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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 공동체

부활절 조회 수 22447 추천 수 0 2011.05.01 23:4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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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도행전 2:22-32 

부활의 증인 공동체

사도행전 2:22-32, 부활절 둘째 주일, 2011년 5월1일

 

     오늘은 부활절 둘째 주일입니다. 부활절 절기는 지난 주일부터 시작해서 일곱 주간동안 계속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과 한 묶음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수레를 끌어가는 두 바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겠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별로 그렇지 못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인들도 겉으로만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지 실제로는 관심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십자가에 달렸을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삶은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과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부활도 역시 비슷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방식으로는 증명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원하는 그리스도인은 별로 없을 겁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왜 이렇게 사람들의 일반적인 종교심과는 거리가 먼 사건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았을까요? 우리는 그런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 있을까요? 아니면 점점 멀리 떨어져 나오는 중일까요.

     오늘 설교의 본문인 사도행전 2:22-32절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공식적인 첫 설교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베드로가 행한 첫 설교입니다. 베드로는 잘 먹고 잘 사는 것, 요령껏 출세하는 것을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합니다. 이것 이외의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십자가와 부활을 신학적으로 규정합니다. 그게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아주 중요합니다. 먼저 십자가에 대한 규정입니다. 23절에서 베드로는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사두개파, 서기관 등, 당시 오피니언 리더들이 중심으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근거해서 기존의 유대 종교를 강하게 비판한 나사렛 예수를 신성모독과 사회소요 죄로 로마 정권에 고발했습니다. 결국 유대 종교와 로마 정치의 야합으로 예수님은 당시 가장 저주스러운 형벌인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은 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갔을까요? 그들이 파렴치하거나 비인격적이거나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절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단 결정적인 이유는 메시아가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메시아를, 즉 메시아의 일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늘도 이런 일은 반복됩니다. 지금 당장 메시아가 나타난다고 해도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달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는 메시아 살해가 반복됩니다. 무죄한 이의 고난이 계속된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십자가에 대한 신학적 규정에 이어서 부활에 대한 신학적 규정을 이렇게 내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24절) 부활은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시편 16:8절 이하를 인용해서 다윗이 이미 주님의 부활을 내다보았다고 설명합니다. 이 사실을 32절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인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다는 말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다시 살지 못합니다. 무작정 오래 살지도 못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지금까지 다시 산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살았다는 소문은 많습니다. 죽어서 천당을 보고 돌아왔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가사체험이지 실제로 죽은 게 아닙니다. 그런 주장은 마치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 물을 다시 거꾸로 돌려서 강과 골짜기로 보냈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복음서에도 다시 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오긴 합니다. 나인이라는 마을에 살고 있던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서 상여에 실려 가다가 예수님의 의해서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인 나사로도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합니다. 복음서의 이런 기록들은 실제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그런 방식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에 나온 이들이 다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데서도 이 이야기가 부활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가사체험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다시 살아났다가 또 다시 죽는, 그리고 다시 또 살아나는 윤회도 아니고, 환생도 아니고, 영원한 회귀도 아닙니다. 아담 이후로 죄와 죽음에 묶인 인류의 운명을 끝장내고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사건입니다. 종말론적인 구원 사건이라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부활은 지금 여기서의 이런 생명 형식이 영원하게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 무궁히 잘 살고 잘 먹는 세상살이의 반복이 아닙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늘 그런 삶을 꿈꿉니다. 그런 꿈이 이집트 파라오들에게는 피라미드의 지하세계 건설로 나타났습니다. 중국의 황제들 중에서도 그런 지하세계를 건설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꿈은 아무리 야무지게 보여도 허황된 것입니다. 지금은 모두 관광지가 되었을 뿐입니다. 파라오의 미라나 간혹 매스컴에 보도되는 평범한 이들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미라나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꿈이 현대인들에게는 국가, 재산, 후손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삶은 아무리 야심차게 계획해도 결국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결국 죽음과 허무로 끝나는 삶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하나님이 종말에 새롭게 시작할 생명으로의 질적인 변화입니다.

     이런 설명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도대체 새로운 생명이 뭐냐 하는 겁니다. 그런 것보다는 지금 당장 여기서 최소한 행복하게 사는 게 소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가족들 건강하고, 자식들 부끄럽지 않게 성장하는 행복을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여러분이 원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들은 굳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들입니다. 원만한 인격과 적당한 경력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 것만을 생각한다면 굳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둘째, 우리가 원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들은 우리를 실제로 행복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이미 경험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저는 테니스 운동을 할 때 즐겁습니다. 그게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제외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테니스가 아무리 즐거워도 그 운동을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만으로 행복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그만 두어야 하고, 그런 순간이 오기 전에도 그것 자체의 재미가 계속되지 못합니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말하는 새로운 생명은 창조 생명과 같습니다. 창조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창조는 개량이 아닙니다. 모양이나 기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없던 것을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고 합니다. 무와 유가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하면 아득합니다. 장자 유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루살이와 코끼리는 무게가 똑같다고 합니다. 둘 다 존재한다는 차원에서는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세계로부터 무언가가 나왔다는 것은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이제 이 세상은 또 다시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것이 종말입니다. 창조의 완성입니다. 그런 창조의 종말론적 완성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베드로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무엇에 근거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할 수 있었을까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영적인 통찰력입니다. 세계를 고정된 시각이 아니라 영적으로 열린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베드로의 설교는 시편 16편을 인용했습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그 말씀을 해석한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던 시편이지만 그게 모두 눈에 들오지는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 현현에 대한 고유한 경험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에 함께 살았던 예수님을 부활체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선택된 이들입니다. 그들만 선택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불평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선택받을 만 했습니다. 제자들은 제자로 불림을 받을 만했습니다. 다른 분야도 그렇지 않습니까. 뉴턴은 만유인력을 발견할 만한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그의 과학적 통찰력을 통해서 숨어 있던 만유인력이라는 물리현상이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통찰력과 예수 부활 현현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고, 그것을 용감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나 안티 그리스도인, 또는 교회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도마처럼 꼼꼼히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다음과 같은 궁금증이 생길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무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나 그런 경험을 아무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증명하려면 반복이 가능해야만 하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반복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주 전체의 역사를 통해서만 증명이 가능한 어떤 궁극적이고 유일회적인 사건을 역사 내에서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4차원을 3차원에서 증명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그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도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궁극적인 것을 경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이 아니라 증언하려고만 했습니다. 베드로는 32b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이들의 영적인 부담감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상상이 갑니다. 사람들이 이해하지도 않고, 동의하지도 않는 종말론적 생명 사건을 증언한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부활 경험에 대한 증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경험이 너무 확실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증인이라는 헬라어 ‘마르튀스’는 순교자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리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자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부활에 완전히 걸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부활의 증인 공동체로 자리 매김을 한 것입니다. 거기에 교회의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전통에 서 있습니다. 부활의 증인 공동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나요? 그 대답은 제가 일일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삶의 모양이 다 다르듯이 여러분 각자가 다 다른 대답을 찾아야 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하나의 방향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인 부활을 우리 삶의 현실(reality)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억압구조에서도 자유와 해방을 맛볼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속성들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바울은 이 부활 신앙에 기대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8-10) 바울의 이 고백은 자신을 부활의 증인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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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참믿음

May 03, 2011
*.177.73.140

안녕하세요? 요즘 목사님 설교 너무 은혜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목사님 오늘 말씀본문에 베드로설교가 나오는데 이 설교는 실제 베드로가 아니라 누가 자신의 설교를 베드로라는 이름을 빌린

자신의 신학적 진술로 봐야 한다는 목사님 사도행전 강해를 보고 호감이 많이 갑니다.

그 근거로 여러 곳 을 지적 하셨는데,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보여 집니다.

목사님 말씀이 옳다고 하면 행전의 저자가 실제 누가가 아닌 훨씬 후대에 어떤 사람이 여러 전승을 기초로하여

동시대 사람에게 기독교를 변증을 위한 목적이며 따라서 실제 시간적 흐름의 역사서로 보아선 안 된다 하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이러한 역사 비평은 실제 성경내용에 근접함으로 더 바른 신앙을 이해하는 역할에 있어서 역사비평의 필요성과

 배울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영성의 심화가 아닐까요?

 

질문 하려합니다. 행전이 요한복음과 같은 시대 쓰여 졌다는 가장 타당한 근거가 오늘 베드로설교가 구약 70인 역본을 인용했다고 하셨습니다.

행 1장15절 가롯유다 이야기도 70인역의 표현 방식으로 전개 했다고 했는데 70인역 사용이 왜 90년 이후로 보아야 합니까?

70인역은 B.C.3세기경에 만들어 졌으면 예수님시대부터 당연히 알고 있었을 터인데요?

왜인지 어림 짐작은 가는데 확신이 안오는 데요?

그리고 요한복음은 헬라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겠는데 사도행전도 후대에 쓰여졌다면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지는데

어떻게 알수 있나요?  질문의 내용이 모호해서 죄송합니다.

 

사도행전 공부위한 추천도서 부탁드립니다.  (저자 에른스튼 헨헨) 사도행전 책 어떨까요?

좀 개인적으로 공부하고 싶어서요.  오늘 제가쓴 내용과 관련 있는 책 추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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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04, 2011
*.120.170.250

참믿음 님,

위 대글 내용은 설교문만 읽고 나온 게 아니라

저의 다른 글도 바탕에 두고 있군요.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시네요.

사도행전의 기록연대와 70인역의 관계를 내가 말했나요?

그건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70인역은 원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한 번역입니다.

복음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전파될 때는

당연히 70인 역이 사용되었겠지요.

유대 그리스도교와 이방 그리스도교 사이에도 이런 차별이 있었을 거구요.

히브리 성경이나 70인역이나 결정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는 건 아닐 거에요.

한번 찾아보세요.

사도행전이 일반적인 추정 연대인 기원후 70-80년이 아니라

2세기 초중반에 기록되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지금 여기서 내가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많은 자료 검토가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아직도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구요. 

두 가지만 간단히 말하지요.

1) 사도행전을 인용하는 교부들의 연대

2) 사도행전에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유대 그리스도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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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한밀

May 04, 2011
*.231.141.176

목사님,

이번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을 보면서

수장을 시킨 이유가 추종자들에 의해서 성지화되는것을 방지하기 위한것이라는

기사를 보면서, 문득 예수님 당시 로마당국과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님에 대한

십자가 처형에 있어 여러가지 발생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조치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빈 무덤, 예수님의 시신의 증발이 로마당국이나 종교지도자들,

아니면 예수님의 사랑하는 추종자들에 의해서였건

성경에 표현된데로의 육체적인 부활이거나, 사람들이 볼수있는 형태데로의

부활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얘기는 그를 기억하고 따르는

이들에 의해 전해지게 되었지요.

베드로와 제자들도 눈으로 보는 예수님의 부활모습이 아닌

어떠한 다른 형태로 그들에게 체험되었고 그 일들을 전하는모습들을 봅니다.

이제 2천년이 지난 오늘, 빈라덴 이라는 사람이 그시신이 드넓은 바다에 가장 작은모습으로

사라져 갔지만, 예수 부활의 비슷한 모습들을 보게되는것 같습니다.

그가 잘못한 일들에 대한 부분들을 간과하는 것이 아니고,

그로 인해 영향을 받았던 추종자들,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된 그들의 지도자

그들은 시체가 없어짐으로 인해, 수장되었지만...또 다른 차원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되어지는 일들을 보려고 합니다...예수부활에 대한 사건의 출발에 대한

이야기의 가능성에 대해서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그것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에게는 잠깐의 죽음과 이별을 인정할 수 없었고

그 주님은 그들 가슴속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되살아나셨고 그들에게 각자 다른 경험들을 가져다 주었을 것입니다.

빈라덴,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는 아마도 어떤 형태로든지 그들의 삶속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가져왔던 비슷한 경험들을 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목사님,

도마와 같은 믿음없는 발언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최근에 사건과 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언급한 부분들은 전적으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의 스침을 표현한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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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04, 2011
*.120.170.250

한밀 님,

개인적인 생각의 스침이라고 했는데,

많은 걸 시사하고 있네요.

로마 제국에 의한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미국 제국에 의한 빈 라덴의 총격 살해라, 음.

비교하기는 꺼림칙 하고

예수와 빈 라덴의 정체성 자체가 다르기는 하지만

추종자들의 심정에서는 통할 게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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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아델포스

May 04, 2011
*.201.77.210

부활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의요.

새로운 생명의 창조라는 말씀이시네요.

말씀 조용히 묵상하고 갑니다.

기쁨과 소망의 부활절을 널리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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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04, 2011
*.120.170.250

아델포스 님,

새로운 생명의 창조가

어떻게, 언제 시작될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야겠지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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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뽀솜이

May 04, 2011
*.181.82.80

목사님 책잘받아보았습니다. 댓글란에있던 글을보던중 십일조를 안내도됀다는 말씀이있던데 목사님 보면 외계인같아요

ㅎㅎ 목사님께 여러가지로 감명받았음니다 ..참진실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목사님 그리고 교회관계자분들 모두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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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05, 2011
*.120.170.250

뽀솜이 님,

저는 요... 외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정통주의자랍니다. ㅎㅎ

사도들, 교부들,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그대로 따라가기 위해서 애를 쓸 뿐이구요.

능력이 없어서 따라가는 시늉만 하는데,

그것도 사실은 벅차걸랑요.

교회 관계자분들도 저와 비슷한 생각일 겁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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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y 05, 2011
*.239.93.193

목사님, 오늘의 말씀을 검지와 중지만을 세우시며 저를 보며 시작하셨습니다.

각본을 품고 있는 드라마와 정교한 사실에 시선을 끄는 다큐멘터리로 말씀을 잘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해가 안되어도 흐름을 끊지 않고 다음 내용으로 잘 넘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끝을 오케스트라의 대미를 장식하는 큰 음향을 남기고 또 긴 여운을 흩어 놓는 전체적인 전개가 지금까지 주일 설교 중에 최고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겉으로만 믿는 십자가와 부활이란 대목 때문에 정신 차리고 읽어 내려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성경책보고 밥 먹고 애들과 북적이며 출근 준비 합니다. "오늘은 10분쯤 일찍 가야지" 해도 언제나 그렇지 않습니다. 출근하면 직장에서 해야 할 일에 신경 씁니다. 직장동료,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며 삶의 고락과 희락을 말하며 기도합니다.

먹는 것, 자녀 ,아내, 직장, 교회, 사는 것 그리고 죽는다는 것을 늘 생각하는 현실에

십자가와 부활이 현실과 떨어진 것이 아니고 함께 가고 끝까지 그리고 다음까지 간다는 사실을 얼른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말씀 덕분입니다.

부활을 내 현실로 받아 들인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는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막연히 받아 들여야 된다는 생각만으로 잊으면 생각하고 잊으면 생각하고 지내 왔습니다. 그야말로 아는 척만 하고 살아 왔습니다.

신앙의 두 바퀴가 이제는 목사님의 말씀으로 든든한 축에 기차바퀴처럼 빠지지 않는 열박음이 되었습니다.

제가 영적으로 열린 시각이 넓지 못해 아직은 예수님 부활의 증언자다운 면모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 정체성은 결국 "예수님 부활의 증언자"입니다.

현재 다니는 교회 확장이 내 죄의 십자스크류못을 뽑는 것인지 속으로 더 밀어 넣는지 고뇌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그 못이 빠지는지 들어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부활의 증인의 공동체로 자리 매김되어야 하는 곳임을 알았습니다.

나 또한 주님의 부활의 증인됨에 운명을 걸었습니다. 오늘 목사님 말씀으로 더 확신에 찬 운명을 걸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저도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셨는데 불행하게 십자가에 다는 그런 자가 될까 두렵습니다.

오늘 말씀은 십자가, 부활, 메시아, 세상의 행복,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창조, 부활의 증인된 내 정체성, 교회정체성, 새롭게 나의 현실에 보태진 부활함 등등 중차대한 것들이 한꺼번에 잘 연결되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도움이 되어 드리진 못하고 가져가기만 해서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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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05, 2011
*.120.170.250

진인택 님,

오늘 어린이날이었는데,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저의 설교를 진인택 님의 고유한 사유와 글쓰기로

새롭게 단장해주셨네요.

하여튼 그리스도교 안에서

무진장한 영적 보화가 들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게 얼마나 귀한지를 알아야겠지요.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보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자신의 삶을 확장하는 데만 관심이 쏠려 있어서

결국 그리스도교는 싸구려 만병통치약처럼 팔리고 있네요.

대글을 잘 읽었습니다.

잘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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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May 06, 2011
*.179.178.110

은혜 팍팍 받고 갑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오자가 보이네요.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훈 4:8-10)

 

<욱여쌈을 당하여도> ----<우겨쌈을 당하여도>로 수정해야겠습니다.

난 또 상추쌈만 있는 줄 알았는데 바울은 <욱여쌈>을 즐겨 먹었네요.ㅎㅎ

 

나중에 목사님께서 설교집을 책으로 엮어내실 때 도움이 될까 싶어

살짝 건드리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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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y 06, 2011
*.120.170.250

오메가 님,

욱여쌈은 개역개정에 나온 그대로인데요.

위 대글에 오자가 보이네요.

(고훈 4:8-10)이 아니라 (고후 4:8-10)이군요. ㅎㅎ

좋은 주말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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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y 07, 2011
*.239.93.193

목사님 전에 happypig란 분이 (얼굴대신 새싹사진) 글을 올리던데 요즘은 전혀 안보이시네요.

글쓴이(예쁜이 비슷한 말)가  줄어드니 찾게 되네요.

어서 오셔서 목사님 말씀 댓글 쓰시고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기도가 happypig님의 미소를 짓도록 하여주소서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y 07, 2011
*.120.170.250

happypig 님은 이모저모로 큰 어려움을 겪다가

천천히 기운을 내면서 신앙생활을 잘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정확한 것은 모르구요.

몇번 대글에서 그런 걸 느꼈을 뿐입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기를 바랍니다.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profile

[레벨:17]아우

May 07, 2011
*.179.178.110

목사님

개역개정판도 몇 종류가 되나요?

저도 개역개정판 성경을 읽는데

분명히 <우겨쌈>으로 돼 있는데요ㅎㅎ

뭔가 착오가 생긴 모양이로군요.

그리고 목사님 <고훈4:8>은 목사님 설교문에서

그대로 카피한 것이니까

얼릉 고치셔요.ㅎㅎ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y 07, 2011
*.120.170.250

오메가 님은 저보다 한 수 위시네요.

고훈을 고후로 고쳤습니다.

욱여쌈과 우겨쌈은 아직 확인이 안 되는군요.

아무래도 오메가 님이 맞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네요.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부활절 셋째 주일입니다.

profile

[레벨:38]클라라

May 08, 2011
*.139.124.107

저도 '욱여쌈'이 오타 아닌가 했는데요,

네이버 사전검색에 이렇게 되어 있네요.

 

**

우겨쌈(우겨싸다)->'욱여싸다' 의 잘못

‘욱이다’의 어간과 ‘싸다’의 어간이 어울려서 이루어진 말이므로 각각 그 원형을 밝히어 적는다.

관련조항 : 한글 맞춤법 4장 4절 27항

 

*대한성서공회刊(2004) 개역개정에는 '우겨쌈'으로 나와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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