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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무덤이 없는 이유

성령강림절 조회 수 23488 추천 수 16 2008.10.19 14:5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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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신명기 3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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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9. (신 34:1-12)

모세라는 이름은 지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 중의 하나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해도 모세를 모르는 사람은 세계 역사와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 아닌 한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가 왜 그렇게 유명한지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따로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출애굽입니다. 출애굽기의 전승에 따르면 모세는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 파라오의 공주에게 입양되어 마흔 살 될 때까지 왕궁에서 살았고,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광야로 망명했습니다. 광야에서 40년 간 양을 치며 살다가 호렙산의 불붙은 가시떨기 나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집트로 돌아와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광야로 나옵니다. 그들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팔십이었다고 합니다.
광야에서의 세월이 너무 길었습니다. 자그마치 40년을 거기서 방황했습니다. 성인 남자들의 걸음걸이로 보름, 아무리 길게 잡아도 한 달이면 충분히 통과해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그 길을 40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 광야 40년 세월이 그들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을는지는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특히 백성들의 생존을 책임져야 했던 모세의 입장에서는 하루하루가 입술이 타들어가는 세월이었을 겁니다. 그를 원망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지도부에서도 옥신각신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40년을 버텼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나안을 바로 목전에 두게 되었습니다. 감개무량했겠지요. 그런데 모세는 바로 이 결정적인 순간에 가나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습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 34:1-12절의 말씀입니다.

느보 산에서
모세는 모압 광야에서 여리고 성 맞은편의 느보 산봉우리에 올라갔습니다. 모압은 사해 동편이고 느보 산은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데, 요단강을 중간으로 해서 왼편에 여리고 성이 오른편에 느보 산이 있습니다. 느보 산봉우리에서 내려다보면 요단강 좌우의 넓은 평야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 넓은 지역을 본 모세는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듣습니다. “이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한 땅이다. 이렇게 너의 눈으로 보게는 해 준다마는, 너는 저리로 건너가지 못한다.”(신 34:4)
왜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을까요? 모세가 지난 40년 동안 견뎌온 그 수고를 조금이라도 인정한다면 당연히 요단강을 건너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발을 디뎌야 하는 게 순리 아닐까요? 모세의 나이가 이미 120살이 되었으니 요단강을 건널 기력이 없는 게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정확한 대답이 아닙니다. 본문 7절에 따르면 모세는 그 순간까지 정정했다고 합니다.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모세가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죽어야 한다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는 분들은 다른 대답을 알고 있을 겁니다. 민수기에 따르면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한지 한 달이 지난 뒤에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마실 물이 떨어졌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르기를 회중이 보는 데서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게 하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물이 많이 나왔고, 회중과 짐승들이 마셨다고 합니다. 이 일이 있은 뒤에 야훼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당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말로 명령을 내리지 않고 지팡이로 친 것이 잘못인지, 아니면 한 번만 쳐야 하는데 두 번 친 것이 잘못인지, 그 순간에 화를 낸 것이 잘못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하지는 않습니다.(민 20:1-13)
민수기 기자의 이런 설명도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크게 잘못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용서를 구하면 모두 용서하시는 하나님께서 모세의 작은 실수를 트집 잡아서 40년 동안 기다려온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 리가 없습니다. 민수기 기자가 이렇듯 우리의 상식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설명하는 이유는 아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실을, 밝히기 곤란한 어떤 사실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위인들은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성서의 신앙적인 영웅들도 그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모세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민수기 기자는 그것을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은 것이라고 암시적으로 지적한 게 아닐는지요.
민수기 기자와 달리 신명기 기자는 그 책임을 모세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신명기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신 4:21절은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말미암아 모세에게 진노를 내리셨으며, 결국 요단을 건너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은 우상숭배였습니다. 모세에게 책임이 있다면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막지 못한 것이겠지요. 결국 모세는 백성들의 책임을 대신 뒤집어 쓴 것입니다. 신명기 기자는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신 4:26) 그렇다면 망할 땅으로 들어가지 않는 게 모세에게는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일지 모릅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똑같은 사건을 놓고 민수기 기자와 신명기 기자가 왜 서로 다른 말을 할까요?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민수기나 신명기나 모두 훨씬 후대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역사관에 따라서 모세의 죽음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역사 해석의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요즘에도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수정해야 한다, 못한다 하는 논쟁이 거세지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역사는 해석이 중요한 것이거든요. 이처럼 모세의 죽음에도 서로 다른 해석이 작용한 겁니다.
민수기와 신명기의 역사 해석이 조금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양쪽이 모두 똑같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느보 산에서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민족 영웅이 평생의 꿈을 달성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겁니다. 성서기자들의 안목은 정말 놀랍습니다. 이건 모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국가를 통일시킨 다윗도 성전을 건축할 수 없었습니다. 성서기자가 묘사한 그의 말년은 초라했습니다. 모든 역사라는 게 영웅들을 가능한대로 미화하기 마련이지만 성서기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모세가 느보 산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그냥 그러려니 하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출애굽의 대업을 이룩한 그가 요단을 건너는 일까지 마무리 하는 게 누가 보더라도 모양새가 좋습니다. 모세가 어떤 사람입니까? 신 34:10절 이하에서 모세는 두 가지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역사적 인물도 묘사되었습니다. 첫째, 모세는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사귀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출 33:18절 이하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 앞으로 지나가겠지만 얼굴을 직접 볼 수는 없고 뒷모습만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영적 권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둘째, 모세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이집트의 파라오와 대결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에 태양신의 아들로 숭배 받던 파라오를 넘어선 사람은 모세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절대적인 영적 권위를 행사하던 모세였지만,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 산에서 죽었습니다. 성서기자들은 그렇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임자 없는 무덤
모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죽은 모세는 벳브올 맞은 편 골짜기에 묻혔다고 합니다. 장례는 삼십일 장이었습니다. 삼십일 장은 그 당시에는 약소한 겁니다. 야곱이 이집트에서 죽었을 때 이집트 사람들이 칠십 일 동안 곡을 했으며, 시신을 미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요셉이 이집트의 국무총리 직에 있었으니 그의 아버지를 위해서 성대한 장례식이 가능했겠지만, 모세가 이스라엘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놓고 본다면 삼십일 장은 예우 차원에서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모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6절 말씀에 따르면 분명히 무덤에 묻히기는 했는데, 결국 세월이 흘러서 그 무덤을 찾을 길이 없어진 셈입니다.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 역사에 등장하게 한 인물입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그는 하나님과 얼굴을 맞댈 정도로 영적인 카리스마가 강했을 뿐만 아니라 파라오를 굴복시킨 인물입니다. 속되게 말해서, 그의 무덤을 잘 보존하면 국가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거나 성지 순례지로 만들어 돈벌이에 보탬이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모세의 무덤을 임자 없는 무덤처럼 취급하고 말았을까요?
성서가 직접적으로 대답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대답을 세계 인류사와 연관해서 간접적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수민족으로 살다가 모세의 영도로 빠져나온 이집트는 그야말로 무덤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원 전 2천 7백 년 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파라오들의 무덤으로 이집트에 94개나 있습니다. 저는 아직 이 피라미드를 직접 구경하지는 못했는데, 세계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취급될 정도로 그 규모와 건축방식 등에서 엄청나다고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쿠프 왕의 피라미드인데, 각각 2.5톤 내지 10톤이나 나가는 화강암 2백 60만 여개로 만들어졌습니다. 원래는 210 계단이었지만 지금은 203 계단만 남아 있습니다. 하루 10만여 명이 1년에 3,4 개월씩 20여년(총 2천여일) 동안, 연인원 2,3억 명이 동원된,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공사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강제노역에 시달렸다는 출애굽기의 보도에 따르면 그들이 이런 피라미드 축성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은 피라미드에 얽힌 백성들의 한이 얼마나 절절한지 알았을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피라미드가 바로 우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도 눈치 챘을 겁니다. 자신들이 만든 건축물 앞에서 황홀해 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바로 우상숭배이니까요. 이런 일은 이미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에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로 탑을 쌓아서 그런 생태적 위기로부터 벗어나자는 생각으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피라미드와 똑같이 인간의 능력을 확인하는 데서 영원한 생명을 경험하려는 노력입니다. 피라미드는 이집트 제국의 힘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면, 바벨탑은 바벨론 제국의 힘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두 개 모두 제국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건축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두 제국과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바벨론 문명의 발생지로부터 탈출한 사람이며, 모세와 그 일행은 이집트 문명으로부터 탈출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역사를 배운 탓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무덤을 성지화하지 않았을 개연성이 아주 높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그런 깨우침이 있었던 것은 아니겠으나 당대의 역사학자라 할 수 있는 예언자들에게만은 그런 깨우침이 있었겠지요. 우리는 그런 것들을 성서의 행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예 처음부터 모세의 무덤을 만들지 않은 건 아닙니다. 모세가 벳브올 맞은 편 골짜기에 묻혔다는 본문의 진술에 따르면 처음에는 누군가 그의 무덤을 만든 게 분명합니다. 자식들이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민족 지도자의 무덤이니 민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만들었겠지요. 처음에는 벌초도 하고 꽃으로 예를 표하기도 했겠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방문객들이 줄어들고, 급기야 모세의 무덤은 아무도 찾지 않는 임자 없는 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이 어쩌다가 일어난 게 아니라 무덤을 성역화하지 않겠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 즉 그런 역사적 판단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이런 역사의식은, 즉 사람과 무덤을 우상숭배하지 않은 이유는 영웅들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성서에서 영웅사관을 결코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불세출의 영웅도 우상숭배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죽어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들의 능력은 죽음 이전까지만 행사될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그들의 무덤은 잊어버리는 게 좋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미련을 둔 개인이나 민족은 결코 건강한 생명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모세와 같이 뛰어난 사람들의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세라는 사람, 무덤에 들어가야 할 한 자연인이 아니라 그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바로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고, 그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에 신앙의 영웅이었습니다. 그의 영웅적인 삶에서도 주체는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의 삶을 통해서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무덤을 성지로 만든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겠지요. 우리의 삶도 무덤을 남기지 않는 게 바람직합니다. 죽은 우리를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면 더 좋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에게 미련을 갖지 않고 하나님에게 집중하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성지 순례를 다니지만 별로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우리가 희망하는 부활생명은 무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무덤은 거기 죽어 묻혀 있는 사람과의 추억을 자극할 뿐입니다.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복고적 감수성에 불과합니다. 참된 생명은 인간이 그런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무덤이 아니라 종말에서 완전히 드러나지만 이미 예수에게서 앞당겨 일어난 부활로부터 주어집니다. 육신을 잠시 담아둘 무덤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인 예수의 부활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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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October 19, 2008
*.160.255.250

민수기 기자의 시각은 새로운 사실이예요. 모세가 하느님의 거룩성에 위배되는 어떤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갈 수없었다.ㅡ 아무리 뛰어난 위인이라도 역사의주체이신 하느님을 가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했군요. 성서에는 이렇게 많은 함축된 의미들이 있군요.
그런데요, 목사님, 아무리 하느님꼐 집중이라지만, 그래도 최소한 우리가 죽은 후에 진심으로 울어줄 사람 한 명쯤은 있어야 덜 허전하지 않겠어요? 아무도 오지않는 장례식은 너무 쓸쓸하잖아요.
그리고 이건 사족인데요. 이집트 기자에 있는 쿠푸(Khufu)( 2613-2494 ?B.C )왕의 피라미드 건설에는 이스라엘 인들의 노동력이 사용되지 않았을 거래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데요. 아마도 아프리카쪽 노예들을 동원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답니다. 다른 곳의 피라미드는 잘 모르겠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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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October 19, 2008
*.160.255.250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러는데요,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과 이스라엘노예와 관련해서 잘 아시는 분 있으면 설명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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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9, 2008
*.181.51.93

이스라엘과 피라미드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없을 거에요.
그렇게 추정할 따름이지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터무니 없이 이상한 추정은 아니에요.
여기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연루되어 있는데요.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 있잖아요?
그들이 혈통적으로 순수 유대인들은 아니에요.
이집트의 여러 소수민족, 미디안 지역의 극빈자, 노예 등등을
모두 망라한 집단이라고 봐야지요.
'히브리'라는 단어가 바로 거기에서 나왔다고 하잖아요.
출애굽를 기원전 14,15세기로 보면
피라미드 건설과 완전히 관계가 없는 시기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설령 시기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조상들이 그 노동에 참여한 건 맞을 겁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 울어줄 사람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나쁠게 하나도 없어요. ㅎㅎ
죽은 다음에는 그런 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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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이길용

October 19, 2008
*.221.207.188

최근의 연구결과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설은 노예와는 큰 관련이 없다 라는 것입니다.
본디 그런 주장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로부터 비롯됩니다.
그 이후 별반 저항없이 헤로도토스의 노예를 이용한 피라미드 건설은 정설처럼 굳어졌죠.
그리고 피라미드의 기능은 왕의 무덤이었다는 설도 함께요..

그런데 최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이 가설을 뒤엎는 일이 벌어집니다.
우연히 이집트 여행중이던 한 여행객이 낙마함으로써
옛 피라미드를 건설했을 것이라 여겨지는 이들의 무덤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노예들이라면 성인 남자들이 주를 이룰텐데
그 무덤에는 여인들과 아이들, 심지어 임산부의 유골까지 발견되는 것이었습니다.

발굴은 연이어 진행되어 결국은 피라미드 건설 노동자들의 주거지도 발견하게되었는데
거기에는 필경사들과 이집트의 고급관료들의 집도 섞여있는 구조였습니다.
그리고 몇몇 기록물들도 찾을 수 있었는데
그런 것들에 의하면.. 피라미드는 노예들이 아니라, 이집트의 자유시민들에 의해
건설된 것이라는 가설이 힘을 얻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피라미드 건설에 참여했던 이들은 국가로부터 노동에 대한 댓가로
임금을 받고 있었다는 것도 알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의 피라미드 건설에 대한 유력한 가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피라미드의 건설은 왕의 무덤과는 직접적 관련은 약하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 경우 왕 1인당 1개의 피라미드가 필요했을 텐데..
어떤 왕의 경우는 다수의 피라미드를 소유하고 있고, 그런 경우를 봐서도
왕의 무덤으로서의 기능은 부수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을 겝니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이 곤란하고 엄청난 토목공사를 이집트는 반복하면서 실했해야만 했을까
그것도 노예들이 아닌, 자유시민들이..

아마도 그것은 나일강의 넘침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디오피아 고지대의 홍수로부터 비롯되는 나일강의 넘침은
그 규모와 기간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범람이 시작되면 강의 너비는 수킬로로 확장되고
또 그 넘쳐있는 기간만 줄잡아 4달이나 됩니다.
그럼 나일강 주변에서 범람 후 생기는 퇴적 토양에 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는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이 넘치는 4달 동안 무엇을 하고 있어야만 하나요?
이것이 바로 포인트입니다.
무위무식하는 기간이 4개월이라~!
이는 국가를 경영하는 이들로서는 큰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1년중 4개월은 대다수 국민들이 실업자 신세로 전락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에 대해 위정자들은 국민들에게 지속적인 일자리와 임금을 통한 경제력을 확보해줘야만 했지요.
그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피라미드 건설입니다.
(이는 마치 MB정부가 대운하 사업을 통해 경제부양을 하려는 의도와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여하튼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넘침으로 인해 생겨난 4개월여의 기간 동안은
불어난 나일강변 바로 그 어귀에서 피라미드 건설을 위해 총매진해야 했던 것이죠.
지금 피라미드의 위치가 옛날 나일강의 범람했을 때의 위치 바로 맞대고 있다는 것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그래서 거대한 돌들을 실어나를때에는 그들은 바로 불어난 강의 잇점을 잘 활용할 수 있었지요.

이런 토목공사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 지금의 피라미드라고 보는 것이
최근의 유력한 설이랍니다.

이거 댓글로 장황한 이야기를 적으려하니.. 많이 고생이 되네요~
여하튼 피라미드의 실상은 그렇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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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이길용

October 19, 2008
*.221.207.188

모세에 대해서도 현 구약신학 내에서도 왈가왈부 말들이 많지요.
그리고 히브리라는 민족도 혈연공동체라기 보다는
지파연맹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구요.
고대 중근동 지역의 소외계층인 하비루로부터 히브리가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구요.
여전히 복잡하고 예민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 또 칼 융같은 사람이 보면
모세 역시 인류의 집단적 무의식에 선천적으로 구비되어있는 영웅신화의 구조의
반복이라고도 주장하겠죠.

여하튼 중요한 것은 그 모세로 인하여 어떤 신앙, 어떤 경배가 인류의 역사에 들어왔느냐 하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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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October 19, 2008
*.244.76.56

모세가 무덤이 없는 것에 대하여
성서 기자의 설명이 흡족하지않다고 항상 생각하던 부분입니다.
그 원인제공자가 모세 자신이라는 것을 뒤로 하고라도,
하나님이 절대적인 구원통치의 사실이
이스라엘인들에게 변질없이 보전되기 위해서
최선의 결말인 것 같습니다.

한편 모세의 무덤없슴에 대하여
외면상 하나의 아이러니,
요셉의 해골이 오버랩되는군요.
수백년 전의 요셉의 해골(아마도 미이라)은
출애굽시에 이스라엘인들과 함께 였고
아마도 가나안 입성도 같이 하였을 것 같습니다.
요셉은 세월을 건너뛰어 가나안에 들어갔을 것이나
모세는 지척에서 멈추어야 했습니다.
요셉이 출애굽을 바라보고 자신을 가지고 갈 것을
유언으로 남겼었고 그 일은 이루어집니다.
입애굽의 요셉은 가나안에 들어가나
출애굽의 모세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것은 아이러니이나
말씀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통치' 의 눈으로 볼 때
완벽하게 일관되는 것임을 새삼 알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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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9, 2008
*.181.51.93

유니스 님,
요셉의 해골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주세요.
요셉의 해골이 가나안에 있다는 건가요?
죽은 야곱의 시신을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 데리고 가서 장사지냈다는 말은
창세기에 나오는데,
요셉 해골 운운은 기억이 날듯말듯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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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October 20, 2008
*.104.196.28

목사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야곱의 시신을 가나안까지 데리고 가서 장사를 지낸 후,
창세기 50장 제일 마지막에 요셉의 죽음 장면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야곱, 이삭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이스라엘인들이 나갈 것을 예언하고
그 때 자신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고 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하나님의 구원통치 방향에 대한
반복의 예언이며 요셉은 자신의 해골을 언급하면서 확정짓는데.
글의 흐름을 볼 때 요셉 해골의 종착지도 가나안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음으로 요셉 해골의 등장은 출애굽기 13:19에서
출애굽시 모세가 이것을 취할 때입니다.
이 작업을 하면서 모세와 이스라엘인들은
400년이 흐른 뒤의 하나님의 변하지않은 약속, 절대성을 확인하며
감격과 경이로움에 싸였을 것입니다.
가나안에 안장하였다는 대목이 뒤에 나오지는 않지만
광야 아무 곳에 묻었다고 보기는 더 힘들 것 같습니다.

요셉해골은 우상화 될 리도 없었겠고,
애굽생활에서 이스라엘인은 대를 이으며 변질되었겠지만
하나님의 절대통치의 약속이
세대를 건너서도 이행된다는 표시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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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0, 2008
*.181.51.93

유니스 님은 성경 지식이 나보다 앞서는군요.
잘 배웠습니다.
입애굽과 출애굽의 신학적 묘미도요.
감사,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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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장마

October 20, 2008
*.75.181.184

일주일에 한번씩은 감사하게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요셉의 해골에 대한 말씀은 여호수아 24:32절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
유니스 님의 말씀 처럼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신 결과가 요셉 해골의 출애굽과 가나안 세겜땅의 매장으로 봅니다.
언약을 받은 사람은 죽어도 언약은 영원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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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October 20, 2008
*.160.255.250

점목사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수유대혈통이 아니었군요.
하비루로부터 히브리안 어원이 나온 것이군요. 참 배울게 너무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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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희망봉

October 20, 2008
*.82.136.189

영웅사관을 배제한 채 철저히 하나님께 집중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의식을 배웁니다

자기업적,자기집중에서 자유롭고
내게있는 소영웅주의를 싹둑 잘라 내도록
플레이오프4차전에 앞서 열심히 배팅연습을 합니다

두분 목사님의 환상적인 설교와 댓글이
꿀맛으로 다가옵니다
(피라미드 건축설...종교확 강의때 배웠다고 밝힐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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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October 20, 2008
*.160.255.250

이길용목사님,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참 재밌네요.
이 유력한 가설에 따르면 피라미드건설은 노예들의 노동력착취가 아닌,
서민들의 구제정책이었네요. 왕권이 하늘같던 시대에도 이렇게 일반인을 위한 정책이
있었다는 게 놀라워요.
GIza피라미드를 가 보았는데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않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동원됬겠구나.. 생각했더랬어요.
그런데 이런 가설이 있군요.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왕의 무덤은 그 속에 없었고 사막의 계곡에 숨겨 놓았더라구요.
도난의 우려 떄문이었을거라고 추정한다는데
그때 무덤을 건축하던 이들은 다 눈을 가리고 십여리 밖에서부터 출퇴근을 했다는 군요.
왕의 무덤이 어딘지를 모르게 하기 위해서.
암튼 박사님 얘기를 들으니 고고학을 공부해보면 참 재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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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3]웃겨

October 20, 2008
*.160.255.250

에고.. 부러워라. 그 종교학 강의를 직접들은 분들은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렇게 글로 대해도 재밌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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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0, 2008
*.181.51.93

피라미드가 순전히 노예만으로 건축된 게 아니라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긴데요.
여러 루트로 노동력을 확보했겠지요.
돈으로 고용한 사람도 있고,
백성들의 자발적 참여도 있고,
납세하듯이 의무적인 노동력 제공도 있고,
물론 노예들도 참여했을 거에요.
중극의 만리장성도 천문학적인 돈이 많이 들었지요.
피라미드가 파라오의 무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건 하나의 가설로는 말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덤설이 무너졌다고 보는 건 좀 곤란할 것 같군요.
이런 건 최근의 자료를 검토해야 하는데,
그래도 기본적인 것만은 위의 이야기가 크게 틀리지 않았을 겁니다.

장마 님이 구체적으로 성구를 인용해주셨군요.
나는 왜 평신도보다 성경을 더 모를까, 자존심이 상하는군요. ㅎㅎ
감사.

웃겨 님, 배울 거는 모두에게 많답니다.
아는 거로만 따지만 우리 모두 도토리 키재기에요.
그런 거 다 몰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아요.
기본 방향, 어떤 개념을 놓치지 않는다면요.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삼국시대에 신라사람과 고구려 사람 사이에 통역 없이 말이 통했을까요?

희망봉 님, 성서는 역사책이랍니다.
하나님은 역사로 계시하는 분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역사 서술은 일정한 역사관으로 기록되지요?
성서는 영웅사관이 아니라 신명기사관에 의한 역사 해석이랍니다.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사관으로 읽는데요,
그건 영웅사관 못지 않게 한쪽으로 치우친 해석인 것 같이 보입니다.
위의 신명기사관은 구약이 그렇다는 거고,
신약은 종말론적사관이라고 보면 좋겠군요.
학자 티를 내느라고 내가 자꾸 관, 론... 등등, 이런 말을 자꾸 쓰지요.
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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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October 20, 2008
*.116.60.105

저는 신명기 마지막 장을 읽으며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 하시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는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가슴을 쳤을까 원통하다고..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바꿔달라고 애원했을까..
근데 아.. 드디어 자유로워졌단 생각을 하진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가나안을 건너가서도 수많은 전쟁과 불평과 원망을 계속할 것이 뻔한 그들이
얼마나 답답하고 또 마음 아팠을까 하면서도
그들을 끌고 가야 하는 그 중한 책임에서 마침내 벗어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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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김바울

October 20, 2008
*.127.200.179

주 안에서 평안하시길.

정목사의 설교말씀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지난 토요일 오래 전에 이용하던 컴퓨터의 어떤 프로그램이 이상해져, 밤새도록 해결하려고 끙끙거리다 결국 일요일 새벽 5시 경 잠들고 말았다. 오랫동안 사용치 않아서인지 도무지 사용방법이 오리무중.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했던 게, 오기가 발동해 버렸나보다. 탓에, 주일예배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해서, 월요일 정목사의 설교말씀을 읽기도 하면서, 듣기도 해야지 하면서, 내자신 합리화한 게다.

하나님의 자비만으로, 이집트의 노예신분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해방되어 가나안 땅으로의 여행 도상에서
하나님을 배반함으로써 40여 년 간을 광야에서 방황해야 했던 그 들의 처지가, 마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혀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나 자신이 세상의 삶 속에서 아둥바둥거리는 나와 유사했으리라.
힘 주면 힘 줄수록 손가락사이로 줄줄 흘려내리는 모래알을 웅켜지려는 내 주먹같이, 용쓰고 애쓰는 나의 모습과 같이.....

정목사의 설교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도 신음하고 용쓰는 나에게, 주님께서 들려주시려고 하시는 메세지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곳을 방문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가 항상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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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데오그라시아

October 21, 2008
*.106.92.146

정목사님 설교하신 본문을 따라서 저도 한번 이 말씀을 묵상하고 기록해 보았습니다.
감히 정목사님의 깊은 성서를 보는 혜안을 따라잡을수 없지만 좀더 말씀에 묵상하고 그 뜻을
찾아보고자 하는 작은 바램으로 이글을 적어 봅니다. 너그럽게 보아주셨으면 합니다.

모세의죽음의 특징(신34:1-12)

오늘 본문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모세의 죽음과 장사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면 신명기 저자가 이 모세의 죽음을 기록하므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였을까?
먼저 오늘 본문에 기록된 모세의 죽음을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로 모세는 죽기전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계시에 따라 이스라엘백성들이 장차 들어가게 될 약속의 가나안땅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1절에 보면 모세가 모압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하였다.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열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며 저에게 말씀하신대로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었다. 이것을 바라보는 모세는 비록 자신은 그 가나안땅에 들어가지못하지만 얼마나 감격하였겠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가졌겠는가 ? 우리도 하나님께 기도하자 우리의 임종직전에 모세가 장차 이스라엘백성들이 들어갈 가나안땅을 본 것처럼 하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그 영광을 본다면 절대로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기쁨으로 그 죽음을 맞이할수있을 것이다. 오 주님의 주의 나라의 영광을 보여 주시옵소서 아멘..

둘째 모세는 기력이 쇠하여 죽는 그런 자연적 죽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신명기32장50-5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의 죽음을 예고하셨다. 그리고 그 죽음을 맞이할 장소와 죽음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도 말씀하셨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 말씀대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래서 5절에 보면 신명기 저자는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땅에서 죽어"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생존본능이 있다. 죽지 않고 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그 생명에 대한 욕구를 억제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마치 이속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한 주님의 기도처럼 그대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보게 된다. 우리도 진정 이렇게 죽음을 극복할수 있을까 ? 죽음도 나의 삶의 한부분으로 태연하게 받아들일수 있을까 ?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도 죽음도 다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믿는다면 죽음도 하나님의 주권속에 이루어지는 삶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받아들일수 있어야 하겠다. 미련과 아쉬움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다 초연하여 담담하게 그 죽음을 받아들일수 있는 그런 믿음의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모세는 그렇게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순종하였다.

세번째로 모세는 자신의 마지막을 인식하고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세웠다. 사역의 계승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9절에 보면 ”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 그렇다. 내가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사역의 계승자를 내 신앙의 계승자를 두어야 한다. 언제나 마지막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내 마지막 죽음이후의 삶을 준비하며 주께로부터 받은 나의 사역이 내 후임자를 통해 더 크게 계승되고 발전될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죽어서 없어진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실려고 하던 일은 더 크게 더 영광스럽게 번창해야 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날마다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세의 죽음의 특징이다. 나의 죽음은 나의 종말 마지막은 어떠해야 할까 ?

네번째로 신명기 기자는 이 모세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10-12절 ” 그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급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자더라 하였다.
사람들은 나에 대해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 사람들의 나에 대한 평판은 어떠할까 ? 진정 사람들이 나를 기억할 때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하나님과 참으로 가깝고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던 사람이었다고 말할수 있을까 ? 이 모세의 죽음과 그에대한 사람들의 평판을 보면서 나의 마지막 죽음 그리고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 어떠할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여 보자.

마지막 다섯번째는 그의 무덤을 아는자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형되었을때 그 옆에 엘리야와 모세가 있었다. 이것은 모세가 비록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신명기 저자는 그가 죽어 골짜기에 장사되었지만 그의 무덤을 아는 자가 없다는 말로 대신 하였을 것이다. 그는 무덤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세는 표상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모세의 죽음과 부활은 장차 있게 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한다. 여러가지 면에서 모세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일치한다. 백성들의 완악함과 죄가 결정적으로 모세의 죽음의 원인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도 우리 인간의 죄때문이다. 이런 여러가지 면으로 보게 될때 모세의 죽음과 부활은 표상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바울은 고린도후서3장14절에서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그렇다. 구약의 모든 사건속에 그리스도가 있다.

이것이 바로 신명기 저자가 모세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구약의 모든 사건 인물속에 그리스도를 보는가? 더 나아가 우리의 일상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경험하고 있는가?


주님 긍휼 여겨주시고 주의 얼굴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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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2]머리를 비우고

October 21, 2008
*.117.199.100

이건 뭐... 설교 댓글도 설교수준입니다... 잘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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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1, 2008
*.181.51.93

위의 대글을 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데오그라시아 님의 설교도 잘 읽었구요.
모세가 무거운 책임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젖었을지 모른다는
모래알 님의 통찰에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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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신밧드의보험

October 23, 2008
*.245.180.138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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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Peace..

October 23, 2008
*.252.105.169

목사님 이번 주 설교말씀 잘 들었습니다. 목사님의 저서 <그날이 오면>에 수록된 설교말씀 듣는 것을 얼마 전에 마쳤기에, 이제는 최신의 설교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알게 되어 감사 드립니다,

이곳에서 평신도로서 감히 성경말씀을 거론하는 것은 공자님 앞에서 문자를 사용하는 격인 줄 잘 알면서도 궁금하여 여쭈어 봅니다. 목사님께서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던 이유를 잘 모르시겠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고전적인 해석은 잘못된 것일까요? 즉, 다음은 탈피해야 할 정형화된 해석이거나, 또는 금지해야 할 지나치게 아전인수격인 알레고리적 해석일까요?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생활은 현재를 살아가는 교회의 그림자적인 모습으로 이해되어 왔지요. 이들은 애굽(세상)에서 유월절의 피 (예수님 보혈-고전5:7)로 구원받고, 홍해 (세례-고전10:1-2)를 건너 구름기둥과 불기둥 (성령님 은혜)의 인도를 받고 광야생활을 하다가 드디어 요단강 (육체적 죽음)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지요. 이들의 모습은 교회시대에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약속으로 주어진 예수님 재림 이후에 도래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을 그림자적으로 보여주고 있지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음은 당연하겠지요. 왜냐면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서 율법의 일차적인 목적이 예수님께 인도하는 길잡이의 역할일 뿐 결코 예수님을 대신하여 가나안까지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지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직접적인 사건이 반석을 지팡이로 내려친 것이지요. 이것은 인간적인 관점으로는 사소하지만 하나님관점으로는 절대적이고 중요한 기준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왜냐면 모세가 지팡이로 내리친 반석은 바로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이지요(고전10:4). 교회시대에 교회 형성의 토대는 모세로 상징되는 율법이나 율법주의가 아니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신앙고백이어야 하겠지요. 물론 입술만의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삶의 헌신을 포함하는 실질적인 고백 (게바-즉 반석)을 토대로 해야 하고, 이때에만 반석에서 샘물이 솟듯이 진정한 말씀이 열릴 것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을 못박은 사람들은 모세를 가장 신봉하던 율법주의자들에 의해서였지요. 이들이 진정 모세의 율법을 따랐다면 예수님을 영접하였을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았겠지요. 그러나 이들이 따랐던 것은 모세에 의해 주어진 참 하나님의 율법이 아니라 율법주의와 전통 (십일조, 기도, 금식, 부모님 공경대신 고르반 등)이었지요

저는 최근에 정목사님께서 신랄하게 설교 비평하셨던 분들 중 한 분이신 목사님의 부흥회를 참석한 바 있습니다. 이때 제가 이해한 바로는 (많은 목회자들을 포함하여 그렇게 많은 분들이 열광적으로 따르는 깊은 내막을 모르고 한 오해일 수 있음) 그 주용 내용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하나님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씀이란 새벽기도, 십일조, 주일성수, 목사님 받들기, 전도, 죄악된 마음을 몰아내기 등으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긍정적인 면도 있을 수 있겠지만, 크리스천이 이대로 살다 보면 초자아와 자아의 괴리에 의해 내면이 황폐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러한 내면의 문제는 결국 짜증과 신경질을 유발하여 본인과 주변을 피폐하게 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큰 분노의 폭발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요. 거룩한 신앙의 이름으로 말이지요.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묘사된 모세조차 화가 나서 신경질적으로 지팡이를 반석에게 휘둘렀습니다. 그럼에도 반석에서는 은혜의 샘물이 솟아났지요.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나게 하셨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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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눈사람

October 24, 2008
*.136.37.162

peace 님의 말씀에 적극 공감하며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그 목사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네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천국을 주실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온전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가 사실 힘들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우리의 모습이 온전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우리가 의로워져서 천국에 가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겠지만요.

감히 평신도 나부랭이가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 말하는 것이 날넘은 짓일수 있지만
이곳에 오시는 모든 분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제 의견을 적고 싶어서 한 자 끄적거립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천국 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등등의 것들은
우리의 업적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저는 알고 있고 성경에도 그렇게 나와있는데
그 목사님께서는 정말 성경말씀을 모르시는 것인지...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 해서 그 댓가로 천국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없게 되겠지요.
심지어 전도를 많이 하고 죄악된 마음을 다 몰아내고 예수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우린 압니다.

이것 저것을 해야 하나님으로 부터 사랑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설교는
결국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유로워진 우리를 다시 율법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주일성수까지도 자칫하면 율법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일 성수를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고 뭔가 죄를 짓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리고 천국에 못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율법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항상 하나님 곁에 붙어 있고 싶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서로 나누고 모여 기도하고 등등의 것들을 하기 위해서 주일 성수를 철저하게 한다면 이것은 율법의 완성일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도
그것을 해야만 이러 이러한 복을 받고 천국의 상급이 크다고 생각하면 율법이요 자신의 자랑거리만 늘어날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것을 하게 된다면 율법의 완성이요 하나님만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자신을 내어주시고 우릴 죄의 속박에서 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천국에 대한 약속을 하지 않으셨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저는 그 목사님의 설교에서 조금의 긍정적인 면도 발견할 수 없네요.
그저 부정적인 면만이 가득하게 보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평신도 눈에 말입니다.

설령 그 설교로 인하여 삶이 바뀌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천국이라는 것을 얻기 위한 또 하나의 가증스런 노력의 결과물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profile

[레벨:7]도니

October 24, 2008
*.96.12.130

요셉의 무덤과 유골에 대한 여기 글을 보고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 생각납니다.
이미 알고계신 책이라고 여겨지지만 이 책들을 읽을 당시의 그 흥미진진함의 감동으로 몇자 적어봅니다.

런던 대학에서 이집트학과 고대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데이비드 박사는 비록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저서 "문명의 창세기", "시간의 풍상"을 통해 성경의 역사학적 서술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해나갑니다.

"문명의 창세기"에서는 에덴으로 부터 시작해서 롯의 땅의 현재위치, 노아의 홍수 등 많은 사건들을 고고학적자료와 이집트의 연표 및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연대기적 지층발굴을 통해 생생하게 증명해나갑니다.

"시간의 풍상"에서는 요셉의 꿈에 대한 해석이 지금 이시대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증명이 되는지, 그리고 요셉의 무덤이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났는지 또한 출애굽 당시 유언에 따라 요셉의 유골을 가나안으로 가져가기 위해 유골을 캐내고 남겨진 무덤의 모습이 그림으로 사진으로 이 책에 나타납니다.

이책에서 언급한 사실들을 BBC가 데이비드 박사와 함께 제작한 다큐먼트리도 있다 하는데 이것은 제가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집중에서 피라미드 건설에 히브리인들이 동원되었을거라는 언급에 의아함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이책의 기억에 의하면, 기자의 거대한 피라미드는 BC3000~BC2500년사이의 이집트 고왕조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서 아브라함 후손들의 이집트 이주시기, 출애굽 시기와는 엇갈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역사해석을 강조하시는 목사님의 보충의견을 듣고 싶었었는데 이 자리에서 보게 됨을 또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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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찬양하라

October 24, 2008
*.54.125.176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 신학생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어 이렇게 글을 적습니다.
일반적으로 창세기 1~11장까지를 원역사로 보고 족장시대부터 연대를 측정하고 있지요.
아브라함의 시대가 B.C 1800년도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피라미드는 B.C 2500년경에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왔을때 이미 건설된 피라미드를 보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이스라엘백성을 국고성 건축에 사용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집트에 가면 피라암셋과 비돔에서 국고성 건축의 터를 볼 수 있습니다.
언제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시는 목사님의 설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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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4, 2008
*.181.51.93

위의 대글로 의견 주신 분들,
잘 기억하겠습니다.
피라미드와 히브리인들의 이집트 체류에 대해서
내가 다시 생각해봐야겠군요.
히브리인들이 직접 피라미드 공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거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봐야 괜찮겠지요?
피스 님이 거론한 고전적 해석은 부분적으로 가능하기도 하고 문제가 있기도 하군요.
모세가 내려친 반석을 예수 그리스도로 본다는 것은
전형적인 알레고리 해석이군요.
구약을 기독론적으로 재해석할 필요는 있지만
모든 구약을 그렇게 하기를 좀 힘들지요.
다만 광야의 반석 경험은 이스라엘의 고유한 하나님 경험으로 가고,
예수가 우리 삶의 반석이라는 신약성서의 관점을 그것대로 가면서,
즉 각각의 지평들이 고유하게 살아 움직이면서
창조적인 구원 지평을 여는 해석이 옳겠지요.
모두 좋은 하루.
profile

[레벨:3]삶에서..

October 24, 2008
*.239.24.254

요새는 설교도 좋지만 제목이 아주 재밌어요..
너무 재밌어서 프린트해서 교회동생에게 첨으로 건내기도 했어요..
저는 정말 재밌는데 동생도 재밌을 런지는 잘 몰라요 ㅋㅋㅋ
목사님은 유희를 아시나봅니다요..^^;
profile

[레벨:3]코람데오

October 28, 2008
*.109.122.33

피스님 눈사람님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하나님말씀대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철저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은혜로 천국을 갈 수 있다라고 성경이 가르친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중에 철저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않아도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이 어디에 있는지 좀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철저히 살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철저한 가르침에 복종해야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며, 아주 작은 잘못조차도 무거운 죄짐으로 느껴 질 수 있으며, 그곳에 진정한 회계와 뉘우침이 있으며 날마다 죽기까지 죄와 싸우는 군사가되어가는 것 이며, 그 자리에 예수의 의혜가 실로 귀하게 느껴지는 것 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구요? 천만의 말씀 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시작일뿐이지 완성은 아닙니다. 얼마전 저희 목사님 말씀이 생각 나는 군요. "믿음이란 생명을 찾는 보물지도를 손에 넣은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생명을 얻기위해서는 보물지도가 지시하는 대로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철저히 순종하는 삶이 위의 피스님이 참석하셨던 집회를 하신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새벽기도, 십일조, 주일성수, 목사님 받들기, 전도, 죄악된 마음을 몰아내기"라는 이런식의 유아기적 설교에 공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백서들 새벽기도 열씸히 하고 십일조 열씸히 하고 주일성수 열씸히하고도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고 예수를 십자가에 목박아 죽이지 않았습니까?

http://www.christianinsid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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