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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이 답이다 (벧전 5:6-11)

부활절 조회 수 14742 추천 수 0 2011.06.07 22: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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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베드로전서 5:6-11 

하나님의 영광이 답이다

베드로전서 5:6-11, 부활절 일곱째 주일, 2011년 6월5일

     고난의 문제

     베드로의 편지는 전체적으로 고난당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예컨대 벧전 3:1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며” 이 구절은 그들에게 고난, 두려움, 근심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벧전 4:1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오늘 본문은 그것을 더 노골적으로 표현합니다. 8b절은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로 다니면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고, 9b절은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고난을 일상의 삶으로 경험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향해서 베드로는 지금 영적인 아버지의 심정으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난은 세상살이 자체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돈이 없고, 취업이 안 되고, 배신당하고, 아프고,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겪게 되는 고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예수를 믿으나 믿지 않으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가오는 것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목적이 이런 어려운 세상살이를 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세속적인 욕망을 믿음이라는 명분으로 실현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일상 문제까지 해결된다는 논리의 삼박자 축복은 한국교회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모두 해결해준다는 뜻으로 오해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당시 유대 종교를 가리킵니다. 종교적인 율법이 삶의 짐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일상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신앙을 통해서 일상의 문제가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이지 일상을 자기의 욕망대로 바꿀 수 있다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복이라고 할 수 없고, 견디기 힘든 시련이 반복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시인의 정체성은 좋은 시를 쓰는데 있지 돈을 잘 버는 데 있는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합니다. 좋은 시를 많이 써서 돈도 벌면 좋겠지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인은 돈 버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않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말하는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이 사실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눈엣가시와 비슷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을 절대화하던 유대인들은 그것을 상대화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절대화하던 그리스도인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지중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무식쟁이, 또는 무신론자로 간주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신으로 믿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게 말이 안 됐습니다. 로마의 여러 신화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로마 헬라 신화에 나오는 여러 신의 하나로 주장했다면 로마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좋았을 겁니다. 그리스도교는 그걸 거부했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에게만 붙일 수 있는 ‘퀴리오스’, 즉 ‘주’라는 단어를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붙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이런 신앙은 로마의 황제 숭배와 완전히 대립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공공기관에 세워놓은 황제 신상에 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무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외에 여러 가지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았고, 때로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당시의 권력이나 시대정신을 거부했다는 뜻입니다. 마치 지금 여호와의 증인 교도들이 군복무를 거절하고 감옥에 가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초기 그리스도교의 영적인 긴장을 잃었습니다. 시대와 잘 어울립니다. 팍스 로마나 이데올로기가 오늘에도 작동되는데도 아무런 고난을 겪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화뇌동의 조짐을 보입니다. 오늘 우리는 로마 황제를 숭배하고 있습니다. 무조건 물질적으로 잘살게 해주겠다는 선전에 쉽게 속습니다. 무한경쟁에 발 벗고 나섭니다. 남을 눌러야만 살아남는다는 약육강식의 논리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경쟁은 마치 헤비급 권투선수와 라이트급 선수가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학생들을 모조리 줄 세우는 방식으로 몰아갑니다. 경쟁의 압박감에 못 이겨 많은 청소년들이 목숨을 끊습니다. 지금 정부에서 경쟁하듯이 밀어붙이는 4대강 사업에서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죽었습니다. 총체적으로 교회도 역시 이런 경쟁 구조에 빠져 있습니다. 목사들도 이런 경쟁 구조 속에서 영적으로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한기총을 비롯해서 모든 교단의 선거판이 혼탁해진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게 현실인데 어쩔 수 없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현실이긴 합니다. 개인들이 거기서 벗어나기는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에도 로마의 질서가 현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거기서 적당하게 적응하고, 또는 출세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서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9a)고 권면합니다. 그들이 대적해야 할 대상은 마귀입니다. 그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노예로 만드는 시대정신(Zeitgeist)입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듯이 무한 경쟁에서만 삶을 확인하게 만드는 이념과 구조를 가리킵니다. 그런 힘이 바로 마귀입니다. 베드로는 그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어떻게 대적할 수 있나요? 대적해보려고 노력을 하기는 했을까요? 마귀가 무엇인지, 삼킬 자를 찾는다는 사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셨나요? 베드로가 무턱대고 싸우라고 등을 미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그것은 사이비 이단이 됩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막무가내로 세상을 부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동키호테처럼 누가 적인지도 정확하게 모르고 창을 들고 말을 타고 돌진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귀를 대적해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귀의 힘은 그리스도인들을 능가합니다. 거기서의 싸움은 백전백패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지금의 무한경쟁이라는 악한 구조를 여러분 스스로 극복해나갈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무능력한 사람들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 스스로 알게 모르게 마귀의 추종자가 될 때도 있습니다.

     대적하라는 베드로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맞서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겁쟁이로 만드는 마귀를 향해서 맞서야 하고 맞설 수 있습니다. 일단은 맞서 있어야 합니다. 궁극적인 승리는 마지막 때 일어나겠지요. 그 중간시기를 사는 우리는 일단 버텨내야 합니다. 그것마저 포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맞서야 하고, 당연히 맞설 수 있습니다. 대적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이 문장에 중요한 단어가 4개나 나옵니다. 온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견고하게 하십니다. 마귀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런 힘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겁쟁이가 되게 하는, 거듭해서 황제숭배로 돌아가게 하는 악한 세력과 맞설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름으로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했지만 여전히 삶의 토대가 흔들립니다. 도대체 삶의 용기가 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마귀와 대적하기는커녕 나 자신도 추스르기 힘들어집니다. 신앙생활이 권투나 유도처럼 겉으로 실력을 보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게 안 됩니다. 저 사람이 마귀와 맞설 능력이 있는지 아닌지 분간하기 힘듭니다. 하나님 경험이라는 게 눈에 확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적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사실을 직접 실감나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에 대한 베드로의 설명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입니다.(벧전 5:10a)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갔다면 당연히 온전하고, 굳건하고, 강하고 터가 견고합니다. 대적할 능력은 하나님의 영광에서 나옵니다. 우리에게 대적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모르겠다는 뜻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관건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삶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멀게 느껴지시나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에서 ‘영광’은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어떤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자체, 또는 하나님의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물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영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은 뒤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과 일치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휩쓸린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것이 분명하다면 당연히 우리는 삶의 능력에 전적으로 사로잡힐 것이며, 삶을 파괴하는 마귀와 대적할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직은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이 아니라 등만 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베드로의 말은 완료형이 아닙니다. 앞으로 들어갈 약속입니다. 그 약속의 보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사실에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걸었습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간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이고, 하나님의 계시이고, 하나님의 구원 통치입니다. 이 사실에 근거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를 더 이상 ‘퀴리오스’라고 떠받들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똑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신처럼 섬기는 자본과 권력과 명예를 퀴리오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런 삶의 태도로 인해서 고난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주눅이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이 실제로 풍요로워지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답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영광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영혼을 질식시키는 마귀와 대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고난을 가리켜 ‘잠깐’이라고 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켜 ‘영원한’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잠깐입니다. 세상에서 획득할 수 있는 모든 소유와 권력도 잠깐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도 잠깐입니다. 모든 것이 잠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이 영원합니다. 거꾸로 영원한 것이 하나님이 영광입니다.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그의 영광으로 인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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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신짱구

June 08, 2011
*.196.241.92

목사님 이번 설교는 조금 늦게 올리셨네요. 주안에서 평안하시지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영광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영혼을 질식시키는 마귀와 대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고난을 가리켜 ‘잠깐’이라고 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켜 ‘영원한’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잠깐입니다. 세상에서 획득할 수 있는 모든 소유와 권력도 잠깐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도 잠깐입니다. 모든 것이 잠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이 영원합니다."

        .......아멘.....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영원하신 영광의 하나님께 인도하실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오늘도 날이 덥습니다.  건강하세요.♪♪♪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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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8, 2011
*.120.170.250

신짱구님,

제가 설교 꼭지글 올리는 게 좀 늦었지요?

주일 오후에 서울에 올라가서

서울샘터교회 예배를 인도하고,

월요일에는 일산 호수 공원으로 서울샘터교우들과 놀러갔고,

화요일에는 한신교회 별세목회연구원에서 주최하는

전국목회자 세미나에서 강의하느라 그렇게 되었네요.

오랜 만에 2박3일 동안 외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이 영원하다는 사실이 전달됐지요?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현실이라는 것도 전달됐지요?

그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게 바로 영성이랍니다.

그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기에

조금만 마음을 열고 그쪽으로 다가가면,

더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세계에 마음을 열면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금년은 장마가 빨리온다는군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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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June 08, 2011
*.54.137.164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미래와 운명을 걸었던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바 된 하나님의 계시와 의로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바 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제가 더욱 제대로 알아 가고 싶습니다.

목사님, 오늘도 좋은 말씀으로 깨우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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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8, 2011
*.120.170.250

별달 님,

위에서 별달 님이 더 알아가고 싶다고 한

그 믿음, 그 계시와 의로움, 그 뜻은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겁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낭만도 아니고 자기 열망도 아니에요.

우리에게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몰입하는 겁니다.

이런 몰입을 위해서는 일단 알아야 합니다.

그런 앎의 과정에 마음을 쏟고 있는 별달 님에게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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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질그릇

June 08, 2011
*.159.144.211

목사님, 밖에는 비가 내리고 천둥 소리가 요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야

우리의 삶 전체가 잠깐인 것을 깨닫게 되겠지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실제로 풍요로워지기를 기도하는 밤입니다.

여름의 시작점에서 건강 유의하세요.^^

감사합니다....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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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8, 2011
*.120.170.250

질그릇 님,

그렇지요?

번개와 천둥처럼 우리의 삶 자체가 잠깐이지요?

이런 운명 가운데서 살아가는 우리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은

이런 우리의 운명을 전제하는 겁니다.

기독교의 가장 초보적인 교리도

인간과 우주에 대한 엄청한 통찰을 전제하고 있군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화염처럼 불사르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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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신짱구

June 09, 2011
*.196.241.92

아!!! ∧∧바쁘시기도 하셨겠지만, 오래만에 외출이 참 즐겁고 행복하셨겠어요. 목사님♪♪♪

정성스럽게 올려주신 답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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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선비다움

June 09, 2011
*.15.25.90

본문 설교를 통해

베드로 사도의 영성과 신학을 엿볼 수 있네요.

정 목사님의 말씀이 많은 것들을 열어 주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 느낌을 몇 자 적어보겠습니다.

말미에 한 가지만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상식적으로만 보면

소아시아에 흩어진 성도들과

지도적 위치에 있던 베드로 자신에게

조여 오는 박해의 현실이

크게 보입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라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정신적 파탄자들, 고집 불통자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라는

비난을 밤낮없이 들었을거구요.

군소리 없이 유유자적하며 시대와 발맞추는

절대다수의 비(반)그리스도파에 비하면

조금은 유별나게 보이기까지 하는

소수파로서의 고독함도 있었을겁니다.

자칫 잘못하면 기독교가 소멸될 지도 모른다는 어떤 불안감,

생존 자체가 불투명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

이런 분위기속에서도 예수가 진리이기에 믿고 따라야 한다는

영적 긴장감을 읽을 수 있는데요.

그리스도인이 만난 고난의 총체랄까요.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는 비장한 현실속에서

오히려 차분하게 권면하는 베드로의 영성에 탄복합니다.

“근신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너희를 영원한 영광으로 부르셨다.”

장점이든 단점이든 베드로의 이전의 전력(前歷)만을 본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는 “아, 이 더럽고 악한 세상 ”하면서

현실도피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아니면, 어차피 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로마권력과 방해세력을 향해 격렬하게

궐기투쟁이라도 할 법한데 말이죠.

이 양 극단(兩 極端)에서 모두 비껴 설 수 있는

영성의 단초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는데요.

사실 베드로 서신이 쉬운 내용 같지만

현실-그것도 서슬 퍼런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바윗돌 앞에서-

과 진리 앞에서 어떻게 살아남느냐, 그러면서도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어떻게 펼칠 수 있을까 하는 어려운 물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들이 맞고 있는 고난이

어떤 성격의 것인가를 잘 이해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해결해주겠지”라든가

“케세라세라” 식으로 흘렀을테니까요.

고난당하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나타남(영광)에서 보여주니까요.

만일 이 세상이 끝이라면

이런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마귀 같은 시대정신에 휩쓸리지 않고

저항하며 살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하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인데요.

고난과 영광을 연결해서 말 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도

영광을 경험하고 그 비밀을 아는 자만이

말 할 수 있겠지요.

이 비밀의 열쇠는 역시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사실(어떤 빛 경험이랄까요)

이것에서 찾을 수밖에 없겠는데요.

목사님, 물론 베드로가 변화산 경험도 있었습니다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이

어떻게 그의 삶을 이루는 중심축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지가 궁금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다른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만)의

예수 부활경험의 강도라고나 할까요, 크기라고 할까요.

아니면 성령의 지속적인 도우심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것이 무척 궁금해지는데요?

 

영혼을 열어주는 설교

다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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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09, 2011
*.120.170.250

선비다움 님,

초기 교회의 형편을 재미있게 설명하셨네요.

뒷부분에서 주신 질문은

그리스도교가 역사에 등장하게 된 핵심에 대한 것이군요.

그걸 여기서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활 현상에 대한,

그리고 부활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다 할 수 없는 거지요.

다만 이렇게 정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죽어 땅에 묻혔던 예수를

종말에 드러나게 될 궁극적인 부활의 실체로 경험하게 되었다는 거지요.

이런 경험을 설명하려면

유대인들이 묵시사상, 예수 공생애에 대한 새로운 조명,

추종자들에게 현현된 예수 등등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겠지요.

부활의 실체가 무언지는 아직 다 드러난 게 아니지요.

어쨌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2천년전 일정한 시점에 나사렛 예수가 생존했다는 사실이 분명한 것처럼

제자들의 부활 경험도 분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변증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궁극적인 선교가 아닐는지요.

주님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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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더럼

June 11, 2011
*.30.159.251

목사님

30일에 졸업합니다. 또하나의 세속적인 감투를 갖게 됩니다.

그것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달려 왔습니다.

여러 사람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습니다.

하지만 두렵기도 합니다.

세속적인 돈, 권력과 명예에 더욱 집착하는 유혹과 그것을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렴움인 듯합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공부했노라고 말은 하지만 여전히 세속적인 욕망이 앞서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마귀와 대적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휩쓸릴 수 있는 능력, 온전 굳건, 강하고,견고한 능력을 예수님을 통해서

길러야 한다는 목사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림니다.

성당에서 하는 졸업식을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묵상하는 날로 기억하겠습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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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11, 2011
*.120.170.250

더럼 님,

졸업 축하드립니다.

세속적인 감투이기도 하지만

영적인 칼이기도 합니다.

그걸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근본 의미가 달라지겠지만,

어쨌든지 손에 무기가 들린 것은 분명합니다.

학위 과정과 논문 작성에 최선을 다 하셨으니까

앞으로 거기에 걸맞는 열매를 맺을 겁니다.

귀국하시면 밥 한번 살테니

하양에 한번 들리세요.

영국에서는 졸업 가운을 빌리나요, 사나요?

한국에서는 주로 사는 것 같은데,

값이 만만치 않더군요.

성당에서 졸업식을 한다니 멋지군요.

좋은 주말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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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선비다움

June 11, 2011
*.15.25.90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에 대한 이해에서

본문에서의 의미도 그렇고,

목사님의 설명에도 백번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목사님,

우리가 일상에서 당하는 소소한 어려움을 제쳐두고

‘그리스도인’이기에 당하는 본질적인 어려움과만 싸우는게

간단하지 않은데요.

실제로 작게 보이는 일들과

오히려 더 소모적인 싸움을 벌일 때가 많거든요.

물론 신앙을 통해 고난의 차원을

달리 해석해 내고 넘어서면 더없이 좋겠지요.

‘지금, 여기서의 나’라고 하는 사람이 존재함이 분명하구요.

내안에 작게 보이지만 아주 큰 고통이

실재 하는 것도 사실이잖아요.

(주관적인 느낌만을 따지고

감정적으로 보면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요)

그렇다면 한 개인이 맞닥뜨리는

일상적인 고통과 신앙의 본질적인 고통의 양면을

한 인격 안에 두 사람으로서

대처(기능)해 나가야 하는 어려움이 생기는데요.

이 문제를 하나로 통합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따로따로가 아닌 전인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결국은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측면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답을 찾아간다는 측면에서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데 있어서

양 갈래 길(세속적인 나와 신앙적인 나)이 있는 것 같아 드리는 질문입니다.

주님의 영광이 답이라면

작은 일상적인 고난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데 따르는

고난에 포함시키면 무리일까요?

 

귀한 가르침이 새롭게 다가와

감사의 인사로 대신합니다

거룩하고 은총 넘치는 주일되시길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11, 2011
*.120.170.250

선비다움 님이 중요한 걸 짚으셨네요.

일상적인 고난과 신앙적 본질로 인한 고난,

세속적인 나와 신앙적인 나 사이의 분리, 일치 ... 등의 문제네요.

정답이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요? ㅎㅎ

긴장을 놓치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요.

나의 경우를 말한다면

이걸 분리하는 쪽입니다.

한 인격체이지만 차원이 다른 문제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현실 정치에 대해서 신앙적으로만 대답할 수는 없어요.

FTA를 신앙의 차원에서 결정하기는 힘들다는 거지요.

개인의 세세한 삶을 모두 신앙으로 규정할 수는 없구요.

이런 점에서 나는 루터의 '두왕국론'을 지지하는 쪽이에요.

세속의 질서와 신앙의 질서는 구분된다는 거지요.

완전한 분리라기보다는 긴장관계라고 보는 게 좋겠군요.

설교 제목과 연관해서 보충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신앙의 본질 영역만이 아니라

세속의 영역까지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대하는 방법이 다를 뿐인 거지요.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profile

[레벨:13]진인택

June 14, 2011
*.220.104.49

영적 긴장감을 강화할 때 자칫 다시 수고하고 짐진자가 되진 않을까 염려됩니다.

지금 이 순간 만큼과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나면 영적 상태가 이완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이완이 잦아들 때 ,주님의 십자가 피 흘림 의미가 나를 숙연하게 만듭니다.

 

목사님, 주님의 부활 속에 나타난 하나님기쁨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나의 하루가

왠지 긴장감보다는 솔직히 전 보다 즐거움이 증가되고 있습니다. 영적 긴장감이

떨어지는 걸까요.

 

영적 긴장감을 나에게는 요구할 수 있어도 사랑하는 자들에게 피력하는 힘의 약함과

한계를 느낍니다. 그건 아마도 내가 나만 사랑하는 죄와 연결되는 모양을 버리지

못한 탓이겠지요. 현재 겪고 있는 교회와의 갈등이 정리되어가는 상황에서 느끼는

이탈의 자유로움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습니다.

 염려되는 것은 홀로 있음에 영적 긴장감이 약해질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의 약함을 나를 주님으로 부터 벗어 나지 않게 예수님의 부활 뒤의 궁극적인 삶의 현실에

닻을 내립니다.

profile

[레벨:5]낙타

June 24, 2011
*.21.7.39

넋놓고 있다가 영혼 뺏길판입니다.

진안택님의 첫단락이 완전공감 됩니다.

긴장해서는 불편해서 못살고 그렇게 살아지는 삶이였으면 좋겠습니다.

 

일하고 집에오면 무지하게 피곤합니다. 피곤하다고 바로 자면 늘 피곤한 몸이지만 의지를 갖고

30분 산책하면 더없이 상쾌하죠.....하지만 자꾸 바로 자는 저의 모습과 탁한 영성과 너무나도 비슷하네요;

더 한심한건 긴장을 통해 인식은하는데 의지적으로 인식하는대로 살기를 거부하군요.

 

물질이 지배하는 세계와 경쟁을 통해 인정받는 기준앞에서 중심잡기가 힘들어집니다.

불 완전한 인생에서 영원한 시간을 볼 수 있는 안경을 챙겨놔야겠습니다.

목사님! 안경같은 설교를 통해 힘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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