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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종됨의 관계

성령강림절 조회 수 19036 추천 수 3 2010.10.04 10: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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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누가복음 17:5-10 

믿음과 종됨의 관계

(눅 17:5-10)

 

     누가복음 17:1-10절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네 가지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이 네 가지 중에는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것도 있고, 나오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나오더라도 서로 위치가 다릅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 네 가지를 한 군데로 모아 편집했습니다. 그 이유는 각각의 항목이 서로 연결된다고 보았거나, 아니면 제자들이 모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가르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겠지요. 1-2절은 실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살이에서 서로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의도하지 않아도 실족하거나 실족시키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 바다에 던지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그만큼 엄중하다는 뜻입니다. 3-4절은 용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경고하고,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죄를 짓고 회개하면 그를 용서하라는 겁니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한 번도 용서할 줄 모릅니다. 이것도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가르침입니다.

 

    겨자씨 믿음

     오늘 설교의 본문은 세 번째 가르침부터 시작됩니다. 5-6절은 믿음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이 예수님에게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5절) 그들의 이런 요청은 기특해 보입니다. 부자가 되게 해달라거나 출세하게 해달라거나, 또는 건강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더해 달라는 겁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아는 것에 불과하지 실제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믿음보다 경쟁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이 믿음인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정생활이나 자녀교육에서도 이런 이유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자녀들에게 가장 크게 기대하는 것은 공부와 경쟁력입니다. 말은 믿음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경쟁력입니다. 믿음은 나중에라도 회복할 수 있지만 경쟁력은 지금 당장 확보하지 않으면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어떻게 교육하는 게 신앙교육인지를 잘 모르기도 합니다. 우리의 숙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절) 예수님의 대답은 동문서답처럼 들립니다. 믿음을 더해달라고 했으면 ‘더해주마’라고 하든지 더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든지, 또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셔야만 했습니다. 겨자씨는 씨 중에서도 아주 작은 씨입니다. 뽕나무는 겨자씨에 비교할 없을 정도로 큽니다. 어른이 올라가도 될 만한 크기의 나무입니다. 뽕나무를 바다에 옮기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겨자씨처럼 작은 믿음만 있어도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뜻일까요? 믿음에는 작은 믿음과 큰 믿음이 따로 없다는 뜻일까요? 그러니 믿음을 더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믿음에도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의 관계에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 부모와 자식이 있습니다. 자식들은 일반적으로 부모를 믿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부모를 의심하는 자식들도 있습니다. 사춘기 때는 거의 모든 자녀들이 부모를 의심합니다. 그 시절을 정상적으로 통과하면 다시 믿음의 단계로 접어듭니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이와 똑같지는 않지만 믿음의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믿음이 형편없이 부족하거나 없습니다. 그 증거들은 세상걱정과 자기연민에 사로잡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걱정을 크게 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완전히 초월해서 사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마치 전쟁 중에도, 비바람 속에서도 엄마 품에 안겨 평화롭게 잠자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믿음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을 더해달라는 제자들의 요구는 정당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겨자씨와 뽕나무 이야기를 하신 걸까요?

     그것은 믿음의 본질에 대한 생각의 차이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의 크기를 어떤 가시적 능력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같은 사람들의 능력이 가득했을 겁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백세에 얻은 이삭을 번제 형식으로 하나님께 바칠 생각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능력을 보였습니다. 엘리야는 초자연적 능력이 가장 출중했던 인물입니다. 이들처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제자들도 남에게 보일만한 능력을 갖고 싶었겠지요. 그들은 믿음이 클수록 더 큰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큰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오늘도 많은 신자들이 믿음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일을 무작정 밀고 나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이 200명밖에 나오지 않는 교회를 몇 년 안에 1천명으로 키우겠다고 큰 소리 치거나 무리하게 헌금하는 것을 믿음의 크기로 말합니다.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믿음이 없다고 낮추어 말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사람에게 나타나는 큰 능력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았습니다. 뽕나무를 바다로 옮기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불가능합니다. 겨자씨 같이 작은 믿음으로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은 그런 일이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능력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뽕나무를 옮기는 일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능력을 보이기 위해서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능력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큰 능력을 나타내려고 믿음을 더해달라는 것은 월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런 능력이 없으니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말인가요?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한 노력도 아무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미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큰 일을 희망하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네 번째 가르침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무익한 종

     예수님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일반적인 제도였습니다. 그걸 배경으로 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네 번째 이야기입니다. 종이 밭을 갈거나 양을 쳤다고 해서 집에 돌아와 대접을 받는 게 아닙니다. 종은 주인의 식사준비를 해야 하고, 주인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후에 종은 먹을 수 있습니다. 주인의 명령을 다 따랐다고 해도 주인에게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이런 일을 천부당만부당합니다. 아무리 종이라 하더라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2천 년 전입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였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해야 하고, 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받을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10절)

     이 가르침은 제자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리새인을 향한 충고이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적인 행위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율법을 자기들보다 더 잘 지키는 사람들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모범적으로 살았습니다. 기도, 헌금, 구제, 금식 등, 모든 신앙생활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오늘로 바꾸면 믿음 좋은 장로님들, 또는 그런 정도의 신앙 연륜이 있는 분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분들은 시간과 물질을 전폭적으로 교회에 투자합니다.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기준으로만 보면 그렇게 살아야만 장로가 될 수 있습니다. 본인이 즐거워서, 본인의 신앙고백으로 그렇게 교회에 묶여 산다면 누가 뭐라 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어야만 교회 공동체가 힘을 얻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걸 자랑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노골적으로 자랑하는 분들도 있고,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종이 주인의 명령을 다 행한 후에 “나 이만큼 했으니 알아주시오.”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인정받으면 아무리 큰 고생이라고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인정받지 못하면 아무리 쉬운 일이라고 하기 싫어집니다. 교육적으로도 인정은 효과가 큽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마음의 움직임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수고를 우리가 죽은 뒤에 하나님이 인정해주기를 바랍니다. 이런 마음을 무조건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역시 인간적인 성정을 모두 포기하고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에서도 가능하면 서로를 인정해주는 태도는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할 만큼 했다는 자세가 아니라 ‘무익한 종’이라는 자세로 돌아서야 합니다. 이런 자세는 손해 보는 일일까요? 그것이 손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기독교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지 못한 것입니다. 무익한 종의 자세는 자기 무능력에 대한 열등감도 아니고 자기 합리화도 아니고, 세계 현실에 대한 정확한 통찰이며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특히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태양을 보십시오. 태양이 우리를 위해서 빛을 내지 우리가 태양을 위해서 연료를 공급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한다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오늘 우리의 소비 중심적인 삶을 보십시오. 전쟁과 폭력을 보십시오. 남북의 이념갈등을 보십시오. 지역감정을 보십시오. 혹시 교회봉사를 생각하시나요? 구제와 선교활동을 생각하시나요? 물론 귀한 일이지만 그것도 아주 작은 일이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종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걸 모른다면 교만입니다. 교만이 바로 죄입니다.

     저는 앞에서 겨자씨와 같은 믿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대답을 무익한 종에 대한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이 이제 대답을 찾으셨겠지요?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대답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뭔가 한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겨자씨 믿음으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은 곧 종의 실존을 받아들이는 결단입니다.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할 게 아니라 종됨의 실존에 집중해야합니다.

     이런 삶이 비굴하게 느껴지시나요? 니체가 비판했듯이 노예근성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영적 시각을 맞추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입니다.(히 11:1) 무엇을 바랍니까?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를 바랍니다. 믿음은 그것의 현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종말에 이루실 부활의 세계입니다. 믿음은 그것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전혀 새로운 세계의 확실성을 알게 합니다. 이것보다 더 큰 능력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내 능력과 업적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종됨’을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즉 궁극적인 생명 현실 앞에서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거기에 사로잡힌다면 여러분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뽕나무가 뿌리째 뽑혀 바다로 심겨지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아멘. (성령강림절 후 열아홉째 주일, 10월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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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주님의평화

October 04, 2010
*.215.155.235

 

가끔 들러 좋은 글들 뵙고 갑니다.

 

 

오늘 오마이뉴스에 보니 과학과 신학에 대한 글을 올릴수 있게 허락하셨다는 글이 있어 읽어보다가,  

 

 

문득... '이분이 혹시 성공회 분이신가?' 싶었습니다. 보통 미국 성공회에서는 자주 듣는 이야기들이어서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미국성공회(Episcopal Church)를 다닙니다. 그리고 오늘 다비아에 다시 와서 찬찬히 살펴보니, 설교말씀도 모두 성무일도 순서로 하시고 계시더군요. 절기를 매우 중시하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혹시 교회에서도 매주 성찬을 하시는지요?

 

 

혹시 공도문을 참고 하시는지요?

 

 

제가 개인적으로 받은 느낌은, 성공회에 대해서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실것 같으세요.

(너무 질문이 많았습니다... 귀찮으셨다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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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바우로

October 04, 2010
*.62.24.93

안녕하세요. 저도 성공회 교회를 다닙니다. 미국 성공회(The Episcopal)이 아닌, 한국의 성공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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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주님의평화

October 05, 2010
*.215.155.235

반갑습니다. :)

원래 성공회가 매우 좁죠. 이런 좋은 곳에서 뵙게 되어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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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4, 2010
*.120.170.243

주님의 평화 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미국에 계시는군요.

성공회 신자이시구요.

성공회 사제로 회심할 생각이 없습니다. ㅎㅎ

그럴 자격도 없구요.

성찬을 월 1회를 하는데,

내년부터는 매주일 해야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동기도문을 사용하는 건 물론이에요.

다비아 위 막대바에서 <샘터교회>를 클릭하고

'서울샘터교회' 메뉴에 들어가면 예배 순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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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주님의평화

October 05, 2010
*.215.155.235

하하.. 회심이라뇨.  ^_^; 제가 보기엔 성공회 사제를 하실 자격도 차고 넘치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자격이 있어서 하는 것도 아니죠. 모든것이 하느님의 은혜이리라 봅니다.

샘터 서울 교회 주보를 보니까, 정말 예전이 잘 짜여져 있네요. 순서상 조금 차이가 있지만, 크게 문제되지 않는 차이인것 같구요. 한가지 굉장히 궁금한것은, 예전적인 교회들에서 사용하는 Lectionary 즉 성서봉독 부분은 Lesson 또는  Reading 으로 하기 때문에, 가끔씩 외경이 그 주의 구약성서가 위치하는 부분에 있곤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A해의 특정11주를 보면 지혜서, B해의 특정20주에는 지혜서, C해의 대림2주를 보면, 바룩서가 구약부분 독서목록으로 나오는데, 그럴 경우는 어떻게 하시는지 많이 궁금합니다. 그냥 외경을 넣어서 쓰시는지 혹은 성시와복음과 매치가 잘 되는 다른 구약 성서말씀을 선택하시는지요? (죄송합니다. 자꾸 궁금한게 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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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참믿음

October 04, 2010
*.120.151.79

목사님 아래 "개신교 종주국인 유럽교회의 몰락 "이라는 제목으로

sbs뉴스에 나온거 올려 봅니다.

목사님 생각은 어떠신지 듣고 싶습니다.

원인이 무엇인지?  그 현상이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은폐가 있는건지요?

오래전부터 궁금 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한국 교회도 유럽과 같은 교회가

되지 않기 위해 기존 대형 교회에서 예배,기도를 앞세워

더 종교성 열심을 강조 하고 있는 입장 입니다.

 

내용: 유럽교회 대부분 문을 닫고 다른 용도로 이용, 교회 나오는 인구는 전체 5%도 안된다.

         교회 건물은 지금 식당,카페,타종교 땐스 교습소로, 갱인 가정 생활공간 등으로 변했으며

         앞으로 미국도 점차 유럽처럼 변할 가능성 매우 높다. 지금 현제 2세대 때가오면 그렇게

         될거라 하네요 ( 뉴스 영상을 올려 드릴려는데 안되네요. 그래서 간략하게 요약)

 

목사님 유럽기독교인들이 구원의 보편성, 존재론적으로 깊이 들어가 있는  현상은 아닌가요?

교회 나오지 않는건 또 다른 이유가 있는건 아닐런지요?

그들의 기독교가 무너진게 아니라 우리와 다른 영성을 보이는건가요?

혹시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에 염증을 느껴 종교성만 떠난건 아닐런지요?

종교의 세속화 (자본주의 선두에서 파괴와 개종의 합리화 앞세워  전쟁 따위)에 신뢰성 상실 인가요?

 

목사님 글 모두 잘 읽고 습득 하고 있습니다.

다비안 운동에 부족하나마 일조 할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열심히 공부는 하고 있습니다만ㅎ.

목사님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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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4, 2010
*.120.170.243

참믿음 님,

유럽교회 문제는 한 두 가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처럼 적극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죽었다고 말하면 그것도 잘못이구요.

기독교가 그곳의 문화가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계몽된 사람들에게는 문화적인 접근 말고는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유럽 교회가 좋다는 뜻은 아니에요.

한국과 유럽의 중간 쯤 되는 교회가 바람직할까요?

어쨌든지 기독교인은 세상에서 소수로 남아 있는 게 당연합니다.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면 되는 거지요.

세상 구원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세상 전체를 통해서 구원활동을, 즉 선교를 하시거든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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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상수리

October 04, 2010
*.34.181.8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아멘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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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4, 2010
*.120.170.243

상수리 님,

내 설교가 놀라운 게 아니라

성서의 세계가 놀랍답니다.

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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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October 05, 2010
*.251.192.155

겨자씨와같은 믿음은 곧 우리의 종의 무익성에 대한 가르침을 말한다는 말씀...

겨자씨보다 더 큰 믿음을 갖기를 원하는 것은 능력을 발휘하려 함이고

무익한 종에게는 믿음 더함으로 더한 능력을 발휘하려는 것이 틀린 일이라는 것

무익한 종에게는 믿음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종의 마음자리라는 것,

목사님, 겨자씨가 늘 마음에 걸렸었습니다.

생명을 담지한 점 만한 것이,

없는 것이라 할 수도 없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말이어요.

다만 그 생명 담지성에 대하여는

그 씨만 보았을 때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나무가 생겨난다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내재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 같고,

보잘 것 없는 것에 대하여는

종의 무익성, 더 볼품이 있는 것이어서 뭔가를 해내려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의미..

로 이해가 이제 되어집니다.

특히 히브리서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않는 것들의 증거이다'에

종말과 부활의 세계에 대한 말씀으로 들으니 충격이었습니다.

각각의 알고 있던 것을 같이 조립해주실 때의 충격!

이제껏 바라던 것들이 흩어지는 그런 느낌요.

깊이 간직해야겠습니다.

감사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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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5, 2010
*.120.170.243

유니스 님,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좀더 분명하게 색깔이 드러나지요?

각각의 전체의 틀로 보는 작업이

바로 신학인데요.

그런 훈련이 신학교에서

부족한 편이죠.

그건 그렇고,

이제껏 바라던 것들이 흩어지고 있다니

아쉽습니까, 시원합니까?

솔직하게는 시원 섭섭하겠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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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October 07, 2010
*.209.173.60

목사님, 매주 말씀이 다 기다려지는 말씀이지만,

특별히 이번 주 말씀은 제게는 더 특별했는데요, 

한 때 교회다니기 정말 힘들었을때(싫어졌을 때)

이 본문 말씀 읽고 큰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해는 잘 안되었지만,

여태껏 들어온 기독교신앙과는 많이 달라 보였었어요.

그리고 이 두사람의 관계가 표면적으로는 일반적인 주인과 종의 관계였지만, 

그러나 그 둘 사이에 어떤 묵계 같은게 있어 보였는데요. 

그걸 도무지 모르겠어서 답답했었어요.

 

그러다 어느날,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이제 너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리라"하신 말씀에서

힌트를 얻었는데요,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맹목적으로 순종한 게 아니라 주인에 대한 '신뢰'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또한 자신의 실존을 바로 봤다는 증거겠지요?(이건 목사님 말씀 들으면서 이해된 거구요.)

설교 말미에서 "믿음은 종의 실존을 받아 드리는 결단"이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이제사 퍼즐의 남은 조각을 찾았구나, 싶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피조물로서, 종으로서의 참 자유가 무엇인지 더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라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이 자유와 사랑안에서,

그래서 우리는 맘껏, "무익한 종"으로 살아가면서,

아울러 무한한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비록 형편없는 삶을 살지라도요.

목사님, 삼일 내내 이 말씀만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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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7, 2010
*.120.170.243

라라 님,

피조물로서의 자유,

종의로서의 자유를 알았다면

기독교 영성의 근본으로 들어갔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주님의 분부에만 영혼을 집중하면 되니까요.

저 위의 분이 우리를 향해서

세상 구경 그만하고 오라고 하시면

득달같이 달려갈 준비만 하면 되겠지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롯의 아내처럼   미련이 많기에

실제 행동은 쉽지 않겠지요.

그래도 방향이 일단 정해졌고,

그 길이 조금씩 더 선명해지면

실제 행동도 따라가겠지요.

잘 알아서 하시겠지만

설교를 듣고 너무 오래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 자체에 매달리면

그것이 또 걸림돌이 된답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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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October 07, 2010
*.209.173.60

예, 목사님, 그동안 경험상으로 봐서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던 거 같습니다.^^

 

목사님, 시편강해 받아쓰기를 하면서,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게 하나 있는데요,

그건 성서기자들의 공통된 신앙고백이 "여호와를 찬양하라, 즐거워하라"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 찬양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토대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피조물임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삶의 자리에서 고백되어지는 것임을 알겠더라구요.

그리고 그 찬양은 자유를 아는 자만이 부를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러니까 그 '자유'는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창조하신)그 사랑을

깨닫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요.

그래서 저는 이 자유를 종종 '아름다운 束의 자유' 라고 부르고 싶어하는데요, 

그 '구속된 자유'만이 참 자유라는 생각에서 이지요.^^

 

목사님, 문제는 이런 앎이 제 삶에서 얼마나 체득이 되었으며,

또 가볍게, 자유하게 살아내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예요.

아마 다분히 흉내만 내던지 아니면 머리로만 알고 있을거예요.

그렇지만, 이 땅의 삶에는 그다지 큰 미련이 없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아, 주님께서 부르시면, 득달같이 달려가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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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춰니

October 09, 2010
*.227.99.107

목사님 잘 계시나요?^^

요 몇주간 임을 그리는 이처럼,

몰래 엿보기만 하다가 오늘아침

주신 말씀이 감사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몇일전에 강도사인허를 받았습니다.

여러 선배목사님들께서 좋은 목회에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마음과 진정성은 많은부분 공감했지만

점점 마음이 지쳐감을 느꼈습니다.

 

저분들처럼 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수고를 해야하나?

얼마나 많은 능력을 겸비해야하나...

소위 목회적 스펙을 확보해야 한다는 권고는

목회 초년생인 제가 받기에 너무 무거운 짐 같았습니다.

 

그런데 설교말씀이 제 마음을 전율케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미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큰일을 희망하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믿음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영적 시각을 맞추는 것입니다."

 

어느덧 저도 제자들처럼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다는 사실을 섬뜩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설교말씀을 통해 무익한 종의 마음을 갖게해 달라고 성령님께 구했습니다.

결국 능력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맡겨주신 일들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신말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참, 올해 목사님과 함께 예배드리게 해달라는 소망이

이뤄질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감사한일 투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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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9, 2010
*.120.170.243

춰니 님,

우선 축하(?) 해야겠네요.

강도사 인허를 받으셨으니

이제 정식으로 설교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군요.

한국교회 목사들은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야 한답니다.

불가능한 요구를 받고 있어요.

그런 요구가 구조적인 문제라서

개인이 해결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에요.

구조가 안 되면

그 구조를 넘어서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겠지요.

자, 힘을 내고

길을 가 봅시다.

갈수 있는 데까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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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진리추구

October 10, 2010
*.224.76.215

목사님, 오늘 주일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고 집에서 쉬고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 연구용역 보고서 쓰느라 너무 지치고, 또 월요일부터 할 일이 쌓여 있어서

오늘은 도무지 교회까지 갈 에너지가 부족합니다. ^_^

지금  지난 주 목사님 설교 말씀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지난 주 설교시간에 깨닫지 못 했던 말씀을 새롭게 깨달으면서 저의 삶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의 실상이요 하나님이 종말에 이루실 부활의 세계의 증거"라는

 히브리서의 해석은 새롭게 저에게 다가 옵니다.

지난 3년간 목사님의 설교말씀에 따라 저의 신앙과 삶을 리모델링하고 있습니다.

삶도 단순화하려고 하는 중입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요^_^

목사님과의 만남은 주께서 저에게 주신 큰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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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0, 2010
*.120.170.243

안경모 집사님,

오늘 집에서 잘 쉬셨습니다. ㅎㅎ

저희가 만난지 벌써 3년이나 됐군요.

포항 와이 공부 할 때

두분 부부집사님을 만난 게 생생하게 기억나는군요.

그때 갈라디아서 공부를 했는데,

내용이 좀 낯설었지요?

삶의 단순화,

정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입니다.

단순하면서도 치열해야겠지요.

그것의 토대는 아마 영성의 심화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이미 살아온 날이 훨씬 많아지는 시간을 우리가 살고 있군요.

늦가을 해꼬리처럼 남아 있는 삶을

명실상부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에

우리는 도반이랍니다.

저도 두분 집사님을 만난 것을 주님의 큰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한 주간 보내시고,

다음 주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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