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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성탄절 조회 수 12270 추천 수 23 2004.07.02 16:08:12
성경본문 : 누가복음 1:46-56 

마리아의 노래

20031225, 1:46-56

 

 

그저께((1223) 대구경북 목협 성탄절 평화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10명 가량의 적은 숫자가 모였지만 찬양, 기도, 성경봉독, 성찬으로 이어지는 열린 예배를 통해서 새로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부른 찬양 가운데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쓴 평화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내용의 찬양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서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함께 이 찬양을 부르면서 마음속으로 느낀 바는 내가 프란체스코 같은 삶의 자세를 견지하지 못하면서 입으로만 이렇게 노래를 부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자기 삶을 담아내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찬양을 부르는 그 이유는 신앙을 일종의 감상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런 감상주의적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와는 전혀 상관없이 인간의 심리적 작용만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훨씬 현실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흡사 한에 사로잡혀 있는 여자 분들이 이웃 초상집에 가서 과할 정도로 슬픔을 풀어내듯이 말입니다. 사람의 억눌린 무의식은 이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풀어내야만 그런 대로 자기의 삶을 꾸려갈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늘 이런 식으로 움직이게 되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은 그 무게를 점점 잃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실용적인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것을 추상화시키는 것도 문제입니다. 실용성과 추상성을 넘어서 그 현실성을 따라잡아야 하는데, 그 작업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프란체스코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슴을 때리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의 깊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종교적 수사로만 접근하게 되면 우리는 말씀을 은폐시키게 됩니다. 도대체 이 노래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사실 이 찬양이 마리아에 의해서 불렸다는 것은 그렇게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풍습에 의하면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는 사춘기를 갓 지난 어린 소녀였을 것입니다. 그 어린 소녀가 이렇게 인류 역사를 해석할만한 능력을 갖추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아마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이 이 마리아의 이름을 빌려 전승된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 역사적 사실 여부는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방식을 통해서 전승되었든지 신약성서가 기록될 당시 초기 기독교가 가슴에 담고 있던 신앙이 이런 노래의 형식으로 표출되었다는 사실만은 명백하니까 말입니다.

 

구약성서에도 자주 진술되고 있듯이 오늘 마리아의 찬양도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노래합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31).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막연한 생각이거나, 아니면 프로이트 같은 이들이 비판하듯이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반영된 심리적 표현이 아닙니다. 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대하고 있듯이 우리가 이룰 수 없는 어떤 욕망을 대신 이루어준다는 차원에서 언급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세계와 그 역사를 꿰뚫어보는 예언자적 분석이며 판단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전능한 분이 아니라면 그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세계가 그 분에 의해서 시작되었듯이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그 분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의 전능은 기계적인 방식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흡사 독재자들이 모든 것을 독점하고 전횡을 행사하는 것 같은 전능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방식이라면 오히려 이 세상의 권력자들과 대기업가들이 훨씬 능력을 많이 갖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참된 의미에서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 다른 방식에 대해서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1)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51).

2)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52).

3)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53).

 

위에서 언급된 세 종류의 사람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렇게도 성취하기를 원하는 그런 대상입니다. 우리가 눈만 뜨면 경험하듯이 오늘 대개의 사람들은 자부심과 권력과 부를 잡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오매불망 매달리고 있는 이런 것들을 흩으시고 내치시고 빈손이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과연 이게 정확한 역사 진단일까요? 아니면 이런 힘에 의해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요? 세 가지 요소가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지만 약간씩 다른 부분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개별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마음이 교만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자기 마음을 높은 데 둔다는 것입니다. 높은 희망을 가진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에 비해서 높은 데 두는 것 말입니다. 잘난 척 한다는 표현이 여기에 어울릴 것 같습니다. 이게 늘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존중할 줄 알아야 다른 사람도 자기를 존중하게 됩니다. 공연히 자괴심이나 열등감을 갖고 사는 것도 그렇게 바람직 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는 마음, 그래서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올려놓는 그런 마음은 신앙과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으로 이상한 존재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놓치는 일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거나 무슨 말을 할 때도 자기가 중심이 됩니다. 특별히 드러내놓고 잘난 척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래도 비교적 교양이 있고 체면도 차릴 줄 아는 사람도 속으로는 자기를 중심으로 마음을 씁니다. 이게 마음이 교만한 게 아닐까요?

마리아의 기도는 이렇게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하나님이 전능한 팔로 흩으신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앞으로 언젠가 교만한 사람에게 닥칠 불행을 예고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잘난 척 하지만 그런 마음을 계속 품고 있으면 결국 주변 사람들이 흩어진다고 말입니다. 이런 해석도 그렇게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좀더 철저하게 생각한다면 이런 일이 미래에 돌려지는 것만이 아니라 이미 현재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은, 즉 자기의 존재의 근거를 자기 자신에게만 두는 사람들은, 그래서 다른 사람을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지배와 도구의 관계로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늘 바람의 겨와 같이 흩날릴 뿐입니다. 아무리 강철같은 자기 확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니 자기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굳게 잠그면 잠글수록 마음은 더욱 허전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계속적으로 잘난 척하면서 사람의 눈을 잠시 속일 수 있습니다만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다시 이렇게 준엄하게 울려 퍼집니다. 주님이 전능하신 팔로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신다고 말입니다. 이런 구절만 본다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그야말로 혁명적 기운을 가득 품고 있었습니다. 민초들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황제의 권위에 반역하는 노래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체제 전복이나 모든 가치와 질서에 대한 부정을 지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동시에 그 어떤 권위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절대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용어이기 때문에 정치가 절대적인 영역으로 들어갈 때마다 교회는 그것에 도전했습니다. 사실 권력의 속성은 자기의 힘을 끊임없이 키우는 데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이 지나치게 될 때 스스로 허물어집니다.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정치가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일으켜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면 마땅히 수용해야 하겠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힘으로 행사된다면 그것은 반드시 부패하게 되며, 따라서 우리가 피를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붕괴됩니다. 구약성서의 배경을 이루었던 지중해 부근의 모든 제국이 걸어왔던 흥망성쇠를 보면 이는 분명합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로마제국도 몰락의 길을 걸었으며, 히틀러의 신성로마제국 이데올로기도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리고 그가 전능하다면 자기를 절대화하는 권력을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쳐 권력을 쫓아낸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기 절대화의 길을 걷는 권력을 하나님이 내리치십니다. 자기가 쌓아올린 그 권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용함으로써 망하는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부요한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낸다는 이 말은 맞습니까? 예수님이 팔복말씀을 복과 화의 대조법으로 새롭게 전승하고 있는 누가복음 6:24절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모든 삶의 과정이 돈과 연결되어 있는 지금 우리는 이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부정한 방식으로 돈을 버는 것에 대한 경고 정도로 생각하거나, 영적으로 자만심에 빠져있는 사람에 대한 경고로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얼버무리거나 왜곡하는 신앙의 태도가 바로 우리의 한계입니다. 오늘 본문과 624절을 함께 묶어서 생각한다면 어떤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자는 부가 주는 위로에 만족하기 때문에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이 주는 참된 위로를 원치 않게 됩니다. 그의 마음이 돈과 연관된 것으로 가득하다는 말은 결국 그의 마음속에 아무 것도 담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평생 돈만 생각하다가 결국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것들을 상실하고 빈손이 되고 맙니다.

사실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에 비해서 엄청나게 부자로 삽니다. 지난 주일에도 잠시 언급한 것 같습니다만,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1960,70년대에 우리 모두는 가난을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가 성실하게 노력하기만 하면 이 추운 시절에도 따뜻한 방에서 쌀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100년 전의 우리 조상들에 비해서 얼마나 호화롭게 사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삶은 어딘가 허전합니다. 비어있습니다. 부를 통한 위로에 만족하는 삶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삶 자체는 비어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아무리 경제적으로 일등 국가로 발돋움한다고 하더라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담겨 있는 예언이지만, 동시에 사회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차원에서도 옳습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이렇게 슬픈 현실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고 노래합니다. 지난 주일 우리가 함께 보았던 이사야도 역시 이런 신탁을 선포했습니다(55:1이하). 흔히들 예수 믿는다고 돈이 나와, 밥이 나와, 하고 말합니다. 돈과 밥이 있어야 우리가 생존하는 게 사실이기는 하지만 예수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밥입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듯이 참된 생명의 양식이며 음료입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프란체스코는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낮은 땅으로 오신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현실의 낮은 자리에서 영광의 자리로 옮기게 됩니다. 배고픈 현실에서 참된 배부름으로 나아갑니다. 과연 성탄절 이 아침에 우리는 이런 영적 배부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있습니까? 마리아의 찬양은 곧 우리에게서 현실화되어야 할 우리 자신의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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