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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기타 조회 수 11026 추천 수 54 2004.06.30 23:37:06
성경본문 : 마가복음 9:14-29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막 9:14-29



오늘 본문에는 간질병 환자로 볼 수 밖에 없는 한 남자 아이의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듯이 자기 아들이 귀신 들렸다고 여긴 이 사람은 예수님에게 축귀 능력이 있다고 보고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왔지만, 예수님은 산에 오르셨고, 제자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입장에 빠져 있던 그 순간에 예수님이 다시 그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결국 그의 기대대로 예수님은 그의 아들을 고치셨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복음서에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없지는 않습니다만 그렇게 자주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본문에서 예수님은 무당같은 역할을 하셨다는 점에서 특이한 이야기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고대는 이런 축귀 행위가 매우 보편적이었습니다. 요즘도 문명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원주민들에게서 이런 형태의 종교의식이 많이 등장합니다. 심지어는 기독교 안에서도 이런 행위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부흥사들에게서 이런 일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지난 피디수첩에서 보도된 오 아무개 신부 사건을 보니까 그 사람도 엑소시스트처럼 행동 하더군요. "너 몇 년 된 귀신이냐?", "40년 됐습니다." 이런 대화가 오가다가 귀신을 내어쫓더군요. 본인이 예수님쯤 되는 걸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이런 마술적인 겉모습을 보여야 자신의 영적인 권위가 올라간다고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들만이 아닙니다. 꽃동네 시설을 거창군 지역에 짓겠다는 생각으로 기도하는 중에 어느날 새벽에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마 자기의 마음 속에서 번득 떠오른 아이디어를 하나님이 주신 계시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직접 계시 운운하면 이단이라고 박양식 신부 교수가 말하는 장면도 티브이에 방영되었습니다. 저는 그 보도를 보면서 귀신을 내어쫓고 있는 오 신부가 바로 귀신 들린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다는 그 명분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섰으니, 이게 귀신 들린 게 아니고 무엇일까요? 귀신의 속성은 자기보다 훨씬 강한 세력이 오지 않으면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 신부도 자기 스스로는 이런 마성적 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온갖 논리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할 뿐입니다. 귀신은 이렇듯 꾀가 많고 강합니다.



오늘 본문에 묘사되어 있는 축귀 현상을 사실적으로 이해해야만 할까요? 아니면 예수 공동체가 오해한 사건일까요? 저는 예수님도 이 아이가 귀신들린 것으로 보았는지, 아니면 간질병으로 알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귀신으로 인정해 버렸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생리학적인 면에서는 그 당시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마 귀신 현상으로 보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인식론적 한계는 우리가 성서를 읽는데 별로 결정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성서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 하는 점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 아이의 병이 간질병이냐, 아니면 귀신들린 것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런 사태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핵심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뚫어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믿음의 능력입니다. 믿음이 모든 사태를 풀어내는 능력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가운데서 여러 번에 걸쳐 이 믿음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간질병 든 아이의 아버지가 제자들의 무능력을 하소연 했을 때였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19). 두 번째는 할 수 있으면 도와 달라는 이 아버지의 간청을 들었을 때였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모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23). 이 순간에 이 아이의 아버지는 "믿는다"는 고백을 합니다. 세 번째는 아이의 병을 고친 다음에 자신들은 왜 고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제자들이 질문했을 때였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29). 여기서 기도는 믿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믿는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신앙 문제가 많은 경우에 왜곡되곤 합니다. 설교자들이나 또는 성서를 읽는 사람들이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아무 데나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믿으면 다 된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쇄뇌시킵니다. 사업도 잘 되고, 건강도 잘 되고, 심지어는 믿음으로 기도만 열심히 하면 노처녀가 시집갈 수 있다고 까지 말합니다. 이런 것은 기독교적인 믿음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자기 확신에 불과합니다. 이 자기 확신을 믿음으로 착각함으로써 벌어지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자기 확신을 일종의 심리학적 차원의현상이라고 한다면 신앙은 진리에 대한 전적인 신뢰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영성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진리로 믿는 우리 기독교인은 바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이 오늘 본문과 같은 사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그 이외의 것으로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제자들, 서기관들, 그 아이의 아버지 모두 간질병이라는 사태 앞에서 참으로 무능력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단지 병든 사람을 위로해주거나 통증을 덜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근본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 행위는 근본적으로 무능력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의 현장도 역시 무능력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대구 지하철 참사에 대해서 저는 할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일을 당한 당사자들에게 어느 정도 연민을 가질 수는 있지만 똑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나의 말은 빈 말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이들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일은 더더욱 못합니다. 이번 참사 이후에 보여준 지하철 관계자들과 대구시의 대처는 너무나 졸속하고 미숙하고, 미봉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리고 책임 회피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만한 형사책임을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 기관사였다면, 내가 상황실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들보다 모든 면에서 바르게 조치를 취했을까, 사건은폐나 녹취록 조작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 앞에서 별로 자신이 없었습니다. 상황 판단이 신속하거나 얀간이라도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면 사고의 크기를 축소시킬 수는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사법적, 또는 사회 윤리적 판단을 하는 게 아니라 신학적 판단을 할 뿐입니다. 결국 인간은 참으로 무능력한 존재들이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다시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현장에 있었던 제자들과 서기관들과 그 아버지, 어느 누구도 믿음이 없었으며 기도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믿음과 기도가 없는 서기관과 제자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아차, 새벽 기도회를 하지 못했구나. 믿음이 부족해서 교회 출석을 게을리 했구나. 앞으로 열심히 해야지. 이 정도면 우리가 오늘 말씀을 읽은 충분한 반응을 보이는 걸까요?

마가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예수님만이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기도하는 분이라는 사실도 역시 똑같습니다. 예수님만이 간질병 아이를 낫게 했다는 사실이 바로 이에 대한 반증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모두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도 그렇고 신학자들도 그렇고 대형교회 목사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오늘 대구 지하철 참사 앞에서 망연자실하고 있는 대구 지역의 모든 시민들과 더불어 교회도 역시 믿음이 없습니다. 삶의 무능력은 곧 불신앙의 징표입니다. 오늘 대구 시민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진리와 생명을 믿고 있습니까? 지난 주일에 저는 작은 교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곽은득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대구에 뭐하러 지하철을 만들어 놓고 이런 야단인지 모르겠다. 전부 사람들을 한 군데 모아놓고 책임자들은 자기 업적을 만들어놓기 위해 이런 시설들을 건설하는 것 아니냐. 대충 이런 뜻이었는데, 저는 동감했습니다. 일반 시민들은 그만두고 우리 대구 지역의 교회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을까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진리와 생명의 영이신, 그리고 종말론적인 구원을 일구어내시는 하나님의 영을 진정으로 믿고 있습니까? 장로 투표에서 낙선했다고 해서 교회 안에서 난장판이 일어나는 이런 세태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감히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와이엠씨에이를 잘 모릅니다만 오늘 설교와 연관해서 한 두마디는 할 수 있을 것 갑습니다. 우선 와이는 대구 시민사회와 교회의 경계선에 놓여 있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격이 아주 독특합니다. 경실련이나 참여연대나 흥사단이 아니며, 또한 교회 자체도 아닙니다. 교회이면서 동시에 시민단체라는 말씀입니다. 두 가지 성격을 함께 갖고 있으면서도, 두 단체와 구별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어떻게 기독교 정신을 확보한 가운데서 시민단체로서의 위상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지난 역사는 잘 모릅니다만 제가 아는 역사 안에 있는 와이는 기독교 정신이 매우 희박해진 것 같다는 사실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와이의 사업이 거의 복지에, 더 정확하게는 수익에 기울어져 있다는 현상을 보면 이게 분명합니다. 이렇듯 와이가 수익 사업에만 마음을 많이 두게 된 것은 와이 사업에 별로 적극적이지 못한, 그리고 여러 면에서 모범이 되지 못한 교회의 책임도 적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이는 기독교적인 정체성을 어느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기독교 정신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당위나 숙명론으로서가 아니라 일반 시민단체와 구별되는 와이만의 생명과 능력을 담보하기 위한 정도(正道)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마가는 오직 예수님만이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불신앙인들입니다. 자기 자신을 조금만 정직하게 들어다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불신에 사로잡혀 있는지 잘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참되게 믿었던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에게 완전히 자기를 열어놓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예수님 때문에 우리도 믿음을 다시 배울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무능력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신앙의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이 신앙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생명을 파괴하고 자기 자신을 학대하게 만드는 악한 영이, 바로 그 간질병이 쫓겨날 것입니다.

<자하철 참사 희생자를 위한 추모 기도회 및 대구 와이엠씨에이를 염려하는 모임, 2003.3.6,목,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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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0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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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잇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ㅇ 호가인케 하심 말씀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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