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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믿음

사순절 조회 수 19058 추천 수 4 2010.03.22 16:5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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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립보서 3:4-14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믿음

(빌 3:4-14)

 

 

바울은 빌립보서 3:4-6절에서 바울답지 않게 자기를 자랑합니다. 자랑하는 항목이 모두 여섯 가지입니다. 할례, 베냐민 지파, 히브리인, 바리새인, 유대교에 대한 열심, 율법의 의가 그것입니다. 이 여섯 가지는 각각 의미가 있습니다. 세 가지는 타고난 것이고, 다른 세 가지기는 획득한 것입니다. 바울은 선천으로나 후천적으로 엘리트였다는 뜻입니다. 유대교에 대한 열심히 교회를 박해했다는 사실이 자랑거리로 나열되었다는 것은 좀 이상해보일 겁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상황에 설명입니다. 그는 유대교에 대한 열정이 너무 강해서 유대교와 다른 입장을 보이는 기독교를 앞장서서 박해했습니다. 사도행전 기자는 스데반의 순교 뒤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박해에 관해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3)

 

 

할례파와 논쟁

바울이 그리스도인답지 않게 자기를 자랑한 데에는 나름으로 이유가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바울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을 전하는 이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볼 때 그들은 이단이었습니다. 진리를 거스르는 이들이었습니다. 교회의 평화와 화합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이단을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개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빌 3:2) 그들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으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많은 편지를 썼지만 여기 외에서는 이런 욕설을 쓴 적이 없습니다. 바울의 위기의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개들이라고 표현한 이들은 할례파입니다.

할례파는 유대교인들인데, 지금 빌립보 교회에서 그들이 왜 문제가 되는지 궁금할 겁니다. 여기에는 초기 기독교의 속사정이 숨어 있습니다. 당시의 기독교는 유대교와 완벽하게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안에 유대교적인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독립적인 종교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한 종파로 자리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적인 특색이 강해졌지만 유대교적인 신앙이 일시에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유대교적인 신앙을 끝까지 고집했던 이들을 가리켜 할례파라고 합니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고수했습니다. 자기들 전통대로 사는 거야 누가 뭐라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그것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갈라디아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바울의 삶은 바로 이 할례파, 율법주의자들과의 싸움으로 점철되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싸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역사적인 기독교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겁니다. 오늘의 본문이 바로 그런 이단 논쟁의 한 장면입니다.

할례파의 특징은 물론 태어난 지 팔일이 되는 유대인 남자 아이들에게 할례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 핵심은 율법 준수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삶과 정신과 종교의 요체가 바로 율법에 있습니다. 바울이 할례파를 거부한 이유는 율법의 본질이 육체에 대한 신뢰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람의 업적에 대한 신뢰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전히 자기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업적만 믿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이 왜 하나님을 믿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지만 그 믿음의 토대를 바로 자기의 행위에, 자기의 업적에 놓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이런 긴장은 지금의 교회에서도 여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믿기 때문에 기도를 드린다고 합니다. 예배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헌금도 최선을 다 합니다. 그런데 그 중심은 모두 자기에게 가 있습니다. 자기의 종교적 행위에, 즉 자기 의에 만족할 뿐입니다. 육체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것과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를 신뢰하는 것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구별하기는 더 어렵지만, 자기 자신도 구별하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한국교회의 종교적 열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중세기 유럽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하면서까지 베드로 성당건축에 열심을 내듯이 한국교회도 똑같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보이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으며, 많은 경우에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실이 꼭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한국교회의 신앙행위가 종교적 욕망에서 나온 것이라는 증거는 많습니다. 많은 교단들이 지금 총회장 선거나 신학대학교 총장 선거로 서로 간에 큰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개별 교회 안에서의 싸움도 흔하게 일어납니다. 일반 법정으로까지 나가는 일들도 많습니다. 신학적인 진리 논쟁이 아니라 인간적인 이해타산이 걸린 싸움입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이 보이는 많은 열정들이 결국은 육체에 대한 신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신앙행태는 결국 지금 바울이 이단이라고 본 할례파의 그것과 똑같습니다.

참된 믿음과 육체에 대한 신뢰를 구분하기 힘든 이유는 육체에 대한 신뢰가 표면적으로 매우 그럴듯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거기에 다른 사람도 속고 자기 자신도 속습니다. 바울이 자기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다면서 나열한 자랑거리를 다시 보십시오. 할례로부터 율법의 의에 이르는 여섯 가지입니다. 이걸 우리의 경우로 바꿔보십시오. 세례, 집사, 권사, 장로, 목사, 십일조, 새벽기도회, 선교 활동, 이단 박멸 등등, 모든 종교적 직책과 행위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 안에서 인정받듯이 할례파의 행위들도 당시에 모두 인정을 받았습니다. 모두 귀한 전통들이었습니다. 은혜로운 것들이었습니다. 바울도 그런 것들이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빌 3:7) 왜냐하면 그런 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고 자기에게도 만족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런 것들을 이제는 ‘해’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7절과 8절에서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8b절에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제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유익하던 것들은 무엇인가요? 학력, 경력, 자격증, 요즘 젊은이들이 매달리는 소위 ‘스펙’일지 모르겠군요. 그것을 유익한 것이 아니라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는 바울의 말이 실제로 설득력이 있을까요? 너무 이상적이어서 현실성이 없는 말은 아닐까요? 단지 종교적 수사가 아닐까요?

우선 바울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가 율법주의자들인 할례파와 싸웠다고 해서 율법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실정법이 없으면 한 국가와 사회의 유지가 불가능하듯이 율법이 없으면 교회 공동체의 유지가 불가능합니다. 바울은 원래 교회의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입니다. 고린도에서 교회질서를 부정하는 열광주의자들의 위험성을 일찌감치 경고했습니다. 그런 열광주의는 무(無)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열광적 은사에만 치중했습니다.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는 극과 극이 통하듯이 결과적으로 서로 똑같은 오류에 빠졌습니다. 양쪽 모두에게서 복음의 본질은 훼손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할례파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뚫어보았습니다.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오히려 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극단적으로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노시스 크리스투

유익하고 덕스러운 가치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는 바울의 말을 실제로 삶에 적용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할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것에 대한 경험이 별로 또렷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인식하려면, 그래서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자리를 위협하는 경우에 그것을 가차 없이 잘라낼 수 있으려면 절대적인 것에 대한 명백한 인식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뜬 불교계의 어른이셨던 법정이 자기의 모든 책을 절판하다고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말의 빚을 다음 세상에도 지고가기 힘들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베스트셀러 저자가 되기 위해서 모두들 몸부림을 치는 마당에 그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에게 어떤 절대적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바울의 경우에 그 절대적인 것은 ‘예수를 아는 지식’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가장 고상하다고, 즉 가장 숭고하다고 말합니다.(빌 3:8) ‘그노시스 크리스투’, 즉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인식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노시스 크리스투가 절대적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노력은 생명을 얻으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시작해서 민족의 역사와 인류 역사 전체를 돌아보십시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안간힘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모든 생명체들은 죽습니다. 결국 모두 사라지고 죽는다면 그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지금 허무주의를 설파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항해하던 우리가 난파당한 상황과 비슷합니다. 구명정이 앞에 있다면 다른 것들은 포기하고 구명정에 올라탈 생각을 하겠지요. 그 순간에는 구명정만이 절대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이라는 배를 타고 항해를 하다가 난파를 당했고, 예수라는 구명정을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에게서 궁극적인 생명인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그에게 일어난 사건을 인식하는 것에 ‘올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의 문제는 모든 것이 죽는다는 사실과 부활 생명에 이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별로 또렷하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경계하는 할례파의 뒤를 따릅니다. 우리의 육체를 신뢰합니다. 복음에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삶에 안주합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살아갈 수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바울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할 정도로 유대교에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을 가다가 부활의 주님을 환상 중에 경험했습니다. 그는 원래 유대교적인 인식과 헬라 철학적인 인식, 그리고 로마법에도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학문적으로 높은 수준에 올랐고, 종교적으로도 고도로 높고 신비로운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기가 절대적인 인식의 세계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이 사실을 그는 빌 3:12-14절에서 분명하게 고백했습니다. 각각의 절이 똑같은 뜻입니다. 1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은 부활 생명을 완전히 얻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의 비밀을 완전히 인식한 것도 아닙니다.

이와 달리 할례파는 자신들의 할례와 율법으로 완전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완전은 성서적 용어로 ‘의’입니다. 그들은 완전한 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그들의 행태를 우리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눅 18:9-14절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세리와 달리 부도덕하지 않았고 종교적인 선한 행위가 많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자기의 완전한 의에 대한 감사행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를 율법의 실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디아 피스테오스 크리스투)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했습니다.(빌 3:9) 이런 점에서 그노시스 크리스투와 피스티스 크리스투는, 즉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일치합니다.

인식과 믿음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무조건 믿는 것이지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런 풍토에서 신학 무용론이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에 따르면 할례파의 율법주의에 빠져듭니다. 할례파의 특징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육체에 대한 신뢰입니다. 믿어야 할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그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 통치에 대한 인식은 간 곳 없고 믿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만 열광적으로 매달립니다. 여기서 믿음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해집니다. 어떤 교회의 예배와 설교 장면은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 반사적인 현상이 반복됩니다. 말이 되던 않던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치고 싶어서 조바심이 난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에 관심이 있을까요? 그 인식이 바로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요? 물론 여러분은 그렇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기를 바랍니다. 자기를 신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나요? 그렇기를 바랍니다. 다시 묻습니다. 실제로 그런가요? 그것을 제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확신하기 힘들 겁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는 말씀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잡은 예수가 누군가요? 그를 인식하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까? 여러분은 궁극적인 생명인 부활의 세계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실제로 그것에 마음이 쏠려 있습니까? 이것이 곧 사순절 다섯째 주일에 주님이 주시는 질문이자, 곧 대답입니다. 아멘! (사순절 다섯째 주일, 3월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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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참믿음

March 23, 2010
*.70.211.242

목사님 오늘은 좀 길게 글을 써볼까 합니다.

제가 목사님께 성가시게 보일수도 있겠습니다. 그냥 한사람, 한영혼이  진리에 대한 갈급함으로

 가득차 있다고 인식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작년 10월쯤 다비아를 알게 되었구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신앙과 신학이 저에게는 마치 획폭탄으로 비유하면 어떨까 합니만 사실은 오랜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과 삶, 믿음과 종교생활이, 불만족과 의문으로 가득 ,물론 제 자신도 실망과 실패의 삶을 살았지만

그래도 가장 가치있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희미한 빛이라도 이어갈려구 안간힘 (고통 으로 표현)

 교회에서 그럴듯한 직분을 가지고 봉사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건 분명이 아닌데" "정말 예수님의 의도 하심이 이런

건가?" 심지어 교만한 생각이지만 "목사님께서 정말 예수님 믿으실까?"  "꼭 이렇게 해야 하나님 기뻐 하실까?"  그리고 유명한 국내,국외 목사님들의 설교와 베스트셀러 라는 책은 온통 잘되는 방법, 긍정의 힘, 잘되는 나,  설교도 온통 축복, "빌려 줄지언정 빌리지 말라",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길" 성경 구절 인용    매주일 마다 축복기도와 학생들 에게

세계적인 인물이 하버드대학 예일대학 나오는 인물이 나오길 기도 할때마다 다른 열등생 학생들의 고통은 생각하는지?

큰교회 행사시 비용시 수백만원 들여 잔치를 벌리지만 바로 가까운 근처에는 한끼먹기 힘들어 하며, 자녀 교육비가 없어

고통 받는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는지?   돕지는 못할 지언정 제발 높은곳에서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힘도 없고 따질만한 논리적 지식도 부족하고 또 감히 목사님께 말한다는것 그자체가 힘든게 현실이죠.

 

신학적 지식이 부족하여 내면에 표출하고 싶으나 할수도 없고 혼자 방황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던 의문들이 목사님의 글속에서  제자신을 찾았습니다.  제 자신을 찾았습니다. 소중한 나를 내 영혼을~

 

아직 더 시간을 가지고 목사님 글을 배우려 합니다. 여기 다비아는 지식인들의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느껴져 글을 쓰거나 혹 무식함이 드러날까 두렵기도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덤벼 듬니다.

 

요즘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 다비아의 언어를 조금 이해 하기위해 그리고 성서를 바로 보기위해선 신학을 조금씩 알아야 할거 같아서요. 아래 공부 내용 간략하게 적었습니다.

17C계몽주의(개인의 자유와 이성의능력을 무한히 신뢰)  합리주의,역사주의,관용주의,낙관주의 / 다음은 계몽주의 대표적 사상은 칸트의 비판철학/. 또 17세기 정통주의는 생명력 있는 신앙을 상실 형식화,교리화 되었으며,세례단,설교단,고백실이 무언의 우상화 되었다. 여기에 반동으로 나온것이 경건주의 / 그러나 경건주의는 개인의 구원만 관심 쏟는 개인주의로의 결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19세기 개신교 사상의 재구성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여 자유주의 신학이 주관적 경험적 윤리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를 처음 알았습니다. 계몽시대 종교관에 반기를 들고 직관과 감정을 종교의 본질로 ,기독교 진리를 재해석함으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을 위한 방향을 제시/ 현대 신학의 아버지 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정말 대단한 신학자 이네요

이것을 반대하는 신정통주의 (칼 바르트) 쪽 으로 넘어 가기전 "슐라이에르마허"에서 잠깐 멈출려고 합니다. 조금 생각을 또 "리츨"에 대해서도 조금 공부 해야 할듯 합니다.

 

목사님 철학 용어가 이해가 안되어 진도를 못나가겟습니다. 그냥 개념만 알려고 하는데도 안되네요

여쭤 보겠습니다.

종교론에서 그는 "종교의 본질은 사유와 행위가 아니라 직관과 감정이다, 종교는 우주를 직관하는것이다

또 종교란 형이상학과 도덕과 구별되는 그 자체의 독자적 영역이다 " 의 뜻이 무었인지 알고 싶습니다.

간단히 알려주기 어렵겠지만요 압축이?  압축이 제가 이해가 잘될수도 있습니다. 어른이 중학생에게 하는 언어로

표현 할수 있겠는지요? (형 이상학?)

 

시간과 환경이 최악일때 왜 신앙의 환경은 오히려 반대로 좋은지 모르겠네요? 미묘하네요

목사님 제가 간혹 뚱단지 같은 질문 할때도 종종 있을겁니다.ㅎ

목사님 건강 잘 챙기시면서 목회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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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3, 2010
*.120.170.243

참믿음 님,

슐라이어마허를 공부하고 계신가요?

와, 대단하시군요.

그건 좀 나중에 공부해도 좋을 데요.

우리에게 친숙한 신학자들부터 진도를 나가는 게

공부의 효율성이라는 차원에서 좋습니다.

그래도 뭐 이런 게 절대적인 원칙은 아닙니다.

슐라이어마허의 '절대의존의 감정'이나 '직관' 같은 개념은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것들이랍니다.

문제는 슐라이어마허가 그걸 말하게 된

유럽의 정신사적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슐라이어마허의 그 신학 개념은

루돌프 오토의 '누미노제'와 비슷한 겁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학문적이고 합리적인 사유와 논증이 아니라

절대적인 힘 앞에서 압도당하는 사람의 감정과 느낌이라고 보는 거에요.

히말라야 산맥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느끼는 것과 비슷하지요.

모세는 시내산과 호렙산에서 그런 경험을 한 거에요.

이사야는 성전에서 그런 경험을 했구요.

지금 우리도 우주를 직면하면서 그런 경험을 합니다.

슐라이어마허는 당시에 합리주의적 방식으로

세상 학문과 대결하고 자기를 방어하던 신학으로 하여금

그런 것에서 완전히 돌아서라고 한 거지요.

사람의 절대의존 감정과 직관으로요.

신앙은 합리적 논리나 도덕 실천이 아니라는 겁니다.

슐라이어마허의 주장이 일리가 있지만

신앙과 신학의 모든 걸 다 담아내는 건 아닙니다.

우리의 감정과 직관만 절대화하면

우리의 이성적 논증과 사유는 배척되고 맙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차원도 실종되고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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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March 23, 2010
*.139.166.134

목사님께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에 관심이 있을까요?

그 인식이 바로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요?'

를 들으면서 판넨베르크의 글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아주 초보적인 말이거든요.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온전한 이성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마음은 사유의 자리였습니다.

만약 인식과 이해가 없다면 결국 하나님에게 아첨만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마음은 감정의 자리라서 열광을 중시하고

신학으로 인한 인식을 멀리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전체적인 약점인 것 같아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숭배한다는 것은 아첨이라는 판교수의 말과

목사님께서 그리스도를 인식하기를 계속 하라는 말씀을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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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3, 2010
*.120.170.243

앗, 유니스 님이 나보다 판 선생의 경구를 더 잘 기억하고 있군요.

저걸 미리 알았다면 내 설교에 인용했을 텐데요.

앞으로는 미리 설교문을 유니스 님에게 보여주고

조언을 받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음.

하나님에게 아첨만 하게 된다니,

정말 멋진 표현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변에는

아첨꾼 투성이군요.

우리가 모든 다 이해하지는 못 하지만

하는 데까지는 해 봅시다.

바울도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라고 했으니,

자, 생각이 멈출 때까지

성령과의 진리 논쟁을 벌여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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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방랑자

March 25, 2010
*.109.153.8

늘 되새깁니다 자신이 무화되는 것이 참된 신앙의 경지라는 사실을요

저와 같은 사람들이 잘 빠지는 함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자랑할 행위도 없고 있다 해도 자랑하지 않는다고....그것이 진정한 겸손도 아닐 뿐더러 그렇게

겸손하다고 여기는 것 자체도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만 보여주는 것일텐데요

언제쯤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을지 갈길이 멀어보입니다

 

지난 주에는 서울샘터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갔기에 예배가 아주 낯설진 않았습니다.

사람이나 주변 환경에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말씀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참으로 좋았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사람이 중심이 아닌 오직 하나님 중심의 예배임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다니던 교회에서 지난 주일부터 또 부흥회를 한다고도 하고 새벽기도 운동을 다시 해야 한다며

새벽예배 출석부 비치해서 체크한다고 하고 매번 간증과 헌신강요뿐인 말씀속에서 이젠 저의 인내심도

거의 한계에 다다른 듯합니다. 일단 저번주부터 교회를 안나갔는데 작은 교회라 아마도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거 같습니다 잘 견뎌낸다면 샘터교회를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이번주엔 회사에서 근무(숙직)라 못가겠네요 6시부터 인데 예배중에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고

많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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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5, 2010
*.120.170.243

앗, 방랑자 님이 바로

지난 주일 서울샘터교회 예배에서 뵌

그 낯선 분이시군요.

그냥 악수만 하고 통성명 없이 헤어졌지요?

그 뒤로 차 마시는 시간과

공부 시간이 있었는데요.

다음에 오시면 인사를 잘 나눠봅시다.

새벽 기도회에도 출석 도장을 찍어요? ㅎㅎ

좋은 게 좋다고 한다면 크게 할 말이 없긴 한데,

좀 심하군요.

작은 교회가 표시가 금방 나겠군요.

이런 점에서는 대형 교회에 다니는 게

부담 없이 좋은 점이 있는 듯합니다.

방랑자 님,

갈 길이 멀다는 건 느끼신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구도의 길로 들어섰다는 증거랍니다.

우리가 여기서 완벽할 수는 없지만

방향만은 분명하게 잡고 그 길을 가야겠지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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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March 26, 2010
*.127.115.206

요즘 틈나는 대로 한군데씩 서산의 교회들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작은 시골이지만 90개 가까이 된답니다

근데 평일에는 문을 잠궈 놓더군요

그치만 대충 봐도 알겠던걸요 ㅎㅎㅎ

건물, 십일조, 새벽기도, 선교, 부흥회 이 다섯가지만 체크해도..........

참된 교회 찾기도 어렵지만 

아닌 교회 걸러내기도 참 쉽네요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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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6, 2010
*.120.170.243

마음에 딱 맞는 교회를 너무 고르지는 마시게나.

완벽한 여자와 결혼해야만 행복한 건 아니거든.

교회나 여자(또는 남자)나 피곤하지 않을 정도면

서로 맞춰가면서 살아갈 수 있는 거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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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이 영식

March 26, 2010
*.122.81.15

오늘날 한국교회가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저 또한 그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 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인들만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전하는 자나, 가르치는 자가 이런 모습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국교회의 믿음에 대한 잘못된 모습은 아는 것이 없고, 영적 실제에 대한 경험이 없는 목회자의 잘못이고, 더 나아가 편하게 목회하려는 안일한 자세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목회를 준비하는 과정가운데 있는 신학생입니다. 저도 얼마 있지 않으면 목회 일선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구조속에 들어가 얼마나 견딜 수 있을런지 두렵지만 말씀을 통해서 힘을 얻습니다. 그래도 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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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6, 2010
*.120.170.243

이영식 님,

신학생이시라구요.

반갑습니다.

믿음도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해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경우에 따라서 무의미하다는 바울의 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구요.

오늘 교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에도 역시

이를 확인할 수 있어요.

지금 한국교회는 계몽이 필요한 상태라 할 수 있어요.

믿음과 신비 경험은 그 뒤에나 가능하겠지요.

척박한 교회 현장이 기다리고 있는데,

용기를 내세요.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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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jhon

March 29, 2010
*.111.243.242

 

정목사님!

샬롬!  목사님의 설교문을 대할 때마다 도전과 새로운 그노시스를 얻습니다.

늘 감사를 드립니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목사님께서  "그노시스 크리스투와 피스티스 크리스투는, 즉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일치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공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일까요? 라는 질문에 예수님(하나님께서 보낸 자)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그 성경적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저같은 연약한 신자가 예수님에 대한 '그노시스'에 이르게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을 아는 것이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기도만 해야 할까요?  

  목사님은 바울의 말을 인용해 아무도 완전에 이를 수 없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오직 부르심의  푯대를 향해 달려갈 뿐이라고요.  그러나

  그 이유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것에 대한 경험이 별로 또렷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인식하려면, 그래서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자리를 위협하는 경우에 그것을 가차 없이 잘라낼 수 있으려면 절대적인 것에 대한 명백한 인식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목사님께서 위에서 말씀하신 경지 가까이는 안내하실 수 있겠지요. 자주 대하는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통해서 그 그노시스에 조금씩 다가간다고 생각하면서도 영적으로 빈곤한 제 자신을 보면서 답답하고 괴로워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늘 강녕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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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30, 2010
*.120.170.243

john 님,

절대적인 것에 대한 명백한 인식과 경험에 이르는 길을

안내해 달라는 말씀이시죠?

와, 나도 겨우 길을 기웃거리며 가고 있는 주제에

다른 분에게 그 길을 안내하기는 힘에 겨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그 절대적인 것이라는 그 무엇은 손에 잡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잡았다고 생각하면 그 순간에 비어버리거든요.

에두르지 말고 고지식하게 말씀드리는 게 좋겠군요.

우리가 죽지요?

그게 절대적인 것입니다.

알고 있다고 하지만 느슨하게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답니다.

죽음을 지금 지금의 삶으로 당길 수만 있다면

우리가 절대적인 것과 일치하는 거지요.

다시 에둘러서 말씀드리죠.

불교에서 말하는 공즉색, 색즉공이라는 개념도

역시 절대적인 것에 대한 표현이랍니다.

이런 인식이 철저하다면

상대적인 것이 눈에 들어오게 되겠지요.

고난주간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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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김철민

March 30, 2010
*.109.12.77

죄송합니다만, 님의 글을 바울이 읽으면 말장난도 참 더럽게 한다고 했겠습니다.

설교라고 하시는 저 강연의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요? 실제로 저 글이 설교 강단을 통해서

예배 가운데 읽혀졌다면, 님이 갖고 계신 설교관은 무엇인가요?

하도 다른 목사들 설교를 비판하는 분이 있다고 해서 여기 저기 거치다보니

이 게시판까지 왔는데, 님의 설교관을 한 번 정의해 주면, 글을 읽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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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30, 2010
*.120.170.243

김철민 님,

안녕하세요.

제 설교가 말장난처럼 보인다고 하셨지요?

청중들에게 그렇게 전달될까 해서 염려를 많이 하는데,

결국은 그렇게 전달되었군요.

내 책임입니다.

그래도 내 입장에서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의 신비를 전하려는 거지요.

그 말은 세계를 창조하는 능력을 가리킨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자, 바로 예수님이시구요.

이건 내 말이 아니라 요한복음 기자의 설명이랍니다.

'님의 설교관'에 대한 정의를 내려달라고 하셨는데,

그런 건 이런 대글에 어울리는 요구가 아닙니다.

정철민 님은 제가 전혀 모르는 분인데,

기독교인이라고 보기에는 굉장이 공격적인 글을 쓰시네요.

정말 궁금한 게 있으면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고난주간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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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우디

March 30, 2010
*.15.172.14

김철민님의 댓글 잘 읽었습니다.

다른 목사님들 설교 비판하는 분을 찾고 찾아 그 설교를 읽어보니

별 감동이 없어서 실망이 크셨던 모양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글들이 비판이라기 보다는

비평으로서의 형식과 내용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고 보았는데,

1. 김철민님께는 비평이 아닌 비판으로만 보였나 봅니다.

그게 아니면 "다른 목사들 설교를 비판하는 분이 있다"라는 말을 "하도" 듣다보니

2. 비판인지 비평인지 확인하지 않고 댓글을 달으신 것 아니신지요?

 

어느 경우이던 간에 댓글을 달으실 때에는

예의를 가지고 적절한 어휘를 선택하셔서 근거를 들어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님을 댓글에 대하여 "댓글도 참 (       )게 단다."이러면 안되잖아요?

저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댓글을 너무 심하게 쓰셨네요. 좀더 예의를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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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용남군

March 30, 2010
*.11.251.130

목사님의 겸손과 인내심에 늘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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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March 31, 2010
*.122.208.32

김철민님,

저는 정목사님의 설교를 매주 현장에서 듣고 있는 샘터교회의 교우입니다.

저도 왠만하면 그냥 지나치려 했습니다마는 꼭 한 말씀 드려야 겠군요.

참으로 거칠고 무례한 댓글을 다셨군요.

앞으로는 최소한 기본적인 예의만이라도 지켜서 댓글을 달아 주시길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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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닥터케이

March 31, 2010
*.49.242.201

김철민님, 죄송합니다만 님의 댓글을 다른 사람들이 읽으면 성질도 참 더럽다고 하겠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는지요?

정 목사님의 설교관이 궁금하시면 이 홈페이지에 있는 기존의 글들을 차분히 읽어보시면 저절로 이해가 됩니다. 동의하든 안하든 그것은 그 이후의 문제이지만, 적어도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이 남들을 비판하고자 쓴 글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게 되실 것입니다. 비평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설교관이 어떠냐는 질문은 무의미 합니다. 일단 그 작업부터 하시고 난 다음에, 그래도 이해가 안되면 설교관의 정의니 뭣이니 하는 질문을 하시는게 상식적인 행동입니다. 요즘은 교회에 비상식적인 일들이 워낙 많이 난무하니 김철민님의 댓글도 생경한 것은 아니지만 보기에 좋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바람직한 것도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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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김철민

March 31, 2010
*.109.12.77

닥터님, 비평의 본질 파악이 먼저입니까? 그 비평을 가져오게 하는 ism이 먼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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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jhon

March 31, 2010
*.111.243.242

목사님 감사합니다. 바쁘신 중에서 일일히 답을 주시니.

절대에 대한 지식에 도달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셨는데요,  절대를 온전히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 인지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손안에서 빠져나간다는 말씀이 어렴풋이 이해는 됩니다

그리고 '죽음이 절대'라는 것을 이런 의미로 이해했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일체는 변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라진다는 점에서 상대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 뒤에 오는,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죽음만이 절대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를 잃는다.'그런 의미인가요?  그렇다면 존재나 소유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다. 왜냐 하면 그것을 실체가 아니라 잠시 누리다가 없어지는 것일 테니까요.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절대라면 , 즉 있음이 없음이고 없음이며, 존재가 무이고 무가 존재라는 명제만이 절대라면 그  앞에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과 '색즉시공, 공즉시색' 앞에서 영생과 절대자가 설 자리가 있을까요?

  절대에 대한 인식이, 유한하고 상대적인 지상의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 있다고  하여도, 즉 그것에 집착하지 않게 만든다 해도  진정한 해결이 될까요?

  목사님의 글이나 댓글을 깊이 생각하고 질문을 드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읽고 바로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드리는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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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김철민

March 31, 2010
*.109.12.77

별로 회답을 달고 싶지 않았지만, 토마스 쿤의 paradigm shift 가 좀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이렇게 또 오네요.

우디님, 비평과 비판의 차이가 뭔가요? 저는 비난이라는 표현대신 비판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고, 비판과 비평을 구별짓는 것 또한 말장난입니다.

그리고, 라라님?도 "정중히 부탁드린다"는 표현은 정중히 부탁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정용섭님은 가진악이 누렸던 복은 없나봅니다.  

 

제가 여기서 정용섭님의 글에 대한 어떤 생각이나 만약 있다면 신학을 알려달라는 것은 정용섭님의 글을 어떤 ism에 근거하여 바르게 읽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와 예수와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제가 적은 회답의 첫 줄에 나오는 표현때문에 몇 분이 마음이 상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단지 정용섭님이 근거로 했던 빌립보서에 나오는 단어를 사용해서 그대로 표현한 것 뿐인데,  본문에서 나는 냄새를 다들 맡지는 못하셨나 봅니다.

제가 볼 때 님의 글은 야스퍼스나 키에르케고르적인 언어적 유희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기독교라고 하는 paradigm을 도구로 예수를 아는 지식이 아닌, 예수에 관한 무언가를 설파함으로 오히려 '예수 안에서 발견되려는 자'들을 혼란케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가장 행복한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고, 진실은 거짓이고 거짓은 진실이라는, 또 실재는 허상이며 허상은 실재라고 말한 한 철학자의 말이 생각나네요. 다 옳은 말이며, 19세기 지성인들은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열광했지요, 왜냐면 '진리는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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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March 31, 2010
*.136.37.80

ism이 뭔가요? 제가 무식해서... paradigm은 또 무엇이구요... 너무 어려운 단어가 많아서...

(이것에 대해서는 제가 공부를 할테니 굳이 설명 안해주셔도 됩니다.^^)

 

전 좀 쉽게 얘기 하겠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전하고자 할 때 말이나 글로써 가장 많이 하지요.

어떤 것에 대한 설명을 할 때, 특히 무엇에 대해 설명하여 이해시키려 할 때

여러가지 방법으로 말을 하겠지요.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어떤 관점에서 듣느냐에 따라

언어적 유희로 밖에 들리지 않는 사람도 있고

진리에 더 다가서게 하는 명쾌한 설명으로 듣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말로 듣는 사람도 있겠지요.

예수님께서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 때도 듣는 사람에 따라 달랐으니까.

예수님의 말씀도 언어적 유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김철민씨는 과연 어떤 관점에서 정용섭 목사님의 글을

읽었을까라는 추측을 감히 해봅니다.(님께서도 바울의 마음을 추측하셨기에..)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사실과 다를 수 있으니 다르면 다르다고 댓글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김철민씨는 일단 정용섭님 이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정목사님이라는 호칭도 쓰셨지만.. )

또한 '설교라고 하는 저 강연'이라는 말도 했지요.

이건 정용섭 목사님을 목사님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자세가 드러난 것이지요.

그러한 자세로 설교를 들으면 그 생각에서 출력되는 생각이나 말은

지금 김철민씨가 댓글을 단 것처럼 밖에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감히 비교를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굳이 비교를 하자면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느끼고 생각했던 것도 김철민씨와 같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제가 김철민님이라고 쓰지 않은 이유는 아시겠지요?(이거 좀 많이 유치하지요?^^)

김철민씨라고 쓴 것과 김철민님이라고 쓴 것의 차이 말입니다.

이것도 말장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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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김철민

March 31, 2010
*.109.12.77

아, 그리고 닥터님, 그 글을 다 읽으신 후 닥터님이 결론내리신 정목사님의 설교관을 알려주시면 좀 더 도움이 되겠습니다.

닥터님의 회답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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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닥터케이

March 31, 2010
*.90.149.105

정목사님의 설교관이 궁금하시면 남에게 묻지 말고 직접 정목사님의 글들을 읽고 잘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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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김철민

March 31, 2010
*.109.12.77

역시 실망시키지 않으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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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닥터케이

March 31, 2010
*.90.149.105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고 기대가 적으면 실망도 적은 것이 인생사이니까 당연한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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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우디

March 31, 2010
*.66.172.32

김철민님께서는 저 또는 그 비슷한 사람들에 비하여 더 인문학적 신격이 있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키에르케고르, 또는 야스퍼스 이런 이들의 이름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봤던듯한 기억을  김철민님의 댓글을 통해서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키에르케고르가, 야스퍼스가 작가인지, 철학가인지, 건축가, 물리학자인지는 생각이 안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위 설교에서 저는 더럽게 말장난한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정목사님의 설교들을 통해서 저의 믿음과 신앙에 대해 더 깊이 성찰하게 되고, 조심스럽고 진지해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종종 정목사님의 설교가 어렵다거나 어휘가 낯설어 불편하다는 말은 들어봤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그런 경향이 있었으나,

점점 익숙해지니 근원적인 것을 말할 때에 너무 구체적인 것을 가리키는 언어로는 그 의미가  더 확장되지 못할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가 처음에 다비아 접했을 때에, 참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러면서도 게시된 글을 하나 하나 읽다보니, 더러는 갸우뚱 하기도 하고 더러는 끄덕끄덕하기도 했고요.

다소 위험한 분이 아닌가 하면서 정목사님의 설교관, 신학에 대해 얼른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신학단상에 있는 글들, 수십편의 지난 설교들, 설교비평에 있는 글들을 하나하나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정목사님의 설교관, ism ... 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비아에는 목사님의 설교관이 너무나 여러 글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설교비평 게시판에서 3건만 읽어봐도 알수 있고요,

신학마당 > 신학단상 에서 <제목 : 설교> 로 검색을 하시면 14건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와 같은 방법으로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관, ism 은 무엇인가를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없이 불쑥 댓글에

"설교가 말장난 더럽소. 정용섭님의 ism 이 무엇이오, 정용섭님의 설교관을 말해보시오"

"그러면 댓글을 단 그대가 결론내린 정용섭님의 설교관을 알려주시오"

"댓글에 있는 비평, 비판 구별도 말장난이오"

이렇게 글쓰기를 칼 휘두르듯 하는 것은 참으로 당황스러운 장면입니다.

누구라도 이와 같은 댓글에는 진심있는 응답을 보이기는 힘든 것입니다.

다비아에서 천천히 읽어보시고, 김철민님이 함께 할만한 곳인지 아닌지 스스로 판단하시면 되리라 봅니다.

바라건대 함께 길을 갈 수 있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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