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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철학을 넘어서

기타 조회 수 8133 추천 수 86 2004.07.02 15:07:15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22-25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
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2-25>

바울은 참으로 특이한 사람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예수
님이 살아 계실 때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소상하게 언급하고 있는지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그가 보도하고 있는 예수님
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역사적 내용이 아니라 신앙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그래도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이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특별한 인물입니다. 특히 우리는 바울의 편지를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론적 의미를 매우 심층적으로 공부할 수 있
습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등, 그의 서신들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역시 그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무슨 이유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 역
사에서 일어난 그 어떤 다른 사건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사건인지에 대
해서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유대사상과 헬라사상 사이에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유럽의 대표적인 두 가지 사상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 사상이며 다른 하나는 헬라 사상입니다. 유대 사상은 종교적인 것이
며, 헬라 사상은 철학적인 것입니다. 이 두 사상은 지난 2천년 동안 유럽의 모든
정신, 문화 세계의 근거가 되었으며, 기독교와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습
니다. 이미 우리 기독교에는 유대교적인 뿌리가 적지 않게 내면화 되어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의 경전인 구약성서를 우리 기독교인들도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 예배에도 역시
유대교가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헬라 사상은 교부 시대의 기독교와 연관
이 아주 깊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이 어거스틴의 신론에 영향
을 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2천년 교리사는 이런 헬라 철학과의 대화
를 통해서 발전되어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분명히 유대교가 아니며 또한 헬라 철학이 아닙니다. 비록
유대교의 유산을 물려받긴 했지만 결정적인 점에서 유대교와 구분되며, 헬라 사상
의 철학적 착상에서 신학의 깊이를 심화시켜나오긴 했지만 결정적인 점에서 헬라
철학과도 다릅니다. 그 준거가 곧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차원에서는 유대교와 같은 길에 서 있지만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생
각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며, 신앙을 철학적으로 변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헬라
철학과 비슷한 사유의 길을 걸어왔지만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구원의 길로 여긴다
는 점에서 그들과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구별성이 이미 바울의 가르침에서
확실하게 증거되고 있습니다.

기적을 구하는 유대인
바울은 본문에서 유대인은 표적(기적)을 구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
시피 유대인들의 역사에는 이런 기적이 많았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역
사라 할 수 있는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천년 이상의 성서 역사에는 끊임
없는 기적적인 사건들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한 두 가지만 거론하자면, 이들이 광
야생활을 하면서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한 기적을 경험했으며, 가나안을 정복해
나갈 때도 역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그 뒤의 모든 역사로 역시 이런 기적적인 사건들로 이어지고 있습니
다.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이런 경험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기적에서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 앞에 와서도 당신이 누구인지 자신들
이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십시오"라고(마 12:38) 요구할 정도였습
니다. 이 요구에 대해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게 없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종교경험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근동의 지정학적 조
건 안에서 자기들의 생존이 보장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손길 밖에 없다
고 생각했습니다. 약소민족인 그들의 힘은 이집트와 앗시리아, 바벨론으로 이어지
는 주변의 강대국과 대결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들 제국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기적뿐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고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이
선민인 이스라엘의 생존을 보장해준다는 증거가 바로 이런 기적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런 기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
를 요구합니다. 간혹 간증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으로 드라마틱한 증거
들이 있습니다. 사업이 망해 가는 중에도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하니까 오
히려 사업이 성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이런 극적인 체험은 아
니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일반적인 신앙 형태는 이런 증거를 확인하는 것과 연결되
어 있습니다. 목회에 성공했다는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기독교 신문에서 볼 수 있
는데, 대개는 하나님이 보여주는 기적적인 사건들이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기적적인 사건들은 우리를 어떤 확신에 이르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많은 신앙
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기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원리들이 거의 똑같이 적용됩니다. 특히 요즘의
젊은 연인이나 부부들끼리 서로가 상대방에게 사랑의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냥 마
음이나 느낌만으로, 더 나아가서 상대방의 존재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아주 특
별한 증거를 원합니다. 예컨대 결혼 기념일이나 생일에 100송이 장미를 받는다거
나 깜짝 놀랄만한 이벤트를 받는 것을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놀랄만한 사건을 통해서 서로가 사랑하고 있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벤트로 사랑이 확인되던가요? 그것은 잠시 우리를 자극할 뿐이지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기적을 많이 경험
했으면서도 그 순간뿐이지 거듭해서 불신앙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에도 이런 기적
적인 일들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전하는 기독교인
이런 점에서 기적을 구하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이 다르다고 말하는 바울의
주장은 아주 정당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종교
적 태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종교는 기적을 요구
하지만 기독교는 십자가를 증언합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가 종교를 넘어서는 근
본 토대가 놓여 있습니다. 이 말은 곧 기독교는 종교의 차원이 아니라는 말씀입니
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기적을 구한다는 종교의 본질과 십자가의 그리
스도를 전한다는 기독교의 본질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구하고 있는 기적은 모두가 인간 중심입니다. 구약성서의 모든 기
적적인 사건들을 보십시오. 그것은 인간이 잘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유
대인들이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아이 성이 무너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집니다. 인
간이 잘되기 위해서 일어나기를 원하는 이런 기적들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더라도 역시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과, 또는 아무리 선의로 생각한
다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의 생존과 번영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타적인 마
음으로 구하는 기적적인 증거가 있긴 하지만 그것도 역시 어떤 사람이 잘 되는 것
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이런 관심으로 살아갑니다. 이 세상살이도
그렇고 종교 생활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렇듯 기적을 구하는 종교적인 사람의 눈
에 십자가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짜증스럽고 화나는 일입니다. 그
래서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잘사는 것을 위해서 어떤 확실한 증거를 찾아가고 있는 마당에 이런 잘 사는 일과
는 전혀 상관없는 사건은 가능한대로 기피해야할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들에게 십
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죽었다는, 없다는 증거에 가깝습
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승리가 아니라 실패의 징표라 할 십자가를 전한다는 기독교
인들의 삶은 패배주의라는 말씀일까요? 기독교의 삶이 유대 종교가 추구하고 있
는 승리주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패배주의 자체도 결코 아닙니다. 십자가는 외면
상 분명히 인간의 패배입니다. 2천년 전 그 당시에 누가 생각해도 이 십자가는 실
패입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말하려는 바는 그런 패배주의, 즉 패배
의 합리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순종과 신뢰입니다. 예수님 이외에도
십자가로 죽은 사람은 부지기수입니다. 그들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전
혀 다른 의미입니다. 그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투쟁하다가 로마군에 의해 그
렇게 죽었습니다. 일종의 애국심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애국
심이나 단순한 희생정신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 의한 결과였습니
다.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미 프로그램화된 그 길이 아니라 하나님
에게 자신의 모든 삶을 맡기고 순종함으로써 갈 수밖에 없었던 죽음이었다는 말씀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순종이 무
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준
우리는 지금 어떤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많은 경우에 나에게
어떤 좋은 점이 있는가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씁니다. 흡사 우리가 수능시험을 앞
둔 학생들처럼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이러한 노
력의 궁극적 목표에는 내가 얼마나 잘 되는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한 결과를 놓
고 이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한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열심히 기도
하고 교회 봉사하고 살게 되면 만사가 잘되고, 심지어는 물질의 축복도 받으며 산
다고 주장합니다. 요즘 우리 기독교 안에서 소위 <청부론>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
니다. 이런 문제에 제가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대충 이런 의미
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양심껏 부자가 될 수 있으며,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부는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신앙적인 덕이 될 수 없
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청부론을 주장하는 동기는 약간 순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문구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 모든 사람
들이 이런 물질적인 관심에 빠져 있으니까, 로또 복권현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런 시대적 감수성에 호소하고 있는 신앙형태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저는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틀렸는가 하는 답변은 주어질 수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양
심껏 노력해서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할 수 있으며, 그것을 죄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청부론의 일부분이 옳고, 그러나 일단 부를 축적한 사람이 그것을
자기의 소유로 계속 유지한다는 것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도 있듯이 기독교
인으로 떳떳한 일은 못된다는 점에서 청부론의 한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어느 정
도의 재산을 갖고 있어야 부자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도 명확하지 않기 때
문에 이런 논쟁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우리가 여전히 기
적을 구하는 종교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이런 부(기적)에 대한 논란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게 신뢰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러
니까 근본적으로 생각의 차원을 다른 데 놓는 일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것에 우리 삶의 토대를 놓
아야 합니다. 이게 바로 기적을 찾는 유대인들과 우리 기독교인들이 구별되는 초
점입니다.
여기 모인 청년들의 삶은 각양각색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있고, 적게
한 사람도 있고, 재정적으로 넉넉한 사람도 있고 부족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
는 짝을 만난 사람도 있고, 혼자 외톨이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이런 것이 필요하니까 기적을 통해서라도 채워 달라고 기도한다면, 아직 유대인들
의 종교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위로를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것 때문에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크게 책망하지는 않으시겠지
요. 그러나 그런 종교적 차원이 아니라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살려면 십자가의 그
리스도를 증거해야만 합니다. 즉 하나님에게만 온전히 마음을 두는 삶을 뜻합니
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모든 일상적인 삶을 포기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도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사셨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과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서 집중하라는 말씀입니다. 내 삶이 얼마나 윤택하게 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시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
의 의미를 아직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 음악공부를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피아노를 공부하는 사람이 늘 피아노를 통해서 어떻게 사람들에
게 인기를 얻을 수 있는지, 이것으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사람
들에게 연주 잘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신경을 쓴다면 그는 결코 피
아노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피아노 음악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으로 작용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아노라는 악기를 통한 음악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면 비록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음악을 통해서 참된 평화
와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
오늘의 설교는 여기서 마쳐도 됩니다. 그러나 본문에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
문제가 거론되었으니까 한 대목을 보충해볼까 합니다. 기적을 구하는 유대인들과
달리 헬라인은 지혜를 구합니다. 이 양자는 구하는 게 다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똑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기적이나 헬라인들의 지혜나 모두 인간 자신에 대한 관심입
니다. 다만 유대인들은 그런 것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얻어보려는 것이
며 헬라인들은 인간 자신의 내면에서 얻어보려는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사유능
력에 기대서 어떤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인간이 그저
동물처럼 본능적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참된 깨달음을 얻으려는 노력은 인간을 인
간되게 하는 본질에 속하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의 철학
입니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헬라(이방)인들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미련한 것
으로 여깁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바울이 본문에서 일컫고 있는 이방인들은 헬라인과 로마인을 중심으로 한 모
든 문명인들을 가리킵니다. 문명이 발달할 곳에서는 철학이 발달합니다. 그런 철
학에 근거해서 예술, 법, 학문이 발달하게 됩니다. 이런 문명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인간의 품위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가장 가치 있는 삶의 내용들을 확보해내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십자가는 인간의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일 뿐입니다.
십자가는 종교와 철학이 일구어놓은 인간문명과 반대의 길에 있습니다. 따라서 당
연히 십자가는 미련하게 간주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도 이 세계는 늘 문명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만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여기서 시시콜콜하게 열거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세계가
얼마나 화려하게 변화되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의 기본구조는 지
나칠 정도로 시장경제나 상품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이런 시대정신에 영합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문명을 모방하고 부러워합니다. 세련된 겉모습을 치장하는
데 마음이 분부합니다. 이렇듯 문명 중심적 사고방식에서 작은 교회는 부끄러움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이런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목회에 성공했
다느니, 실패했다느니 하고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런 인간의 모든
기준과 평가를 무화시키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런 힘의 질서와 문
명의 질서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
저는 오늘 사람들의 일반적 종교심 자체를 부정하거나, 인간의 문명생활을 매
도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바울도 역시 그것 자체를 부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한 인간은 자기의 삶이 안정되고 가능한대로 풍요
로워지기를 바라며, 세련된 문명 안에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역시 이런 요구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런 종교심과 철학적 지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런 영향을 받더라고 근본에
서는 다릅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유대인 같은 습관이 남아 있거나 헬라인 같은 태
도가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그들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전한
다는 사실에서 구별됩니다. 이 십자가의 그리스도 사건은 종교와 철학이 생산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한 세계입니다. 우리의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생각을 뛰
어넘는 하나님만의 고유한 사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부활생명이 담보되어 있습니다. 예
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24,25절). 종말까지 하나님은 우리의 종교적 본성과 철
학적 지혜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게 곧 하나님의 계
시이며, 이것을 알아 가는 이것에 바로 우리 삶의 의미와 희망이 있습니다.  
                  <2003.3.9. 영남제일교회 청년회 헌신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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