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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성령강림절 조회 수 1381 추천 수 0 2022.07.25 08:09:51
설교보기 : https://youtu.be/K9NA_QqvFjk 
성경본문 : 누가복음 11:1~13 

성령을 주시리!

11:1~13, 성령강림 후 일곱째 주일, 2022724

 

 

11:1~13 우리말 성경 개역개정에는 기도를 가르치시다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두 단락으로 구분됩니다. 첫 단락은 1~4절로 주기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다는 소문을 들은 예수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기도를 배우고 싶다고 말하자, 예수님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주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단락은 5~13절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비유 방식으로 이어갑니다. 이웃에 사는 친구가 한밤중에 찾아와 손님 접대용으로 빵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합니다.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려면 이미 잠든 가족이 잠을 깨야 하니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도 친구가 간청하면 들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비유가 끝나고 우리가 잘 아는 경구가 나옵니다. 9절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요즘 표현으로 오지게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의미로 이 말씀을 우리는 받아들입니다. 한두 번 기도하다가 실망하지 말고 이뤄질 때까지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겁니다. 이를 보통 강청 기도라고도 합니다. 여기에 더 부합하는 이야기가 눅 18:1절 이하에 비유로 나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과부가 원한을 풀어달라고 재판장에게 매달렸습니다. 재판장은 자기가 과부에게 시달림을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과부의 원한을 풀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의 본질

기도에 관한 이야기는 신구약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기도 없이 신앙생활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예배에도 여러 형식의 기도가 나옵니다. 수도원 생활은 기도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문필가와 영성가와 신학자는 모두 기도문을 썼습니다. 저도 기도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소장하고 있고, 실제로 매일 기도하라(201361)는 기도문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대구 샘터교회 창립 10주년 기념 도서였습니다. 매주 주보를 작성하면서 짧은 기도문을 씁니다. 요즘 수요 성경공부 시간에 요르크 칭크의 기도를 어떻게 드릴까요?2권에 나오는 기도에 관한 글을 한 편씩 읽고 설명합니다. 그 이전에는 어거스틴의 기도를 읽기도 했습니다. 매월 첫 주일 오후 2시에 열리는 신학공부 모임에서 칼 라너의 기도의 절실함과 그 축복에 대하여를 강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하십니까? 기도의 필요성을 굳이 느끼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 이유도 여러 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성실하게 살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도한다고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하고 거칠게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에 매달리는 사람 치고 제대로 사는 사람을 못 봤다거나, 기도는 어딘가 정신적으로 약한 인간이 행하는 종교의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일종의 기도 냉소주의에 떨어지는 일은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다.

거꾸로 기도 열광주의에 떨어진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마치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듯이 기도하는 이들이 그들입니다. ‘통성기도라는 말이나 합심기도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바울이 고전 14장에서 그런 방식으로 기도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도, 한국교회에서는 그게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집단 심리 요법으로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기는 합니다. 이처럼 기도 냉소주의와 기도 열광주의로 떨어지는 이유는 기도에 대한 오해에 있습니다. 그 오해는 기도를 통해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기도를 주식투자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구원 사건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친밀하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친밀하지 못하면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 나온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말씀에서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구한다고 모든 걸 얻는 건 분명히 아니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는 건 분명합니다. 어린 자식은 부모에게 구하는 게 많습니다. 자기 부모가 아닌 사람에게는 구하지도 않습니다. 어린 자식과 부모의 관계가 밀접할 때만 이런 대화가 가능하듯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밀접할 때만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분에게 자기의 중심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분이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숨길 수밖에 없는 속사정도 말할 수 있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사랑에 깊이 빠져든 연인처럼 두 사람만의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는 겁니다. 현대인에게 많이 나타나는 우울증 같은 정신과 문제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깊어지면 치유되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장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은 받아야겠지만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무엇인지를 말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느끼지 않으면 안 되는 생명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람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보십시오. 자녀와 부모가 인격적인 관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일도 간혹 벌어집니다. 자녀를 소유로 여긴다면 어떻게 인격적인 관계가 가능하겠습니까? 부모를 자기와 똑같이 인간의 실존적인 무게를 감당한 한 인간으로 대하지 못하는 자녀가 어떻게 부모와 성숙한 인격적인 관계를 맺겠습니까? 인격적이라는 말을 쉽게 표현하면, 말이 서로 통한다는 뜻입니다. 시인들은 사물과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소소한 사물이 모두 자기에게 말을 거는 경험이 발생합니다. 곽재구 시인의 시 수국마지막 행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열일곱 우리 엄마/ 수국에 입 맞추네이런 경험이 없다면 삶은 정말 지루하고 무료해질 겁니다. 젊어서는 그런대로 버텨내겠으나 늙으면 점점 더 자기 동굴 안으로 빠져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십니까?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없어도 괜찮을 정도로 그분과 긴밀히 대화하십니까? 현대인은 그런 경험이 없거나 크게 부족하니까 수다 떨기수준의 대화까지 그리워하는 건 아닐까요? 너무 목마르니까 오염된 물을 마시듯이 말입니다. 가끔 수다 떨기도 필요하긴 합니다.

 

성령을 주시리

실제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깊어지는 삶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자칫하면 무조건 하나님께 떼를 쓰듯이 기도할 뿐이지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로는 들어가지 못하는 일도, 또는 숙제하듯이 기도하면서 자기만족에 떨어지는 일도 흔합니다. 스토킹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끝까지 읽다가 색다른 문장이 거기 놓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이야기 후반부에서 자식과 부모의 관계를 비유로 들었습니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주거나 알을 달라는 자식에게 전갈을 주는 부모가 없듯이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 갑자기 성령이 나옵니다. 13절 전체를 읽겠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병행구인 마 7:7~12에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문장만 나오고 성령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기자가 마태복음과 같은 전승을 받아서 누가복음 공동체에 맞도록 성령이라는 표현을 보충한 겁니다. 어떤 후대 전승에서 본문 2절에 나오는 나라가 임하오시며라는 기도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로 바뀐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Veni Sancte Spiritus! 그들은 성령이 바로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분이 성령을 주신다면 모든 것을, 즉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거와 같습니다.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11:14~26)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 당신은 바알세불의 힘을 의지하는 거 아니냐, 하는 비판에 대해서 예수님은 바알세불의 힘으로 어떻게 악한 귀신을 내어쫓겠느냐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손을, 하나님의 성령(12:28)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응수합니다. 예수님의 반론 마지막 단락에 재미있는 비유가 나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다가 다시 그 사람에게 와서 보니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살았다고 합니다. 정곡을 찌르는 비유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착하게 살기만 하면, 또는 정의롭게 살면 충분하지 예수 믿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과연 그럴까요? 착하게만 살면 공허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그는 이전보다 더 악한 영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본질에서 착할 수가 없고, 정의로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조금 더 착하거나 정의로울 뿐입니다. 그리스도교 교리에 있는 원죄가 그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비우고 착하게 사는 게 아니라 마음에 성령을 채우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기록한 이 사람은 오늘 본문의 기도에 관한 전승 마지막 단락에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첨부한 것입니다.

성령을 주신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아야겠지요. 13절에 나오는 성령이라는 단어와 24절에 나오는 더러운 귀신이라는 단어가 우리말로는 크게 달라 보이지만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구조가 비슷합니다. 두 단어 모두 핵심은 프뉴마입니다. 성령은 프뉴마에 하기오스’(holy, pure)가 결합하였고, 더러운 귀신에는 아카다르토스’(unclean)가 결합하였습니다. 여기서 프뉴마는 영, 공기, , 기운 등등의 뜻이 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실감할 수 있는 현상은 아기 출생입니다. 어머니 자궁에서 나올 때 아이는 숨을 쉬지 않습니다. 자궁 안에서는 숨을 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와의 연결이 끝나고 자기 혼자 살아가려면 숨을 스스로 쉬어야 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숨을 쉬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을 불러오거나 떠나보내는 현상인 숨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프뉴마라고 불렀습니다. 거룩한 프뉴마인 성령은 사람을 살리는 힘입니다.

성령보다는 돈이 우리를 살리는 힘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니면 취미활동에서 자신은 살맛을, 사는 재미를 느낀다고 말합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고급 승용차에 목숨을 겁니다. 옛날에는 하우스푸어라는 말이 있었는데, 요즘은 카푸어라는 말이 있더군요. 자기 수입을 승용차 운영에 대부분 쏟아붓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어떤 이들은 백화점 순례를 손에 꼽습니다. 외모에 삶의 모든 에너지를 쏟기도 합니다. 책 읽기에서 삶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정원 가꾸기에 자기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또는 정의 평화 노동해방 운동을 삶의 궁극적인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습니다. 그렇게 일상을 열심히 사는 건 중요합니다. 맛집 찾아가는 재미도 있어야지요. 음악회도 찾아가고요. 악기를 다룰 수 있다면 더 좋겠지요. 친구들과 카페에서 담소하는 즐거움도 쏠쏠합니다. 이처럼 삶을 충실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성경이 말하는 성령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의 죽음

물론입니다. 성령만이 우리를 생명 충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아무리 재미있어도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 영혼의 심연은 그런 재미있는 그 무엇으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집안을 아무리 예쁘게 꾸며도 작은 재미는 느끼겠으나 충만한 만족은 안 됩니다. 꿈에 그리던 세계 일주를 했다고 합시다. 그 과정에서 얻은 즐거움은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압니다. 다만 외면할 뿐입니다. 외면한다고 해서 거기서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꿩이 사냥개에게 쫓기다가 머리를 눈더미에 파묻고 현실을 외면한다고 해서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실존이 불안한 겁니다. 그 사실을 반클라이번 피아노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은 임윤찬 군은 이미 잘 알고 있었나 봅니다. 그는 피아노 콩쿠르에서 대상 받는 일보다 산속에 들어가서 혼자 피아노를 치면서 사는 게 훨씬 좋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즐거움에 만족하지 못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를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엄청나게 즐거운 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그는 혼자 숨을 쉬어야 하고, 혼자서 걸어야 하고, 혼자서 자리에 누워야 합니다. 결국은 혼자서 죽음의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의식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의식한다고 해서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의식하는 사람이 의식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삶을 훨씬 더 풍요롭게 누릴 겁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화두로 삼았다고 합니다.

저는 이제 1년 반이 지나면 공식적으로 담임 목사직에서 내려옵니다. 소위 은퇴입니다. 목사직 은퇴가 저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은퇴는 삶의 방식이 조금 달라진 것뿐입니다. 비유적으로 이전에는 의자에 앉아서 밥을 먹다가 이제는 바닥에 앉아서 밥을 먹는 것뿐입니다. 이전에는 승용차를 타다가 이제는 자전거를 타거나 걷는 겁니다. 은퇴 전이나 후나 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죽음 준비입니다.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고백을 흉내라도 낼 준비를 하는 겁니다. 저만이 아니라 여러분도, 지금 젊은 분도 모두 죽음 앞에 서야 합니다. 준비되셨나요? 두려우신가요? 생각하기 싫으신가요?

그리스도인들은 이 죽음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로 믿는 예수님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여기에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하나님도 죽을 수 있으니 피조물인 우리가 죽는 건 당연합니다. 2) 하나님도 죽음을 경험했으니 죽음이 더는 저주가 아닙니다. 예수의 부활 이후로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이미 극복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았던 담이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가까워졌기에 우리는 자녀가 부모를 대하듯이 안심하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이 세상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로 삶이 가끔 답답하겠으나, 근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생명 충만에 들어간 것입니다. 노래하고 춤을 추듯이, 기쁘고 자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영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성령의 오심(주심)을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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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바람소리

July 30, 2022
*.201.8.123

목사님, 최근에 목사님께서 쓰신 "목사공부"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제가 평신도이긴 하지만 무척 재밌게 읽었고 많은 것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 죽음, 구원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저도 기독교인의 궁극적인 관심은 죽음과 구원이라고 생각하기에 더 관심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기회가 되셔서 목사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 더 넓고 깊게 책을 쓰신다면 궁극에 대한 관심은 있으나 아직 제대로 정리해서 알지 못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좋은 설교로 예수를 더 알게 해 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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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30, 2022
*.201.3.230

바람소리 님, 졸저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왕 읽으시는 김에

'목사공부' 연작으로 나온 '목사구원'까지 읽어보세요. ㅎㅎ

거기서 죽음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실지 모릅니다.

내일이 7월31일, 7월 마지막 주일이네요.

복된 주일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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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예베슈

July 31, 2022
*.98.139.179

시차상 한주 전 설교로 예배를 드리게 됐습니다. 1년 반 뒤 은퇴하시기 전에 한국의 샘터교회에서 예배드리고 그 곳에서 정목사님을 '대면' 하기를 정말 고대합니다. 이 공간에서의 만남은 사실상...... 코로나 훨씬 이전부터 그러니까 '뉴노말' 이라는 개념이 성립되기도 전에 전 '영적 뉴노말' 을 훨씬 빨리 경험했던 일종의 '얼리 어댑터' 이었던 것이지요. 오늘의 설교로 기도에 대한 한가지 부담을 덜게 되었습니다. 새벽기도, 통성기도, 합심기도, 방언기도로 성장했던 그 피곤함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영적 조기교육의 뿌리가 사실 많이 사라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그런 기도의 장점을 살리면서 진리의 자유함을 누리려하는 것이 저의 인생 마지막 반쪽의 투쟁이 되어 버렸지요. 오늘 설교가 자유함의 근거가 되면서 제 기도가 업그레이드 되어감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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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01, 2022
*.201.3.230

잘 지내시지요? 

예베슈 님이 2006년에 다비안이 되었으니, 왕고참 회원이십니다.

불원간 대구샘터교회를 방문하신다면, 대환영입니다.

미국에서 한국까지 나오신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긴 하나

겸사겸사 일을 묶어서 한번 시도해보세요.

할 이야기도 많겠네요.

'영적 조기교육'이라는 표현에 넘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예베슈 님은 인문학자의 길을 가도 좋았을 겁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과(의학?) 계통 과목을 강의하시지요?

저는 1년 반 뒤에 은퇴하지만, 모든 걸 끝내는 건 아닙니다.

예베슈 님처럼 제가 인도하는 예배와 설교에서 '자유'를 얻는 분들이 계시고,

또 그것이 저의 은사이면서 소명이기도 하고, 영적 수행이라는 점에서

온라인으로나마 예배는 계속할 예정입니다. 

대구나 경북에 사는 대구성서아카데미 회원 중에서 원하는 분들, 

대략 15명 내외가 저희 집에 모여서 예배드리고,(숲속 예배)

그걸 영상으로 만들어서 유튜브로 보내는 방식입니다.

많은 인원은 모일 수도 없으니까, 선착순으로(ㅎㅎ) 끊을까 합니다.

재미있을 거 같습니다. 기대가 됩니다.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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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1653
27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1623
26 주현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2~20) [6] 2022-02-13 1620
25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1598
2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1592
23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1578
2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1548
2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1496
20 사순절 시험받는 예수 (눅 4:1~13) 2022-03-06 1495
19 주현절 예수 변모 순간 (눅 9:28~36) 2022-02-27 1448
18 사순절 예수의 하나님 (눅 15:1~3, 11b~32) [5] 2022-03-27 1424
17 사순절 하나님의 새로운 일 (사 43:16~21) [4] 2022-04-03 1410
»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4] 2022-07-25 1381
1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1368
14 사순절 유월절 마지막 식사 (눅 22:14~23) [2] 2022-04-10 1343
13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1259
12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1257
1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1218
10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1180
9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1107
8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1072
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991
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936
5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845
4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767
3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741
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610
1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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