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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의 깊이로!

성탄절 조회 수 23531 추천 수 4 2010.12.26 22:3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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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이사야 63:7-14 

은총의 깊이로!

(사 63:7-14), 12월26일, 성탄절후 첫째 주일

 

7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 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11 백성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 이르되 백성과 양 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들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12 그의 영광의 팔이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시며 그의 이름을 영원하게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을 갈라지게 하시고 13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광야에 있는 말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14 여호와의 영이 그들을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와 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오늘 설교의 본문인 사 63:7-14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른 일종의 예배 찬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과 형식은 시편과 비슷합니다. 이 노래가 불리기 시작한 때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당한 기원전 587년이 약간 지났을 때입니다. 민족적으로 어둠의 시절이었던 이 시기에 많은 문서들이 기록되었고, 그런 문서들이 구약에 포함되었습니다. 사람은 원래 고통의 시절에 근본적인 것을 질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장 궁극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왜 파멸되었을까요? 하나님이 무능력한 존재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는가? 이 고통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이런 질문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큰 불행이 닥칩니다. 사업에 실패도 하고, 실연을 당하기도 하고, 큰 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도저히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 앞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민족적인 구렁텅이 앞에서 부른 찬송입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이를 탄식 시(詩)로 분류합니다.

 

    고난과 은총

     이사야는 고난의 시절에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사 63:7) 지금 유대 민족이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느냐 아니냐 하는 위기상황에서 여호와의 자비, 사랑, 은총을 거론한다는 것은 이것이 아무리 문학적인 수사가 곁들여진 시라고 하더라도 한가해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영적인 능력입니다. 고난이 심할수록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더 절실하게 노래했습니다. 이런 대목에서 우리는 그들의 영성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총에 매달렸습니다. 그런 저력으로 지난 수천 년 동안 계속된 고난의 역사를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 8절부터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이라고 인정하셨고, 거짓을 행하지 않는 자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선택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서 반복된 하나님의 주도적인 행위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 사실에 대한 영적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실일까요? 하나님이 다른 민족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스라엘만 ‘나의 백성’이라고 부르셨을까요? 그 증거가 무엇인가요? 그 증거는 제 삼자가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관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연인관계에 있는 두 사람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특별한 일이 없는 것 같지만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경험합니다. ‘내 사람’이라고 느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름으로 증거를 댈 수 있습니다. 그 증거가 다른 사람에게는 시시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두 사람에게는 절대적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나의 백성’이라고 선택하셨다는 사실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들의 고유한 영적 통찰력이 거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이라고 인정하셨다는 것은 그들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이사야는 8b절과 9절에서 말합니다. 나의 백성이라는 표현과 가까운 또 다른 표현은 시편에 흔하게 나오는 ‘나의 양’입니다. 이스라엘을 백성이라고 할 때 여호와는 왕이시고, 양이라고 할 때는 목자이십니다. 왕은 백성의 생명을 보장하며, 목자는 양의 생명을 지킵니다. 왕은 백성의 구원자이고, 목자는 양의 구원자입니다. 그가 구원자라는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모든 환난’에(9절) 동참한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바로 환난의 순간에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이 환난을 당하는 순간, 바로 그 자리에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동참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진술도 모든 사람에게 실증적으로 확인해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알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함께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그렇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유한 영적 통찰력이 작용합니다. 마치 일반 사람들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그런 장면에서도 시인은 특별한 시적 감수성을 경험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난 가운데 동참했다는 사실을 이사야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걸까요?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영적 경험이 있을까요?

오늘 설교의 제목은 ‘은총의 깊이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환난에 동참한다는 사실은 은총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면 경험될 수 없습니다. 은총에 대한 경험은 사물을 확인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돈벌이와 다릅니다. 그것은 목회와도 다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깊이만큼 보입니다. 이는 마치 바다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다의 파도만 봅니다. 그것이 바다의 모든 것처럼 생각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발만 담급니다. 그것으로 바다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스쿠버다이빙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바다 밑으로 내려가서 많은 걸 볼 수 있겠지요. 해변에서 파도만 보고 그것이 바다의 모든 것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바다 속의 세계를 아무리 설명해줘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사야는 영적인 바다 밑을 마음대로 헤엄칠 수 있는 고난도 실력을 갖춘 스쿠버와 같습니다. 이사야가 경험한 은총의 깊이를 좀더 따라가겠습니다.

 

    갈라지는 물

     이사야는 11절부터 모세 전승을 거론합니다. 모세 시절은 고난의 대행군과 같은 때였습니다. 그의 출생부터가 그렇습니다.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새로 태어난 아이가 남자면 모두 나일강에 던지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도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갈대로 작은 배를 만들어 세 달된 모세를 그 배에 태워 나일 강에 띄었습니다. 바로의 공주가 그 아이를 발견해서 살렸습니다. 모세는 기적적으로 물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80년 후 홍해에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애굽을 탈출한 모세는 홍해 앞에서 길이 막혔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지게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홍해 전승으로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 전승을 이사야가 그대로 받아 쓴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갈라진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이사야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광야에 있는 말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사 63:13)

이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 밑으로 땅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함께 해변에서 홍해 밑바닥으로 내려갑니다. 양쪽으로는 여전히 바닷물로 된 벽이 세워져 있습니다. 만약 물이 다시 땅을 덮친다면 그들은 모두 수장되고 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다는 확신으로 기쁨으로 행진하듯이 홍해 안으로 들어갔을까요? 그게 과연 신나는 일이었을까요? 적지 않은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비록 두렵지만 그들은 점점 깊이 들어갑니다. 원래 그 깊은 곳은 악한 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깊음은 위험한 곳입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입니다. 깊이로 내려왔지만 어쩌면 밖으로 나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곳은 아차 하는 순간이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멸절할 수밖에 없는 장소였습니다. 죽음을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홍해 전승을 리얼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이 역사적으로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여기서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서기자들은 지금 물리학적 사실이나 고고학적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의 하나님 경험을 말하는 겁니다. 그들은 홍해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은 경험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주변의 제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공포를 경험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와중에 홀로코스트가, 즉 유대인 대학살이 발생했습니다.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홍해의 깊은 곳을 경험했을 겁니다. 순식간에 바닷물이 땅을 집어삼킬 것과 같은 경험 말입니다.

홍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우리는 압니다. 광야에서 말이 잘 달리듯이 그들도 홍해 깊은 땅을 넘어지지 않고 걸어서 건넜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도대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신 이가 누군가요? 그가 어디 있나요? 이사야는 지금 탄식하듯 바로 그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외칩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환난에 동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으로 인해서 홍해의 깊은 곳을 편안하게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사야는 문학적인 수사력을 발휘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호아의 영이 그들을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사 63:14a) 골짜기도 깊은 곳이긴 합니다만 홍해의 깊은 곳과는 다릅니다. 골짜기는 가축이 편안히 물을 마시고 풀을 뜯을 수 있는 곳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처럼 홍해의 깊은 곳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로!

     이사야는 지금 홍해의 깊은 곳에서 골짜기의 평화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가득한 깊은 곳에서 생명의 평화를 내다봅니다. 인간의 눈에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말이 될까요? 혹시 망상이 아닌가요? 그것을 현실로 살아가는 태도가 바로 성서가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이런 신앙의 눈이 열리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은총을 깊이로 경험하지 못하고 표피적인 것으로만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살이가 잘 풀리는 것에서만 하나님의 은총을 맛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그렇게 잘 풀린다면 그렇게 살아도 좋습니다. 언젠가는 홍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 날이 옵니다. 모든 희망이 끊기는 것과 같은 순간이 옵니다. 아무리 인생이 잘 풀려도 죽는 날이 올 겁니다. 여러분이 홍해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순간입니다. 평소에 그런 깊은 곳을 외면한 채 재미있는 인생만 생각했다면 죽음은 말 그대로 절망으로 다가올 겁니다. 살아있는 동안 절망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처럼 편히 쉴 것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홍해의 깊은 곳에 내려가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천수를 살다가 죽은 분이 아닙니다. 사고를 만나거나 병으로 죽은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가장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한탄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미래를 완전히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저주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판넨베르크의 표현처럼 그분의 십자가 죽음 이후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더 이상 혼자 고독하게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성탄절 후 첫째 주일입니다. 어제는 성탄절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해야 할 이유가 아주 분명합니다. 오늘 이사야에게서 전해들은 은총의 놀라운 깊이를 예수님에게서 실제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홍해의 깊은 곳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영적 시선을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리십시오. 그분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십시오. 그 은총을 실제로 살아내십시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그 사실을 말로, 삶으로 전하십시오.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은 죽음보다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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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바람

December 27, 2010
*.158.188.41

목사님, 깊이있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언어사건이 된 텍스트가 신학과 목사님의 고유한 영성 속에서

마음껏 춤추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텍스트가 시간과 역사의 신비를 담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뜁니다.

그러나 여전히 텍스트앞에 서면 어디서부터 말씀을 풀어야 할지 막막해집니다.

그래도 목사님의 설교를 조금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는게 큰 기쁨이고 희망입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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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8, 2010
*.120.170.250

바람 님,

설교공부 모임에 세번이나 참석했지요?

성서의 놀라운 세계로 들어가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은 막막한 순간이 많을지 모르지만

구도자처럼 길을 가다보면

그 세계가 열리고 말을 걸어오는 경험을 하게 될 거에요.

준비가 되기만 하면

나보다 훨씬 깊은 세계로 들어가게 될 거에요.

이런 것 이외에 목사의 영성은 어디서도 주어지지 않아요.

힘을 내고 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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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beginner

December 27, 2010
*.238.202.176

홍해의 깊은 곳!

죽음보다 깊은 은총!

예배 후 식사 시간에 곽집사님과 유니스와

목사님 설교 말씀으로 밥을 먹었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은총의 깊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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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8, 2010
*.120.170.250

이일녀 집사님,

죽음보다 깊은 은총이라,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신앙의 모든 것이겠지요.

이제 집사님은

문학적인 소양이 풍요로웠던 여고시절이 다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입에 붙은, 상투적인 용어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용어로 신앙을 표현하시니 말입니다.

띠가 저와 같지요? ㅎㅎ

인생 후반을 죽음보다 깊은 은총의 깊이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도록 천천히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준비 없이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는 걸을 아시지요?

앗, 눈이 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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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창조의 향기

December 27, 2010
*.18.184.206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구상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 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空)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는

매한가지지만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意識)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

 

 

*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금 깊이 묵상해봐야 하겠습니다.

매주 월요일 기대하는 맘으로 설교말씀을 찾는데, 글은 처음 올리네요. 

설교말씀을 읽으며 제가 좋아하는 구상 시인의 시가 떠올라서 함께 나눠봅니다.

- 라이프찌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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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8, 2010
*.120.170.250

향기 님,

처음에 시를 읽으면서

삶의 향기가 깊이 전달되는 듯했습니다.

향기 님이 직접 쓰신 걸로 생각했는데,

구상 시인이 쓰신 거군요.

덕분에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라이프찌히에 계시는군요.

공부하세요?

혹시 서울샘터교회 예배에 참석하셨던 분이 아닌지요.

독일의 도시 이름만 들어도

나의 30대 초반 유학시절이 생각하네요.

지금 이곳에는 함박눈이 쏟아집니다.

한해 잘 마무리 하시고.

즐거운 새해를 맞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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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창조의 향기

December 29, 2010
*.18.184.206

목사님 안녕하세요. 

네, 올해 초에 친구와 한달정도 예배참석했던 학생입니다.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종종 사이트에 들러서 주일말씀과 여러 신앙글들을 접하고 있습니다.

그때 함께 했던 사진 전공하는 친구와도 함께 이곳 말씀들을 읽고 얘기나누곤 합니다.

유학생활 가운데 영적인 방향을 잡아주는 등대 같아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곳은 올해 눈이 너무 많이 오는군요. 하얀 눈이 사람마을의 화려함도 추함도 모두 새하얗게 뒤덮는 듯 하네요.  

주님의 은혜도 이같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목사님 그리고 샘터교회 식구들 모두 복된 새해 맞으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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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December 29, 2010
*.255.183.133

창조의 향기님, 우리 샘터교회 오셨던 분 맞지요?

저도 구상시인 너무 좋아하는데, 이런 시도 있었군요.

정말 가슴에 새겨 두고 싶은 시네요. 잘 감상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if !supportEmptyParas]--> <!--[endif]--> 요런게 많이 들어가는데,

왜 그럴까요?^^

 

정말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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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창조의 향기

December 29, 2010
*.18.184.206

구상시인을 좋아하신다니 반갑네요.

시인의 말년에 쓰인 시인데, 영적인 깨달음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제 화면에는 깨끗하게 보이는데, 뭔가 호환에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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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참믿음

December 28, 2010
*.177.73.140

하나님의 은총의 깊이

한없이 떨어지며

그 끝이 어디인가?

 

너무 아찔  현기증이

두려움으로 멈추네요

 

술에 깊이 취한 그 해방의 느낌

깊은은총에서  묘한 두려운 떨림

 

그것은 아직 나에겐

서툴고

나 같은자에게는 아직  과분한

 

알지만

그분께 전적으로 맡기지 못함은

또 다른 두려움이

 

2011년은 그 두려움을 날려버려

죽음보다 더 깊은 곳 

한없이 떨어지는

체험을 하게 하소소

 

목사님 편한밤 되세요

내일은 또 오늘입니다.

천천히 좀 쉬시면서 일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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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8, 2010
*.120.170.250

참믿음 님,

생명, 시간, 은총의 신비 앞에서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위 글에서 생생하게 전달되는군요.

술취함과 은총에 들어감이 대비되면서

묘한 기분을 자아냅니다.

그래요.

'한없이 떨어져'

그분과 하나되는 순간의 희열 안으로

들어가봅시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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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December 29, 2010
*.255.183.133

목사님, "하나님의 은총은 죽음보다 깊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죽은자들로부터의 일어나심"이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죽음을 극복하시고, 통과하신 분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육신의 죽음까지도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 은총의 영역안에서

받아드린다면, "고난이 내게 유익이다."라는 말에서 "죽음이 나의 유익이다."까지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의 종착역인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겨진다면,

우리 삶에 시시로 닥치는 고난, 환난, 고통(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일지라도), 심지어는 임종의 자리에서도 "나의 죽음,이것이 은총이었네."라는 고백까지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건 결코 감상적 고백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또한 이런 고백을 자주 하는데요, 가장 극한의 지점에 와 있을 때 "나는 너의 창조자니라." 이렇게 당신을 계시하시는 거더라, 라고요. "나는 너의 창조자, 너의 하나님이라."이 말씀이야말로 나의 실존, 내가 주안에 있다는 근거를 가장 명확하게 규정지어주는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큰 범주를 정해 놓고 삶을 살아간다면, 참으로 이 지난하고 고달픈 우리네 삶이 얼마나 새털같이 가벼울까요?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는 자연스레 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c.s 루이스는 고통을 "쉐도우렌즈"라는 말로 표현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 그러나 고통은 성서기자들, 특히 시편기자들이 가장 잘 해명해 주셨다는 생각이 오늘 설교 들으면서 더 굳혀지네요.

고통은 (내세의)그림자라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표이다..(아, 임마누엘 하나님!!)

목사님, 제가 잘 이해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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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9, 2010
*.120.170.250

라라 님,

"목사님, 제가 잘 이해한 걸까요?"라고 물었지요?

그건 제가 모른답니다.

삶과 고통에 대한 라라 님의 경험을

내가 따라가기 힘들기 때문이에요.

또 한 가지는 위 글에는 많은 것들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은총, 죽음 부활, 창조, 고통 등등이 연결되는데요.

이렇게 거시담론들이 섞이면

자칫 비약이 생기거든요.

그 용어들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더 설명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이런 짧은 글에서는 가능한대로 한 가지 주제로만 집중하는 게 좋아요.

예를 들어 지막에 나온 글이요.

"고통은 (내세의)그림자라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표이다..(아, 임마누엘 하나님!!)"

이게 무슨 뜻인지 잘 와 닿지 않거든요.

라라 님이 글을 잘못 썼다는 게 아니라

서로 먼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낸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아마 내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거에요.  

어쨌든지 어렵게 쓰지 말고

쉽게 쓰시도록,

고상하게 쓰지 말고

담백하게 쓰시도록!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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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December 30, 2010
*.255.183.133

예, 목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다시 읽어보니

"시방,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목사님? "요렇게 되려 여쭤 보고 있네요. ㅋㅋ

제 생각을 글로 표현한다는 건 너무 어려워요, 목사님, ^^

더구나 논리적으로 사유하는 훈련이 안되서 더 그럴 거예요. 고상하고는 넘 먼 것 같은데요?^^

 

목사님, 그래도 저는 저의 최선을 다해서 전달한 거랍니다. 이 보다 더 잘 전달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왜냐면요, 제가 이렇게 이해를 한 거거든요,

고통은 고통자체에서는 죽었다깨나도 이해할 수 없다, 그건 단편적으로 고통에 대한 분석일 뿐이다..

왜 그런가 했더니.. 고통은 창조, 예수님의 죽음, 부활, 은총, 계시..

이런 범주 안에서만 제대로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게 도무지 잡히지 않았는데,

"은총은 죽음보다 깊다." 이 말씀에 함축되어 있었다. 그렇게 이해하니, 내 경험상으로 봐서도 이해된다.

그 죽음 끝까지, 극한의 한계 상황에서 주님은 극적으로 당신을 계시하시더라, 그게 '은총'이었다.

그러기에 고통의 문제 또한 이런 은총의 맥락안에서 이해되더라..

c.s 루이스도 고통의 문제를 집요하게 다뤘지만,

설교말씀을 듣다 보니, 고통, 심지어 우리의 죽음까지도 이 "죽음보다 깊은 은총"안에서만이 해결 될 수 있는 같다..

그건 다름아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의 증표 아니겠는가..

고통은 하나님의 (지금, 여기서)임재와 떼어서 생각할 수없다.. 이런 의미였어요.

섬광처럼!! 이런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었어요. 목사님,

 

오늘 서울은 설국이군요.

새벽에 일어나서 <영광과 평화의 노래> 설교 들으면서,

또 다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묵상해 봤습니다.

다시 어제의 그 '섬광'이 저를 휘몰아 감싸안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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