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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대한 질문 (눅 10:25-37)

성령강림절 조회 수 17929 추천 수 0 2013.07.14 22:4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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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누가복음 10:25-37 

이웃에 대한 질문

눅 10:25-37, 성령강림절후 제8주, 7월14일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도전을 받기도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기쁘고 위로가 되지만 도전을 받으면 좀 불편합니다. 그래서 도전이 되는 말씀은 자기도 모르게 피하게 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눅 10:25-37절도 도전적입니다. 새로운 깨달음을 주시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마음 한 구석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불편한 이유는 그 말씀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율법이 이에 대해서 뭐라 말하느냐고 다시 묻습니다. 율법교사는 신 6:5절과 레 19:18절을 인용해서 대답합니다. 온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답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율법교사는 자기가 율법에 조예가 깊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는 투로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내 이웃이 누군지를 알아야 이웃을 사랑하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율법교사다운 질문입니다. 오늘의 신학자처럼 율법을 전공한 이 사람은 누가 이웃인지, 또 누가 원수인지를 식별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연히 이웃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이고, 원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율법교사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예수님이 한번 더 정확하게 인정해주기를 기대한 겁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잘난 척 한 겁니다.

 

사마리아 사람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다음과 같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이 사람의 모든 걸 빼앗고, 옷을 벗기고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구타한 뒤에 길에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사람들이 뜸한 광야입니다. 산적들이 출몰하기에 맞춤한 환경입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방치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국 죽게 될 겁니다.


마침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일을 다 마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제사장이 이 사람을 보았습니다. 끔찍했겠지요. 피범벅이었겠지요. 독수리들이 시체를 쪼아 먹을 기회를 노리느라 높은 곳에서 배회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제사장은 많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보면 누구나 측은한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도울 생각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제사장은 시체에 손을 대면 율법을 어기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강도들이 아직도 이 부근에 남아있을지 모르니까 빨리 피하는 게 좋습니다. 그의 생각이 실제로 어땠는지에 대해서 본문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다만 제사장이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라고 했습니다.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제사장은 외면한 겁니다. 그 다음에 레위인이 지나가다가 제사장과 똑같이 행동했습니다. 레위인도 제사장보다는 못하지만 종교적으로 상위 계급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 모두 그 위급 상황에 처한 사람을 나 몰라라 했습니다.


세 번째로 그곳을 지나간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고 있던 율법교사나 다른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간 뒤에는 당연히 일반 유대인이 등장해야만 합니다. 사라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는 아주 짧게 한 마디로 끝냈습니다. 그들은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는 아주 상세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그 사람을 치료하고 돌봐주었습니다. 34절을 그대로 읽겠습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뿐만 아닙니다. 하룻밤을 거기서 보내고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다친 사람을 더 돌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 가족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에게서 큰 감동을 받으십셨습니까? 그래서 나도 그 사람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십니까? 우리 주변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종교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렇게 극단의 휴머니즘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본인이 직접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오지에 들어가서 원주민을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하기도 합니다. ‘국경없는 의사회’라는 단체에 속한 의사들은 일정한 기간 동안 돌아가면서 의료시설이 없는 지역의 사람들을 찾아가서 의료 봉사를 합니다. 슈바이처, 마더 테레사, 이태석 신부 등은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 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이런 분들을 손에 꼽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이름이 알려진 분들만이 아니라 숨어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을 베푼 이들도 많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다고 하더라도 휴머니즘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칭찬 받고 존경 받아 마땅합니다. 개인 이기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의 후예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무조건 비난받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그들과 비슷하게 행동했을 겁니다. 예수님도 이 비유를 통해서 누가 잘하고 누가 못했다는 것을 말씀하려는 게 아닙니다. 또한 사마리아 사람의 삶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갈 수도 없습니다. 복음서에는 이것과 견해가 다른 이야기도 나옵니다.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일이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누가 듣더라도 휴머니즘이 넘치는 발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8) 가난한 이들, 즉 강도 만난 이들을 돕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핑계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상대화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휴머니즘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도대체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강도 만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한 질문이 중요합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당연히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율법교사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싫어한 것 같습니다.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교사의 관심은 누가 자기의 이웃인가를 규정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이웃이 되어주는 데에 있었습니다. 관점이 완전히 다릅니다. 전자는 자기가 중심이 된 관점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강도당한 사람이 중심이 되는 관점입니다.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를 율법교사와 비슷한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내 관점으로 상대를 봅니다. 주관적으로 세상을 판단합니다. 내 편과 너의 편을 나눕니다. 조폭의 의리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끼리끼리 어울립니다. 이게 우리의 숙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편이 아닌 대상은 부정하든지 무시하든지 배척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국제 정치나 사회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일상에도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원당리로 들어간 우리 가족은 요즘 곤충과 벌레에 휩싸여 살아갑니다. 특히 모기가 많습니다. 꽃밭이나 텃밭에서 일할 때 모기에 많이 물립니다. 모기가 얼마나 귀찮은지 모르겠습니다. 잡풀도 그렇습니다. 정성스레 심은 채소는 잘 자라지 않고 심지도 않은 잡풀은 잘도 자랍니다. 잡풀이 보기 싫어집니다. 이런 게 다 저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사실 귀찮은 벌레도 없고, 보기 싫은 잡초도 없습니다. 모두가 각자 지구에 기대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입니다.


조금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율법교사 수준으로 살기만 해도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이웃에 대한 관심이 그 생각의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교사가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인용한 두 번째 성경구절인 레위기 19:18절을 보십시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렇게 살기도 힘듭니다. 유대민족이 주변의 막강한 제국 틈바구니에서도 생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내부의 결속입니다. 내부의 결속은 자기와 통하는 게 많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율법은 가난한 사람, 과부, 고아 등을 사회가 책임지도록 명령합니다. 유대인들은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내 이웃이 누구냐?’ 하고 물은 것은 자신들의 이웃 사랑이라는 전통을 자랑하고 싶었던 데에 있습니다. 그런 정도라도 이웃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면 누구에게만 인정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의 삶은 아무리 고상해도 일정한 대상을 부정하게 됩니다. 이 비유에 세 번째로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유대인들도 사마리아 사람은 사랑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고착된 세상에는 왕따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할 대상과 미워해야 할 대상이 구별됩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웃이 누군지를 고르지 말고 참된 이웃이 되어주라고 말입니다.

 

예수가 사마리아 사람이다

율법교사는 이 말씀을 듣고 생각을 바꿨을까요? 본문은 말하지만 않지만, 바꾸지 못했을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눅 18:18-30절에는 어떤 부자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사람도 오늘 본문의 율법교사와 똑같이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잘 지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근심했다고 합니다. 그게 성실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왜 나름으로 성실한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걸까요?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윤리 도덕적인 짐을 지우시는 분이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부르시어 모든 짐으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하신 예수님이 또 다른 짐을 맡기실 리는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오늘 본문은 더 궁극적인 어떤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곧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영생을, 구원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웃이라고 생각한 어떤 누구도, 심지어는 가족도, 또한 자기 자신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본문에서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강도 만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먼지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은 온갖 상처로 가득합니다. 겉으로는 세련되고 웃고, 뭔가 있어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강도 만난 사람과 똑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유일한 이웃으로 경험하셨는지요. 그래서 구원의 빛을 보고 따라가시는지요?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한 교회 안에서 서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우리의 참된 이웃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알고 경험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이미 답이 나왔습니다. 사랑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사랑할 줄 안다는 말이 있듯이 참된 이웃을 경험한 사람은 세상에서 이웃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습니다. 강도 만났다가 사마리아 사람에 의해서 구원받은 그 사람이, 성경은 말하지 않지만, 그 뒤로 어떻게 살아갔을지 생각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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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라크리매

July 15, 2013
*.7.25.212

지난 주와 이번 주 말씀이 모두 제 허를 찌르네요
예수님과 이웃된 자의 삶의 변화가 제게도 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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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5, 2013
*.94.91.80

ㅎㅎ 허를 찌른다구요?
제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있는지 잘 검토해보세요.
해석은 제2의 창조 활동입니다.
현악기를 전공하셨으니 잘 아시겠지만
연주도 역시 해석이잖아요.
원래 악보에 충실하되
연주자의 창조성이 살아나야 수준 높은 연주겠지요.
저는 매주일 성서라는 악보를 연주한다는 생각으로
설교를 준비하고 말씀을 선포합니다.
청중들을 성서의 놀라운 세계로 인도하고 싶은 마음으로요.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우선 내가 그 놀라운 세계를 얼만 정확하게 알고 있느냐 하는 것과
그것에 대해서 청중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느냐 하는 게 맞아 떨어져야 하거든요.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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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여름비

July 15, 2013
*.182.17.150

목사님 기도말씀 중에 '악을 악으로 갚지 말도록 하옵소서,,' (정확한 문장은 아닌 것 같아요.)라는 말씀이
콕 박혔습니다.
마음이 조금 상했을 뿐인데 크게 되갚아주려는 악한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지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그런 생각만으론 그리 되지 않을 것 같고 주님 앞에 시시때때로  엎드려 기도하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가 깨닫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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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5, 2013
*.94.91.80

여름비 님이 인용한 그 내용은
설교후 기도가 아니라
파송예전의 '위탁의 말씀'에 나오는 겁니다.
되갚아 주겠다는 생각은 우리의 본능입니다.
성령으로 본능이 제어되어야겠지요.
생각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말씀은 정확한 겁니다.
우리 안에 말씀의 영이 가득해야겠지요.
주님이 도우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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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beginner

July 15, 2013
*.106.154.10

어릴적 교회에서 오늘 본문으로 연극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마음에 선한 사마리아인 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하지만 흉내조차 못내고 이기적인 이웃으로 살아온 것, 부정할 수 없네요.
설교를 들으면서  궁극적인  사실 
즉 우리가 강도 만난 사람이며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 우리의 이웃 즉 구원자이시다는 말씀을 듣고
핑! 눈물이 돌았습니다.
지난 주에 영혼의 문둥병자에 이어 상처 투성이 강도 만난 사람이 저라는 사실이 정말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구원 받은 강도 당한 사람과 같은 심정으로 감사하며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텐데..
주여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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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5, 2013
*.94.91.80

이 집사님에게 저의 설교가 정확하게 전달되었네요.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처럼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 앞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는 말을 제 아내에게도 들었습니다.
저 비유가 이전에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렸는데
이번에는 자기와 직접 연관된 이야기로 들렸다는군요.
시간이 좀더 있었으면 우리가 왜 강도 만난 사람인지에 대해서 좀더 말하고 싶었습니다.
앞부분을 너무 길게 설명하다가 기회를 놓친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우리 모두 사마리아 사람 컴플렉스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우리의 참된 이웃이라는 사실을
아주 실질적으로 깨달으며 남은 인생을 살았으면 합니다.
키리에 엘레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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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여름비

July 16, 2013
*.182.17.150

아마 beginner님께서 말씀하신 부분, 이 설교말씀에서 저는 공감하지 못하고 의아해했던 것 같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이 '나'이고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을 비유한 것이라는.  그런데 목사님의 댓글 중 사마리아사람 컴플렉스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말씀에 걸려  못 일어나고 계속 앉아있습니다. 도덕적 윤리적 계율에 갇혀있기 때문일까요. 저는 얻어맞고 야단맞고 혼이나야 자연스럽게 상황이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이 의아함이 착한 컴플렉스에서 기인한 거라면 제가 지고 있는 의무 책임 죄책감이라는 사슬을 예수님께 의탁하는 신앙을 갖고 싶습니다. 어려운 상황이 오면 저는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를 간절히 떠올리며 날 도와달라고 제발 도와달라고 애걸복걸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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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6, 2013
*.94.91.80

한국 기독교인들을 정도의 차이만 있지
누구나 사마리아인 컴플렉스가 있을 겁니다.
노력해도 잘 되지 않는 거
그냥 내려놓으세요.
그렇게 해봤자 실제로는 별 거도 아니구요. ㅎㅎ
희생적인 삶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그게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하기야 요즘 기독교인들은 그런 컴플렉스도 없이
아주 뻔뻔스럽게 살아가는 게 더 큰 문제이긴합니다.
예수가 왜 우리에게 메시아인지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을 집중시키는 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
그런 신앙의 세계로 들어간 깊이만큼
우리 주변과 참된 이웃관계를 맺고 살아가겠지요.
어떠어떠 해야 한다는 규범으로부터의 해방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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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육바금지

July 16, 2013
*.51.18.87

 정목사님, 사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이라는 대목에서 사뭇 놀랐습니다. 이 비유를 이후 거의 1500년간 알레고리로 해석하면서 대표적으로 이 사마리아인을 예수로 상정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알레고리가 100% 무용한 것도 아니고, 특별히 정목사님께서 이 설교를 통해서 알레고리적 해석을 시도하신 게 아닌 것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비유의 해석을 공부하면서, 되도록 하지 말아야할 해석의 방법으로 알레고리를 경계하였기에 사마리아인 = 예수님 이런 공식은 되도록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중입니다. 그냥 넘어가도 되는데 괜히 목사님 골치 아프게 해 드린것 같아 죄송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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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6, 2013
*.94.91.80

아, 그렇군요.
사마리아인이라는 해석이 벌써부터 있었군요.
나는 내가 처음으로 그렇게 해석한 줄 알고
기특하게 생각했습니다. ㅎㅎ
그런데 저 해석이 알레고리라는 게 맞아요?
알레고리는 해석학적 근거 없이 
은혜, 또는 믿음의 차원에서 두 가지를 연결하는 글쓰기 수법이잖아요. 
예컨대 구약의 요셉을 예수로 본다든가, 
다니엘이 본 거대한 신상의 발을 
오늘의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본다든가, 
요한계시록의 144,000명이나 666 숫자를 
오늘의 어떤 현상으로 보는 해석 같은 거 말입니다. 
신천지에서도 구약과 신약을 짝짓기하는
알레고리 해석을 자주 하는 것 같던데요.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그것 자체가 비유니까
사마리아 사람을 예수님으로 비유하는 해석이
반드시 알레고리라고 하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1500 년동안 그렇게 해석되었다는 근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혹시 자료가 있는 알려주세요.
재미있고, 공부하고 싶어서요.
예레미야스의 <예수의 비유>라는 책에 있을까요?
얼핏 그런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기도 하는군요.
나는 알레고리는 생각하지 않고
본문을 해석하면서 도달한 결론이에요.
일반적으로는 사마리아인= 예수라는 공식보다
사마리아인= 기독교인의 표상이라는 공식이
한국교회 강단에 강하지 않을는지요. 
민중신학 쪽에서는
강도 만난 사람을 예수님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절박한 위기에 빠진 민중을 돕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돕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쨌거나 제가 전혀 의식 없이
전통적 알레고리 해석으로 돌아간 걸 보니
제가 전통주의자가 맞기는 맞는가 봅니다. ㅎㅎ
좋은 지적, 고맙습니다.
profile

[레벨:28]정성훈

July 17, 2013
*.41.205.218

선한 사마리아인,  비밀번호  76165144


 http://dl.nanet.go.kr/userCheck.do?ui=7w0hl8r%2F2pmJR6cR7w4VwQ%3D%3D&ed=qHidF1N9HhzhkPl99npV8Q%3D%3DyjxwxwDOOITNAr2Blk36IA%3D%3DoWd5aW0aLQ%2FkF21%2FrDZVrQ%3D%3DySpBLuHCr4JhJ9cwUkgAuA%3D%3DYUWYp%2FzeEuLs6jqSetl%2BcA%3D%3DtjUm%2BOSjZbj2urlJwniwOw%3D%3Do0FgwGYr8YyIUKmwoOvuqA%3D%3DHnQ7aoVUbVJBrsB8on4%2F%2Fg%3D%3DQA04ne1DVfTUFQYo4x8Npg%3D%3DIO70erc0E2JOO%2BT91RR%2FTg%3D%3DIpYC%2BHzVTrjAxE7hP2F56A%3D%3DoifzGokGuEPD7P0H1hkMBA%3D%3DxFlUMXGbOAz04ai8oSgTdg%3D%3DqLTPmCoHejr1mVAwmoKurA%3D%3Dru5EJ1jR54OuVUxV8kLE9g%3D%3D&class2=0&wonmunType=3&isEx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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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17, 2013
*.94.91.80

정성훈 집사 덕분으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공부 많이 했습니다.
신학석사 논문으로 잘 썼네요.
내용도 충실하고 글쓰기도 좋아요.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 대한 알레고리 해석의 역사가 오래 됐군요.
저 논문에 따르면
2세기의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가 이렇게 해석했네요.
사마리아 사람- 이웃, 그리스도
강도- 어둠의 지배자들
상처- 공포, 정욕, 진노
포도주- 다윗, 포도나무의 피
기름- 성부 하나님의 동정심
싸매줌- 사랑, 믿음, 소망
4세기의 어거스틴과 16세기의 마틴 루터도
알레고리 해석을 했다고 하네요.
성서에 대한 역사해석이 등장한 이후로
알레고리 해석은 신학의 역사에서 배제되었구요.
옳은 이야기입니다.
알레고리는 극단적인 주관적 해석이니까요.
저 논문의 저자는 결론적으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이렇게 해석하네요.
1) 당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인종학적 편견에 대한 비판
2) 원수 사랑에 대한 가르침
저 결론에 대해서 나는 쪼끔 다르게 생각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편견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의식이 있는 당시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비록 유대인이라고 하더라도 다 알고 있었을 겁니다.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보이는 오늘날에도
다른 시각으로 보려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이요.
예수님이 기껏해야 그런 편견을 교정하려고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원수 사랑이라는 결론은 좀더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오른뺨을 치는 사람에게 왼뺨을 대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으니
원수 사랑을 말하지 못할 거는 아니지만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는 분이 예수님은 아닐텐데요.
저자도 이 비유가 기본적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개념과 연결된다고 말은 합니다.

이 대글을 읽는 분을 위해서 저의 입장을 한 마디 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사마리아 사람 비유의 역사적 상황을 무시한 거는 아니고,
다만 기독론적으로 해석한 겁니다.
비유를 역사적 상황에서 보라는 말은 옳지만 
그것이 해석의 모든 것도 아닙니다. 
성서기자들은 기본적으로 역사적 예수에 관심이 없었어요. 
복음서를 통해서 역사적 예수를 복원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북음서 기자들은 올리우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눈으로 
땅에 있었던 예수를 읽을 뿐이지요.  
예수의 비유도 역시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복음서에 나오는 비유는
예수님이 문자 그대로 했다고 믿는 사람은 없겠지요.
복음서 기자들의 신앙에서 해석된 비유입니다.
나는 누가복음 기자가 무슨 생각으로 저 비유를 전하고 있을까를 생각했어요.
그가 복음서를 기록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는
이미 들림받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자리를 잡았을 때구요.
우리의 참된, 궁극적인 이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거지요.
저 논문의 저자도 말했듯이
이 비유는 도덕 윤리적 가르침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니까요.
내가 보기에 모든 복음서 기자들이 전하려는 것은
예수가 가르친 내용이 아니라 예수 자체라는 사실입니다.
저 비유를 말하는 예수는 누군가, 하는 거지요.
수고 많았습니다.
profile

[레벨:18]르네상스

July 17, 2013
*.182.27.246

제가 댓글로 달려고 했던 내용을 이미 다른 분들이 쓰셨군요. ^^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비유를 해석할 때 기본적으로 기독론적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에 저는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이지요.
주일학교 설교에서는 보통 "어린이 여러분, 우리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요. 이웃사랑을 실천해요. 영적으로
강도 만난 사람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요." 등으로 설교를 하지요.
위에서 언급하신 것처럼 이 비유는 단순히 "착하게 살자"는 도덕적 교훈으로
보기는 힘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론적 해석과 아울러
종말론적 해석, 다르게 말해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보통 대부분의 인간이 생각하는
국가나 민족과 인종과 성별 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의 문화, 사상, 가치관, 세계관에
갇혀 있기 때문에 국가, 민족, 인종, 성별 등을
넘어서서 사유하고 행동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본질적으로 인간이 규정해 놓은
그 모든 것들의 경계를 허물고 누구나 하나님나라의
'초청의 대상', '하나님의 부르심의 대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나라' 중심적 성경해석에 예민하게 되었는데
제가 너무 오버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17, 2013
*.94.91.80

하나님 나라 중심적 성경해석이라는
김종원 님의 입장은 바람직합니다.
이를 위해서라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을
여러 차원에서 더 깊이 이해하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주님의 평화가...

profile

[레벨:5]진리구도자

July 18, 2013
*.214.137.125

감사합니다
나는 철저히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되어있을까.. 혹시 나의 상처를 진실되고 참된 예수님의 사랑보다는 돈이나, 명예 등 세상사람들이 높이 받드는것으로 보상받고 치유받으려는 어리석음에 빠져있는것은 아닐까........종교인이란 예수님의 사랑을 참되게 느끼지 못한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척하는 사람이 아닐지.. 그렇다면 참되게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또한 무엇일지..어리석음이 가로막혀서만인지,  광야를 40년간 헤메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때가 안되어서인지..
등등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설교였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18, 2013
*.94.91.80

진리구도자 님은 구도적으로 생각하시는군요.
세상이, 신앙생활이,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모두
혼란스럽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하지요?
'그날이 오면' 우리는 궁극적인 비밀을 알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삶의 토대로 삼고 살아야겠습니다.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기를...
profile

[레벨:18]르네상스

July 18, 2013
*.182.27.109

본문에 나오는 율법교사는 사실상 율법을 '가진' 유대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닐까요?
유대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본인들은 율법을 가졌고
이방인들은 율법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본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고 이방인들보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훨씬 더 우월한 자들이라는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 없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말하죠.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라고 생각을 했었죠.
심지어는 사도행전에서 사도 베드로도 처음에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을 볼 수 있으니까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 차별이 없다는 갈라디아서의 말씀과 연결되는 것이 아닌지요? ^^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18, 2013
*.94.91.80

그렇습니다.
율법이 좋은 것이로되
오용되면 악하게 작동되겠지요.
세상이 법으로만 정의로워질 수 없는 것처럼이요.
그렇다고 율법을 폐기처분할 수도 없지요.
복음의 빛 안에서만 율법의 가치가 살아난다는 사실을
오늘의 교회가 실제로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profile

[레벨:13]진인택

March 19, 2014
*.176.176.115

사람들은 간단명료하면 오히려 의심을 합니다. 모자라다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다..

그러다 보험약관처럼 |눈에 잘 안보일 정도로 작은 글씨로 빼곡히 적어놓으며 뭔가 있나보다 하면서 잘 보지도 않습니다.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다라고 모든 일들을 의심의 눈으로 보려고 합니다. 심리가 야속합니다.

아무리 천국으로 이어진 길이 이길이다라고 말해도 말을 안들을려 합니다. 굽은 길, 음침한 길을 속으로는 더 좋아합니다. 여차하면 자기가 숨을 수 있는 구멍이 중간 중간 있는 길을 좋아합니다.

점점 자기가 원하고 편한 길을 고집합니다.  좀 바뀌면 좋으련만 잘 안바꿉니다. 나도 그런기질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할려는 맘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겉으론 이웃, 속으론 이웃만도 못하게 생각합니다. 돈도 안빌려주고 누가 죽는 소리라도 내면 못들은 척합니다. 결정적인순간은 다 걸러 냅니다. 예수님 도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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