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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길을 준비하라! (눅 3:1-6)

대림절 조회 수 21482 추천 수 0 2012.12.09 22:39:42
설교듣기 : mms://61.111.3.15/pwkvod/dawp/dawp_1209.mp3 
성경본문 : 누가복음 3:1-6 

주의 길을 준비하라!

눅 3:1-6, 대림절 제2주, 2012년 12월9일

 

 

1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 설교 본문이 들어 있는 누가복음의 특징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역사적 배경에서 전개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눅 2장1,2절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시대를 정확하게 기술합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아구스도이고, 수리아의 총독은 구레뇨였다고 합니다. 세월이 30년 쯤 흐른 뒤의 이야기가 눅 3장부터 시작됩니다. 이 때 디베료가 로마 황제였고, 빌라도가 유대 총독이었으며, 헤롯이 갈릴리 분봉왕, 헤롯의 동생인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의 분봉왕, 그리고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이었다고 합니다. 누가는 이런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헛소문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

누가의 이런 신학적 관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세례 요한입니다. 누가복음만이 아니라 다른 세 복음서도 요한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훨씬 강한 어조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 이야기가 눅 1,2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출생을 거론하기 전에 세례 요한의 출생을 먼저 말합니다. 제사장인 사가랴와 아내인 엘리사벳은 늙어서까지 아이가 없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던 사가랴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그의 아내가 임신하고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알립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여섯 달 후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를 찾아와서 그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알립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누가는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친척 사이라고 말합니다(눅 1:36). 그렇다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도 친척지간이라는 말이 됩니다.

 

누가가 예수님과 요한과의 관계를 이렇게 강조하는 또 하나의 다른 실제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시작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요한의 제자들이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의 속편이라 할 행 18:24-19:7에는 아볼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볼로는 세례 요한을 추종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아볼로에게 세례를 받은 이들이 당시에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세례 요한의 세례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성령 세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결국 아볼로와 그 일행들은 모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이 합세한 뒤에 초기 기독교는 세례를 중요한 종교의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초기 기독교의 이런 역사적 배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세례 요한과의 관계를 자세하게 언급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도 요한으로부터 시작됩니다. 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했다는 것은 요한의 소명을 가리킵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소명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스스로 나서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끌려나왔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요단 강 근처 빈들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가 베푼 세례의 특징은 사죄를 받게 하기 위한 회개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불을 토하는 듯이 강력했습니다. 눅 3:7절 이하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세례를 받으러 온 사람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일갈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 안에 독을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걸 요한은 죄라고 말합니다. 요한의 이런 말을 듣고 사람들의 반응이 각양각색이었겠지요. 어떤 사람은 요한의 말이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또 어떤 사람은 세상을 살다보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나, 또 어떤 이들은 양심에 가책을 받고 크게 두려워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독사와 같다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독을 품기도 하고, 그것으로 어떤 대상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은 그 사실을 교묘하게 피해갔습니다.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도피처로 삼았습니다. 요한은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합니다.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눅 3:8) 요한의 메시지는 어떤 위선도, 핑계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가 볼 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목사라는 직책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교회 장로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회적인 신분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것들을 목록으로 만들어보십시오. A4 용지에 빼곡하게 채울 수 있는 목록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독을 품고 있다는 인간 본질의 은신처가 되지 못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몰려든 민중들을 향해서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까,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모두 찍혀서 땔감이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요한의 설교는 준엄합니다.

 

이사야의 예언

누가복음 기자는 세례 요한의 이런 말씀 선포와 행위를 이사야 선지자와 깊이 연관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는 세례 요한입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해석입니다. 누가복음만이 아니라 다른 복음서도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똑같이 인정합니다.

 

누가가 인용한 사 40:3-5은 소위 제2이사야(40-55장)의 시작 부분입니다. 이것을 기록한 사람은 바벨론 포로 후기에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유다는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고, 귀족과 지도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암담했습니다. 우리 한민족의 일제 말기와 비슷했습니다. 일제 초기에는 민족 독립과 애국심을 말하던 지도자들이 후기에 들어서면서 변절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일제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50년 가까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들은 절망했습니다. 조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별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냥 바벨론에 귀화하는 게 더 나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신탁을 받았습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노역의 때가 끝났다고 했습니다. 이제 곧 포로 생활을 끝내고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예언을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 40: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바벨론 포로로 잡혀서 50년의 세월을 보낸 유대인들이 조국으로 돌아가려면 광야와 사막을 횡단해야 합니다. 골짜기와 산을 넘어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도 그런 길을 횡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들은 노약자와 함께 가야 합니다. 길을 먼저 내지 않으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민족이 해방될 영광스런 날을 선포한 것입니다. 포로생활의 서러움과 고난이 끝난다는 기쁨의 노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계획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구체적으로 광야와 사막에 길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유다 민중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준비를 마치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볼” 것입니다(사 40:5).

 

누가는 5백여 년 전에 선포된 이사야의 예언이 세례 요한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사야가 처한 상황과 지금 세례 요한이 처한 상황은 다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광야와 사막에 길을 낼 필요는 없습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일이 없습니다. 세례 요한 시대의 사람들은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았지만 나름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 덕분으로 그럴듯하게 재건되었습니다. 광야와 사막에서 길을 내라는 이사야의 예언은 요한의 상황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광야와 사막에 실제적인 길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길을 내는 것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 세례 요한의 역할이었습니다. 요한은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했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 즉 메시아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눅 3:16)

 

하나님의 구원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그것이 광야와 사막에 고속도로를 내기 위한 토목공사가 아니라는 것은 방금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길을 낸다는 것일까요? 그런 것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건 아닙니다. 주님은 원칙적으로 길이 필요 없습니다. 자동차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런 준비와 상관없이 자신의 권능을 실행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의 준비가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마지막 때 재림의 주님은 사람들이 준비하지 않고 있을 때 갑자기 오십니다. 주의 길을 준비한다는 것은 주님이 행하실 일을 미리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일어날 일을 사람들에게 미리 알리는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인지 본문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그 때에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관계가 정의로워집니다. 골짜기가 메워지고 굽은 것이 곧아집니다. 부와 가난의 악순환이 해체됩니다. 권력자의 횡포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습니다. 재물과 돈이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는 세상이 됩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의 차별이 없어집니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의 차이도 없어집니다. 산이 낮아지는 것처럼 아무도 잘난 척할 수 없고, 잘난 척하지도 않는 세상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이민자로서 당했던 모든 불이익도 없어집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하고 있는 이런 놀라운 세계에 대한 영적 상상력이 누가복음 기자의 중재를 통해서 우리에게까지 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런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까요? 실제로 그런 세상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림절 영성은 주님이 통치하실 이런 세계에 대한 강렬한 열망입니다. 이런 세계를 단순히 정치, 경제적인 정의나 복지 자체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림절 신앙의 본질은 이 세상의 변화에 있습니다. 대충 모양이 변화하는 게 아니라 질적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모든 경험과 예측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안의 삶과 동굴 밖의 삶을 비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를 비롯해서 초기 기독교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본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도 역시 그들과 똑같이 그렇게 믿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 때 세계는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차원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이 낮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 부활 생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를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말씀이 자신의 삶과 너무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생각을 바꾸십시오. 이사야와 누가복음 기자의 영혼을 불태운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십시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고 했습니다. 그런 순간이 빨리 오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입니다. 기뻐하십시오. 그 때가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일을 행하실 주님의 길을 준비하십시오. 주님이 이미 문 앞에 당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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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굶주린 늑대 

December 12, 2012
*.18.118.229

선지자들은 자기 소명에 대하여 어디까지 자각하고 있었을까요?


성서에서 큰 사역을 감당한 선지자들은 왕이나 제사장처럼 공인된 신분이 아니라

민중이나 권력자 개인에게 인정받은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그 소명을 확신했을까요?


우리 주변에서도 소위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꼭 은사주의 교단 등에서 말하는 실제 음성이 아닐지라도 

스스로 자각한 하나님의 섭리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부름받은 자들이고 

그 부름에 응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시련과 난관에 부딪힙니다.

그런 순간마다 과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계속 고민하지만 

언제나 답을 알기는 어렵고 또 답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욕구가 아니었나 의심하게 됩니다.


선지자들의 영성이 특별했던 것일까요?

어떻게 소명을 깨닫고 부응하는 삶을 살 수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신앙을 떠나있던 시절이지만, 바른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계속 고민하다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고,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켜가는 것이다. 


소명이 무엇인지 사명이 무엇인지 전에 

내가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지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과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정욕에 이끌리는대로 사는지도 불분명한 자신을 보면서 

선지자들의 소명의식은 너무 멀어보이는 것 같습니다.


정말 이럴수록 주님을 더 기다리게 됩니다.

너무나 불확실하고 흐릿한 모든 것이 확연히 들어나게 될 그 날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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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2, 2012
*.149.31.175

포크 군,

소명 문제의 핵심을 짚고 있소이다.

오늘 젊은 목사들도 그런 것에 대해서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깝소이다.

나도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뭣도 모르고 그냥 제 기분에 젖어서

전도사, 그리고 목사 역할을 한 것 같소.

지금이라고 해서 뭐 크게 달라진 것도 없겠지만.

내가 보기에 모든 사람은 다 소명을 받았소.

차이가 있다면 성령의 소명이냐,

아니면 악령의 소명이냐 하는 것뿐이오.

그걸 분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오.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분하기 힘든 것과 같소.

예수님의 말씀에도 있듯이

거짓 선지자, 자칭 메시아들에게도

초자연적인 능력과 비슷한 것들이 나타나기 때문이오.

이런 것들은 포크 군이 다 알고 있는 것이오.

문제는 '내가 어떻게 소명을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일 거요.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소명 자체를 생각하지 않소.

하나님이 자기를 불렀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는 거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소명 받은 선지자는 있는 거 아니겠소?

그것은 나중에 판단될 뿐이오.

그의 삶이 과연 소명에 의한 것이었는지 아닌지는

당대가 아니라 역사가 흐른 뒤에,

그 역사의 기간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거요.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드려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소.

성령이여, 우리에게 오소서, 라고 노래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소.

부디 우리가 자기 착각에 빠지지 않고

거룩한 영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할 뿐이오.

포크 군의 결론이나 내 결론이 비슷하군.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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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굶주린 늑대 

December 14, 2012
*.18.118.229

설교와는 다른 질문이지만, 대림절이라 궁금해진 것이 있습니다.

짧은 내용이라 댓글로 쓰겠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재림]에 관한 표현들은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쪽에 가까운지

아니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에 가까운지 궁금합니다.

예전 신학단상에 남기신 글 중에

'예수님은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인식하고 있었는가?' 에 대하여 글을 쓰셨는데...

 

http://dabia.net/xe/?mid=theo&page=10&document_srl=29989


왠지 재림에 관한 질문도 연관성을 가지는 것 같아서요.

아니면 재림 = 부활에 가까운 표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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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4, 2012
*.149.31.175

포크 군,

좋은 질문이오.

설교와도 관계가 있소.

지금 우리는 재림을 준비하는 중이니 말이오.

재림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친언이냐,

추종자들의 고백이냐 하는 질문이었소.

두 가지에 다 해당되오.

추종자들의 고백은 그냥 나온 게 아니라

예수 정체성에서 나온 거니까

겉으로는 구별할 수 있지만

실질적인 의미에서는 동일한 것이오.

먼저 구별해보면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직접 하셨다고 볼 수는 없소.

예수님도 자기 생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생각했을 수는 있으나,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임하지는 않았소.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생각과는 달랐다는 뜻이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대상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하나님 나라는 예수와 일치되고 말았소.

추종자들은 예수를 곧 하나님 나라로 믿게 되었소.

여기까지만 말합시다.

이번 주일 설교가 이 주제요.

빌 4:4절에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씀을 설명하게 될 거요.

지금 설교를 준비하는 중인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 많소.

설교도 열린 작업이라오.

창조적이라는 뜻이오.

기독교 교리가 어느 정도 틀을 잡고 있으나

완전히 고정된 것이 아니고

성서텍스트, 청중들과의 관계 속에서

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오.

그 작업을 수행한다는 게, 음

새로운 시나 소설을 쓰는 것과 비슷하오.

포크 군은 이번 주에 야근을 할테니

피곤해서 설교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것 같군.

예수님이 빨리 오시지,

왜 늦어져서 야근을 하게 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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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December 13, 2012
*.164.11.151

목사님의 설교문을 읽고

대림절 신앙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소인의 무지함을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회력과 관련해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가 대림절을 보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교회력과 관련한 설교본문은 교파마다 다른 건지요?

제가 궁금한 건 아래와 같습니다.

1) 교회력 설교본문이 카톨릭, 동방정교회, 루터교, 유럽의 개혁교회들 간에 서로 일치하는지.

2) 우리 한국교회 개신교 교단(통합,합동,기장측)에서 모두 동일한 설교본문을 채택하고 있는지.

3) 교회력과 관련한 성서일과는 누가(어디서) 결정하는가?

4) 정용섭 목사님은 어느 기관에서 제정한 교회력 설교본문을 따르고 있는지.

 

\4가지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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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3, 2012
*.149.31.175

갈매기 님,

대림절 신앙을 생각했다고 했는데,

그게 가슴에 와 닿던가요?

그게 쉽지가 않답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은 절실하지만

예수의 재림을 통해서 이뤄질 부활 생명은 멀게 느껴집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에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다는 뜻이지요.

그걸 어떻게 벗어나는가, 하는 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교회력에 대해서 질문하셨군요.

1) 교회력은 교파마다 똑같지만 성서일과(성서정과)와 설교본문은 다릅니다.

2) 한국 개신교회에서도 서로 다른 성서일과를 따릅니다. 똑같은 교단도 있긴 하겠지요.

3) 각 교파마다 동일할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어요.

    호주의 장로교회와 미국 장로교회는 똑같을 거구요.

    세계 루터교회는 다 똑같겠지요.

    성공회와 가톨릭이 어떨지는 모르겠네요.

    그걸 정하는 신학분과가 각 교파마다 있겠지요.

4) 나는 반더빌트 트리니티 라이브러리(http://lectionary.library.vanderbilt.edu/)에서

    제공하는 성서일과를 따릅니다.

    구약, 신약의 서신서, 신약의 복음서가 매 주일 나오는데,

    설교 본문은 그 중의 하나를 선택합니다.

     자세한 건 다음을 참조하세요. http://dabia.net/xe/comment/471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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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December 15, 2012
*.164.11.151

네~ 답변 감사합니다.

교파마다 성서일과가 다르다는 건

성서일과를 통한 교회일치는 거의 기대하기 힘들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괜찮을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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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5, 2012
*.149.31.175

교파 수준에서 성서일과를 함께 하기만 해도 좋습니다.

그것마저 거의 유명무실하니까 어려운 거지요.

언젠가 한국교회 전체가

하나의 성서일과를 사용할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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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아우

December 15, 2012
*.164.11.151

성서일과를 보니까

구약,복음서,서신서

주로 셋으로 구분되는데(많은데는 4개도)

성경본문을 세 군데나 찾아서 낭독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럽니다만

어차피 세 본문을 다 다루지 못할 거라면

공연히 예배에 시간낭비만 불러오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차라리 이번 주에는 구약, 다음 주에는 복음서, 그 다음주에는 서신서

이런 식으로 일년간 성서일과를 짜면 안 되나요?

왜 한꺼번에 구약,복음,서신서를 나란히 읽어야 하는건지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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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17, 2012
*.149.31.175

한 예배에서 3-4 군데의 성경을 읽는 이유는

페스트 푸드가 아니라

고른 반찬을 곁들인 식단이 건강에 좋다는 사실과 비슷합니다.

구약, 서신, 복음서는 필수 불가결의 영양소와 같든 거지요.

그 양양소가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인가요? ㅎㅎ

3,4 군데의 성구가 나름으로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어요.

어떤 설교자는 그 성구를 다 다루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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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y 15, 2013
*.44.68.186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삶이 주의 자녀로 살아가는 길.

생명을 존중하고 나의 악을 책임지고 외식하는 자의 악에 맞서고
선을 분별하면서 선에 맞서지 말아야하는 삶.

부활 희망이 점점커져서 문밖에 계신 주님께서 말씀을 반복하시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읽고 가까이하고 생각할때마다 더 말씀들이 예전것을 다시 읽는 것이아니라
부활한 말씀들을 읽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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