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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의와 은총

기타 조회 수 8901 추천 수 21 2004.07.02 15:41:02
성경본문 : 누가복음 18:9-14 



자기 의와 은총
눅 18:9-14

본문에 대한 곡해 두 가지
오늘 본문은 아주 간단하지만 그 의미는 깊고 넓습니다. 간단한 쪽으로만 보
면 뻔한 대답만 기다리고 있지만 깊고 넓은 쪽으로 보면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
리는 귀한 가르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우선 지나칠 정도로 간단하게 해석
함으로써 이 말씀이 교회 현장에서, 그리고 이 성서 본문을 읽거나 설교하는 사람
들에게서 어떻게 곡해되고 있는가를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이
예수님의 비유를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라고 일컬으면서, 바리새인을 비판하고
대신 세리를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결론적으로 이 세
리를 인정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바리새인처럼 잘난 척 하는 기도를 드리지 말고
세리처럼 죄인으로서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세리는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 아닙니다. 9절 말씀에 기록되었듯이 예수님은 "자기
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가르치신 것이지 세리
의 모범적인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읽을 때 범하
는 또 하나의 잘못은 세리의 기도를 모범으로 삼아서 신자들이 '죄의식'에 빠지는
것입니다. 자칫 기독교인들이 거의 습관적으로 자기를 죄인이라고 기도하거나 그
런 생각을 자주 하는데, 원칙적으로 말해서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은 더 이상 죄인
은 아닙니다. 이미 죄를 용서받은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따라서 막연하게 죄인이
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고, 자기의 구체적인 잘못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그 이
후로 그런 잘못을 더 이상 행하지 않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심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본문에 대한 곡해 두 가지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이 다루고
있는 핵심 인물을 세리로 설정하는 것이 하나이고, 특히 세리의 기도에서 기독교
인의 죄의식을 강조하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의 가
르침의 초점을 바리새인에게 두고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높이면 낮아
진다"고 경고하는 이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남과 비교하는 기도
바리새인의 기도를 잘 들어보십시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
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
람이 아닙니다."(11절). 이 바리새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본 동기는 다른 사람
과의 비교하는 것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무언가 낫다는 생각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기도가 무언지 모르는 사람입
니다. 오직 하나님에게 온 영혼을 집중하는 것이 기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
다. 그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만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의 도덕적인 모든 노력은
다른 사람보다 앞서기 위한 욕망에 불과합니다. 물론 겉으로는 감사의 기도를 드
리는 것 같지만 내면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우월감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신앙은 다른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는 삶의 태도
입니다. 성서도 늘 그런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
만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물론 사람을 보면 실망할 일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 상대적으로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는 참된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으로 어른이 된 사람
들은 이런 점에서 아주 철저했습니다. 바울이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낫다는 사실
에서 위로를 받았을까요? 어거스틴이 그랬을까요?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그
랬을까요? 영성의 대가 에크하르트가 그랬을까요? 모든 영적인 스승들은 다른 사
람과 비교하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자세가 무엇인지
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자기의 영적인 세계는 비교의 차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확보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너무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에 치우쳐
있다는 점에서 위기에 처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시시콜콜한 문제를 지적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두 가지 예를 들어보겠
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기도의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다른 교회보
다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라는 소문이 나기를 바랍니다. 다른 교회보다 좋은 교회
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별로 그렇게 큰 교회당이 필요한 게 아닌
데도 다른 교회보다 낫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무리하게 큰 교회당을 건축합니다.
교파 사이에도 서로 비교하면서 자기들의 교파가 낫다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합니
다. 물론 모든 일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일반적으로 그런 경향이 많습니
다.
이런 문제는 종교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도 여전히 똑같이 적용됩
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삶 자체가 늘 남을 의식하고 그들과 비교하면서 우
월감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게 아닌가요? 여성분들이 외모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이유도 역시 다른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예의를 지키기 위
해서 모양을 내는 것이야 무슨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만, 우리 사회에는 그것이 도
에 넘칩니다. 가짜라도 좋으니까 세계 유명 브랜드 핸드백과 목거리를 해야만 마
음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식들 교육 문제도 상당한 부분에서
는 남을 의식하기 때문에 무리를 합니다. 다른 아이들의 부모들을 다 하는데 나만
빠질 수 없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지나치
게 넓은 집에 삽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늘 자책감이나 열등감에 빠져들
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도 자기를 높이는 우월감 못지 않게 왜곡된 상태입니다. 신
앙적인 차원에서도 이런 자책감이 많습니다. 늘 자기가 부족하다는 신앙적 열등감
이나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한국 교회는 신앙적 자만심과 열
등감이 교묘하게 엮여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편으로는 '잘한다'고 추켜세
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왜 그렇게 못하냐'고 책망함으로써 매우 왜곡된 신앙형태
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현상이 결국은 남과 비교하는 것에 신앙과 삶의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 바리새인의
문제는 바로 남과의 비교에 있었습니다.  

비교 우월감은 업적 신앙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결론을 이렇게 내리셨습니다.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
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14
절).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잘난 척 한 바리새인보다는 자기를 낮추는 세리
를 의롭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우리도 이렇게 자기를 낮추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
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을 읽을 때마다 사람들은 이게 그럴 듯 하기는 하지만 현실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는 것
은 나중의 일이고, 현실적으로는 별로 '감'이 오지 않고, 오히려 당장은 자기 자신
과 주변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리 이런 말
씀을 귀가 닳도록 듣고 또 들어도 자기를 낮추며 살지 않습니다. 또는 속으로는 자
기를 자꾸 높이고 싶은 데 그걸 억지로 참으면서 체면상 자기를 낮추는 척 하기만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경험적으로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며 산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실 겁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아주 명백합니다. 우리에게 '업적 신앙'이 너무나 강하게 자리를 잡
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성취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업적을 확인
하려면 다른 사람과 비교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자기가 이룬 게 많으
면 흡족하고 부족하면 아쉬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의 업적을 통
해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일종의 '자기 의'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486주년을 맞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
당의 문 위에 95개 조항의 신학명제를 적은 대자보를 내다 붙인 날이 바로 1517년
10월31일인데, 우리 개신교 신자들은 그 날을 종교개혁기념일 지킵니다. 매년 10
월 마지막 주일이 종교개혁 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그 95개 조항의 신학 명제가
담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는 '면죄부'와 '교회 무오설'인데, 이런 문제를 포함해서
마틴 루터는 그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업적 의'와 투쟁했습니다. 특히 '면죄
부'는 죽은 부모나 가족 중에서 연옥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 살아있는 후손
이 면죄부를 사면 그들의 영혼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증명서였습니다. 로마 교황청
에서 이런 무리수를 두면서 까지 면죄부를 판매한 까닭은 '베드로 성당' 건축비 때
문이었습니다.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가보신 분들은 그 웅장함과 화려함과 아름다
움에 놀라셨을 줄 압니다. 이 베드로 성당의 이면에는 '면죄부'라는 일종의 사기극
이 자리하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인류의 모든 위대한 예술품이나 건축물들이 그
렇게 긍정적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그 당시 로마 가톨릭에서는 베드
로 성당을 완성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았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의 신앙이 얼
마나 확실한가를 확인하려는 심사였습니다. 일종의 업적의(義)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서, 그리고 사도바울이 율법주의자들과의 논
쟁에서 그렇게 위험시했던, 그리고 마틴 루터가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했던 업적의
가 개신교 역사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입니다. 자기가 성취
한 것을 통해서 자기를 확인해보려는 게 바로 인간의 본성인가 봅니다. 이런 점에
서 우리는 성서와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날카롭게 비추어 보아야 합
니다. 우리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충실하게 서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경계한 바리새인의 업적 신앙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 문제를 좀더 잘 이해하려면 업적의라는 문제가 단지 종교적인 차
원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를 사로잡고 있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앞에서 사
람들이 늘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살아간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곧 사람들에게
성취욕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게 없으면 허전하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런 성취
감 때문에 예술도 생기고 학문과 과학도 발전합니다만 신앙적인 면에서 업적의가
신자들을 살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성취감이 인간의 삶을 살리지는 못
합니다. 오히려 이런 성취감에 매달리게 되면 그때부터 인간의 삶은 훼손됩니다.
이게 맞는 말인가요, 그리고 왜 그럴까요?

업적의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다
업적의는 기본적으로 인간학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중심으로 판단하는 관점
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한 희생이며 봉사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자기가
무엇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능력을 중심으
로 생각하면 상당히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아무런 해결책되 되지 못합니다.
이게 아마 인간의 원죄에 속하는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
는 한 사람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무언가를 성취한 순간에는 어느 정
도 기쁨이 찾아오는 것 같지만 그런 순간이 지나가면 다시 무엇을 해야한다는 조
급증으로 쫓기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월세로 살다가 집을 매입했다고 합시다. 좋
은 집으로 이사하고 얼마간은 행복한 것 같지만 약간만 시간이 지나면 그런 느낌
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버립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해도 역시 그렇습니
다. 좋은 직장을 마련해도 역시 그것을 자기의 성취로 생각하고 머물러 있는 한 남
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역시 업적의에 머물러 있는 한 참된 기쁨은 맛볼 수 없습니다. 오
늘 본문에서 바리새인은 12절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자기의 업적으로 통해서 하나님에
게 인정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자기의 업적으로 생각하는
한 금식과 십일조의 기쁨은 사라지고 의무감과 우월감만, 그리고 조바심과 초조감
만 남습니다. 아니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형식에만 머물러 있게 됩니다. 이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런 현상 자체가 이미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
아진다'는 하나님의 판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증거를 우리는 이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11
절을 봅시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모르긴 몰라도
정신분석가가 이 구절을 읽는다면 이 바리새인은 자기가 말한 것과 정반대의 생각
에 젖어 있다고 분석할 것 같습니다. 욕심, 부정직, 음탕이라는 단어를 굳이 꺼낼
필요도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언급했다는 것은 이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 이런 요
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그가 사용한 단어는 모두가 한결같
이 인간의 부정적인 요소들입니다. 약간의 인간학적인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런 부정적인 요소들로 인해서 인간이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런 요소들은 인간이 인격적인 노력을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 것입니다. "나는 욕심이 없다"고 말한다고 해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닙
니다. 오히려 욕심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아마 이 바리새
인은 이런 문제로 인해서 양심적으로 고민하고 힘들어한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모두 이런 문제로 인해서 그런 갈등을 느낍니다.

은총의 세계로
기독교인은 이런 문제를 심리적으로 해결하지 않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욕심
과 부정직과 음탕을 없는 것처럼 위선적인 태도를 취하는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습
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문제를 부둥켜안고 괴로워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
들에 비해서 약간 도덕으로 낫다는 사실로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예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발버둥치는 게 아
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말하는 방식으로 표현하자
만 '이신칭의'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생각하지 우리의 선한 행위로 의로
워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은 하나님에 이르는 길을 근본적으로 잘못
선택했습니다. 토색, 불의, 간음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중심이어야 합
니다. 이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약간 도덕적으로 사는 방식을 알고 그런
자제력은 있지만 하나님의 은총은 몰랐습니다. 만약 이 바리새인이 이렇게 기도했
다면 괜찮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약간 정직하게 사
는 것은 인간의 능력입니다만 자유와 기쁨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마틴 루터의 신학은 바로 은총을 그 기초로 합니다. 구원은 곧 하나님이 주신
선물일 뿐이지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루터의 이런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대개는 그것의 심층적 의미를 파악하지는
못합니다. 은총의 신학은 인간을 모든 업적의로부터 해방시키지만, 업적의는 아무
리 우리가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여전히 상대적인 상태에 머물거나 더 나아가서
우리의 영성을 훼손시킬 뿐입니다. 이런 영성의 훼손은 이미 오늘 본문에서 예수
님이 지적한대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진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
기의 업적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했습니
다.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는 기도는 바로 자기가
의존할만한 업적이 없는 사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위선보
다는 불의가 훨씬 낫습니다. 왜냐하면 돌아설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의 은총에 철저하게 의존하지 않고, 약간이라도 자기의 성취감에 사로잡히는 사람
이라면 하나님에게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종교개혁 486주년을 맞습니다. 마틴 루터가 날카롭게 제시했던
업적의와 은총의 관계를 오늘 우리는 다시 새겨들어야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짧은 선교 역사에서 놀랍도록 발전했다는 사실에 도취하면 안 됩니다. 요즘 서울
의 대형 교회에서 벌어지는 자못 부끄러운 일들은 우리가 이만큼 해냈다는 성취감
에 빠져 있기 때문에 벌어집니다. 만약 우리가 신앙생활이나 일반적인 삶에서 이
런 업적의와 성취감으로부터 벗어나서 은총의 세계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놀라운
기쁨과 자유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곧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는 말씀
의 근본 의미입니다.   2003.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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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May 21, 2007
*.158.162.113

위에서 십일조에 대해 말씀하신 것처럼 똑같이 제가 그랬습니다
록펠러 이야기를 들은 뒤
꿔줬던 돈을 받았을 때나 길에서 동전을 주웠을 때도 십일조를 떼며 나중에 하나님의 축복으로 엄청난 거부가 되었을 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나는 이런 정도까지 철저하게 십일조했노라고 간증할 상상에 빠져 있었고요
무의미한 헌금에 빠지기도 했고
어느 기도원에서 주의 종에게 잘하면 축복받는 다는 얘기에 혹해서
용돈을 탈탈털어 목사님 댁에 가전제품을 밀어넣은 적도 있고요
별 능력이나 기적이 나타나지 않자, 십의 4조,5조까지 늘려보려다 부담되서 포기하기도 했고
원종수 권사님이 직장의 첫열매를 온전히 드렸다고 해서 저도 아르바이트 첫 월금을 전부 헌금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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