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건강한 신학이라면 그런 이론에 빠지지 않고 그 이론이 가리키고 있는 진리의 세계를 경험하게 만듭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목사는 다른 일을 접어두고 말씀과 그 사건을 경험할 수 있도록, 그 세계를 볼 수 있도록 용맹정진 해야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의 한국 교회는 목사로 하여금 이런 말씀에 정진하게 하기보다는 교회를 관리하게 만듭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성서 말씀을 단순히 정보 차원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보는 그것을 수집하기만 하면 끝나버립니다. 더 이상 생각하고 말고도 없습니다. 자기의 필요에 따라서 도구적으로 이용하면 그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에서 요한 계시록 까지 완전히 외웠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자기의 영적인 눈높이만큼 들어옵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그 말씀의 영적인 깊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다 기울어야만 할 것입니다.

5. 아마 어떤 분은 오늘의 설교는 목사들이 들어야 할 내용 같다고 생각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선포를 선택했다는 점에서는 목사와 교회 지도자들에게 해당됩니다만, 보다 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이 말씀은 우리 성도들에게 훨씬 중요합니다. 즉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사도들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서 불림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사도들입니다. 사도적 사명이 교회 안에서는 목사들에게 있지만, 세상에서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심각하게,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요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본문이 보도하고 있는 대로 사도의 선택을 따르고 있습니까? 봉사의 일은 다른 제자들에게 맡겨두고 기도와 말씀 선포에만 힘을 쏟기로 했다는 사도들의 선택을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십니까?
기독교인들은 기도하는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직 돈 버는 일에만, 혹은 휴매니즘의 실천에만 마음을 쏟고 있지만 우리 성도들은 기도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즉 영적인 세계에 힘을 기울인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일들, 그 중에는 부도덕한 일도 있고, 바람직한 일도 있지만, 이런 많은 일들은 세상 사람들이 잘 하도록 맡겨둡시다. 학문과 사업과 봉사에 힘을 기울이라고 합시다. 영적인 사도들인 우리는 기도와 말씀 선포에 전념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밥만 먹으면 교회나 기도원에 달려가서 기도하고, 거리에 나가서 전도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사업도 말고 공부도 말라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일상적인 일을 도외시하라는 게 아니라 그런 삶에서 영적인 세계를 펼쳐나가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일들이 바로 기도이며 말씀선포처럼 하나님의 세계와 단단히 연결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도와 말씀선포를 중심으로 하는 우리의 삶은 이 예배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예배 공동체로서의 그 중심을 흔들리지 않고 이어나갑시다. 처음 기독교가 시작할 때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선포에만 집중하며 살았듯이 말입니다.

profile

profile

[레벨:13]진인택

October 02, 2011
*.239.93.193



세상을 향한 사도가 되기엔 많은 부분이 부족한 내가 복음을 전하려니 어려움도 따릅니다.

그러나 내가 이 주어진 임무를 피한다면, 산속에서 홀로 딱는 자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생명의 기쁨과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생각하면서 그걸 독식하는 자세는 비 기독교인에게 흘러가는 물꼬를 막아버리는 존재가 될 수 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섭섭한 소식이나 상대방이 들어서 힘들어하는 내용을 전하는 것도 아니고 기쁨을 전하는 일인데 힘이 들겠냐 마는내공이 부족하여 반발력을 종종 유발합니다. 하나님. 복음을 전할 때 제가 목적을 들고 가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 뭔가 나의 꿍꿍이속이 복음전함에 일절 배제 시켜 주옵소서.

profile

[레벨:18]은나라

March 16, 2015
*.105.196.66

목사님..

기도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말고, 말씀하신대로 영적세계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기도라고 하셨는데..

하나님 말씀속에 깊이 들어가는 것인지..?

하나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것인지..?  확실치가  않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 했을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할 기도가 이땅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하나님 통치를 받으며 살아야하는 우리의 삶을 말하는

것인지요.  삶 전체에서 이 하나님 통치를 받는 삶자체가 기도인가요? 정말 궁금합니다..

예전의 기도를 안한지가 오래됐어요..

이땅에서 내육신의 정욕대로 더이상 구할수가 없겠어서 그런 기도는 하고 있지 않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16, 2015
*.94.91.64

ㅎㅎ 은나라 님이 기도가 뭔지에 대해서

본인 입으로 다 말해버려서

내가 덧붙일 게 없습니다.

옆에 소울 메이트(영혼의 친구)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관계를 맺을까요?

경우에 따라서 다 다릅니다.

함께 밥을 먹을 때는 밥에 대해서 말하고,

산책을 하면서는 걷는 것에 대해서 말하겠지요.

때에 따라서는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구요.

서로 빙긋이 웃어만 줘도 되는 거잖아요.

그가 거기에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영혼의 만족감을 느끼는 대상이 소울메이트에요.

은나라 님이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의 자리에서

기도는 저절로 제 자리를 찾게 될 테니까

기도가 어떻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좋은 기도문을 읽고 외우는 것은

모두에게 필수적인 공부입니다.

profile

[레벨:18]은나라

March 17, 2015
*.105.196.66

전에는 말씀을 암송했었는데..

이젠 기도문을 열나 암송해야겠네요..ㅎ ㅎ

좋은 기도문은 어디를 참고 해야하는가요?

시편으로 기도하나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17, 2015
*.94.91.64

말씀을 외우는 거도 좋습니다.

성경이 기본적으로 기도와 다를 게 없으니까요.

기도문을 담은 책을 몇 권만 소개합니다.

1) 선한용 편역, 성어거스틴의 기도, 대한기독교서회

2) 박근원 역음, 새로운 예배 기도, 대한기독교서회

3) 정용섭, 매일 기도하라, 한들 출판사

4) 김영봉, 사귐의 기도,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이외에도 찾아보면 많습니다.

유명한 교부들과 영성가들과 신학자들,

우찌무가 간조 같은 분들의 기도도 있을 거구요.

시편은 당연히 귀한 기도문이지요.

profile

[레벨:18]은나라

March 17, 2015
*.105.196.66

목사님!

많이 많이..감사합니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9606
251 사순절 예수는 심판 주다! (요 9:35-41) [2] 2020-03-22 6726
250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씨 비유 (막 4:26-34) [5] 2018-06-17 6708
249 주현절 게네사렛 어부들 이야기 [6] 2019-02-03 6693
248 부활절 생명의 은폐와 탈은폐 (골 3:1-4) [7] 2017-04-16 6685
247 부활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 (요 10:22-30) [13] 2016-04-17 6685
246 사순절 예수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 (요 12:20-33) [4] 2018-03-18 6670
245 대림절 전쟁 연습, 평화 연습 (사 2:1-5) [7] 2019-12-01 6660
244 창조절 언약을 통한 생명 경험 (수 24:19-25) [12] 2017-11-12 6622
243 성령강림절 지혜의 근원 (잠 8:1-4, 22-31) [4] 2019-06-16 6607
242 창조절 하나님께 가까이! (히 10:19~25) [2] 2021-11-14 6597
241 성령강림절 이스라엘의 선지자 '너머' [16] 2016-07-03 6535
240 성탄절 하나님을 본 사람 (요 1:10-18) 2020-01-05 6527
239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 파송 (눅 10:1-11) [2] 2019-07-07 6524
238 주현절 하나님의 회심 (욘 3:1-5, 10) [6] 2018-01-21 6522
237 성령강림절 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 (창 18:1-15) [6] 2020-06-14 6512
236 부활절 "우리는 부활의 증인들이다." (행 2:22-32) [2] 2017-04-23 6493
235 성령강림절 연보도 은혜다! (고후 8:7-15) [6] 2018-07-01 6481
234 사순절 예수와 복음 (막 1:9~15) [9] 2021-02-21 6472
233 부활절 눈이 밝아진 제자들 (눅 24:13-35) [2] 2020-04-26 6454
232 주현절 은사의 다양성과 성령의 동일성 (고전 12:1-11) [6] 2019-01-21 6427
231 성령강림절 기독교 윤리와 하나님 사랑 (엡 4:25-5:2) [4] 2018-08-13 6419
230 대림절 "파루시아" (약 5:7-10) [5] 2019-12-16 6397
229 대림절 평화의 왕이 오신다! (미 5:2~5a) [1] 2021-12-19 6396
228 사순절 십계명 "너머" (출 20:1~17) [7] 2021-03-07 6390
227 주현절 선지자의 운명 (신 18:15-20) [2] 2021-01-31 6371
226 사순절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요 3:14~21) [15] 2021-03-14 6362
225 부활절 빈 무덤 앞에서 (막 16:1~8) [3] 2021-04-04 6338
224 창조절 만물의 시원성에 대한 질문 (욥 38:1-7) [20] 2018-10-21 6294
223 창조절 '힐링'의 원천 (막 7:24-37) [2] 2018-09-10 6290
222 창조절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 4:12-16) [4] 2018-10-15 6272
221 사순절 하나님과의 화해 (고후 5:16-21) [5] 2019-03-31 6242
220 사순절 생존의 위기 앞에서 (출 17:1-7) 2020-03-15 6239
219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 충만이다! (요 6:24-35) [2] 2018-08-05 6230
218 창조절 삶의 견고한 토대 (시 90:1-6, 13-17) [4] 2020-10-25 6200
217 성령강림절 예수는 왕인가? (요 6:1-15) [8] 2018-07-29 6190
216 창조절 욥의 회개 (욥 42:1~6) [4] 2021-10-24 6070
215 부활절 그는 "변호인"이다 (요일 1:1~2:2) [1] 2021-04-11 6029
214 사순절 제자도의 위기 (눅 22:24-34) [4] 2019-04-14 5992
213 부활절 사랑과 계명 (요 14:15-21) 2020-05-17 5976
212 성탄절 영광-찬송 (엡 1:3~14) [2] 2021-01-03 5956
211 주현절 종말의 능력과 현실 (눅 4:14-21) [5] 2016-01-24 5947
210 사순절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막 14:32~42) 2021-03-28 5906
209 성령강림절 냉수 한 그릇의 궁극적 의미 (마 10:40-11:1) [2] 2020-06-28 5888
208 사순절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의 믿음 (롬 4:13~25) [2] 2021-02-28 5884
207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1-28) [4] 2018-01-28 5884
206 부활절 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 (사 65:17-25) [2] 2019-04-21 5873
205 성령강림절 성령이 도우시리라! (롬 8:22-27) [4] 2018-05-20 5870
204 부활절 순교 영성 (행 7:55-60) [3] 2017-05-14 5859
203 창조절 사소한 것들과의 생명 관계 (막 9:30-37) [4] 2018-09-24 5828
202 창조절 말다툼과 진리의 말씀 (딤후 2:8-15) [2] 2019-10-14 5820
201 사순절 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 12:1-8) [4] 2019-04-07 5815
200 사순절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창 15:1-12, 17-18) [5] 2019-03-17 5776
199 대림절 빈 들에서 (눅 3:1~6) [2] 2021-12-05 5745
198 주현절 십자가에 못 박힌 이 (고전 2:1-12) [8] 2020-02-10 5739
197 주현절 "빛으로 변화되리라!" (눅 9:28-36) [2] 2019-03-03 5724
196 부활절 회개 (행 3:12~19) 2021-04-18 5718
195 창조절 복음, 은혜, 믿음, 고난 (빌 1:21-30) [2] 2020-09-20 5691
194 성령강림절 종말과 오늘 사이에서 (마 13:24-30, 36-43) [2] 2017-07-23 5675
193 성령강림절 법과 은총 (신 4:1-2, 6-9) [15] 2015-08-30 5662
192 부활절 믿음과 사랑 (요일 3:16-24) 2018-04-22 5643
191 사순절 주의 손과 주의 얼굴 (시 31:9-16) [6] 2020-04-05 5613
190 창조절 "급히 먹으라!" (출 12:1-14) [2] 2020-09-06 5609
189 사순절 의와 생명 (롬 5:12-19) [2] 2020-03-01 5593
188 성탄절 환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사 63:7-9) [2] 2019-12-29 5588
187 성령강림절 예수는 누군가? (요 6:60-69) [6] 2018-08-26 5570
186 창조절 두려워 말라! (학 1:15-2:9) 2019-11-10 5556
185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10] 2018-06-11 5527
184 주현절 창조주 여호와! (사 43:1-7) [6] 2019-01-13 5495
183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9) 2020-06-21 5491
182 창조절 종의 노래 Ⅲ (사 50:4-9) [2] 2018-09-16 5458
181 사순절 백척간두의 실존 (눅 13:1-9) [6] 2019-03-24 5428
180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마 13:31-33, 44-52) [5] 2020-07-26 5391
179 성령강림절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요 16:5~15) [2] 2021-05-23 5390
178 성령강림절 "브니엘"에서 (창 32:22-31) [5] 2020-08-02 5389
177 성령강림절 예수의 치유 능력 (막 6:30-34, 53-56) [6] 2018-07-22 5386
176 창조절 생명과 지옥 (막 9:42~50) [4] 2021-09-26 5373
175 부활절 생명의 깊이 (요 10:1-10) [4] 2017-05-07 5360
174 창조절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 (막 10:17~22) [5] 2021-10-10 5349
173 부활절 영광과 영생 (요 17:1-11) [4] 2020-05-24 5342
172 주현절 하나님, 역사, 삶 [4] 2019-02-24 5335
171 사순절 영생과 예수 (요 3:1-17) 2020-03-08 5328
170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4] 2020-06-07 5325
169 창조절 양자택일 (눅 16:1-13) 2019-09-22 5305
168 사순절 여호와의 손과 영 (겔 37:1-14) [2] 2020-03-29 5299
167 창조절 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2018-11-25 5233
166 성령강림절 "사탄아!" (마 16:21-28) [2] 2020-08-30 5199
165 주현절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2] 2020-01-26 5189
164 성령강림절 "정의" (사 5:1-7) [6] 2019-08-18 5141
163 창조절 유대교 신학자의 질문 (막 12:28~34) [4] 2021-10-31 5130
162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7] 2019-06-30 5102
161 성령강림절 예수와 영생 (요 6:52~58) [2] 2021-08-15 5040
160 성령강림절 "지금", 은혜와 구원 (고후 6:1~13) [5] 2021-06-20 5039
159 부활절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벧전 2:2-10) [4] 2020-05-10 5024
158 성령강림절 어두운 심연으로부터의 해방 (롬 8:26-39) [2] 2017-07-30 5018
157 성령강림절 충만! (사 6:1~8) [5] 2021-05-30 5008
156 부활절 선한 목자 (요 10:11~18) 2021-04-25 4992
155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요 1:10~18) 2022-01-02 4989
154 성령강림절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롬 8:12-25) [2] 2020-07-19 4989
153 성령강림절 안식, 해방, 연민 (눅 13:10-17) [6] 2019-08-25 4928
15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하심 (롬 11:1-2a, 29-32) [4] 2020-08-16 4915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