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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마리아와 부활의 주

부활절 조회 수 19625 추천 수 0 2011.04.24 23:2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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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20:1-18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의 주

요한복음 20:1-18, 부활절, 2011년 4월24일

 

     오늘은 2011년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그리스도교 교회력에서 전통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절기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부활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이에 반해 성탄절은 상당히 훗날 교회 절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부활절은 세계 모든 교회가 똑같은 날로 지키지만 성탄절은 좀 다릅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는 12월25일을, 정교회는 1월6일을 성탄절로 지킵니다. 이는 곧 부활절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부활절을 맞아 한국교회는 지역마다 연합예배를 드립니다. 가장 큰 축제니까 그럴만합니다. 세례를 베풀기도 하고, 달걀을 나눠 먹으면서 부활의 의미를 새기기도 합니다. 부활절 음악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있습니다. 각종 행사를 다채롭게 여는 것도 나름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행사에 머물지 말고 부활의 근본적인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선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에 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을 죽었다가 다시 사는 환생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이나 나사로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이건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됩니다. 피부가 검은 사람은 검은 피부로, 장애인은 장애를 안고 다시 살아난다면 하나님의 정의에 위배됩니다. 부활의 세계에서도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친구와 형제 관계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그래서 가족이 없이 외롭게 살았던 사람이 그대로 외롭다면 부활의 세계는 절대적인 세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의 세계를 장가가고 시집가는 방식이 아니라 천사와 같은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삶으로 회귀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은 무엇일까요? 부활의 상태를 실증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는 사람은 사이비 교주입니다. 부활이 무의미하다거나 부정해도 좋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실존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가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생명 사건입니다. 그 하나님의 종말론적 생명 사건은 우리의 세계 경험을 근본적으로 뛰어넘습니다. 지금의 이 세계 경험에 고착되어 있는 한 부활생명을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비유를 들어야겠군요. 부활은 씨앗으로부터 꽃으로 변화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씨앗만으로는 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실험실에서 씨앗을 아무리 물리적이고 화학적으로 분해하고 힘을 가해도 거기서 꽃을 뽑아낼 수 없습니다. 씨앗은 땅에 심겨 썩어서 싹을 틔우는 과정을 거쳐서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꽃은 씨앗에서 나오는 게 분명하지만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세계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씨앗은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이 세상의 삶과 비슷합니다. 이것을 아무리 분석하고 가공해도 부활에 이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죽는 것만으로 끝난다면 물론 끝장입니다. 모든 씨앗이 썩는다고 해서 무조건 꽃을 피울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인간의 죽음 뒤에는 창조주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고유한 권능이 개입되어서 부활의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런 설명이 옳은지, 어떤 근거가 있는 건지 궁금하게 생각하실 분들이 있겠지요.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역사에서 일어난 부활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종말론적 생명 사건이 역사 안으로 선취된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것입니다. 만약 그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부활을 막연하게만 생각했을 겁니다. 기껏해야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 정도로 생각했을 겁니다. 구약성서의 유대인들도 부활을 모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모두 게헨나, 즉 지하의 음부로 내려갈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역사 경험을 통해서 좀더 발전된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묵시사상입니다. 이런 사상들은 여전히 부활의 실체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교회는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종교와 사상이 미처 알지 못했던 구체적인 부활의 세계를 알고 맛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류의 미래가 담보된 부활 사건이 예수의 운명에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역사의 한 지점에서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첫 증인은 놀랍게도 막달라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자입니다.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부활의 첫 증인들이 모두 여자들이었습니다. 고대인들은 동양이건 서양이건 큰 차이가 없이 여자들의 권위를 남자들에 비해서 낮추어보았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오히려 여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뜻밖입니다. 바울은 이와 달리 부활 증인의 목록에서 여자들을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서와 바울 서신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가 지금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각각 다른 전승을 따랐을지 모르고, 아니면 바울이 복음서를 전제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복음서에 따르면 여자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가장 처음으로 확인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매장할 때 적절한 절차를 밟지 못했습니다. 안식일이 바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당시에 여자들이 맡았습니다. 여자들은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이 매장된 무덤으로 갔다가 무덤이 빈 것을 본 것입니다. 복음서마다 이들 여자들의 명단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모든 명단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는 막달라 마리아만 나옵니다. 요한복음에는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의 중요한 제자로 취급되는데, 이 부활 전승에서만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밀립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으로 추정되는 제자에게 그 사실을 알립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어디론가 치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제자들에게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무덤으로 달려간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에 시체는 없고 시체를 쌌던 세마포만 보았습니다. 이들은 이게 무슨 사태인지 알지 못한 채 각각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다가 무덤 안을 들여다보다가 뜻밖의 광경을 보았습니다. 흰 옷을 입은 두 천사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마리아의 대답입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요 20:13) 마리아가 이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보자 부활의 주님이 계셨지만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천사들과 똑같은 내용으로 마리에게 왜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인줄로 착각하고 천사들에게 했던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요 20:15) 마리아의 진술은 예수 부활에 대한 당시의 소문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한 게 아니라 누군가 시체를 치워놓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 27:62절 이하에 따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와서 예수님을 속이던 자라고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한 뒤에 사람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헛소문을 퍼트릴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이 그 이전보다 더 혼란스럽게 될 것이라고 은근히 협박을 했습니다. 시체가 도난당하지 않도록 경비를 잘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은 그들만이 아니라 마리아와 제자들에게도 당혹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무덤 부근에서 만나는 이들마다 예수님의 시체를 찾아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마리아의 마음을 헤아리셨겠지요.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 순간에 마리아의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알아보고 선생님이라는 뜻의 ‘랍오니!’ 하고 대답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지난날 일곱 귀신에 들렸다가 예수님을 통해서 치유 받은 경험이 있었습니다.(막 16:9) 주님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그녀는 아주 놀랍고 특별한 경험을 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그냥 경험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먼저 부르셔야만 합니다. 부활의 주님이 빌라도와 가야바나 이스라엘 주민들에게 나타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나타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볼 수 있거나 알아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과의 어떤 특별한 관계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일상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없는 것을 서로 공유하기 마련입니다. 그 두 사람에게 어떤 공명이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이 돈벌이의 대상에 불과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가득한 피조물로 경험됩니다. 성경이 어떤 사람에게는 흔한 책에 불과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고 전했습니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부활 경험의 첫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와 똑같은 차원에서 주님의 부활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녀의 경험은 그녀만의 고유한 것입니다. 본문 17절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은 아직 승천 이전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주님이 아버지라고 불렀던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곧 승천입니다. 그 주님은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 우편은 하나님과 동일한 권능을 행사하는 자리를 가리킵니다.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은 영적으로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예수님의 승천 직전에 예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경험은 우리에게 반복되지 않습니다. 마리아와 그 뒤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몇몇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안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과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고, 전해들은 사람들의 숫자는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리아를 비롯해서 베드로 등등, 모든 부활의 증인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전해들은 사람들도 직접 경험한 사람들 못지않은 부활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당면한 영적 숙제였고,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리아와 똑같은 경험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간접적으로도 그런 경험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못 보고도 믿을 수 있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가능할까요?

     마리아의 부활 경험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과 분리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서의 여러 증언과 서신의 여러 증언을 통해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예수님을 직접 못 본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마리아처럼 부활 신앙을 경험할 수 있으며, 더 나가서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 경험과 증인으로서의 신앙이 아니라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모래 위에 집을 세우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왕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고 결단했다면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자리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우리의 무상한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되는 초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려는 영적 수고를 아끼지 마십시오. 어느 때가 되면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던, 그러나 지금은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자리하신 부활의 주님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여러분을 부르실 것입니다. “마리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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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zzicse

April 25, 2011
*.113.99.1

안녕하세요

설교를 들을 수가 없네요.. 어떤 프로그램을 깔아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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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April 25, 2011
*.160.132.218

아래 사이트에서 Net Transport 라는 프로그램을 다운,

설치하셔서 설교화일을 다운받으시면 됩니다.


http://www.net-xfer.com/download.htm


사용법 설명은 아래 링크에 있습니다.

http://blog.daum.net/insubonglove/716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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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April 25, 2011
*.139.124.107

선교사님, 부활절 예배 잘 드리셨는지요,

저희들이랑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요?

부활의 기쁨이 선교사님사역에 늘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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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신짱구

April 25, 2011
*.196.241.92

♪♪목사님 지난주 설교에서 "나는 아니지요?" 정말 제 마음에 큰 찔림이 있었는데.....

오늘의 말씀도 저에게는 놀라운 울림으로 들려옵니다. ♥

"주님의 부활은 그냥 경험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 먼저 부르셔야만 합니다. "

이왕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고 결단했다면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오십시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자리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우리의 무상한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되는 초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려는 영적 수고를 아끼지 마십시오.

 어느 때가 되면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던,

그러나 지금은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자리하신

부활의 주님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여러분을 부르실 것입니다.

 “마리아야!”""!!! 목사님 아멘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오늘도 또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그외) 것을 가장 쉽게 어린 아이들에게 전하려면,

어린이 조직신학을 아이들과 공부해도 괜찮은지요?

괜찮다면 어떤 책자가 좋을까요? 아님 다른 방도가 있을까요?

지금 교회에서 한국 어린이 전도협회 새소식 공과 중심으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정말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하나님의 나라, 성경에 대해, 기도에 대해 등등 바르게 알려 주고 싶습니다.

큰 가르침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영육간에 강건하세요.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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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5, 2011
*.120.170.250

신짱구 님,

부활주일을 잘 보내셨겠지요.

앞으로 여섯 주간이나 더 계속해서

부활절 절기가 이어집니다.

아마 저는 그 절기 중에 계속해서

부활 설교를 하게 될 겁니다.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을 따로 지키지 않구요.

어린아이들과 조직신학 공부를 하는 건 별로 지혜롭지 않습니다.

일단 조직신학은 관념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전달이 잘 되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교리적인 하나님을 고정시킬 수가 있어요.

그냥 성경 이야기를 너무 교훈적으로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고

아이들 스스로 질문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끌어가는 게 좋습니다.

어린이 전도협회의 공과를 책을 내가 모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코멘트는 드릴 수가 없네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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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삼송

April 25, 2011
*.109.42.2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부활이 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지 예전에 느끼지 못한 깨달음이 밀려옵니다.

제 큰아들놈이 초등학교 6학년인데요  아들이 "왜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아요? "라고 어제 저에게 묻길래" 주님을 믿는 다는 것은 은총이요 큰축복이다  우리가 믿을려고 해도 잘 믿어지는 것이 아니란다 " 라고 말해 주면서 "지금 아빠보다 나이가 어린 33살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나는 메시야다 하나님이다 라고 말하면 너는 믿을수 있느냐"고 하니 말귀를 알아 듣더군요 교회를 다니면서 큰아들 작은 아들이 질문이 많아져서 큰 일입니다. 제가 신학공부를 많이 해야 되겠습니다.  아침에 목사님 설교 말씀을 가족끼리 들으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믿는 우리들이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기도하며 서로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찾아주신 은총임을 생각하니 예전에 지식으로만 알던 믿음에서 한걸음 더 존재의  세계로 발검음을 내딛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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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6, 2011
*.120.170.250

삼송 님,

아이들과 신앙적으로 솔직하게 대화한다는 건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에요.

그런 가정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아예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뻔한 대답만 알고 있거든요.

아이들이 질문이 많아졌다는 건 영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그런 질문을 막으면 안 됩니다.

아빠가 모르는 건 모른다고 대답하는 게 좋아요.

부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모든 교리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죽을 때까지 구도적인 태도로

관심을 갖고 배워나가야 합니다.

삼송 님의 가정이 그런 것 같아서 보기 좋군요.

앞으로 당분간 부활 설교를 계속할 예정입니다.

지루해도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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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삼송

April 26, 2011
*.109.42.2

예 목사님! 목사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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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춰니

April 26, 2011
*.147.76.100

목사님 안녕하세요~

얼마만에 글을 남기는지 모르겠습니다.

 

작년에 목사님을 뵙고나서

사랑방 기웃거리듯 몰래 몰래 들락날락 했었는데,

교회에 한번 방문하려 했던 소박한 소망이

어느덧 꼭 한번 이루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되어버렸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다시 되새겨봅니다.

"무상한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되는 초석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려는 영적수고"

"때가 되면....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부르실 주님" -'마리아야'

 

바울이 빛과 음성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것처럼

분명히 논증할 수 없지만 그런 초석을 마련하게하는 순간이 신앙인인 저에게도 찾아왔습니다.

저를 부르셨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 다른 사람들과 성경의 여러 인물들과도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분명히 실재하는 그러한 순간이었었습니다.

 

이제 가르치는 자가 되어 이것을 설명하고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데,

그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영적수고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 이해시켜야 하는지...

자칫 그 수고를 공덕쌓기 정도로 혹은 맹인이 길을 가르쳐주는 수준으로

가르치고 있지는 않는지 고민이 되고, 또 고민이 됩니다.

 

성령께서 때가되면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이끌어 가실거라 자위해 보기도 합니다만...

저에게 맡겨진 아이들에게 더 깊은 영적 샘물로 먹이고 싶은 욕심을 마구 부리고 싶을때가 더 많습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고 스스로 질문할 수 있게 해주는 방식.... 이러한 방식이

신앙의 영적 중심으로 들어가도록 도와줄 수 있는 길이겠죠.

 

그 길을 열어 줄 수 있으려면, 먼저 열어야 할텐데요....

지난주에 구입한 "설교란 무엇인가"를 다시 정독해보아야 겠습니다.

설교에대해 고민하다가 두서없는 푸념을 늘어놔 봅니다.(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고민이나 늘어놀 곳이 아닌것 같아 죄송한 마음입니다.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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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6, 2011
*.120.170.250

춰니 님,

반갑습니다.

하나님 경험은 각자가 다 다르다는 게 신기합니다.

혼자서 숨을 쉬어야 하듯이

우리는 혼자서 하나님을 경험해야겠지요.

춰니 님이 고유한 자리에서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셨다니

멋진 일이군요.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런 경험은 세월과 더불어 흐지부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험은 실증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증적이지 않다고 해서 참된 게 아니라는 말씀이 아니에요.

궁극적인 것은 실증적으로 경험할 수 없어요.

부단히 영성의 깊이로 들어가는 게 최선입니다.

그 길을 잘 가보세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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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신짱구

April 26, 2011
*.196.241.92

네♪♪♪부활주일 잘 보냈습니다.

감사드립니다.♥목사님♥

부활설교 기다리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가르침과 조언 부탁드리며.....

평강의 주님께서 함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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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April 26, 2011
*.111.210.2

부활절이 되면 늘 교회에서 무조건 믿고 받아 들이면 구원 받는다는

설교만 듣다가 이렇게 목사님을 통하여 부활절 사건을 다시 조명해보게 되니

참 좋은 공부도 되고 생각의 폭도 넓어지는것 같습니다.

"마리아야"  하며 부르시는 부활 예수의 음성을 듣기를 저도 소망합니다. 

목사님, 늘 건강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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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6, 2011
*.120.170.250

별달 님,

'마리아야!' 하는 주님의 음성이

언제 어떻게 우리 영혼의 문을 두드릴까요?

이미 두드리고 계시지만

우리가 잠시 졸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종말이 이미 여기에 와 있다는 신비로운 사실을

좀더 실질적으로 알게 된다면

우리의 영적인 귀가 더 예민해져서

두드리는 소리를 분별할 수 있겠지요.

번개와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는군요.

우리가 아는 한

우주에서 지구에만 벌어지는 물리적 현상입니다.

이 순간에 그런 소리를 듣고

그런 빛을 본다는 참으로 놀랍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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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April 28, 2011
*.179.178.110

목사님,

예수의 부활이 왜 죄를 정복한 사건이 되는건가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죄의 결과인 죽음을 이겼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하는 건지요?

아니면 예수의 부활이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로마의 불의한 권력(죄)에 희생당한 것에

대한 일종의 반전(혹은 역전)이기 때문인가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마태복음 27장인가 어딘가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 잠자던 자들이 일어나서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는 구절이 나오더군요.

이들의 몸이 예수님과 비슷한 형태의 몸으로 부활한 것인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이 사건이 문자적으로 맞다면

과연 부활사건을 역사적 예수에게만 일어난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볼 수 있는지요?

예수님의 부활과 그 사건에 이어서 일어난 다른 죽은자들의 부활사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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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8, 2011
*.120.170.250

오메가 님,

첫번째 질문은 오메가 님이 스스로 대답했군요.

죄의 결과인 죽음을 이기는 길이 바로 부활이기 때문이에요.

설교 조로 한 마디 하면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사면령을 받으면

죄로부터 벗어나는 거지요.

예수님의 운명 순간에 대한 묘사에 나오는

무덤, 거룩한 성 등등의 이야기는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마태복음 기자가 예수님의 죽는 순간을

신학적으로 극대화하기 위해서

구약의 몇 가지 전승에 기초한 이야기를 끌어들인 거에요.

문학적인 장치라고 보면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진술과 비슷한 거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왜 문학적인 장치가 들어가는지 이상하게 들리나요?

그 이상은 나도 잘 모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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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April 29, 2011
*.220.104.49

말씀이 육신되어, 말씀이 음성되어, 말씀이 성령이 되어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합니다. 주님의 부활의 형상을 요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또 다른 주님의 정보를 요구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폐의 아름다운 비밀에 나의 낮음과 행위 없음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마리아야! , 주님께서 불렀던 그 부름을 내가 기다리는 것은

 내가 모양만 마리아처럼 되지 않을까요? 

저는 부름만을 기다리는 삶보다는 부름 받기에 걸맞는 자녀로 살아가렵니다.

부활의 모든 의미가 길어도 나에게 남겨진 하나는 보이지 않는 크기만큼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또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제게 오셨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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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29, 2011
*.120.170.250

진인택 님,

고유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글을 쓰시는군요.

흥미롭습니다.

부름을 기다리는 삶과  

부름받기에 걸맞는 자녀로 사는 것을 대비하셨군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겠습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부름을 기다리는 것 자체가 사실은

거기에 걸맞는 자녀가 되는 거랍니다.

기다린다는 게 참으로 어렵습니다.

무기력한 것도 아니구요.

내일은 비가 많이 온다고 하니

어디 외출하려면 단단히 준비하세요.

좋은 주말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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