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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듣기 : https://youtu.be/3IP_c0LZB1M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18-31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고전 1:18-31, 주현절 넷째 주일, 2014년 2월2일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운하는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입니다. 크기가 그것들보다 못하지만 나름으로 유명한 운하 중의 하나가 그리스에 있는 코린트 운하입니다. 그리스 지형은 우리나라처럼 반도로 되어 있는데, 반도 중간이 개미허리처럼 잘록하게 지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지협에 자리한 도시가 코린트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그 지역을 고린도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남북으로 왕래하려면 반드시 그곳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으면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도 발달합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에 고린도는 요즘 대도시에서 볼 수 있듯이 활기가 넘치고, 사치가 심했고, 부도덕했고, 우상을 열광적으로 섬겼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곳에 전략적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썩 괜찮은 교회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몇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분파주의입니다. 오늘 설교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1:1-17절에 그 내용이 소상하게 나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갈렸습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문제로 파가 갈렸습니다. 바울은 세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복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했습니다. 그 복음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당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고, 어떤 분들은 십자가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걸고 다닙니다.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펑펑 흘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서울에 처음으로 오신 분들이 야경을 보고 놀라운 이유 중의 하나는 시뻘건 십자가 불빛이라고 합니다. 그런 포즈를 취한다고 해서 그가 과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걸까요? 그걸 아는 교회가 분파주의에 떨어질 수 있을까요? 고린도교회는 네 분파에 불과했지만 한국교회는 백오십 여개의 분파로 나누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우리보다는 오히려 양반입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공허한 종교적 구호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런지 아닌지는 오늘 바울의 가르침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극명하게 두 가지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리석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능력입니다. 18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기서 십자가의 ‘도’라고 할 때 그 도는 헬라어 로고스를 가리킵니다. 공동번역은 그걸 이치라고 번역했고, 새번역은 말씀으로, 현대어 영어성경은 메시지로, 루터는 말씀(Wort)으로 번역했습니다. 로고스는 일반적으로 언어, 가치, 이성, 근거라는 뜻이 있습니다. 의역을 하면 섭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로고스는 십자가 신학, 또는 십자가 영성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23, 24절에서 이 사실을 다시 반복해서 짚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이 구절에서도 18절과 마찬가지로 십자가 사건이 두 가지로 대별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자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18절이 말하는 멸망하는 자들과 23절이 말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모두 기독교 신앙과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건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 처형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동정 받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개죽음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대표적으로 유대인과 헬라인을 거론했습니다. 22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표적, 즉 기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원했습니다. 구약성서에 그런 사건들이 많이 나옵니다. 모세 이야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홍해를 가르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허락하셨습니다. 바위에서 물이 흐르게 하셨습니다. 그런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런 능력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장 무기력하게 죽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면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고 외쳤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십자가를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합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헬라인들은 철학적인 민족으로 유명합니다. 철학(philosophy)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아는 것, 깨닫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연을 알려고 노력했고, 인간을 알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전통에 따라서 서양에서 물리학도 발전하고, 심리학도 발전했습니다. 오늘의 모든 학문은 다 이런 철학의 열매들입니다. 그들의 눈에 십자가로 죽은 예수는 결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학문을 깊이 알고 제자들을 키우고 사람들에게 큰 스승이라는 말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삼십대 초반에 십자가 선고를 받고 죽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을 지혜롭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 일컬어지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운명에 대한 말을 듣고 뜯어말린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런 시대정신을 거슬러서 말합니다. 십자가 사건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라고 말입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여러분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게 되었으니 당연하다고 대답하실 겁니다. 옳은 대답입니다. 정답입니다. 그러나 왜 그런지에 대한 총체적인 질문을 좀더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건 그렇게 당연한 대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지혜가 뭔지를 묻고 있습니다. 본문에 지혜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가 대립됩니다. 세상의 지혜는 간단히 말해서 잘난 척하는 겁니다. 자기가 뭔가를 안다는 걸 내세우는 겁니다. 그런 지혜를 바울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지혜는 오히려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나타내 줄 뿐입니다. 2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위 구절에 세 종류의 사람들이 거론됩니다. 지혜 있는 자, 선비, 변론가는 당시 로마시대에 잘 나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스승, 학자, 웅변가, 변호사, 정치인, 제사장, 선지자 등등입니다. 누구나 존경할만한 사람들이이었습니다. 세상의 지혜를 대표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세상 법과 종교의 권위로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실정법이나 종교법 모두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런 실정법과 종교법이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시켰습니다. 그게 세상의 지혜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에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무시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자들의 사회적 신분이 낮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당시 기독교 신자들 중에는 노예, 여자, 일일 노동자들이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 26절이 그걸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고 능력 있는 자가 많지 않고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 말입니다.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이 볼 때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와 그를 추종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어리석기 짝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세상의 지혜를 하나님께서 미련하게 하셨다고 과감하게 선포합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세상의 권력을 빼앗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세상의 지혜는 십자가를 저주하도록 가르칩니다. 오늘날 인생의 실패를 저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지혜에 묶여 있는 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7절과 28절에서 그것을 더 생생하게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세상에서 미련한 사람들로 취급받던 기독교인을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셨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게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 걸까요? 아니면 기독교인들의 열등감을 숨기기 위한 자기합리화나 자격지심에 불과한 것일까요? 성경말씀을 냉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은혜로운 말씀이거니 하고 지나가는 건 옳지 않습니다. 노예, 여자, 일일 노동자들, 요즘 말로 ‘루저’들이 모여서 아무리 떠들어도 권력과 명예와 돈이 있는 사람들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눈 깜빡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이 진술은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눠서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이 진술은 종말론적인 관점입니다. 지금 당장은 예수의 십자가가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은 숨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말이 오면 그 사실은 명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게 드러나는 순간에 그걸 무시했던 이들은 모두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잘난 척하던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이 종말론적 관점은 오늘 우리에게 현실로 앞당겨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신분과 조건에 관계없이 예수의 십자가야말로 참된 지혜라는 사실을 실제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이런 뜻으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본문과 다릅니다. 우리는 당시 교회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하층민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들처럼 모두 가난하거나 지식이 없거나 명예가 없이 살아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입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의 분파주의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분파주의는 자기가 스스로 지혜롭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결국 자기 자랑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게 없다는 사실을 29절에서 짚었고, 31절에서는 렘 9:23절을 인용하면서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빌 3:7,8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귀하기 때문에 자신의 자랑거리들을 배설물로 여기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건 좀 과장된 거 아니냐, 예수 십자가를 믿지만 다른 것도 다 중요한 게 아니냐, 자랑 좀 하며 살면 안 되나,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더 나가서, 예수 십자가는 그냥 구원받기 위해서 믿을 뿐이고 세상살이는 세상의 지혜로 살아야 한다고, 그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게 어려운 일입니다.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세상살이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공부도 해야 하고, 돈벌이도 해야 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문제는 여러분이 알아서 하십시오. 각각 삶의 모양이 다르니 제삼자인 제가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저는 성경이 말하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능력과 지혜는 똑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을 생명이라는 말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십자가는 생명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즉 삶의 능력이요, 삶의 지혜입니다. 이 사실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걸 좀더 실질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죄가 없는 상태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가장 높은 존재가 가장 낮은 운명에 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운명에 떨어졌던 예수님을 택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로 삼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단순히 교리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깨닫고 믿는 사람은 자기에 임하는 어떤 운명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게 삶의 능력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가 절대적인 능력으로 간주하는 돈은 삶의 방편은 되지만 능력은 되지 못합니다.

 

얼마 전에 저는 2년에 한 번씩 하는 건강진단을 받았습니다. 콜레스테롤이 정상수치보다 조금 높은 것으로 나왔을 뿐이지 나머지는 대부분 정상입니다. 요즘 흔한 암에 걸린 것으로 진단이 나왔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돈을 내고 수술을 받거나 항암 치료를 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으로 삶의 능력이 생기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십자가 사건과 일치할 수 있다면 비록 육체적인 고통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힘들어할지 몰라도 절망하지는 않을 겁니다. 더구나 종말의 생명인 부활을 실제로 희망할 수 있다면 불치병이라는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 수 있을 겁니다. 저에게 닥치는 그 외의 다른 문제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얼마나 깊이 연루되어 있느냐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거기에 몰입하십시오. 기독교인은 거기서만 삶의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2: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삶의 능력을 비밀한 방식으로 여러분의 영혼 가득히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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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February 04, 2014
*.192.53.116

내가 은혜로 갖게 된 이 믿음이,
하나님과 화목된 자로 되었다는 이 신분의 변화가,
매일 매일 내가 처한 정황을
넉넉히 감당해내는 능력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저 거대한 풍조를
이겨내는 능력이 되어야 마땅하겠지요?

그런데 현실에선 능력이 되어주기 보단
적당한 타협의 잔꾀만 제공해주지 않나
싶습니다
허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어떤 정황이라도 감당할수 있나이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의 그 고백처럼
왜 내가 가진 믿음이 오늘의 정황을 넉넉히 감당하는 자족의 능력을 발휘해주지
못하는것인가....

늘 자책하는 제게 오늘 설교제목을 보는 순간
반갑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설교를 거듭
묵상하고 난 결론은
"그럼 도대체 어떻게 믿어야 십자가가
내 삶에 능력으로 발휘될수 있단 말야?..."

오늘도 시원한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제시안해 주셔서 갈증과 의문만 더해주셨군요
ㅎㅎ

'각자가 처한 정황이 다 제 각각이니
방법론은 성령님의 사역에 맡기자!'
또 그러시는건지요?
ㅎㅎ

"단순한 교리로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깨닫고
믿어야 한다
십자가 사건에 일치시켜야 한다
십자가에 얼마나 연루되느냐에 달렸다
거기에 몰입해야 한다
십자가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런 표현들이 시원하게 와닿지가 않습니다

부연 설명을 해 주실수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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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4, 2014
*.94.91.64

'시원하게...' 경험하고 싶으시지요? ㅎㅎ

판넨베르크 선생에 따르면

신학도들이 신학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철학적인 마인드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랍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에게도 이 말이 적용됩니다.

(부스러기 님을 가리키는 게 아니니 오해마세요.)

하나님을 실체론적으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인식하고 경험해야 한다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니까 신학책이 어려운 거지요.

그래서 신학도(목사)들이 청중들의 심리학에 의존하게 됩니다.

심리적인 카타르시스를 목표로 목회 하고, 설교 합니다.

그게 요즘의 말로 하면 힐링인 거구요.

말이 옆으로 흘렀군요.

 

십자가와의 일치가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는 거지요? 음.

다른 사람들은 실제로는 느껴지지 않아도 숨기는데,

벌거벗은 임금 앞에서 아무 소리 하지 않듯이,

부스러기 님은 솔직하게 말씀하셨네요.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걸 더 이상 시원하게 느끼도록 설명하기는 역부족입니다.

좀더 시간을 기다리는 게 최선입니다.

그래도 아쉬운대로 한 말씀만 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경험이 주어지면 숨 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경험이 주어지면 세상의 온갖 즐거움이 소소하게 보입니다.

그 하나님 경험이 십자가와의 일치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소유'의 차원에서는 세상의 저주이나

'존재'의 차원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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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February 04, 2014
*.9.118.42

하나님을 실체론적으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인식하고 경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신학이 밑바탕 되어야  한다! 

 

전적으로 공감하며, 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목사님이 공역하신

(판넨바르크인가요, 칼 바르트인가요?)

무쟈게 두꺼운 서적을 구입하였는데, 진도가 십분의 일도 못나간채

스톱하고 말았습니다.

공감도, 감동도,재미(?) 도 없어서였죠.

 

이번에 서울과 대구 교회에서

새로 시작하는 강의가 있죠?

인근에 거주해서, 참석이 가능한 분들이 넘 부럽습니다.

대구 강의에 대해

어떤 분이 '강의를 녹취해서 올려주십사'는 댓글을 남기었더군요.

저는 거기에 실날같은 희망을 가져봅니다.  ㅎㅎ

 

"하나님 경험이 주어지면 숨 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고,

 세상의 온갖 즐거움이 소소하게 여겨진다!"

--> 이 득도,해탈의 경지에 언제쯤 도달할수 있을까?

    내 생애에 가당키나 할까?

   그리살면 얼마나 기쁘고, 매일 매일이 하나님 나라임을 경험할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목사님! 그런데

'하나님을 실체론적으로 경험한다'가 무슨 의미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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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4, 2014
*.94.91.64

부스러기 님도 글을 재밌게 쓰시는군요.

마음이 굳어있지 않고 열려 있다는 증거네요.

'실체'라는 말은 나무, 돌, 공장, 다리 처럼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가리키잖아요.

하나님을 우주 공간 어느 곳에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

이게 바로 하나님을 실체론적으로 경험한다는 뜻이에요.

한국 기독교인들의 상당히 많은 부류가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천당 개념도 그렇게 다가올 거구요.

이런 상태에서는 종말에 자기를 온전히 드러내시나

지금은 비밀한 방식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거지요.

복음서 기자들이 바탕에 깔고 있는

메시아 비밀도 잘 와 닿지 않을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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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February 04, 2014
*.9.118.42

아~ 그렇군요

그 분을 감각적으로, 실체적으로 믿게 되니까

우리 앞에 닥치는 정황 여하에 따라,

내 믿음이 요동치고,

마음이 변덕스럽기가 이를데 없고,

한 입술에 찬송과 불평을 담은 채,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군요.

 

이 가난하고 곤고하고 저급한 신앙수준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서

그 분이 허락하신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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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질그릇

February 04, 2014
*.153.152.171

창밖의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를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봅니다.^*^

처처에 몸의 균형을 잃어서 삶의 질이 깨어지는

아픔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임을  깨달아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조금씩 경험하고 운명을 맡기는 사람은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지하겠지요^*^

하지만, 현실에서의 견딤은 각자가 맡아야 할

또 하나의 숙제인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십자가와 하나되는 길에 서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평강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 주신다는 것을 경험한다는 것이겠지요^^ 

나그네 같은 인생 길에서 만나지는 여러가지 정황을

주님과 함께 극복해 나가는 지혜로움을 간구합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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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4, 2014
*.94.91.64

예, 질그릇 님이 십자가 신앙과 삶의 문제를 잘 정리해주셨네요.

하나님의 아들마저 십자가에 처형당한 마당에

우리가 십자가와 같은 운명에 빠진들 뭐 그리 억울할 게 있겠어요.

고통의 단말마는 지를지 모르나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니

모든 것에 순종하는 것이지요.

그 순종이 영성의 본질이며,

거기서 삶의 능력이 샘처럼 솟아나지 않겠는지요.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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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파란하늘지붕

February 04, 2014
*.129.38.200

1.처음에 분파주의로 말씀을 시작하셔서 분열과 화합에 관한 말씀이 시작되려나 하는데, 주제가 확 바뀌어버린듯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다면 분열하고 싸울수밖에 없다는 서론을 잠깐 꺼내신건가요?

 

2. 전도의 어리석은 것으로... 는 선교나 전도를 할때 항상 유용하게 사용(?)되는 본문이 아닙니까? 전도자체가 미련해 보이지만 해야하는 당위라고 설명하면서요. 여기서의 전도는 '세상의 지혜와 대비되는 개념의 십자가의 도가 미련해보일지라도' 라고 해석을 하면 될까요? 전도행위자체보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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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4, 2014
*.94.91.64

좋은 점을 짚으셨습니다.

1) 주제가 바뀌었지요?

바울이 분파주의를 경계하려고 이 말씀을 시작했으나

사실은 분파주의 자체보다도 거기에 떨어지지 말아야 할 내용이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나도 그 내용에 초점을 맞춘 겁니다.

2)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는 우리말이 좀 어색합니다.

루터는 전도를 설교라는 독일어로 번역했어요.

그것은 곧 십자기를 전하는 설교에요.

세상이 그것을 어리석다고 보는 바로 그것이요.

파란 님이 정확하게 본 거에요.

전도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내용을 가리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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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2]자유의꿈

February 05, 2014
*.31.139.28

현재 설교듣기와 보기를 mms 방식으로 서비스하고 있는데

모바일기기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html5/flash 방식의 jwplayer를 사용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시험을 위해 당분간 설교본문 아래에 설교보기와 듣기 플레이어를 첨부합니다.

단, html5 또는 flash를 지원하는 브라우저를 사용하셔야 합니다.( Internet Explorer는 9이상 사용가능)

안드로이드 사용자는 구글 크롬 브라우저 사용을 권장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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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05, 2014
*.94.91.64

스마트폰으로 접속하기 힘들어하던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네요.

내 구닥다리 스마트폰으로도 잘 들리네요.

PC로는 박스가 뜨지 않는 걸 보니

내 익스플로러가 옛날 건가 보군요.

수고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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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2]자유의꿈

February 05, 2014
*.31.139.28

윈도우 XP 사용자는 Internet Explorer 9이상이 설치되지 않으니

구글 크롬 브라우저를 설치하셔야 시청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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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lutecia

March 16, 2014
*.212.3.56

오늘의 말씀은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었습니다.

저 혼자 듣기에는 아까운 소중한 말씀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주실 때, 항상 숲과 나무를 보여 주시면서 설명을 해주셔서,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어디에 있는 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콜레스톨이 정상보다 조금 많은 수치에요?

하루에 마늘 작은거 3 톨이나, 양파 반 쪽을 드셔보세요.

저는 30 여 년을 서양에서 살면서 김치 없을 때 그렇게 먹었더니 콜레스톨 수치가 놀랍게도 정상 한계의 절반 수준이라고해요.

목사님~ 꼭 그렇게 잡수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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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16, 2014
*.94.91.64

저의 설교를 좋게 들으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마늘이 그렇게 좋은 식품인가 보군요.

기억해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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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December 03, 2014
*.206.242.56

십자가에 못박혀 가장 낮은 곳의 아들을 첫 열매로 삼으셨다는 말씀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 자녀로 삼으심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왠지 맘도 놓이고 부담도 됩니다.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가장 낮은 곳부터란 사실에 주목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범위를 십자가예수님으로 부터 정하심에 참으로 깊은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원점이 여전히 지금 상황의 원점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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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04, 2014
*.94.91.64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로

그 어느 누구의 인생도

버림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먼저 알았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겠지요.

대림절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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