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8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주현절 조회 수 2649 추천 수 0 2023.02.19 18:55:34
설교보기 : https://youtu.be/jx63b0MXS20 
성경본문 : 마태복음 17:1~8 

예수는 빛이다

17:1~8, 예수 변모 주일, 2023219

 

 

예수께서 수제자로 알려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거기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모습이 변형되었습니다.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당시로부터 각각 12백 년 전과 8백 년 전 사람들이니까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엉뚱한 제안을 합니다. 예수와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초막 세 채를 만들고 싶다고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가타부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순간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고, 구름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 소리를 듣고 제자들은 크게 두려워서 엎드렸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면서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이르셨습니다. 제자들이 정신을 차리자 지금까지 보았던 모든 장면이 사라졌습니다. 예수의 모습도 원상회복되었고, 모세와 엘리야도 보이지 않게 되었고, 빛나는 구름도 없어졌습니다.

 

예수 변모 전승

이런 현상은 실제로 일어난 것일까요? 아니면 제자들이 헛것을 본 것일까요?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이 각각 이 이야기를 자세하게 전하는 걸 보면 당시 모든 교회가 이 이야기를 중요하게 여겼나 봅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소재로 사용된 내용을 보충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세 가지입니다.

1) 먼저 본문에 나오는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실질적인 첫 지도자라 할 모세는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경험한 인물입니다. 오늘 성서일과(lectionary) 첫째 말씀인 출 24:12~18에는 모세가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기 위해서 시내 산에 올라가서 사십 낮과 밤을 지낸다는 보도가 나옵니다. 시내 산 위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맹렬하게 타는 불길 같았다고 합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오는 장면은 한참 지난 출 34:29~35절에 나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모세는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려야만 했습니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한 인물로 전해집니다. 열왕기하 2장에 따르면 엘리야는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회오리바람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자 엘리사는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들고 돌아와서 엘리야의 뒤를 이어 선지자 역할을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 두 인물 모두 당시 사람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영적인 카리스마가 막강한, 거의 전설적인 인물들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어떤 분으로 인식했는지를 이런 이야기에서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2) 예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는 본문의 표현은 다음과 같은 바울의 진술과 맥이 닿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실제의 얼굴이라기보다는 그의 인격과 운명 전체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께서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 나라이고,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생명이며, 하나님의 창조이자 완성입니다. 이는 곧 예수께서는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와 똑같이 지금 변화 산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이 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3)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라는 소리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 세례받으실 때 일어났던 현상입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올 때 다음과 같은 소리가 하늘에서 울렸다고 마태복음이 보도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3:17) 두 문장이 헬라어로도 똑같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생명 사건이 그를 통해서 발생했다는 뜻이고,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셨다는 말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는 뜻입니다. 위에 설명한 세 가지 이야기를 배경으로 놓고 오늘 변화 산에서 일어난 예수의 변모 사건을 읽으면 입체적으로 들릴 겁니다.

변화 산 현상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고 질문하실 분들이 계신가요? 그런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만약 그 자리에 제자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을 겁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빛과 소리 현상으로 만났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바울과 동행한 이들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었습니다. 궁극적인 사건은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신문 기자가 사진으로 찍거나 뉴스 시간에 보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볼 눈이 있어야 보고, 들을 귀가 있어야 듣습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며칠만 있으면 초등학교 입학식이 있을 겁니다. 입학생을 둔 어머니들은 긴장하겠지요. 이십 명 학생들이 교실에 앉아있는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어떤 어머니가 창문으로 그 교실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흐릿하게 보이고 자기 아이만 빛처럼 또렷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 그 아이는 어머니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어머니가 아니면 그런 경험은 불가능합니다. 신문 기자가 어머니의 이런 경험을 정상이 아니라고, 저 여자는 뭔가에 홀려서 잘못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작년 연말에 벌어진 10.29 이태원 참사를 당한 가정의 부모들의 심정을 누가 똑같이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시인과 음악가와 화가들도 평범한 일상에서 아주 특별하고 궁극적인 것을 느끼고 경험합니다.

 

빛 경험

변화 산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으로 경험했다는 이 이야기에서 빛은 생명 사건을 가리키는 메타포입니다. 빛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따르면 가장 먼저 창조된 것은 빛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1:3) 창조의 시작이 빛인 이유는 빛이 있어야만 세상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으면 무엇이 존재하더라도 인식할 수 없기에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빛이 창조되기 전의 세상을 창세기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1:2) 창조 전승에서 재미있는 대목은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들기 전에 빛을 먼저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빛은 단순히 태양에서 나오는 물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더 본질적이고 시원적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고,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근원이 바로 빛입니다. 만물의 존재 근원입니다. 그걸 여러분은 느껴보신 적이 있나요?

제자들이 예수를 빛으로 경험했다는 말은 예수를 통해서 세상과 생명을 참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창조와 그 완성과 모든 생명의 비밀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경험한 겁니다. 그런 새로운 경험을 가리켜서 그리스도교 교리는 죄와 죽음에서 의와 생명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표현합니다. 그런 경험의 정점이 곧 부활이고, 영생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기 변화 산에서 머무는 게 좋으니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발상을 저는 순전히 종교적인 감수성이나 문학적 수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절대적이고 시원적인 세계를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진솔한 고백입니다. 그는 예수를 통해서 세상을 빛으로 경험했기에 옛날 사람인 모세와 엘리야도 지금 여기서 현실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일상 경험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간 겁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경험입니다. 자기 실존이 새털처럼 가벼워지는 경험입니다. 생명을 이미 얻었기에, 또는 구원받았기에 잘나야 한다는 욕망이 없고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절대적인 자유와 안식과 평화의 깊이로 들어간 겁니다. 자기를 초월하는 빛 경험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20)

베드로를 비롯한 세 명 제자들의 빛 경험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그리고 실질적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저에게 여러분은 빛입니다. 여러분도 서로에게 빛입니다. “만물은 빛입니다.” 우선 물리적 현상으로도 이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것은 반사된 빛을 본다는 뜻입니다. 지금 보는 순간에 이미 그 대상은 없을 수도 있으나 빛은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우리가 밤하늘에서 별빛을 볼 때 어떤 별은 이미 사라진 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물리적인 빛 경험보다 더 본질적인 빛 경험은 존재하는 것들의 신비에 대한 경험입니다. 여기 연필 한 자루가 있다고 합시다. 꽃 한 송이라도 좋습니다. 그것이 이 순간에 그 자리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정말 엄청난 사건입니다. 지구 나이 45억 년 과정에서 한 찰나에 불과한 이 순간에 어떤 것을 보고 느끼고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 자체가 우주론적 사건입니다. 그게 빛 경험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신비를 경험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 반지하 예배당에서 적은 숫자의 교우들이 모여서, 일부는 온라인으로 예배드립니다. 이게 얼마나 특별한 현상인지를 아는 사람은 압니다. 그런 사람은 예배를 드리는 동안 부르는 찬송가가 즐겁고, 기도 소리가 은혜롭고, 함께 예배하는 교우들이 사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서로 잘해주고 싶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코이노니아가 일어납니다. 그런 경험이 빛 경험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과 세상을 빛으로 경험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이 강요하거나 유혹하는 삶의 방식에 너무 오래 길들었기 때문입니다. 길듦에서 벗어나서 빛을 경험하기에는 세상살이가 너무 고달프기도 하고, 너무 매력적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게 다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세련되기도 하고 합리적이기도 하고 그럴듯해 보이기도 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보았을 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정도로 탐스러웠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단 마음이 그렇게 쏠리면 에덴동산의 다른 실과는 얼마든지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기억나지 않는 법입니다. 기억나더라도 잔소리 정도로 들리겠지요.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그런 세상의 유혹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기는 해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기는 어렵습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나 몸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만큼 삶과 세상을 빛으로 경험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세상에 길들지 않았다고 해도, 그래서 우리 영혼이 생명의 빛을 경험했어도 우리가 여전히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한 늘 빛만 보고, 또는 빛에 휩싸여서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 일행은 산 아래로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그 산 아래가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곳에는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와 그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이를 고치기 위해서 예수를 찾아왔으나 예수는 산에 올라갔고 산 아래에 남은 제자들은 아무런 도움이 못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간질에 걸린 아이가 고통당하는 세상이고,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제자들과 사람들이 모여서 말만 많이 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현실을 나 몰라라 하고, 변화 산 위에 초막을 짓고 영적으로 우아하게만 지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간질 걸린 세상에서 각자의 몫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우선 필요한 일은 삶과 세상을 빛으로, 완전히 새롭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빛이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우리 모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미 빛을 찾아서 나아가는 중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을 찾으시나요? 일종의 빛을 찾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세상이 무지갯빛으로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학문에서 빛을 찾는 사람도 있고, 예술이나 문학에서 빛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면 그게 일종의 빛입니다. 좋은 겁니다. 모든 그렇게 열심히 살았으면 합니다.

문제는 빛이라고 생각해서 찾았는데, 그게 가짜 빛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 악마가 와서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의 모든 영광을 주겠다고 약속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 영광으로 사람들을 잘살게 해주고 자기는 정치적으로 거물이 될 수 있다면, 마다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겁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에 로마 황제 제도가 그걸 대표합니다. 황제는 태양의 아들입니다. 스스로 세상을 밝히는 빛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황제는 식민지 곳곳에 황제상을 만들어놓고 사람들로 거기에 절하게 했습니다. 자신을 빛이라고 여긴 겁니다. 민중들은 거기에 혹할 수 있습니다. 21세기에도 자신을 빛이라고 선전하는 사람과 체제와 사상은 많습니다. 현대인들이 지금 어디에 마음을 빼앗기고 사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다른 빛을 찾았습니다.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빛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경험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자기의 운명 전체로 증명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존재였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제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보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한 유대인 젊은이의 모습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으로, 창조의 근원(아르케)으로 보였습니다. 빛으로 변모된 예수입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오면, 그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였습니다. 바울이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과 세상을 빛으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경험은 사실 무척 두려운 일입니다. 생명과 존재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먼저 그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의 제자로 살기만 하면 됩니다. 인생살이는 주님께 맡기고 빛이신 예수와 하나 되는 길을 우리 함께 걸어갑시다.


profile

[레벨:17]김사관

February 19, 2023
*.196.228.65

언제부턴가 사순절로 가는 길목에 변모주일을 지키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목사님의 변화산 설교 말씀이 저를 미래 생명으로 충만하게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은 잘 변화하지 않는다'란 말 따위엔 별로 신경쓰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빛 되신 주님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February 20, 2023
*.157.223.56

'빛 되신 주님'을 우리가 영혼 충만하게 받아들인다면 

세상의 그 어떤 일로도 실망하지 않고 

그 어떤 일로도 '오버'하지 않을 수 있겠지요.

선승 불교에서는 세상을 꽃이라고 하더군요.

그들이 말하는 꽃이 빛과 같은 의미 아니겠습니까.

profile

[레벨:8]소유와존재

February 23, 2023
*.254.11.100

"그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과 세상을 빛으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경험은 사실 무척 두려운 일입니다. 생명과 존재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먼저 그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의 제자로 살기만 하면 됩니다. 인생살이는 주님께 맡기고 빛이신 예수와 하나 되는 길을 우리 함께 걸어갑시다"


불안은 무언가를 창조하려는 시선에서 태어난다. 그렇게 태어난 불안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우리의 정신을 미래의 어느 순간으로 이동시켜 현실과 미래를 동시에 생각하게 만든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대비하게 만들고, 아직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찾아내게 돕는다.

 

나는 창조를 위해 불안을 즐긴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February 23, 2023
*.157.223.56

소유와존재 님이 불안 개념에 대한 어떤 철학자의 글을 인용하신 거 같은데,

누군가요? 하이덱거, 니이체, 키에르케고르...?

오늘밤 초승달이 장난이 아니게 멋진데,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52
148 성령강림절 살아계신 하나님 (호 1:2-10) [4] 2019-07-28 4851
147 주현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7] 2020-01-19 4777
146 부활절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 (시 1:1~6) [8] 2021-05-16 4758
145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5] 2020-08-23 4715
14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714
143 성령강림절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 6:35, 41~51) [3] 2021-08-08 4697
142 주현절 성령 받음이란? (행 8:14~17) [2] 2022-01-09 4657
141 성령강림절 전투하는 교회 (엡 6:10~20) [2] 2021-08-22 4642
140 부활절 예수를 '믿는 자' (요 20:19~31) [1] 2022-04-24 4637
139 주현절 세상의 외형 (고전 7:29-31) 2021-01-24 4632
138 성탄절 그리스도의 평화 & 그리스도의 말씀 (골 3:12~17) [3] 2021-12-26 4599
137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556
136 성령강림절 "딸아!" (막 5:25~34) [4] 2021-06-27 4536
135 부활절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 (요일 4:7~21) [2] 2021-05-02 4524
134 성령강림절 성령 공동체의 길 (고전 12:4-13) [2] 2020-05-31 4519
133 대림절 성령과 불 (눅 3:7~18) 2021-12-12 4511
132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496
131 성령강림절 열두 제자 파송 이야기 (막 6:1~13) [2] 2021-07-04 4481
130 부활절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 (요 10:22-30) [5] 2019-05-13 4469
129 사순절 순종과 영원한 구원 (히 5:5~10) [6] 2021-03-21 4394
128 부활절 예수 사랑 안에! (요 15:9~17) [5] 2021-05-09 4373
127 창조절 지혜 & 그 너머 (잠 1:20~33) [3] 2021-09-12 4361
126 주현절 하나님의 빛, 하나님의 공의 (시 50:1~6) [2] 2021-02-14 4287
125 창조절 놀람의 근거 (막 7:24~37) 2021-09-05 4240
124 창조절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욜 2:2~27) [1] 2021-11-21 4184
123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4165
122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씨 (막 4:26~34) [4] 2021-06-13 4164
121 사순절 하나님의 새로운 일 (사 43:16~21) [4] 2022-04-03 4159
120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154
119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4145
118 성령강림절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 (아 2:8~13) [1] 2021-08-29 4086
117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066
116 주현절 영광스러운 미래의 생명 (마 17:1-9) 2020-02-23 4032
115 성령강림절 가난한 자의 피난처 (시 14:1~7) [2] 2021-07-25 4030
114 부활절 성찬 예배 공동체 (행 2:42-47) [2] 2020-05-03 4021
113 창조절 욥의 재난 & 욥의 믿음 (욥 1:1, 2:1~10) [1] 2021-10-03 3968
112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914
111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847
110 성령강림절 왕-선지자-그리스도 (막 6:14~29) [1] 2021-07-11 3803
109 성령강림절 왕의 출현 (삼상 8:4~11, 16~20) [1] 2021-06-07 3801
108 성령강림절 예수 십자가와 세계 평화 (엡 2:11~22) [2] 2021-07-18 3790
107 창조절 지혜 그 '너머' (약 3:13~4:3) 2021-09-19 3785
106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717
105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9~39) [2] 2021-02-07 3712
104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645
103 창조절 속죄와 구원 (히 5:1~10) [2] 2021-10-17 3621
102 주현절 하나님 말씀의 성취 (눅 4:14~21) [3] 2022-01-23 3618
101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595
100 성령강림절 만물의 충만-그리스도의 충만 (엡 4:1~16) [3] 2021-08-01 3554
99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546
98 창조절 불행한 서기관 (막 12:38~44) 2021-11-07 3523
97 주현절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 62:1~5) [7] 2022-01-16 3513
96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502
95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459
94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439
93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406
92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396
9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61
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358
89 주현절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창 45:3~11, 15) [2] 2022-02-20 3349
88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312
87 사순절 영광의 몸으로! (빌 3:17~4:1) [2] 2022-03-13 3303
86 사순절 유월절 마지막 식사 (눅 22:14~23) [2] 2022-04-10 3217
85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205
84 사순절 시험받는 예수 (눅 4:1~13) 2022-03-06 3197
83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94
82 사순절 목마름의 실체 (사 55:1~9) [4] 2022-03-20 3185
81 주현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2~20) [6] 2022-02-13 3181
80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80
79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3130
78 주현절 첫 제자들의 출가 이야기 (눅 5:1~11) [7] 2022-02-06 3050
77 주현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71:1~6) 2022-01-30 3050
76 사순절 예수의 하나님 (눅 15:1~3, 11b~32) [5] 2022-03-27 3044
7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3030
74 주현절 예수 변모 순간 (눅 9:28~36) 2022-02-27 3026
73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920
72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2889
71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851
70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805
69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2799
68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755
67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727
66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660
65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53
»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649
63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74
6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541
61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536
60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513
59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482
5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76
57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421
5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401
55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389
54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2251
5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2244
52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2208
51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2156
50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2023
49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1965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