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8

삶의 무게 (미 6:1~8)

주현절 조회 수 3362 추천 수 0 2023.01.29 17:50:12
설교보기 : https://youtu.be/L_NWlx8NlcQ 
성경본문 : 미가 6:1~8 

삶의 무게

6:1~8, 주현 후 넷째 주일, 2023129

 

 

미가는 기원전 750~690년 어간에 유대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지자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아시리아 제국의 압박을 강하게 받던 시대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선지자와 제사장으로 구분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고, 제사장들은 제사 의식을 주관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교에서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과 설교하는 사람이 똑같이 목사나 신부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그 역할이 구분되었습니다. 제사장의 활동 무대는 예루살렘 성전이지만 선지자의 활동 무대는 거리입니다. 제사장은 보수적이고 선지자는 진보적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세상이 하나님의 뜻대로 변혁되기를 갈망하던 사람들이어서 현실 유지에 급급했던 권력자들을 비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에 유명한 제사장은 많지 않으나 유명한 선지자는 많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열두 소선지자 등이 그렇습니다. 열두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미가입니다.

 

화려한 예배의식

오늘 본문 미 6:1~8절은 크게 두 문단으로 나뉩니다. 첫째 문단은 1~5절입니다. 여기서 미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관해서 구약성경 전체의 전통에 따라서 설명합니다.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 끌어내셔서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를 통과하도록 도우신 분이십니다. 미가가 볼 때 그 모든 과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the righteousness of the LORD)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입니다. 애굽 제국에서 소수민족으로 박해를 당했으며 광야에서 공공의 적 취급을 당하던 이스라엘을 지켜주셨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경험했으니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공의를 삶의 중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오갈 데 없이 떠돌이 신세였던 자신들의 이전 처지를 돌아보고 가난한 이들과 억울한 이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전혀 공의롭지가 않습니다. 화려한 제사 행위에만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것에 대한 문제 제기가 둘째 문단의 주제입니다. 6, 7절을 보십시오. 새번역 성경으로 읽겠습니다.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자식)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여기에 나오는 단어를 보십시오. 수천 마리의 양,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 맏아들 등등입니다. 하나님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목록입니다. 자식을 바치는 인신 제사는 유대교가 아니라 근동의 이방 종교에서 행해지던 의식입니다. 생존이 극도로 위태롭다고 느낄 때 사람은 정신적인 무정부 상태(멘탈붕괴)에 이르고, 거기서 자식을 신에게 제물로 바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도 그런 유혹을 받긴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이야기와 입다 사사가 자기 딸을 바치겠다고 서원한 이야기에서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대교는 그런 인신 제사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지금 미가 선지자는 그런 이방 종교의 인신 제사 의식까지 거론하면서 제사 행위에 지극 정성을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행태를 비판하는 중입니다.

번제물인 양은 실제로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 의식에서 바쳐졌습니다. 제사장은 양을 잡아서 피를 제단에 뿌리고 불에 태워서 향을 위로 올립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자기를 바치겠다는 생각이 그런 번제 의식으로 자리를 잡은 겁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이런 번제 의식 자체를 무조건 매도하면 안 됩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까지 자신들을 몰고 감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화려하고 나름대로 진정성 있는 종교의식에 지나치게 기울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종교의식의 본질이, 즉 예배의 본질이 훼손되거나 왜곡된 겁니다.

예배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미가가 바로 앞에서 짚은 출애굽과 그 이후 광야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출애굽 사건이 반복해서 언급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애굽 제국은 세상의 정치와 경제 권력이 일정한 체제를 갖춰서 사람들을 지배하는 작동원리입니다. 거기서는 늘 최대한의 성과를 올리는 방법을 찾기 마련입니다. 피라미드를 건설하려면 값싼 노동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노예와 서민들이 그 대상입니다. 올겨울 한파와 에너지값의 상승으로 가장 큰 타격을 보는 이들이 가난한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당시 강력한 국가 건설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애굽에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하는 계층은 당연히 하층 계급이었습니다. 전쟁포로, 노예, 소수인종 등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제국주의를 거부합니다. 그런 체제 아래서는 하나님이 창조한 일부 사람들의 삶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부정되는 사태를 어떻게 그대로 놓아둘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스라엘을 애굽 제국에서 끌어내셨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 행위는 불의에 개입하여 공의를 펼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의식입니다. 양과 숫양을 바치고 성가대의 멋진 시편 찬송가가 울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잊힌다면 그게 무슨 제대로 된 제사이고 예배가 되겠습니까? 8절에서 미가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공의

미가는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여기서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공의와 인자와 겸손입니다. KJV은 이 세 가지를 정확하게 번역했습니다. to do justly, to love mercy, to walk humbly with thy God입니다. 정의롭게 행하고, 자비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를 더 압축하면 정의와 자비와 겸손입니다. 미가가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정의와 자비와 겸손이 없으면서 화려하게 예배드리는 걸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정의롭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힘없는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보살펴야 한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문제는 그걸 알아도 그렇게 살기가 어렵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정의란 무엇인가, 자비란 무엇인가 하는 근본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는 당시 불의한 일들에 대한 구체적인 예가 나옵니다. 10절에는 불의한 재물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나오고, 11절에는 부정한 저울거짓 저울추가 나옵니다. 에바는 바구니라는 뜻으로 물건의 양을 잴 때 사용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물건들은 장사꾼들이 이익을 남기려고 눈금을 속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속이는 방식이 아니면 돈을 벌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돈을 벌더라도 조금 벌겠지요. 속임수를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실행하면 대박을 칩니다. 요즘은 저런 속임수가 오히려 합법적입니다. 두 가지만 예로 들겠습니다.

하나는 금융업입니다. 은행은 수신과 여신에 각각 다른 이자율을 붙여서 그 차액으로 운영됩니다. 돈이 돈을 버는 구조입니다. 초국가 헤지펀드는 더 악랄합니다. 미리 정보를 빼거나 작전을 벌여서 고수익을 올리는 방식입니다. 지금 대통령 부인이 이와 비슷한 일에,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에 연루되었다는 보도가 오래전부터 있었고, 여기에 관련된 이들이 재판을 받는 중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업주와 노동자 관계입니다. 기업이 벌어들이는 금액이 노동자들에게 제공하는 임금보다 클 때 기업은 돈을 법니다. 돈을 많이 번 기업은 그걸 토대로 해서 사업을 더 확장하고 다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입니다. 그게 바로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기업가의 능력이라고 사람들은 인정합니다. 합법으로 여깁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들이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정당하게 대우했고, 사회로부터 받은 온갖 혜택을 제대로 돌려주었을까요? 큰 기업체로 인해서 벌어지는 기후 위기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집니까? 법망만 피한다고 해서 정의로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일련의 현상을 나 몰라라 하는 건 가증한 에바이고 부정한 저울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익숙해져서 이에 관해서 별로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저는 현재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정의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뚜렷한 대안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인류는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입니다. 개인과 개인이, 지역과 지역이, 나라와 나라가 합법적인 방법과 불법적인 방법을 총동원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합니다. 그 끝이 어딜지 저는 별로 낙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린 최선의 길은 율법 실행입니다. 미가의 주장도 율법 범주에 들어있습니다. 19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곡식을 거둘 때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이삭도 줍지 말며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고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라. 청각장애인을 저주하지 말며 시각장애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라. 선지자들의 설교만이 아니라 모세오경도 정의와 자비와 겸손을 삶에서 가장 높은 가치로 제시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런 말씀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도 있으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말씀은 죽은 문자로 남고 불의한 재물과 가증한 에바와 부정한 저울과 거짓 저울추가 대세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오늘까지 여전합니다. 별로 좋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정말 정의와 자비는 불가능한 것일까요? 불가능한 일을 성경이 요구하는 것일까요?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아예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살다가는 정신이 분열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완전

마태복음 기자는 5장에서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여섯 가지 반명제(Antithese)로 정리했습니다. 1) “살인”- 5:22절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한 반명제로 실제 살인만이 아니라 형제에게 화를 내는 행위가 이미 살인이라고 규정했습니다. 2) “간음”- 28절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3) “이혼”- 31, 32절은 이혼 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라는 율법을, 즉 이혼 문제를 편의주의적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4) “맹세”- 34절은 맹세를 지키느냐 않느냐 하기 전에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5) “대적”-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당시로서는 나름 합법적인 율법 논리에 떨어지지 말고 악한 자를 아예 대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6) “원수 사랑”- 이웃만이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누구도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기에 율법을 얼마나 지키느냐 하는 기준으로 자기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을 평가하기 시작하면 위선에 떨어집니다. 위선으로는 아무리 고상하게 살아도 하나님의 구원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정의와 자비와 겸손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닙니다. 그것으로 상대적인 우월감이나 상대적인 자괴심에 떨어지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결론적으로 마 5:48절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perfect)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perfect)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을 목표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삶의 차원이 완전히 달라진 겁니다.

정의와 자비에 관한 실행 규칙인 율법을 지키기도 힘든데, 완전해지라고 하니, 이게 말이 되나요? 우리에게 더 무거운 짐을 맡기는 듯이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순간에도 우리에 무거운 짐을 맡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 이들에게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9)라고 말씀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완전해지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여기서 대답을 찾으려면 우선 율법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조금 더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번복되는 설명이지만 이해하고 들어보십시오. 율법적인 삶은 점수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60점짜리 인생이 있고, 80점짜리 인생이 있고, 30점짜리 인생도 있다고 말입니다. 점수에 따라서 사람이 판단 받습니다.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낮은 점수를 받는 사람을 은근히 무시하면서 만족스러워합니다. 살인자를 혐오합니다. 살인자를 혐오하는 사람도 일상에서 친구를 욕하고 무시합니다. 그게 바로 살인이나 마찬가지라면 누가 살인자를 혐오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런 반명제가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속으로 친구를 욕하고 미워하고 시기해도 실제 살인자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살인자를 두둔하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윤리적인 노력을 깎아내리는 게 아닙니다. 누가 상대적으로 더 나은가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초점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바꿔말하면, 연봉의 차이에 매달리지 말고 삶의 질에 천착하라는 겁니다.

요즘 저는 매주 목요일마다 외르크 칭크의 책 기도를 어떻게 드릴까요?2권에서 그가 쓴 기도문을 강독하는 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는 중입니다. 지난 목요일인 126일에 올린 기도문의 제목은 의로운 사람도 늘 선하지는 않다입니다. 우리에게는 선과 악을 구분할 능력이 없기도 하고, 그걸 구분해서 실행할 능력은 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정의롭고, 얼마나 도덕적이고, 얼마나 진보적이고 개혁적일 수 있을까요? 한밤중에 낯선 사람이 여러분을 찾아와서 하룻밤 재워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들어주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저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정말 사정이 딱한 게 분명하다면 인근 숙박 시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돈을 주거나 숙박 시설에 데려다주겠지요. 이게 완전한 윤리는 아닙니다. 낯선 이들도 가족처럼 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교 믿음이 있어도 실제 삶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일상에서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아무리 잘 풀어보려고 노력해도 개인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현상이 종종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참으로 난감합니다.

저는 삶의 중심을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두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여전히 대답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삶의 중심을 두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생명 완성을 향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런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없을 수 없으나 거기서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는 가운데 매 순간 최선의 길을 선택해서 그 길을 갑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라는 바울의 가르침이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묵묵히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완전을 향해서 함께 길을 가는 거룩한 도반들입니다


profile

[레벨:40]새하늘

January 30, 2023
*.126.124.2

이번 설교는 몇번을 반복하고 있지만, 고민하면서 다시 읽어야 겠네요.

전체적인 맥락보다는 설교 후반부에 낯선 과객 말씀하신 부분에만 맞춥니다.

2년전 지리산 둘레길 구간에서 전남구례 구간을 지나갈때, 시내에 들려 구례 [순대백화점]에 파김치에 함께 어우러진 순대국밥에 감동 했습니다.

근처 여관을 사장님에게 물어보고 밖에 나가 찾아 가려는데, 사장님이 손수 차를 끌고 나와 깨끗한 숙박시설로 안내 해주셨습니다. 

감동 그 자체입니다.

깨끗한 숙박 시설에 편안히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저는 그냥 식당을 이용한 손님일뿐인데 친절을 베푸신 사장님께 지금도 감사를 드리고,

나중에 꼭 다시 찾아 가려고 합니다.


누가 나의 형제이고 자매일까요?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베풀때 선의이겠지요.

그 속엔 절제, 주변 상황 등이 포함 되겠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도움이라도 주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또한 우리 주변에 많고요.


하나님의 정의, 자비, 겸손은 결국 오직, 사랑이겠지요.

솔라, 아모르!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30, 2023
*.151.5.10

예, 오직 사랑, 

자기 안에 꽁꽁 갇히지 말고 이웃과 세상을 향해서 

자기를 개방하는 게 바로 사랑이겠지요.

저는 2월 중에 전남 어디 항구 도시에 가볼 생각입니다. 

전라도 음식을 먹을 수 있으려니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아지네요.

profile

[레벨:23]브니엘남

January 31, 2023
*.118.81.227

저는 목사님께서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 세 가지(to do justly, to love mercy, to walk humbly with thy God)를 설교에서 설명하시는 것이 설교의 핵심일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완전하심(teleios)과 그것을 연결시키셨네요.

우리가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 즉 온전 하신 것 같이 온전하게 되는 것은 그분의 사람 안에서 온전해 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생명 완성이고 성숙이다. 그리고 반명제인 새 율법, 즉 생명의 영의 요구, 곧 생명 완성은 엣 율법의 요구보다 더 높은 것이니 이를 향해서 나아가라. 아멘.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31, 2023
*.151.5.10

설교는 늘 어렵습니다.

설교자의 운명은 곤혹스러움 자체입니다.

자기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그분과 그분의 행위와 그 뜻을

세속의 시대정신에 파묻혀 사는 회중들에게 

소통에서 늘 한계를 보이는 문자와 언어로 설명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의와 자비와 겸손의 삶이 자기를 자랑하는 기회가 아니라

자기의 부족함을 인식하는 기회로 삼는 게 최선의 삶이 아닐는지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완전에, 또는 생명 충만에 가까이 가야겠지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85
148 성령강림절 살아계신 하나님 (호 1:2-10) [4] 2019-07-28 4855
147 주현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7] 2020-01-19 4786
146 부활절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시 1:1~6) [8] 2021-05-16 4763
145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5] 2020-08-23 4723
14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16
143 성령강림절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 6:35, 41~51) [3] 2021-08-08 4704
142 주현절 성령 받음이란? (행 8:14~17) [2] 2022-01-09 4661
141 성령강림절 전투하는 교회 (엡 6:10~20) [2] 2021-08-22 4649
140 부활절 예수를 '믿는 자' (요 20:19~31) [1] 2022-04-24 4645
139 주현절 세상의 외형 (고전 7:29-31) 2021-01-24 4638
138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 그리스도의 말씀 (골 3:12~17) [3] 2021-12-26 4604
137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560
136 성령강림절 "딸아!" (막 5:25~34) [4] 2021-06-27 4541
135 부활절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 (요일 4:7~21) [2] 2021-05-02 4532
134 성령강림절 성령 공동체의 길 (고전 12:4-13) [2] 2020-05-31 4526
133 대림절 성령과 불 (눅 3:7~18) 2021-12-12 4513
132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501
131 성령강림절 열두 제자 파송 이야기 (막 6:1~13) [2] 2021-07-04 4487
130 부활절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 (요 10:22-30) [5] 2019-05-13 4475
129 사순절 순종과 영원한 구원 (히 5:5~10) [6] 2021-03-21 4401
128 부활절 예수 사랑 안에! (요 15:9~17) [5] 2021-05-09 4383
127 창조절 지혜 & 그 너머 (잠 1:20~33) [3] 2021-09-12 4373
126 주현절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공의 (시 50:1~6) [2] 2021-02-14 4293
125 창조절 놀람의 근거 (막 7:24~37) 2021-09-05 4247
124 창조절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욜 2:2~27) [1] 2021-11-21 4192
123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172
122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씨 (막 4:26~34) [4] 2021-06-13 4172
121 사순절 하나님의 새로운 일 (사 43:16~21) [4] 2022-04-03 4160
120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158
119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149
118 성령강림절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 (아 2:8~13) [1] 2021-08-29 4095
117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071
116 성령강림절 가난한 자의 피난처 (시 14:1~7) [2] 2021-07-25 4038
115 주현절 영광스러운 미래의 생명 (마 17:1-9) 2020-02-23 4037
114 부활절 성찬 예배 공동체 (행 2:42-47) [2] 2020-05-03 4031
113 창조절 욥의 재난 & 욥의 믿음 (욥 1:1, 2:1~10) [1] 2021-10-03 3973
112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19
111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47
110 성령강림절 왕-선지자-그리스도 (막 6:14~29) [1] 2021-07-11 3813
109 성령강림절 왕의 출현 (삼상 8:4~11, 16~20) [1] 2021-06-07 3811
108 성령강림절 예수 십자가와 세계 평화 (엡 2:11~22) [2] 2021-07-18 3796
107 창조절 지혜 그 '너머' (약 3:13~4:3) 2021-09-19 3793
106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9~39) [2] 2021-02-07 3722
105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721
104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51
103 창조절 속죄와 구원 (히 5:1~10) [2] 2021-10-17 3623
102 주현절 하나님 말씀의 성취 (눅 4:14~21) [3] 2022-01-23 3620
101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599
100 성령강림절 만물의 충만-그리스도의 충만 (엡 4:1~16) [3] 2021-08-01 3561
99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49
98 창조절 불행한 서기관 (막 12:38~44) 2021-11-07 3529
97 주현절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 62:1~5) [7] 2022-01-16 3517
96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07
95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62
94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43
93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07
92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400
9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64
»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362
89 주현절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창 45:3~11, 15) [2] 2022-02-20 3352
88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17
87 사순절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2] 2022-03-13 3305
86 사순절 유월절 마지막 식사 (눅 22:14~23) [2] 2022-04-10 3222
85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08
84 사순절 시험받는 예수 (눅 4:1~13) 2022-03-06 3202
83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97
82 주현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2~20) [6] 2022-02-13 3196
81 사순절 목마름의 실체 (사 55:1~9) [4] 2022-03-20 3194
80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84
79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134
78 주현절 첫 제자들의 출가 이야기 (눅 5:1~11) [7] 2022-02-06 3054
77 주현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71:1~6) 2022-01-30 3053
76 사순절 예수의 하나님 (눅 15:1~3, 11b~32) [5] 2022-03-27 3046
7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034
74 주현절 예수 변모 순간 (눅 9:28~36) 2022-02-27 3032
73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25
72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2895
71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57
70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06
69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801
68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763
67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36
66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673
65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60
64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651
63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79
6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47
61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39
60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16
59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86
58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483
57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25
5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04
55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393
54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266
5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2244
52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15
51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158
50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030
49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1966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