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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자

기타 조회 수 14281 추천 수 91 2004.06.30 22:42:26
성경본문 : 호세아 6:1-11 
하나님을 알자



(호6:1-11)





구약에 등장하는 대개의 예언자들은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아마 엘리야가 대표적이겠습니다만 그 이외의 예언자들도 거의 같았습니다. 부르지만이 <예언자적 상상력>이라는 책에서 말했듯이 예언자들이 왕들과 경쟁관계에 있었다는 점만이 아니라 그들의 예언(설교)이 대중적이지 못했다는 점이 바로 그 이유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언자들의 말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예언자들의 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행위 앞에서도 그들의 믿음은 별로 자라지 않았습니다. 단적인 예로 온 천하가 떠들썩한 출애굽 사건이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크고 작은 시련이 닥치자 곧 불평불만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도우심으로 가나안에 입성한 이후로도 그들은 곧잘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바알을 섬기고 이방인들의 풍속을 따랐습니다. 이런 예는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아마 구약 성서 전체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앙에 대한 경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보고 그들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단정하고 우리는 그들과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성서를 오해하거나 아니면 자기를 합리화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언자들의 말을 싫어한 이스라엘 민족은 아주 고질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거의 비슷한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평범한 사람들과 예언자들 사이에 긴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만약에 오늘 우리에게 이런 긴장이 없다면 오늘의 예언자들이 올바르게 예언을 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오늘의 신자들이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로 변화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 대중이 변화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오늘의 예언활동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쩌면 이런 긴장이 있기는 있는데 은폐되어 있는지도 모르죠. 긴장을 드러내게 되면 서로가 불편하니까 말입니다. 이 긴장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그 긴장이 호세아에는 어떻게 해명되고 있습니까?

호세아서는 소예언서 중에서 스가랴와 더불어 1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가장 긴 성서입니다. 호세아는 거의 60년 가까이 남북으로 갈려 살고 있는 우리처럼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단된 조국의 운명 앞에서 아주 파격적인 방식으로 예언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주로 북이스라엘에 거주하면서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했습니다만 남유다를 향한 말씀도 적지 않습니다. 그의 예언활동이 파격적이었다는 말은 1:2이하에 기록되어 있듯이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호세아가 수행하는 것으로 공적인 활동을 시작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말씀이 사실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비유적인 것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을 음란한 백성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1장에서 5장까지 이스라엘의 행위가 음란하다고 거듭해서 책망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와 음란을 거의 비슷한 논조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우상숭배가 곧 음란이고 간음인가요? 간음이 곧 우상숭배인가요? 가나안 종교인 바알은 다산(多産)의 신입니다. 비교적 좋은 땅에서 고급의 문화를 일구던 가나안 부족들은 자신들의 농경 생활을 지켜주는 신이 바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풍작을 이루게 되면 인심도 넉넉해지고 무언가 예술적인 것도 생각하게 됩니다. 농사만 잘 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종족도 늘려야 되니까 성(性)과 관계된 일들이 조장됩니다. 먹거리를 많이 생산하고 자식을 많이 낳는 일은 고대인들에게 너나 할 것 없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가나안 땅과 후손을 약속했다는 것도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풍요와 성적 쾌락은 그들의 생존이 달려 있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 두가지 문제가 잘 해결된 민족은 번성했고 그렇지 못한 민족은 쇄락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철저하게 풍요와 쾌락에 묶여서 살아가던 문화민족인 가나안 족속과 관계를 맺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가 그들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셨으면서도 그것을 실증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민족들을 멀리 하라고 경고하셨다는 것은 어딘가 모순이 아닐까요? 부와 성은 생존의 필수요소입니다만 그것이 절대적인 가치로 등장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피조물의 절대화는 곧 우상숭배입니다. 절대는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인데 피조적인 것을 절대의 자리에 올려놓았으니까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구약성서의 명령은 단지 이론적이거나 교리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의 문제입니다. 피조물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행위로부터 인간은 부패하고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절대화 되는 그 순간에 우리를 망칩니다. 이 두 관계가 이렇듯 예민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생생하게 목도했으면서도 아주 쉽게 우상숭배로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자본이 절대적인 힘으로 작동하는 사회가 어떤 길로 빠져드는지 말입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합니다. 신의, 정의, 책임감, 도덕성도 사라지고 돈의 힘만 득세합니다. 종교 자체가 그것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예언자들이 본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일반 대중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언자는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여기에 바로 두 집단 간의 긴장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일반 사람만이 아니라 예언자들도 먹고 마시고 자식을 낳고, 먹는 즐거움과 성적인 쾌락을 누리며 삽니다. 그게 바로 인간 생존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그것을 절대화 하지 않습니다. 절대는 다른 분에게 돌려져야 합니다. 곧 하나님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이 하나님을 아주 추상적으로, 어렴풋하게 의식할 뿐이었지만 예언자들은 너무나 확연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오히려 훨씬 분명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호세아는 불의하고 부패하고 부도덕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2절)고 권면합니다. 부와 성이 악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그것이 구원인양 착각하고 살아가는 그 생각이 악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하나님을 알자고 호소합니다. 상대적인 것은 나름대로 모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만 절대적인 것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벌어집니다.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길은 절대적인 게 무엇인지 아는 데에 있습니다. 좋은 것을 알아야 그렇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는 이치와 같습니다.



성서의 핵심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도 역시 하나님을 중심으로 꾸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우리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도 명분만 그렇지 실제로는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말씀 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게 무슨 말씀인가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사와 태워드리는 번제를 아주 세련되게 드렸습니다만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이상하지요? 그러나 하나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에 화려한 제사행위는 인간들의 자기만족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 둘 사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 행위가 인간들의 자기만족인지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관심과 헌신인지 말입니다.

지난 학기에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 학생들에게 <기독교 해석학>을 강의하면서 이 해석학 문제를 설교문제와 연관해서 생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몇몇 괜찮다는 목사님들의 설교집을 들여야 보기도하고, 인터넷으로 유명한 교회의 설교를 들어보았습니다. 입담이 좋아서 듣는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지만 대개의 경우에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주제로 부각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자. 이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 이런 게 기독교인의 윤리다. 한 마디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훈화나 대학교와 시민단체의 교양강좌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내용이 고상하고 아니고는 둘째 치고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인간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신학대학교에서도 목회 상담학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인간을 알자는 것이지요. 이런 것들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이긴 합니다. 부와 성이 필수적이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런 것을 본질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인간학에 대해서는 세상 학문이 말하도록 내버려두고 신학은,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들여다보십시오. 사람이 중심인가요, 하나님이 중심인가요.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많은 문제들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집니다. 교회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이런 인간적인 이해타산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만 하나님보다 이런 인간 문제가 더 우위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그저 인간학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들은 처세술과 상담학과 정신분석으로 만족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실용적인 도구나 교양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한 분이고 모든 생명의 토대라고 믿고 있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관심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요즘 나의 둘째 딸에게 친구와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고민거리가 생겼습니다. 자기와 가장 친한 친구가 다른 애와 친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동네의 어린이들이 모여서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재미가 있었는지 모두가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놀다가 싸우고, 울고, 다치기도 했다. 그런데 저녁때가 되어서 어머니들이 부르니까 모두 그렇게 열을 내며 놀던 구슬치기를 버려두고 집에 들어갔다. 생각이 깊은 아이라면 구슬치기를 열심히 하면서도 이게 자기 삶의 모든 게 아니라는 걸 안단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거야. 그러니까 친구 문제 때문에 고민하지 마라."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은 구슬치기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주 재미있는 놀이입니다. 재미를 재미로만 생각해야지 그것에 목숨을 걸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 알자"는 호세아의 이 호소도 역시 이런 인생의 사태를 가리키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 말씀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요점은 "알자"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 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안다", "인식한다"고 말합니다. 믿음과 인식은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게 기본이며 최종 목표이긴 합니다만 인식을 건너 뛸 수는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믿음은 이미 인식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반면에 알지 못하고 믿는 것은 광신일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이비 이단의 신앙 행태를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이 단지 광적인 믿음만 있습니다. 호세아가 볼 때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역시 제사와 번제가 있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흡사 바알을 섬기듯이) 있긴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자"라고 말합니다.

호세아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실제로는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 알려고 할텐데 모르니까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게 많은 기독교인의 한계이며,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의 자기 함정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흡사 컴퓨터 작동법을 배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는 자동차 외판원이 자기가 팔아야 할 자동차에 대한 정보를 꿰뚫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길을 가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정보를 기술적으로 전달하는 약장수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이덱거에 의하면 진리는 노츨사건이지만 근본적으로 "은폐"의 성격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진리라고 한다면 그분은 은폐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으로 하나님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 드러난 것 조차도 우리는 여전히 모릅니다. 우리는 사실 "있음"과 "없음"의 차이도 잘 모릅니다. 궁극적인 것은 종말까지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숨어있는 진리는 우리에게 부분적으로나마 자기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계시, 곧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즐거움보다 더 큰 게 세상에 있을까요? 속으로는 더 큰 즐거움이 많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돈 버는 게 즐겁다거나 낚시가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도 테니스가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말 그대로 재미일 뿐입니다. 테니스를 못한다고 해서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깊이 아는 것은 내 생명 전체와 상관됩니다. 아마 이런 답변을 들으면 너무나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래, 너나 잘 해라. 나는 다른 재미로 살겠다. 내 딸에게 들려준 구슬치기 비유와 연관해서 설명하면, 구슬치기는 곧 세상의 재미입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소리는 하나님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무슨 저녁반찬이 준비되어 있을지, 아버지는 오늘 어떤 이야기를 해주실지, 미국에서 놀러온 이모가 무슨 선물을 가져왔는지. 어떤 쪽이 진정한 즐거움일까요? 그래도 여전히 구슬치기가 재미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아이는 고아이거나, 가족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는 아이이거나, 아니면 너무나 철이 없는 아이입니다.

가나안 공동체와 똑같은 이 시대와 사회는 보다 구체적인 물적인 토대와 그것으로 인한 안정감만을 강요합니다. 이런 사회의 미래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내부로부터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지난 인류의 역사는 이에 대한 실증적인 예입니다.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 우리 기독교인은 어떻게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아는 것에 삶의 초점을 놓으십시오. 그 길 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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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햇빛처럼

July 2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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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오히려 훨씬 분명한 현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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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5]정용섭

July 21, 2016
*.164.153.48

햇빛 님이 12년 전 저의 설교를 다시 펼쳤군요.

당시에도 내가 지금과 비슷한 방식의 메시지를 전했네요. ㅎㅎ

폴 틸리히에게 하나님은 궁극적인 현실성이고,

판넨베르크에게는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입니다.

화이트헤드에게는 과정이 현실성이구요.

노자와 장자에게는 도가 현실이지요.

그 현실, 또는 현실성(reality, Wirklichkeit) 개념을

앞으로 계속 화두로 삼고 생각을 깊이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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