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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주현절 조회 수 19245 추천 수 304 2007.01.14 21:45:30
성경본문 : 요한복음 2:1-12 
http://wms.kehc.org/d/dabia/07.01.14.MP32007.01.14. 요 2:1-12
포도주 사건의 실체와 의미

가나 혼인잔치
오늘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장면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한편의 삽화입니다. 갈릴래아의 가나라는 곳에 혼인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옛날 잔칫집을 상상해보십시오. 국수, 부침이, 떡, 돼지고기, 막걸리, 온갖 과일 등, 먹을거리가 넘쳐납니다. 잔치는 한 집안만이 아니라 동네 전체가 벌이는 축제입니다. 이 혼인 잔치에 예수님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잔치 주인이 예수님의 친척일까요? 예수의 어머니까지 그 자리에 온 걸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또 예수의 제자들도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면 신랑이 예수의 친구나 제자일도 모르겠습니다.
잔치가 진행되는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손님이 예상보다 많이 온 탓인지, 손님들 중에서 두주불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든지, 또는 포도주를 충분히 장만하지 못할 정도로 집주인이 가난했든지, 여하튼 잔칫집으로서는 매우 곤란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 사실을 눈치 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렸습니다. 마리아의 태도를 보면 집주인과 마리아의 관계가 아주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포도주가 떨어진 걸 알 까닭이 없으며, 떨어진 것을 알았다 한들 그걸 예수에게 전할 까닭이 없습니다. 물론 마리아가 오지랖이 넓은 여자래서 그런 일까지 참견하고 나섰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대목에 대해서 성서기자는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4절) 이런 대답만 보면 조금 민망합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너무 냉정하게 대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5절)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하리라고 믿은 것 같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아들 예수의 대화는 오늘 우리에게 흡사 선문답처럼 들립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2천 년 전 요한복음 기자의 시각으로 보도된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상하게 들리는 건 당연합니다. 이 사건의 진행을 조금 더 따라갑시다.
성서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유대인들이 정결예식 때 사용하는 돌 항아리 여섯 개가 그 집에 놓여 있었습니다. 원래 물이 부족한 지역이기 때문에 항아리 숫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 부엌에도 물을 담아두는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동네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그 항아리에 담아두고 썼습니다. 지금보다 불편하긴 했지만 물 항아리가 놓인 부엌이라, 생각만 해도 정감이 어립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을 거부한 것 같았던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항아리마다 모두 물을 가득히 부어라.”(7절) 하인들이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자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일렀습니다. “이제는 퍼서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어라.”(8절)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자 물이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 이야기의 중요한 줄거리입니다. 물론 그 뒤로 잔치 맡은 이의 말이 나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이 사람은 포도주 맛을 보더니 신랑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는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 법인데 이 좋은 포도주가 아직까지 있으니 웬 일이오!”(10절) 간혹 술집 주인들이 술 취한 손님들에게 가짜 양주를 내놓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런 일은 이미 2천 년 전부터의 관행이군요. 잔치 맡은 사람의 이런 진술은 앞서 일어난 사건, 즉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보충 설명입니다.

디오니시우스
여러분들은 오늘의 이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이 듭니까? 크게 두 가지의 반응이 가능합니다. 첫째 반응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다는 사실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둘째 반응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은 2천 년 전 미숙한 사람들에게만 통용되는 것이지 오늘 우리에게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요한복음 기자의 보도는 사실입니까, 아니면 단지 신앙적인 해석에 불과합니까?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서는 이 사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이 대세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사실을 일단 전제하고 그 사건에서 신앙적인 교훈을 찾으려고 합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교훈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첫 기적을 행하신 곳이 혼인잔치 집이라는 사실은 곧 교회가 잔칫집과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이 포도주로 변했듯이 우리도 변해야 한다.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우리의 삶이 물에서 포도주로 변한다. 여러분은 이런 것 이외에 더 많은 교훈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이 하인들에게 명령하시기를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히 부으라고 하셨으니까 우리도 교회를 가득히 채워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또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만 살면 우리에게는 늘 기적이 일어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나중 포도주의 맛이 더 좋았듯이 기독교인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처음보다 나중으로 갈수록 더 깊은 맛을 내야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들은 나쁠 건 없지만 본문의 중심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려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우선 가나의 포도주 사건이 요한복음의 독자전승이라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공관복음인 마태, 마가, 누가는 이 사건을 보도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복음서는 똑같이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는 말씀인데, 왜 이 사건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을까요? 그만큼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말이 될까요? 이런 문제는 신학적으로 복잡하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가지는 맙시다. 이 본문은 다른 복음서와 구별되는 요한복음 기자의 고유한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 이 차이점은 근본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은 네 복음서 중에서 헬라철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요한복음은 헬라 사상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흔적들이 요한복음에 많이 등장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포도주 사건 이야기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기독교의 성서에만 나오는 게 아니라 이미 헬라 신화에 나옵니다. C.K. 바레트의 설명에 따르면 디오니시우스 신(神)은 포도나무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기적들은 디오니시우스 예배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기원전 5세기의 고고학 연구에서 이런 것들의 증거들이 나왔습니다. 요한복음 공동체는 이런 신화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들이 신앙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신화를 채용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주 사건은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는 말인가, 하고 언짢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성서를 읽는 독자들이 감당해야 할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우리의 신앙고백은 확실한 겁니다. 또한 복음서의 보도에는 순수하게 기독교적이지 않은, 또는 그 역사성을 완전하게 증명할 수 없는 사건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최선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을 통해서, 비록 그것이 헬라신화와 연관된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성서를 읽는 사람들에게는 깊은 영성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신학적 영성이기도 합니다. 성서본문이 말하는 핵심 메시지를 포착할 수 있는 영성을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에서 물이 포도주가 변했다는 사실 자체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미 헬라신화에 등장하는 요소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할까요? 오늘 우리는 이 사건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들을 수 있습니까?

기적과 영광
요한복음 기자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전한 다음에 11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 문장에서 첫 번째 ‘기적’과 당신의 ‘영광’이 중요합니다. 아니 포도주 사건 전체에서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첫 번째 기적은 헬라어 “아르켄 톤 세메이온”입니다. 성서에는 기적이 많이 등장합니다. 창세기의 창조 사건도 기적입니다. 무로부터 무엇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이 대망하는 새 하늘과 새 땅도 역시 기적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사이에 얼마나 많은 기적 이야기가 보도되고 있는지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서를 펼쳐들기만 하면 나오는 이런 기적 이야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서를 오해하기도 합니다.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자기 인생이 기적적으로 좋아지리라는 야무진 꿈을 기독교 신앙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들은 큰 착각입니다. 성서기자들은 기적 자체에 대해서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마술사입니다. 성서는 비록 기적 이야기를 담고 있어도 마술이 아닙니다. 성서 기자들이 보도하는 기적 이야기는 그야말로 “sign”, 즉 “표징”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을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기적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중요한 건 손가락이 아니라 달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꾸 손가락에 매달립니다.
당신,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안 잡힌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성서가 말씀하는 걸 그대로 믿으면 되지 거기서 무슨 손가락과 달 이야기를 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서언어가 가리키는 근원적인 생명의 세계로 눈을 돌리지 않으면 우리는 성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성서 기자들의 생각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중입니다.
요한은 이 기적이 “첫 번째”라고 말합니다. 헬라어 아르케는 순서에 따른 첫 번째라는 뜻만이 아니라 근원적인, 일차적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포도주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첫 번째 행한 것이라는 의미보다는 본질적인 사건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그것의 본질적인 의미, 그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바로 예수님의 “영광”(독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적을 중심으로 한 ‘호기심 천국’이 아닙니다. 기적, 꿈, 비전, 선교 등등, 이런 것들이 아니라 예수의 영광이 중심입니다. 이런 말이 여러분의 생각을 더 복잡하게 하는 것 같군요. 도대체 예수의 영광이라니, 손에 잡히지 않지요? 당연합니다. 2천 년 전 기독교 공동체들이 경험하고 인식한 예수의 영광을 우리가 쉽게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쉬운 것에만 눈독을 들입니다. 기적현상에만 심취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네, 하는 소문만을 퍼뜨립니다.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무슨 뜻인가요? 포도주 사건이 가리키고 있는 그 예수님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영광이라는 단어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됩니다. 지금은 “가문의 영광”이라는 말도 있지만, 원래 성서 언어에서 사람에게는 사용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에게 현시되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마리아의 요청에 대해서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신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 그리고 예수님을 모두 알아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이 현시가 완전하게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포도주 사건으로 부분적으로,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에게 현시되었습니다. 유대교의 정결의식에 사용되던 물이 생명을 살리는 포도주로 변화된 것처럼 예수님은 생명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신앙 안에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현시하셨다는 신앙 말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과 하나님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나타나는 구원 사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의 현존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 같은 존재론적인 변화가 가능합니다. 가장 궁극적인 변화는 우리가 부활의 몸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쳐집니다. 기독교인은 그런 희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운명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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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로

January 14, 2007
*.126.215.237

오늘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도 요한 2:1-12가 설교의 주제였습니다. 그래서 정 선생님의 설교가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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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수우

January 15, 2007
*.9.86.57

가나안 혼인잔치 비유는 수도없이 들었던 설교이지만 이런성서적 배경은 들어 본적이 없었습니다.
3대째 모태교인으로서 설교에 길이 들어진 한 사람입니다만 대부분 가나안잔치 설교는 한결같이

* 처음보다 나중에 더 맛있고 좋은 포도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라.
* 이유를 묻지 말고 항아리를 채우는 순종의 사람이 되라
* 기적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면 축복이 온다.

보통 이런 메세지가 공통적 이였습니다.
늘 목사님 설교 는 처음들어본 성서적 배경을 들으면서 충격을 줍니다.
처음 들어본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신학적 뜻을 깨달으면서 아항 그렇구나~~~~~~~라고
고개를 끄덕 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시대에 참 스승님을 만난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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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팽귄아지매

January 15, 2007
*.71.223.141

맞아요 ,,목사님설교 ,,,성서를 풀어주시는 차원이 ,,뭔가 다른 설교자들이랑은 정말 다릅니다......그리고 목사님의 강직함도 믿음직스럽구요.....길을 잃고 헤메이는 양들을 위해 등불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말씀 은혜받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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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자

January 15, 2007
*.165.179.136

" 요한복음 공동체는 이런 신화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들이 신앙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신화를 채용했다는 말씀입니다. "
-- 가능성은 있지만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 그래서 저는 지금 성서 기자들의 생각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중입니다."
-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자신있게 선포(?) 하려면 목사님께서 그렇게 주장하는 성서텍스트의 본문에 깊이 천착해야 하는데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 ......전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라고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 말하자면 포도주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첫 번째 행한 것이라는 의미보다는 본질적인 사건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그것의 본질적인 의미, 그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바로 예수님의 “영광”(독사)입니다."
-- 이 택스트에서 어떻게 본질적인 의미가 예수님의 doxa 인지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너무 단순하신건가요? 보수적인 목사님들이 성서 본문을 도구화시키는 것 못지않게 목사님 또한 성서해석이 childish 합니다.

그러나 결론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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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16, 2007
*.150.14.82

구도자 님,
제 설교를 비평하셨군요.
감사합니다.
어쩌면 내 생각보다 구도자 님의 생각이 더 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어떤 궁극적인 진리를 보았기 때문에 설교하는 건 아니에요.
내 눈에 들어온 것만큼만, 가능한 솔직하게 전하려는 것 뿐이지요.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무엇일까요?
이게 문제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니까요.
바둑 둘 줄 아세요?
바둑 이야기를 저는 종종 합니다.
한국이 현재 세계를 석권(?)하고 있는 분야가 바로 바둑입니다.
프로 9단들의 바둑 기보를 본 적이 있으세요?
그 기보를 설명하는 사람의 역할이 바로 설교와 같습니다.
기보 안에 어떤 수가 숨어 있습니다.
바둑의 실력이 부족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그게 안 보입니다.
내가 다 잘 본다는 말이 아니니까 오해 마세요.
다만 우리는 그걸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내 평생 소원은 이세돌과 직접 바둑을 한번 두는 겁니다.
9점을 깔고 두어야겠지요.
이세돌은 20수를 볼줄 아는데 나는 2수도 볼까 말까 합니다.
공연히 말이 이상한 데로 흘렀군요.
다른 글에서 내가 썼지만 성서는 기보입니다.
(참고적으로 다른 분들도 저의 설교비평이나
설교만 읽지 마시고 다른 글도 읽어보세요.
특강도 여럿이 됩니다.)
성서에는 수가 숨어 있어요.
그걸 어떻게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을까요?
이런 이야기는 이만하구요.

1. 디오니시우스 신화와 가나의 포도주 사건을 연결시키는 게 이상하다구요?
설교는 신학강의가 아니기 때문에 참고문헌을 대지 않았지만
이에 관한 연구는 이미 이루어졌답니다.
2. 성서기자들의 생각을 전하는 중이라는 내 표현이 경솔하다고 보시는군요.
그렇게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성서기자의 생각을 따라가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한 겁니다.
기보에서 그 수를 둔 바둑기사의 생각을 아는 게 중요한 것 처럼 말입니다.
3. 포도주 사건의 본질적인 의미가 예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그 이야기를 읽어보면 그대로 나오는 대답이 아닌가요?
어떤 저자든지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게 결론이지요.
그리고 여기에는 더 중요한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성서텍스트의 해석은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순환>에 의해서 전개된답니다.
기독교 전체를 이해하지 않으면 부분이 이해될 수 없어요.
그 기독교 전체는 조직신학이 담당합니다.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는 전체 체계를 알아야
성서의 부분적인 대목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본문은 사실 <기독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누구냐, 하는 질문을 그 안에 깔고 있는 거에요.
지난 2천년 동안 신학은 이것에 대해서 질문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과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서를 읽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좀 과격하게 말하고 있으니까 이해하고 들어세요.
이런 점에서 저는 평신도들의 성서읽기를 그렇게 권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서를 읽지 말라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게 좋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다른 글에서 저는 평신도 설교를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흡사 기보를 설명하려면
프로 기사가 되든지
아니면 아마추어라고 하더라도 '정석'을 충분히 공부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만인제사장직과 연관시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오늘 내가 왜 이렇게 말이 길어지는지...
아마 다비아가 어떻다는 말들이 주자 여기에 올라오는 걸 보고
조금 격해졌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냥 사실을 담담하게 말하는 것 뿐이에요.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하고,
그게 안 되면 어쩔 수 없지요.

끝으로 내 성서해석이 차일디쉬하고 말씀했는데,
내 영어가 짧아서, 그게 무슨 뜻인가요?
유치하다는 뜻, 순진하다는 뜻?
그렇게 보였다면 할 수 없군요.
어쨌든지 제 설교에 관심을 갖고
코멘트를 주신 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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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자

January 16, 2007
*.165.224.145

childish 라는 표현을 써 놓고나서 영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후자로 이해해 주신다면 제 맘음이 좀 홀가분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설명 잘 읽었습니다.
사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만 지적한 것 뿐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숨은 의도까지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는 것이 제 솔직한 대답입니다.
저의 무례한 표현에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주셔서 대답해 주신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의문들이 있습니다.
건필하시고 주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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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박상열

January 16, 2007
*.114.22.74

목사님~! 설교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은 제겐 좀 의아한사건 이었습니다.
멀쩡한 물을 술로 만드시다뇨. 술은 쳐다도 봐선 안된다고 하던데...(구약에서.)^^ㅎㅎ
어쨋든 예수님의 첫번째 기적이고 그래서 그것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의
표적이라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설교를 통해서, 물이 생명을 살리는 포도주로 변한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 바로 그리스도안에 현시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분명 주일아침 졸린 눈을 비비고 몽롱한 상태에서도 편히 들을 수 있는
설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설교 전반의 초점 자체가 하나님만을 향하고 있음을 볼때
이러한 설교를 통해 감히 제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때마다 목사님께서도 종종 언급하셨던 '누미노제'(두려움?)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 또한 참된 설교를 통해서 나타나는 은혜중의 하나이겠지요.

목사님!
생각할 수 있는 바른 질문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올바른 질문 가운데 참된 해답을,,, 말씀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발견하는 한주 보내겠습니다.
건강하시길~!

추신 : 신화를 통해 말씀을 보충 설명해주시는 것은 개인적으로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몇년 전만해도 '신화란 안티그리스도 다' 정도로 생각했었지만, C.S 루이스의 저작을 접하면서
여러신화가 하나의 위대한 진리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신화가 그리스도로
수렴된다는 것입니다.(물론 제가 이것에 대해서 설명할 자신은 없구요. 동의 한다는정도입니다)
어쨋든 이런 이해를 통해 '예수는 신화다' 라는 책에 대한 거부감에서 예수를 신화로 치부하려
는 저자들의 노력이 ,되려, 이방 신화까지도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손가락이 될 수 있다라는
좋은 말씀(?)을 주시고 말았죠.^^
profile

[레벨:1]김영동

January 16, 2007
*.129.204.79

이 '맛'이라는 분, 아니 이전에 '이 돌'이라고 하신 분, 기본적으로 글 쓰는 예의가 안 되있으신 분이 분명하기에 전에 그가 쓴 글들이 다 폐기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이렇게 예의없는 글을 남기시는군요. 다비아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 불쾌하고, 이 분이 전에 목사였다니 저 역시 한 사람의 목사로서 부끄럽기도 하고... 제발 자중하시길 바라고... 관리자이신 이길용 목사님 어떻게 조치 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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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첫날처럼

January 16, 2007
*.104.198.227

어떤 분은 이 말씀을 예수의 새 가르침이 유대교의 오래된 가르침과 차별화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이야기라고 설교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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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임마누엘

January 16, 2007
*.67.140.134

맛님 께서 하시는 말씀에 저는 어느정도 동의합니다
성서를 인문학적으로만 접근한다면 무리가 있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동의를 한다해도
예를 잊고 무례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닌듯합니다..
옳으면 다지 뭐 다른게 있는가..라고 말씀하시겠지만..

그리스도께서도 옳음만을 주장하셨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 은혜를 입을 수 있었겠습니까..
옳음에는 사랑과 예가 있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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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명경지수

January 16, 2007
*.241.161.130

김영동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게시판에서 횡설수설하는건 귀 한 번 씻어버리면 된다치고,
여기까지 와서 이러시는데는 정말 인내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군요.
"돌"님에게 너그러우신분들,
이건 '열린마음'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 아닌가요?
심지어는 '이런 수준..'이라고까지 하시는데,

애들 말로 "도대체 집중을 할 수가 없어요." ...버럭!
profile

[레벨:24]임마누엘

January 16, 2007
*.67.140.134

맛님의 진리를 향한 열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자 하는 것은..
표현의 재창조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베드로 전서 1장 4절~7절』

믿음에는 덕이 필요한 것이지요..

맛님이 자신을 설명하실 때 진리수호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저 또한 하나님의 진리가 명확히 나타나야하며 진리가 지켜져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표현을 정중히 하셔야겠지요..

누가복음을 기술한 누가도 이방인이였던 데오빌로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존칭과 정중한 표현을 사용하였지요..

저도 요즘에 하나님께서 이런것을 많이 알게하십니다.
사랑없는 진리와 예의없는 지적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오히려 보이지 않도록 막는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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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팽귄아지매

January 16, 2007
*.71.223.141

삼돌이 아자씨!!!!!!!또,,,퇴장 당하셨다가 ,,등장하셨네요...(이번엔 ,, 애교도 좀 부리시는군요 ㅋㅋ)
글을 보아하니..님은 진리를 다 깨달으신분 같으신데요?
제말이 맞다면,,,,그만 하산하심이..............ㅋㅋ
도대체 집중을 할수가 없어요...버~~럭...2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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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January 16, 2007
*.247.198.118

정목사님의 설교말씀과 여러분들의 글들 잘 읽었습니다.

먼저 맛 님의 성경을 보는 시각에 대해서는 조금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해 드립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맛님과 같이 그리 단순히 보면
문자 이면에 나타난 진정한 의미를 우리는 알 수가 없을뿐 아니라
진정한 의도를 왜곡 하게 됩니다.

한때 저도 성경을 읽는 시각에 대해 맛님과 같은 시각 이었습니다만
지금은 그러한 시각으로는 말씀속에 담긴 진리의 세계로 갈 수 없다는
생각 이며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위험한 방법중 하나라 생각 합니다.

왜냐구요^^ 구약의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의 성경을 일고 해석하는
방식이 매우 문자적이고 단순 하였던 것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이해하고 구속사에서 버림을 받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 입니다.

이러한 성경 해석의 잘못된점을 예수님께서 영적이고 본질적으로
바로잡으시고 바르게 해석해주심으로서 새로운 교회시대를 여신
것 입니다. 지금은 이런이야기가 님에게 잘 이해되기 어렵고 받아들
이기 어려우실거라 생각 합니다..

그렇다고 본문에 대한 정용섭 목사님의 해석을 전적으로 지지하는것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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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January 16, 2007
*.247.198.118

본문에 대한 정목사님의 설교본문에 대해 전반적으로 도의 합니다만
저는 조금더 다른 시각에서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나 생각 합니다.

저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인문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본설교의
경우는 다행이 그리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만 일반적으로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헬라신화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이야기의 영향을 받아
포도주 사건을 기록하였다는 류의 해석은 일견 합리적인것 같은나 매우 비 합
리적인 근거 제시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과연 헬라신화에 정통 할까요 아니면 구약 성경에 정통 할까요?
다연히 구약의 성경을 배우고 공부하고 자란 사람 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헬라신화에 대한 지식이 많고 그러한 배경하에 이 사건을 기록했다는 말은
근거가 전혀 없는 추측이지요?

신약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의 모든 지식의 근간은 구약의 말씀에 있으며 따라서
그들의 용어 선택과 사용은 정확히 구약 기록자들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당연한 사고 방식 입니다.

따라서 물을 변하여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을 기록한 의도와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구약에서 언급되어지는 "포도주"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구약의
의미와 연결하어 보아야 하는 것이지 헬라의 신화를 들여다 보아선 안되는 것
입니다..

구약의 저자들은 "포도주"의 의미를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와 부정적인
의미 두가지 방향 모두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본문의 경우는 긍정적 의미로 사용된
겨우를 잘 살펴 보아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결론적으로 본 기적의 의미를 예수님의 "영광"으로 본 정목사님의 결론에는
동의 하지만 본질과 정곡을 찌르고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본 사건은 첫번째 이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을 규명"해주는 사건이라
생각 하면 이는 구약의 몇몇 예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특히 이사야 25장 6절 말씀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 입니다.

본설교를 읽으며 헬라신화를 이야기 하기이전에 아래 선지자의 글들이
인용되었으면 훨씬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 1: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

사 1:22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사 25: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욜 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욜 2:24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본문 찾아 잘 읽어 보시면 선지지들의 글과 요한복음저자의 생각과 신약의
일관성을 잘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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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January 16, 2007
*.247.198.118

마침 본문에 관련된 김나사로목사의 글이 있어 사랑방에 올려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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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톨스토이백작

January 17, 2007
*.104.93.37

구도자님과 맛님은 꼭 교회에서 흔히 만나뵙는 분들 같네요. 님들이 그런 생각이시라면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그저 자신의 길에서 열심히 하시고 정목사님 판단은 그만두심이 어떠신지요? 훌륭한 스승은 긴 수업시간에 꼭 한두번 학생들을 희열에 빠트리는 가르침(영감)을 주시는거 아닙니까? 긴 수업 내내 자기를 기쁘게 아니하였다고 성을 내시는 모습은 꼭 장터 아이들 비유를 연상시킵니다. 판단은 모름지기 복음의 가장 큰 해악입니다. 건전한 비판과 손가락질같은 판단은 분명 다른겁니다. 판단을 그치시고 정목사님의 말씀을 경청하신다면 한두번쯤은 희열을 느끼실 수 있을텐데요. 인문학 논리로 설교를 한다니.....그러면 님들은 어떤 논리로 설교를 해야한다는 것입니까? 아마 인문학에 대한 어떤 편견이 있는 것 같네요. 예수님의 성서해석이나 설교방식이 곧 인문학적인 거라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님들의 말씀을 저는 함께 성경 공부하는 분들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아마도 아주 좋은 보기가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님들의 열정은 충분히 사고도 남습니다. 저도 과거에 님들과같은 생각으로 성경을 읽었고, 또 그렇게 배웠으니까요. 그러나 공부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그런 차일디쉬한(?) 생각들은 극복이 되던데요. 아마 제가 인문학 전공자라 님들처럼 처음믿음을 굳건히 지키지못한 탓인지도 모르겠군요.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은 비평당사자인 방인근 목사님도 말했듯이 꼭 있어야하는 비평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생각이 마음에 들지않는다고 입을 막으려는 것이야말로 반인문적인 것이고, 소통을 거부하는 유치한 일입니다. 님들이 그토록 소중히하는 그것이 바로 전달되려면 진리는 진리자체로 언제나 꿀리지 않을거라는 담대함을 가지심으로 누구와도 겸손히 말할 수 있어야한다고 봅니다. 혹 구도자님은 맛님과는 자기가 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제가 보기엔 다름이 없는 논리를 가지신것 같아서 함께 묶어 말씀드립니다.
profile

구도자

January 17, 2007
*.160.189.210

아하...제 댓글에 정 목사님이 이런 기분이었겠군요.
예상은 했지만 가슴이 울렁거리네요....^^

톨스토이 백작님! 잘 읽었습니다.
사실 저는 맛님도 잘 모르고 그분의 생각이나 전달방식도 좋아하지 않아서
제가 맛님과 같은 논리를 가진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전 아무리 생각해도 그 분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어쩌겠습니까? (억울함의 표현입니다....^^)

제가 경솔하게 목사님께 댓글을 단 것은 인정합니다.
다시한번 사과드립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제가 차일디쉬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인문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인문학적 접근을 부정하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리고 정 목사님의 비평작업 자체를 아주 즐거이 반기는 사람입니다.(믿거나 말거나)

제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제 질문이 반인문적인 질문이었는지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 혹은 생각 자체를 입 막음 하려고 했던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부분이 제일 억울하다니까요...^^&)

저의 겸손함을 꾸짖는 것이라면 할 말도 없구요, 인정합니다.
그게 정말 어렵더라구요.
겸손하고 싶은데 존재에 교만 밖에는 없는지라....

어쨌거나
백작님이 절 그렇게 보신 것에 대해서는 별 할 말은 없습니다.
그렇게 느끼셨으니까 쓰셨겠죠.

다만 저는
1. 디오니시우스 신화와 가나의 포도주 사건을 연결시키는데 논리가 너무 단순하기에 의문을 던진 것 뿐이었습니다. 적어도 이런 코멘트만 있었어도 질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 지금 이 시간에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신학계에서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입니다만...."

위의 설교문만 보면 이렇습니다. "당시 디오니시우스 예배에서 이와 유사한 신화적 요소가 있었다. 요한복음의 저자(공동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신화를 차용한 것이다." 리고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렇기에 가능성은 있지만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 것이구요. 물론 가능성이 농후할 지라도 적어도 위의 설교문만 갖고는 그렇게 단정짓기에 너무 논리적으로 희박하다고 생걱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정 목사님을 흠모하고(^^) 있지만 제 머리로 이해가 안되는 것을 존경한다고 억지로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아닙니까?

2. "그래서 저는 지금 성서 기자들의 생각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중입니다."
--이 부분은 이미 정 목사님께서 설명을 해 주셔서 해결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 부분에 딴지를 걸었던 것은 평소 겸손하신 정 목사님의 어튜가 아닌 것 같아 놀라서 나온 반응 정도로 이해해 주십시오. 처음 제가 받은 느낌은 "마치 당시의 성서기자 속에 들어 나온 것 처럼...." 말씀하신다는 것이었죠.

3. 포도주 사건의 본질이 어떻게 예수님의 영광이 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말 그대로 '어떻게' 가 알고 싶어서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본질에 대한 다른 의견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제 머리로는 설교문을 아무리 읽어 보아도 거기까지 유추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설교 본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 말하자면 포도주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첫 번째 행한 것이라는 의미보다는 본질적인 사건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이렇게 넘어갑니다.
"그것의 본질적인 의미, 그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바로 예수님의 “영광”(독사)입니다."

저는 요 부분이 선뜻 이해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본질적인 사건이 뭐냐? 하고 결론을 내기까지의 과정이 전혀 없이 막 바로 그것은 " 예수님의 영광" 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좀 설명해 달라고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 느낌으로 너무 단순하다고 받아들여 졌으며 요기서 제가 좀 건방을 떨었지요.
목사님 이하 다비안의 다룬 분들께도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합니다.
픽 픽 질러대는 나쁜 버릇을 못 고쳐서......

백작님 ! 대답이 되었나요?
전 인문학에 무지할 수는 있어도 아는게 없어서 편견도 없답니다.
백작님 덕분에 목사님 맘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아이고...쑥스러워서....)
그리고 저 좀 잘 좀 봐 주세요. 네?.............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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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athe

January 17, 2007
*.239.187.53

이곳엔 주님이 서실 자리가 없네요. 아볼로 목사가 너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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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브니엘남

February 11, 2007
*.150.83.34

이 이적은 요한 복음의 전체 주제와도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1절에서 처음 표적이라는 단어를 요한은 쓰고 있습니다. 표적이란 "무엇인가를 상징한다"는 뜻입니다. 3~12장의 모든 이적이 이에 관계가 된다는 뜻이지요. 즉 생명과 관계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코람데오님께서 말씀 드린 것 같이 이 곳에서는 "포도주"의 의미를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였고 "물"의 의미를 왕하 2장 21절과 같이 부정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즉 사망의 물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이적은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는 것을 상징하지요. 이것은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와도 부합됩니다. 3~12장의 모든 이적을 이에 맞추어 해석해야 됩니다. 제가 보기에는 절대로 다른 신화를 가져와서 요한이 말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적은 주님이 처음 하신 이적이니까요. 물론 다른 복음서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말하고 있는 복음은 요한복음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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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기타 영원한 구원의 근원 2006-04-02 12746
160 기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4] 2006-03-26 11645
159 기타 예루살렘 성전과 예수의 부활 [4] 2006-03-19 15691
158 기타 믿음의 실체 [6] 2006-03-12 13202
157 기타 해방과 자유 [2] 2006-03-05 13290
156 기타 그리스도의 얼굴의 빛 [5] 2006-02-26 11180
155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12263
154 기타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 2월12일 [3] 2006-02-12 13060
153 기타 사도 바울의 자유 [2] 2006-02-05 13624
152 기타 예언 전통 앞에서, 1월19일 2006-01-29 11039
151 기타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1월22일 [2] 2006-01-22 14794
150 기타 믿음의 토대, 1월15일 [3] [1] 2006-01-15 10703
149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1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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