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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창 45:3~11, 15)

주현절 조회 수 1743 추천 수 0 2022.02.20 17:46:23
설교보기 : https://youtu.be/SvDa2vDjZEw 
성경본문 : 창세기 45:3~11, 15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45:3~11, 15, 주현 후 일곱째 주일, 2022220

 

 

요셉 이야기

구약성경 39권 중에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오경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경입니다. 모세오경은 창조 이야기부터 유대 민족이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까지의 과정을 다룹니다. 유대 민족의 대하 서사라 불릴만합니다. 여기서 변곡점은 유대 조상들이 가나안에서 애굽의 고센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는 대목입니다.

그 대목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한 인물이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입니다. 요셉 밑으로 베냐민이 있습니다. 요셉과 베냐민은 야곱이 특별히 사랑한 라헬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나머지 열 명은 라헬의 언니인 레아와 라헬의 여종인 빌하와 레아의 여종인 실바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은 배다른 형제들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편애했습니다. 그의 형들이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어느 날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이 양을 키우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동생 베냐민은 어리기에 집에 남았습니다. 형들은 늘 잘난 척하는 요셉을 이 기회에 없애버릴 계획을 짰습니다. 의견이 서로 나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요셉은 애굽을 왕래하는 미디안 대상(隊商)에게 팔렸습니다. 애굽으로 끌려간 요셉은 친위대장 보디발 집의 노예로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서도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안주인에게 성폭력을 시도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고, 감옥에서 궁중 관리들의 꿈을 해몽해주는 바람이 나중에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몽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바로는 요셉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41:40절이 바로의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바로의 꿈에 대한 요셉의 해몽은 앞으로 칠 년 동안 풍년이 들고, 그 뒤로 칠 년 동안 흉년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풍년이 들었을 때 곡식을 값싸게 사들여서 창고에 쟁여놓았습니다. 흉년이 시작되자 곡식을 비싸게 팔 수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곡식을 사러 애굽에 몰려들었습니다. 그 모든 일의 책임자가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과 그의 자녀 손들이 살던 가나안 지역에도 극심한 흉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야곱은 막내 베냐민은 남겨두고 나머지 열 명의 아들들에게 애굽으로 가서 곡식을 사 오라고 시켰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긴 여정 끝에 요셉 앞에 엎드렸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형들인 것을 알아보았으나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만감이 교차했을 겁니다. 형들을 시험합니다. 애굽을 정탐하러 왔을지 모른다는 명분으로 시므온을 감옥에 가두고 나머지 형제들은 곡식을 주어 돌려보냅니다.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오면 시므온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인들을 시켜서 곡식 자루에 곡식만 넣지 않고 형들이 곡식값으로 가져온 돈을 다시 넣게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야곱의 아들들은 그간의 자초지종을 야곱에게 자세하게 전합니다. 자루를 여니 가져갔던 돈이 그대로 나왔습니다. 정탐꾼만이 아니라 이제는 도둑 누명을 더 쓰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흉년이 점점 더 심해지니 어쩔 수 없이 베냐민을 데려가서 곡식을 사 오게 합니다. 일이 어떻게 될까요?

요셉은 결국 동생 베냐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격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여 그 자리를 피해 혼자서 울고 나왔습니다. 요셉은 다시 형들을 시험합니다. 신하를 시켜서 곡식을 주고, 특히 베냐민의 자루에 자신의 은잔을 넣게 합니다. 그들이 길을 떠나자 요셉은 청지기로 그들을 추적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왔습니다. 형들은 다시 요셉에게 돌아갑니다. 요셉은 베냐민만 남겨두고 다른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유다가 나서서 요셉에게 자기 가족에게 옛날부터 일어났던 일들을 다음의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아버지 야곱이 늙어 얻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형은 죽고 베냐민만 남았습니다. 베냐민의 생명과 아버지 야곱의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어서 우리가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늙은 아버지는 죽을 겁니다. 그러니 제가 여기 남아 종이 되게 하시고, 베냐민은 그 형들과 함께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요셉은 감정을 더는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애굽 신하들을 모두 물리치고 형들에게 자신이 요셉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팔았다는 사실로 근심하지 마시라. 하나님이 이때를 위해서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이곳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창 45:8절은 이렇습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섭리 신앙

모세오경이 말하는 하나님 신앙의 요체가 이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요셉이 견딘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열일곱 살로 추정되는 나이에(37:2)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앞에서 짚은 대로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르우벤의 도움으로 목숨은 건졌습니다. 미디안 대상에게 팔렸다는 사실도 죽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부잣집 도련님이 이제 이국땅에서 종이 된 겁니다. 친위대장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도 누명을 쓰고 옥게 갇혔습니다.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그럴 때마다 신세 한탄에 떨어지고 자포자기할 만합니다. 형들을 계속 원망하면서 하나님을 부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모든 고난의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표현했습니다.

고대 유대 민족은 요셉 이야기를 자신들의 운명과 동일시했을 겁니다. 그들도 요셉이 겪은 어려운 일을 겪었습니다. 주변 제국에 의해서 민족 전체가 말살당할 위기도 자주 있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위기는 기원전 587년에 벌어졌습니다. 당대 근동의 패권을 쥐고 있던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초토화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졌고, 다윗 궁은 불탔으며, 많은 사람이 죽고 노예로 팔렸고, 지식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고 자처하던 자신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신앙의 근본이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든지, 아니면 그가 선하지 않거나 능력이 없든지, 또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유대 신학자들은 민중들의 이런 질문에 대답해야만 했습니다. 모세오경은 이런 신학적인 문제의식 가운데서 기록된 문서입니다. 그 대답의 하나가 바로 위에서 읽은 창 45:8절입니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요셉 서사를 통해서 당시 유대 민중들은 신앙적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큰 위로를 받았을 겁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것도 큰 틀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그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섭리도 당연히 선합니다. 지금은 고난의 이유를 다 모르지만,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니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신앙은 은혜롭게 들리지만, 실감하기는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자칫하면 숙명론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숙명론은 일종의 역사 결정론입니다. 인생은 이미 숙명적으로 결정되었기에, 즉 팔자가 그렇게 태어났기에 아무리 몸부림쳐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이런 숙명론에 떨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사주(四柱)를 봅니다. 사주는 집의 네 기둥을 의미하는데, 태어난 (), (), (), ()를 간지(干支)로 계산하여 길흉화복을 점치는 법입니다. 단순히 이런 사주풀이에 머물지 않고 무속적인 의례를 통해서 나쁜 운명을 바꿔보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 정도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벌어지는 문제는 한둘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딸이 사랑하는 남자의 사주를 보고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가 옛날에는 종종 있었습니다.

섭리 신앙은 숙명론과 달리 미래가 결정되지 않고 열렸다고 봅니다. 그 미래를 우리가 좌지우지하지 못하지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미래의 주인이 선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뿐입니다. 자신에게 닥칠 고난을 피하려고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그런 고난까지도 받아들입니다. 자기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바로 요셉에게서 볼 수 있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 섭리 신앙입니다.

인생이 잘 풀릴 때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뒤틀릴 때는 그게 잘 안 됩니다. 성경은 전혀 다른 차원을 말합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시편은 37:1~11, 39~40절입니다. 여기서 39~40절만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까닭이로다.

 

시편 기자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환난 가운데서 피할 요새입니다. 어려울 때 도우시는 분이시고, 악인들에게 박해받는 상황에서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분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 때만 우리는 섭리 신앙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시나요? 그리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사실을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실감하시나요? 이런 시편 기자의 고백이 자신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로 들리나요?

 

임마누엘 신앙

이 이야기를 우리의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해야겠습니다. 서로 처지가 다르니까 젊은이들과 늙은이를 구분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일이 취업 문제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지방에 살기 싫어하는 이유도 제대로 된 일자리가 서울에 비해서 크게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답답한 심정이 이해됩니다. 이런 일상에서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실감하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생각을 조금만 바꿔보면 어떨까요. 일자리의 눈높이를 낮추는 겁니다. 말이 안 될까요?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수도권에서 큰 교회를 맡고 싶어 합니다. 그런 은사가 있는 목사는 그렇게 살아도 됩니다만 모두가 그래야만 행복한 게 아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견디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연봉을 충분히 받는다고 해도 행복하게 살지 못할 겁니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조건에서 살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는다는 사실을 느낄 줄 아는 젊은이라면 대도시에서 잘나가는 친구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겁니다. 예컨대 대보름 달을 보면서 존재 신비를 경험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지구를 처음 방문한 외계인의 심정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상대적인 박탈감에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습니다.

늙은이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일은 노화와 죽음입니다. 노화 현상이 어떤지는 저도 실감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늦가을부터 다음 봄까지 손발이 차갑습니다. 컴퓨터 글씨도 점점 흐릿하게 보입니다. 소화 능력도 떨어졌습니다. 테니스장에서 뛰면 젊었을 때보다 훨씬 빨리 숨이 찹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들도 줄겠지요. 그 속도가 점점 가팔라지면서 죽음을 현실로 느낍니다. 이런 노화 현상을 삶의 완성으로 받아들이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젊은이가 부럽지 않습니다. 왁자지껄 모여서 파티를 열면서 지내는 삶이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거꾸로, 늙었는데도 삶의 열정이 강력하면 그것도 이상합니다. 어머니 자궁에서 난자와 정자의 결합으로 시작한 생명체가 살 만큼 살고 다시 그 씨앗과 비슷한 상태로 돌아가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고요이고, 어둠이며, 적막일 수도 있고, 궁극적으로 영원한 안식입니다. 이 영원한 안식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증거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노화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우리의 삶 전 과정에 침투하는 겁니다. 동의가 되나요? 거의 막장드라마처럼 돌아가는 대한민국에서는 너무 한가한 말인가요?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산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한가하게 산다는 뜻입니다. 한가하다는 말은 바쁘지 않다는 말이잖아요.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바쁠 수가 있겠어요. 보세요. 여기 부모와 함께 놀이공원에 온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부모가 옆에 있기에 열심히 놀이에만 심취하면 됩니다. 그 아이는 입장권을 어디서 사는지, 점심을 어디서 먹을지, 돌아갈 때 차가 밀리지 않을지 걱정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부모와 함께 있기만 하면 어려운 일이 생겨도 편안합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애굽으로 끌려왔던 요셉처럼 결국에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다 늙어서 죽을 때가 되었다면 모를까 지금 한창 젊은데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 운운하면서 살 수 있냐고, 반문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집주인이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하는데, 돈이 부족합니다. 지금도 이미 빚이 있습니다. 이런 고단한 인생살이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믿을 수 있을까요? 물론 먹고 사는 복지 문제는 사회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특별히 가난한 분들에게는 무이자에 가까운 돈을 빌려주는 세상이 되어야겠지요. 서민들을 위해서 값싼 아파트를 공급해야겠지요. 고급 아파트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인근에 서민용 장기 임대 아파트를 짓지 못하게 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이런 복지 문제를 얼마나 실효성 있게 해결할 수 있는지는 전문가들이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겠으나, 힘들더라도 방향만은 분명하게 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섭리 신앙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실제적인 이유는 절대적인 빈곤 문제보다, 우리나라는 경제적인 차원에서 이미 선진국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기도 해서, 개인의 영성이 크게 떨어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무리 복지가 잘 된 나라에서도 영성이 빈곤한 사람은 삶을 제대로 살아낼 수 없습니다. 허상이 아니라 실질적인(real) 삶을 대면할 줄 아는 능력이 바로 영성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세상 공교육도 영성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과 문학은 더욱 그렇습니다. 정치도 사실은 영적이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물질 만능, 성장 만능, 경쟁 만능이 아니라 사랑과 연대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히 영적인 차원이 아니겠습니까. 이게 죄 많은 인간이 사는 이 현실에서 가능할까요?

저는 이 대목에서 여러분에게 놀라운 사실을 전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뜻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에(1:23) 딱 맞아떨어지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믿어지십니까? 그래서 그가 누군지, 그에게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더 깊이 알고 싶어집니까? 관심이 없으신가요? 벌이 꿀을 찾듯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면, 여러분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놓였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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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진리의심

March 02, 2022
*.214.116.154

섭리신앙은

내 미래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숙명론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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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02, 2022
*.137.91.132

예, 숙명론과 섭리론이 비슷하게 느끼지겠으나 실제로는 다릅니다.

숙명론은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는 관점이라면 

섭리론은 미래가 열려있다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숙명론자들은 소극적이고 도피적으로 살지만

섭리론자들은 적극적이고 저항적으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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