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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사순절 조회 수 19901 추천 수 1 2011.03.27 21:3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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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출애굽기 17:1-7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출애굽기 17:1-7, 사순절 셋째 주일, 2011년 3월27일

 

     생존에 대한 요구

     오늘 설교 본문인 출애굽기 17:1-7절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광야시절에서 겪은 일종의 에피소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이라는 곳에 이르러 장막을 쳤습니다. 몽고의 유목민들을 생각하면 이들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는 곳을 찾아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도착한 르비딤에 마침 물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다투는 이야기가 두 번 반복됩니다. 한번은 2절입니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책임을 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다른 한번은 3절입니다. 그럭저럭 시간이 좀더 흘렀던 것 같습니다. 물 문제는 해결이 안 되고 사람들은 목이 더 말라갔습니다. 백성은 모세에게 따지고 들었습니다. 모세를 원망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백성은 모든 책임을 모세에게 전가했습니다. 애굽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우리를 왜 끌어냈느냐는 겁니다. 끌어냈으면 최소한 먹고 마시게는 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광야에서 물이 부족한 상황은 모세도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광야로 나온 이상 모두 그것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백성이 모세를 향해서 ‘당신 때문이야. 책임 져.’ 하고 나옵니다. 이런 정도면 막가자는 이야기입니다. 백성의 입장을 이해 못할 것은 없습니다. 어른들이야 목마른 걸 그런대로 참는다고 하지만 노약자들에게는 치명적입니다. 자칫하면 가나안은 둘째 치고 광야에서 모두 물이 없어 전멸할지도 모릅니다. 물은 실제로 생존의 필수조건입니다. 백성들은 애굽의 나일강이 기억났겠지요. 비록 소수민족으로 불이익을 받는다 해도 마실 물만은 풍부했습니다. 나일강에서 목욕도 하고, 고기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모두 목이 말라 죽을 지경입니다. 이럴 바에야 애굽에 머물러 있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는 생각이 이심전심으로 들었겠지요. 그들은 모세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옆에서 조금만 참으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광야시절에 반복되었던 겁니다. 출 15:22절 이하에 따르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마라에 도착했을 때 물이 오염되어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백성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물을 마실 수 있게 된 다음, 다시 길을 떠나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먹을거리가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또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출 16장)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구체적인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을 공격하기 전에 각 지파에서 뽑은 12명의 정탐꾼을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정탐꾼이 돌아와서 보고했습니다. 10명은 가나안 족이 너무 강대해서 이스라엘은 마치 메뚜기에 불과하다고 전했습니다. 맥이 풀리는 보고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10명의 보고는 객관적인 것이고, 2명의 보고는 주관적인, 또는 신앙적인 보고입니다. 백성들은 객관적인 보고를 받아들였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다시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민 14장)

     우리는 이런 일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고 아주 쉽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분명해서 그들과 다르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그런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겁니다. 우리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을 경제성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이 생산하고 수출하고 달러를 벌어들이는 것에만 마음을 둡니다. 원전만 해도 그렇습니다. 원전이 우리 후손들에게 어떤 재앙이 될지 정확한 정보도 없으면서 지금 당장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원전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런 원전 건설에 우리나라가 전(全)세계적으로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돈벌이가 모든 가치를 압도해버리고 말았습니다. 3천5백 년 전 마실 물이 없다고, 먹을거리가 없다고, 가나안이 너무 강하다고 한탄하고 자중지란을 일으킨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모세는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 할까요? 백성들을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설득으로 가능한 게 있고, 가능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여호와는 모세에게 이렇게 일렀습니다.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를 들고 호렙산의 반석을 치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었겠지요. 호렙산의 어떤 물줄기를 발견하게 된 것인지 모릅니다. 모세가 직접 찾아갔든지, 아니면 그쪽 지리를 잘 아는 어떤 누가 도움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민 10:29절 이하에 따르면 모세의 처남인 호밥이 광야에서 가이드 역할을 했습니다. 어쨌든지 물을 얻게 된 백성들은 좋아라 했겠지요. 여호와가 살아계신 증거라고 찬송을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성서기자는 그 사건을 전혀 다르게 평가합니다.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고 불렀습니다. 그 뜻은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다,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였다는 것입니다. 목이 말라 죽기 직전 절체절명의 순간에 물을 얻었다면 기적의 샘이라거나 생명의 샘이라고 이름을 붙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불신앙적인 사건이 벌어진 장소로 기억된 것입니다. 모세는 죽기 직전에 행한 설교에서 이 맛사 이야기를 다시 거론했습니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고 말입니다.(신 6:16)

 

     표적 신앙

     원래는 르비딤이라고 하고 나중에 맛사, 또는 므리바로 이름이 바뀐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일이 정말 크게 잘못된 것일까요? 그들이 노골적으로 우상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살인을 저지른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마실 물이 없어서 그것을 달라고 한 것뿐입니다. 아주 현실적인 요구였습니다. 그것이 정말 나쁜 일이었다면 아무리 그들이 물을 원한다고 해도 주지 말아야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반석의 물을 허락하셨다는 걸 보면 그들의 요구가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서기자의 판단에 따르면 그것은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어 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은 표적을 보는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오고 물이 나오는 것과 같은 표적들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광야에서 생존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들과 함께 하신다면 당연히 받아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대단히 상식적으로 현실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일까요? 왜 그것이 성서가 주목하는 죄일까요?

     마태복음 16:1절 이하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시험의 내용은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메시아라는 표적을 요구한 것입니다. 여기서 표적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런 요구가 약간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원래 많은 이들의 병을 고치셨고, 오병이어를 일으키기도 했고, 악한 영을 내어 쫓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알고 있었을 바리새인들이 또 다시 기적 운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것보다 더 큰 기적을 요구한 건지, 아니면 예수님에게 그런 일들이 별로 없었다는 건지 정확하게 알기는 힘듭니다. 예수님의 답변에서 이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마 16:4)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큰 고기 뱃속에서 밤낮 삼일동안 지낸 사건을 가립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기대한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뱃속의 3일은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이야기의 그 3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외에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그 어떤 표적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영적인 숙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표적이 절대 아닙니다.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고 미련한 것입니다. 이미 바울이 그것을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메시아가 무기력하게 죽었다는 사실이 어떻게 생명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표적이 될 수 있습니까. 부활은 세상 사람들에게 경험되지 않는 종말론적 생명사건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경험이 안 됩니다. 이는 마치 뜨거운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의 경험이 다른 이들에게는 무미건조한 것과 비슷합니다. 거리낌의 대상인 십자가와 경험이 불가능한 부활을 가장 중요한 신앙의 토대로 삼는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보다는 심리치료나 도덕성을 중심으로 삼는 것이 덜 위험합니다. 그런 것은 누구나 좋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취미생활로 교회를 다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죽음과 삶의 문제이지 삶의 취향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여호와를 시험한 맛사 이야기를 보십시오. 광야의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늘 생존의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기에 그들이 표적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는 것은 이해할만하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들의 생각은 예수님에게 표적을 구한 바리새인들의 생각과 똑같습니다. 이들은 모두 표적 신앙의 대표자들입니다. 이 대목에서 여러분은 좀 혼란스러울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표적을 구하는 게 왜 잘못이냐, 하고 말입니다. 신구약성서 전체에 그런 표적이 지천으로 널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도 그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표적들이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표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표적을 요구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표적은 나중에 드러납니다. 그것을 미리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 표적을 미리 요구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시겠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그것이 표적으로 나타납니다. 그 표적을 아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기대하는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잘못된 표적 신앙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표적 신앙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그 답은 명백합니다. 표적을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요구하고 기대하는 표적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자기의 짧은 경험으로 아는 최선의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사실 무엇이 우리에게 좋은 것인지를 판단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도 무조건 자기의 기준으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요구와 기대에 치우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심심하고 무기력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얼마나 새롭고 놀라운지를 조금이라도 눈치를 챈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내 눈높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높이에 여러분의 운명을 맡기는 게 참된 신앙입니다. 예수님마저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그의 행위를, 그의 섭리를, 그의 생명 통치를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마십시오. 여호와를 시험하지 마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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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beginner

March 28, 2011
*.106.154.10

목사님,

목사님을 만나기전

놀라운 하나님을 얼마나 작게 만들었던지...

 제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내 마음대로 아니 제 소원대로 하나님을 움직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설교 말씀을 듣고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   

작은 개미가 생명을 갖고 움직이는 것

우리가 살아있는 것,

공기가 있어서 숨을 쉰다는 것

주님!

이 큰 기적을 매일 보고도  믿음없는 저를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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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8, 2011
*.120.170.250

예, 이일녀 집사님,

아드님들에게는 잘 다녀오셨지요?

인간의 죄는 바로 그것,

하나님을 자기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까 생각합니다.

내 욕망의 투사이기도 하구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성서가 누누이 말하는데도 우리는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고

계속 자기의 일에만 마음을 두고 사는 것 같습니다.

영성은 바로 그것,

자기를 무한히 축소시키는 것이겠지요.

그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개 자아를 확대하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네요.

자, 하나님이 행하실 놀라운 일을 기대해봅시다.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바로 저기 세상 끝에서 우리에게 오고 있네요.

그걸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는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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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March 29, 2011
*.179.74.100

지금 이 순간에도..

북서풍이 계속 불게 해달라고,

원자로를 안정시켜달라고,

우리 나라에는 지진이 없게 해달라고,

다 피폭되더라도 그리스도인들만은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고 기도해야만 이루어는 것이니 의심하지 말고 믿고 기도하자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널려 있으니...

 

이 세상 모든 교회가

위 설교를 동시에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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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29, 2011
*.120.170.250

눈사람 님,

지금 한국 개신교회의 영성은

완전히 기복적이고 주술적인 상태로 빠져들었어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심각한 것은 분명해요.

신앙이 사적인 영역에서

개인적인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도구가 되고 만 거지요.

이를 넘어서는 길은 일단 교회의 공공성입니다.

교회의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이 잘 살고 복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야

누가 옆에서 말할 것은 못되는데요.

문제는 교회 전체가 그런 방향으로 나가는 거지요.

3월도 다 가는군요.

부활절이 있는 4월이 옵니다.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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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March 30, 2011
*.139.124.107

목사님, 저는 이번주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서

사랑채에 올려진 스탠리 하우어워스박사님의 강연내용을 읽는 중에

어떤 삶의 형태든지 우리 인생자체는 어찌 보면 '거룩한 낭비'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거룩한 시간낭비'라고 하시는 마르바 던의 말씀을 차용해 봤어요)

이 '거룩한 낭비'에 부름을 받은 우리가 그걸 거스리는 삶을 살고자 할때,

그게 불신앙이고 불순종이고, 그것이 여호와를 시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요. 

하우어스박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네요.

 "..믿음이라는 것은 답을 모른체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의 대부분은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만져보고,

사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선명하게 보여달라는 기도가 아닌가 싶은데요,

그에 반해,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중언부언 기도를 중지시키고 잠잠히 침묵을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의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의문투성이고 답답하고, 오리무중 같은데,

하나님은 "나를 시험하지 말라" 그러시는군요.

그런데 이 말씀 안에 사실은 우리에게 필요한 답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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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30, 2011
*.120.170.250

라라 님,

종합적으로 생각을 하시는군요.

위 설교, 하우어워스 강연, 마르바 던의 책을 같이 엮었네요.

우리의 삶 자체를 예배라고 본다면

거룩한 낭비라는 말이 옳겠네요.

그런데 이런 진술에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비약이 있어 보이는데요. ㅎㅎ

신학적인 사유가 자칫 하면 일반화의 함정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다른 상황을 하나의 원리로 일반화 시킨다는 겁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게 좀더 진도를 나가게 되면 추상화되고 맙니다.

나를 시험하지 말라는 말에

우리에게 필요한 답이 다 들어 있는 것도 아니지요?

신학적인 생각이 깊어질수록

가능하면 좀더 생각의 폭을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좁은 폭에서의 생각이 탄탄해져야만

넓은 시야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거든요.

일단 라라 님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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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March 31, 2011
*.139.124.107

예, 목사님,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다만,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이 말씀안에 우리에게 필요한 답이 다 들어있다고 생각한 것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우리에게 이미 모든 답이 주어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눈높이에서는 '답'이 없지만요,

다시 말씀 드리면, 우리의 모든 영적인 촉각, 시각, 청각이 여호와 하나님께만 집중될때

우리에게는 오리무중과 같은 이 인생이 '이미 주어진 답'으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나를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 안에 우리의 전적인 신뢰가 잠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하옇든..저는 이렇게 묵상하고 나니까, 목사님의 설교가 10배는 더 이해되는 것 같았어요.^^

왜,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아야 하는지.. 그 분명한 이유가  말이지요.

 

또한, 하우어워스 박사님은 "우리는 답을 모른체 살아간다."라고 하셨지만,

사실, '모른다'가 아니라 오히려, 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시는 감춰져있다, 은폐되어 있다라는 표현을

그렇게 말씀하신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데요,

 

목사님, 이번 주 설교말씀은 제게 아주 심각하네요.^^

마치 베일 한 꺼풀이 벗겨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게는 감로수와 같은 말씀이고, 저 먹구름 너머 빛세계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옳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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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삼송

March 30, 2011
*.119.241.105

목사님!! 설교말씀이 정말 저에게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이틀동안 설교말씀을 되새김질 해보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십계명 1계명에서 3계명까지의 모든 말씀이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의 범주안에 해당이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기도중 대부분이 주술적 기복적으로 흐르는 내용임을 볼때 우리의 기도와 삶이 하나님 앞에서 바뀌어야 되지 않나 생각을 해봅니다. 다시금 저자신의 기도 내용을 돌아볼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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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30, 2011
*.120.170.250

삼송 님,

위 설교 제목에서

십계명의 앞 부분을 생각했다면

그건 삼송 님이 기독교 신앙을 전체적으로 잘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눈높이로 끌어내리려는 욕망이

주술 신앙, 기복 신앙으로 나타나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세상을 구원하시는지

두 눈 바로 뜨고 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이 우리에게 시급합니다.

그게 신앙의 초석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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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happypig

March 30, 2011
*.181.33.172

목사님! 감사해요.

그렇잖아도 사순절 기간 동안 정말로 어떻게 지내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며 묵상하고 있는 중에 이렇게 여호를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받게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제가 목사님 설교를 , 묵상을, 기타등등...

읽지 않았다면 많이 어려웠을 거고 힘들었을 거예요.

지난 주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어요.

우리 교회 목사님 말씀도 정목사님 설교에 비추어 잘 하고 계신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근 사개월 동안 참으로 힘들었어요. 기독교에 대한 회의가 물밀듯 몰려 왔는데 , 다비아 사이트

,C.S.루이스의 "We have our faces","고통의 문제",어머님이 꾸준히 보시는 CBS와 Febc를 통하여

조금씩 믿음이 회복되어 가더군요.가장 결정적인 것은 저의 올케(같은 교회에 다녀요. 저보다 믿음이 깊지요)의

얘기를 듣고 본 교회 목사님 설교를 듣기 위해 인터넷을 들어갔어요.

"인생역전의 사람 야곱(칭32:22-32)"이라는 말씀을 설교 하셨는데 예전처럼 은혜가 되었어요.

저의 올케도 백일 조금 지난 조카를 데리고 교회를 갔는데 조카가 잠을 자서 말씀을 끝까지 듣고 저에게 권면을

했거든요. (저의 교회는 주일 목사님께서 설교하신 내용을 가지고 다시 소그룹에서 간략한 말씀과 함께 삶을 나눠요)

그러니까 제가 "인생역전의 사람 야곱"을 인테넷으로 들어가 동영상을 통해 설교를 들은 후 , 그 다음 주 설교 제목은

"실패를 극복한 사람 (행 15:36-44)"이었나봐요. 마음이 동 (董)하기 시작했었는데 저의 어머님 목장예배를 집에서 보게

되어 이것 저것 정성들여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데(사실, 저는 이미 마음에 기쁨이 샘 솟고 있었어요. 어머님께 말씀은

안드렸어요......) 말씀을 전하는 전도사님과 심방전도사님이 오셔서 예배를 보는데 함께 보자고 해서 함께 했어요.

그 때야 알았지요. 그 다음주 설교제목이 "실패를 극복한 사람"이었고 그 사람이 마가였다는 것을요.

"마가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고생을 모르며 자라서 1차 전도여행 당시 처음 경험해보는 고난과 어려움으로 도망가버렸

습니다. 그는 바울과 바나바의 근심거리이며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그 실패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함으로 초대교회 안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었습니다.마가가 어떻게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이 되었는지 살펴보자 합니다" 내용이 이래요.

그 때 저는 저를 생각했어요. 저는 거의 30년 동안 아프기만 했어요. 그래서 제가 살아 온 삶을 생각하면 너무나 허무했거든요

. 전 일들을 잘 할 때는 아주 잘해요. 그러나 한 번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 , 그 것을 헤쳐나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All Stop!이

었지요. 마음의 문을 꽉 닫고 대인기피증과 무력감에 빠져야 했어요.

그래 나도 마가와 같은 사람이 되자! 해 보자! 그렇지 않아도 한사결단(限飼決斷)이 필요했는데 다른 어느 때 보다도 어려움을 뚥고 일어나기가 힘들었어요. 여러가지로 인하여 만신창이( 滿身瘡痍)가 되어 있었거든요. 다행이도 모든 것이 결단한 대로 잘 되고 있어요. 앞으론 어려움이 오면 절대로  물러 나지 않겠다고 저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있지요.그리고 그 첫 번 째로 밤에 먹는 야식( 夜食)을 안 먹어요. 대신 물을 먹고 있고 잘 극복해 살도 좀 빠졌어요. 아마 뭐지 않아 원래의 몸(body)을

유지할 것같아요. 또 한가지 어머님말씀에 (다소 어긋나더라도 모든 것이 저를 사랑해서 그런 거라는 걸 명심하여) 순종(順從)하고 있지요. 그리하여 지금은 가정이 참 평화스럽고 저도, 어머님도 참 감사한 삶을 살고 있답니다.

여기에 나온 모든 분들께(댓글을 포함하여) 감사드립니다. ^^

하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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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30, 2011
*.120.170.250

해피피그 님,

오랫 동안 몸과 마음이 아프셨군요.

그걸 극복하려고 애도 많이 쓰셨고,

앞으로도 가야 할 많은 길이 남아 있지요?

이렇게 신앙적으로 새롭게 용기를 내는 걸 보니

얼마나 좋아 보이는지 모르겠네요.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바위라는 걸

잘 알고 있지요?

그분에게서 오는 것은 모든 것이 선하답니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해서 이상하게 보일 때가 있지만요.

자, 지금 찾은 평화를 잊지 말고

앞으로 길을 잘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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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March 31, 2011
*.111.248.3

목사님, 내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세상과, 삶을 구하여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저는 정말 궁금한것이 많습니다^^

 

엊그제 본 어느 글에서 철학자가 한 말 같은데 

지금 세상에 펼쳐지는 현실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라고 하는 말을 하던데

저는 한가지 궁금한것이 그러면 일본의 원전 사건도 인류 역사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야할 사건이

일어난것인지 이런 이야기도 신학과 관계가 되는 것인지 목사님 저는 궁금합니다..

목사님은 이런 철학자들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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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31, 2011
*.120.170.250

별달 님,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사람은 없어요.

하나님이 알려주는 것만큼만 알 수 있어요.

그것도 사실은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에게만 가능하겠지요.

그 문제를 일본 원전 사고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느냐는 거지요?

어려운 일이군요.

우리가 경험하는 이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인데요.

계속 논쟁 중인 문제를 여기서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냥 역사를 필연으로 보는 철학자들의 생각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만 말해야겠네요.

일단 동의합니다.

모든 것들은 일어나야만 할 것들이 일어난 것이겠지요.

욥기를 보면 욥의 불행도 역시 일어나야만 할 것들이었어요.

여기서 욥의 자식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거냐 하는 물음은 무의미한 거에요.

성서의 개별 본문들은 어떤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지 

모든 걸 종합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어쨌든지 모든 것이 필연이라는 말을 기독교 식으로 바꾸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이 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역사에서 경험하는 원인 결과의 방식은 아니에요.

모든 악, 불행도 필연, 또는 섭리라고 말하면

하나님이 선하다는 교리가 흔들릴 것 같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종말론적으로 선하신 분이에요.

모든 것을 합해서 선하게 인도하시는 분이죠.

아마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당장 사람이 비참하게 죽어가는데

모든 것을 섭리하는 하나님을 비호하기는 어려운 거지요.

다시 위에서 언급한 욥을 기억하세요.

그는 하나님의 크심 앞에서

모든 자기의 논리를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주님의 말씀도 기억해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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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April 01, 2011
*.111.248.28

목사님,

모든것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씀과

하나님은 종말론적으로 선한 분이시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계속 공부해 나가겠습니다. 

하나님의 크심 앞에서 모든 불행도 인정해버린 욥의 예도 많은 도움이 되는군요..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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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April 01, 2011
*.239.93.193

기도가 표적을 요구하는 모양을 이룸에 몸둘바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모르는 상태에서 기쁨과 탄식을 경험합니다.난 매일 일희일비하면서 표적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라도 제가 눈치를 챈다면 , 알았다면 야수적인 나의 표적의 요구량이 징계받아 죽을 만큼 증폭하겠지요. 하나님의 뜻을 아들로서 듣는것과 일꾼으로서 표적을 요구하는 과욕의 결과로 훔쳐보는 차이가 이해 됩니다. 오늘 말씀의 결말부분이 내 공책에 진하게 써지는 군요. 목사님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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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01, 2011
*.120.17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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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인택 님,

글쓰기가 묘하게 끄는 힘이 있네요.

우리의 인간적인 욕구를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만을 기다릴 수 있을까요?

그런 기다림의 영성 안에서

현실에 깊이 참여할 수 있는 길도 열릴까요?

주님, 우리를 도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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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햇살가득

April 01, 2011
*.228.128.25

"내 눈높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높이에 여러분의 운명을 맡기는 게 참된 신앙입니다. 예수님마저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그의 행위를, 그의 섭리를, 그의 생명 통치를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마십시오. 여호와를 시험하지 마십시오. 아멘."    이 구절에서 하염없이 계속 눈물이 흘러 멈추질 못하고 있어요.

 왜 일까요......

정말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순간에도 ......  

주님! 어리석은 저를 주님의 위로와 은총에 맡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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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01, 2011
*.120.170.250

햇살가득 님,

웬일이세요.

제 설교에 눈물을 흘리는 분들은 별로 없는데요.

가슴으로 나오는 설교가 아니라

머리로만 나오는 설교잖아요. ㅎㅎ

고맙습니다.

햇살가득 님 덕분에 내가 위로를 받았습니다.

힘을 내 봅시다.

그분의 선하신 통치를 의심하지 말고

완전히 일임해봅시다.

아, 그렇게 기도하셨네요.

저도 아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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