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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부르심 앞에서 (딤후 1:1-14)

창조절 조회 수 15445 추천 수 0 2013.10.07 00:3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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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디모데후서 1:1-14 

거룩한 부르심 앞에서

딤후 1:1-14, 창조절 여섯째 주일, 10월6일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오늘 제2독서로 읽은 딤후 1:1, 2절에는 이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의 이름이 나옵니다. 발신자는 바울이고 수신자는 디모데입니다. 딤전 1:1, 2절의 내용도 거의 비슷합니다. 디모데전서와 후서는 연로한 바울이 젊은 디모데에게 쓴 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각별한 사이입니다. 바울이 한창 전도 여행을 다닐 때 디모데가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바울은 디모데의 가정환경까지 자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외할머니인 로이스와 어머니인 유니게의 신앙 전통을 이어 받았다는 겁니다. 6절에 따르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안수를 베풀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목사 안수를 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을 돕던 후배나 제자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관심은 유별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쓴 이유는 디모데에게 목회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젊은이는 아무래도 신앙의 깊이나 목회 경험이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소명, 즉 부르심에 대해서 말합니다. 목회자로서 소명의식이 흔들리면 목회가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소명의식이라는 게 늘 선명하고 뜨겁게 유지되는 것도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다가도 이런저런 일을 만나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소명의식을 다잡는 일이 필요합니다. 보통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과 비슷합니다. 바울이 볼 때 디모데에게 이런 자극이 필요했습니다. 디모데의 소명의식이 흔들린다는 소문이 들렸을지도 모르고, 디모데가 솔직하게 터놓고 그런 하소연을 바울에게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세한 사정은 우리가 모릅니다만 바울이 디모데에게 소명의식을 다시 불러일으키려 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와 디모데를 소명으로 부르셨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바울은 그 소명을 11절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선포자, 사도, 교사로 부름을 받았다는 겁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회심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교회 지도자로 살았습니다. 소명의식이 투철했습니다. 소명은 성서의 핵심 주제입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모두 이 소명을 경험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를 비롯해서 모든 선지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소명에 순종했습니다. 신약성서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원칙적으로 예수님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겁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 마가복음 기자가 소명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소명 이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소명, 즉 부르심은 구약이나 신약, 또는 지난 교회 역사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라 오늘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교회에서는 보통 목사나 선교사 등으로 소명을 받았다고 말들을 합니다. 또는 교회의 봉사를 소명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운영위원 등등입니다. 그런 것들이 두루두루 소명과 연결되는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개신교적 전통에서는 성직이나 교회 업무만이 아니라 모든 세속 직업도 원칙으로 소명입니다. 마틴 루터는 그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독일어로 직업을 Beruf라고 합니다. 베루푸는 berufen이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berufen은 ‘직무를 주다.’라는 뜻입니다. 루터에 의하면 성직과 세속직의 구별 없이 모든 직업은 하나님으로부터 직무를 받은 것입니다. 루터 성경은 오늘 본문의 ‘부르심’을 ‘베루펜’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직업은 소명입니다.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공장 노동자, 영업사원, 의사, 운전사, 카페 사장 등등, 모든 Beruf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왜 우리의 직업이, 그리고 이를 통해서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일까요? 그리고 그런 소명의식이 분명하게 느껴지시나요? 그게 아니라 직업은 그냥 먹고 사는 수단일 뿐이라고 여겨지시나요? 오늘처럼 연봉으로만 직업이 평가되는 세상에서 살다보니 직업의 소명의식을 느끼기 힘들 겁니다. 그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이 소명은 구원과 결탁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9절의 앞부분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를 부르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구원과 소명은 같은 차원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사건입니다. 구원받았다는 말과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을 똑같은 의미로 생각하면 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직업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어야 할 자리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아무 것도 허투루 처리할 수 없겠지요. 구원을 생각하는 사람이 노골적으로 남을 속일 수가 있을까요? 남을 파괴할 수 있을까요? 남을 이용하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바울은 소명을 거룩하다고 표현했습니다. 거룩하다는 헬라어 ‘하기오스’는 구별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직업 자체를 세상의 관점과 구별해서 본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기준은 이해타산에 있겠지만 복음의 기준은 그것과 다릅니다. 그게 뭔지는 여러분이 아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혹은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본문이 그걸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좀 복잡해서 그 의미가 확 닿지가 않는데, 제가 그 문장의 기본 골격을 개인적으로 풀어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와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이 은혜는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듣기 때문에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창 18, 19장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알고 하나님과 담판을 짓습니다. 왜 의인들까지도 죽이려 하느냐, 의인 50명을 보고 나머지 사람까지 용서해 주면 안 되겠는가? 하나님은 의인 50명만 있으면 다 용서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50명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점점 숫자를 줄여서 묻다가 마지막으로 열 명까지 내려옵니다. 그곳에는 10명의 의인도 없었습니다. 만약 10명의 의인이 있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다면 소돔에 사는 수천, 수만 명이 목숨을 건졌을 겁니다. 그 사람들은 은혜를 받은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없었으나 있었으면 놀라운 일이 벌어졌을 소돔의 의인 열 명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10절에서 예수님 덕분으로 우리가 죽음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실감이 가나요? 실감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겠지요.


이 사실에 실감이 가는 사람은 소명이 무언지를 알게 됩니다. 소명이 왜 거룩한지를 알게 됩니다. 여기 판사와 같은 전문 법조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가 자신의 직업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전문가라는 자부심이야 없을 수 없겠으나 그의 영혼에는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이 훨씬 크게 작용합니다. 이것을 아주 실제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 업적, 우리의 지식이라는 건 따지고 보면 보잘 것 없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거꾸로 알 때도 많고, 우리의 의지가 아무리 선해도 결과적으로 큰 잘못을 행할 때도 많습니다. 저도 신학공부의 깊이가 약간이나마 깊어지고 목회의 연륜이 늘어날수록 하나님과 그의 일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만 더 분명해집니다. 자신의 직업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비해서 자신의 일이나 능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뼈저리게 인식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럴 때 그 사람은 자기와 자기의 행위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 자유가 곧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지는 제가 설명할 필요도 없이 분명합니다.


변호사, 교수, 의사, 고위관리 등과 같은 전문가 집단은 먹고 사는 게 넉넉하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 낮은 직업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어렵지 않느냐,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매일 시장 좌판을 벌여놓고 수고해도 입에 풀칠하기 쉽지 않고, OECD 국가 중에서 주간 노동시간이 가장 많은 나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현장 노동자로 사는 사람들로서는 소명이다, 은혜다 하는 게 사치스러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꾸 손해만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노동으로 자기 인생이 혹사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 자체가 은혜와는 상관없어 보입니다. 가능한 피하고 싶은 일입니다. 이건 사회경제적 차원에 속하기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서 더 이상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런 어려운 상황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를 폐기하지 못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연봉 1억을 받는 사람의 삶이 비열해질 수도 있고, 2천만 원 받는 사람이 거룩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삶은 신비롭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의 사람이 되고 싶으신가요?


제가 신앙적인 원칙을 말씀드리긴 했으나, 현실적으로 삶이 고달파 질 때 소명의식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소명의식을 낭만적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바울도 그 사실을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소명을 받아 열심히 일했으나 원하지 않는 고난도 함께 따라왔습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혔습니다. 디모데에게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그가 목회하던 교회에 이단들도 나타나고 그를 욕하는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고난을 피하라고가 아니라 오히려 그걸 각오하라고 8절에서 이렇게 이릅니다.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바울과 디모데가 당한 고난을 오늘 우리는 직접 받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난과는 전혀 상관없는 시대를 사는 것 같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당하는 불이익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전체를 확대해서 보면 고난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어쩔 수 없는 불행이 예고 없이 우리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조기 은퇴, 파산, 교통사고, 장애 아이 출산, 이혼 등등, 언제 어느 때 찾아올지 모릅니다. 실제 직장생활에서도 어려움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을 입시 지옥에 빠뜨리는 이런 교육제도에 맞서서 전인교육을 추구하려면 적지 않는 고난을 당할 겁니다. 여기 젊은 목회자가 있다고 합시다. 기복주의와 문자주의, 교회성장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건강한 목회를 지향하려면 적지 않는 불이익, 또는 어려움을 당할 겁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오늘날 우리에게 고난은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늘 바울의 이 권면이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지금 제가 무슨 고난을 당하고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없습니다. 힘들게 생각되는 일도 없습니다. 목회를 너무 열심히 하다가 건강을 잃은 것도 아니고, 재정적으로 쪼들리는 것도 아니고,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정의를 외치다가 박해를 받는 것도 아니고, 루터처럼 교황청의 잘못을 지적하다가 종교재판을 받은 일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삶을 축복받은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저는 소명의식이 투철하지 못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의 주변에 동료나 후배 목사들 중에는 그런 고난을 몸으로 당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 성소자자들, 장기수들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다 쓰기도 합니다. 그런 일을 하다보면 정부 측과도 마찰을 빚기도 합니다. 경제적으로도 늘 힘들어합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바울의 충고 앞에서 저는 늘 부끄러워합니다.


저의 경우를 말씀드린 이유는 여러분도 저와 똑같이 이런 문제로 고민하라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처한 형편은 다릅니다. 바울이 처한 형편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갈 수도 없고, 따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당시는 기독교 신앙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그들과 전혀 다른 시대에 삽니다. 그것도 우리의 선택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과 다르게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같은 시대를 살지만 각자 처한 삶의 형편도 다릅니다. 고난이 없는 사람도 있고, 고난을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똑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각자의 형편과 분량대로 받아들이고 사는 게 최선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각각 삶의 모양과 방식은 다르지만 우리가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에서는 똑같습니다. 우리의 삶은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에게나 모두 똑같이 거룩한 소명에 해당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것은 직업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인생, 삶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습니다. 그래서 부러워하지도 않고 잘난 체 하지도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소명을 인식하는 사람이 있고,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인가요?


(설교듣기는 서울샘터교회 예배,
설교보기는 대구샘터교회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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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天命

October 07, 2013
*.62.2.5

선포해 주신 말씀,
오늘 아침에 다시 읽으며 새겼습니다. 
아, 저는 행복합니다 !

아침에 읽은 아래 말씀도 바로 이 소명에 관계된 말씀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렘 48:10

여호와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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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7, 2013
*.94.91.64

예, 천명 님,
저의 설교를 대하고 행복해하시니
오히려 제가 행복한 설교자가 된 것 같습니다.
말씀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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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5]진리구도자

October 07, 2013
*.214.139.6

일전에 스마트폰으로 다운로드하는 방법문의해서 시도해보다가 실패했는데 컴퓨터로라도 다운받아보려했는데 이마저도 안되네요 다른 사이트에서는 mp3다운로드가 다 잘되는데 여기서만 그렇습니다. 컴퓨터설정상 뭔가 문제가 있는것 같은데 잘 아시는분의 도움부탁드려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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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7, 2013
*.94.91.64

진리구도자 님,
질문하신 내용은 저도 잘 모릅니다.
이런 건 전문적인 거라서 누가 설명한다 해도
진리구도자 님이 알아듣기 힘들 겁니다. ㅎㅎ
다른 건 포기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만
들으시는 게 최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도 그런 수준이거든요.
앞으로 컴퓨터나 스마트폰의 기술이 더 발달하면
아주 간단하게 들을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날이 속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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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2]자유의꿈

October 07, 2013
*.121.85.46

대구성서아카데미는 웹호스팅을 통해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는데 일일 트래픽 용량 제한이 있습니다. 다운로드를 허용하면 트래픽 제한에 걸려 다른 사람의 홈페이지 사용에 불편을 줄 수 있어요. 그래서 부득이 쉽게 다운로드할 수 없는 MMS 방식(스트리밍)으로 설교동영상/음성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꼭 파일이 필요하시면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아래 餓狼님이 올려주신 녹음 방식으로 파일을 만들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http://dabia.net/xe/free/713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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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October 07, 2013
*.192.53.116

목사님!
아래 문구를 몇번을 되풀이 읽어도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자신의 직업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비해서 자신의 일이나 능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뼈저리게 인식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비해서 자신의 일이나 능력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이는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와 비교할때 우리의 열심이나 노력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의 뜻인지요?
그렇게 해석을 해도 앞뒤 문맥 연결이 잘 안되었습니다.
부연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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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8, 2013
*.94.91.64

부수러기 님,
안녕하세요?
'은혜'는 값 없이 선물로 받는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노력이나 업적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지구의 산소를 마시며 삽니다.
그건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주어진 거에요.
만약 산소가 없다면 우리는 다 죽겠지요.
산소와 비교할 때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최신형 자동차와 아이패드, 대저택도
산소와 비교할 때 미미한 겁니다.
산소가 없으면 죽지만
자동차는 없어도 죽지 않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구원 사건은,
즉 종말에 일어날 궁극적인 부활생명은 절대적인 거라서
그것과 비교할 때 우리의 일들은 있으나 없으나 상관 없는 거지요.
이걸 깨닫는 것이 바로 '은혜를 받았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절대성을 인식하는 통로입니다.
절대적인 것 앞에서 상대적인 것은 결국 무(無)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없음'으로 들어가는 거지요.
없음을 통해서 오히려 생명을 얻게 되는 거에요.
좀 이상하게 들리나요?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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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October 08, 2013
*.9.118.42

절대적인 것 앞에서 상대적인 것은 결국 無가 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린 없음으로 들어간다...

머리로는 "맞아! 그래야지.." 하면서
정작 그 고백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자책과  탄식..
그리고 신앙의 연조가 늘어가도 도무지 믿음의 진보가 없어보이는,
즉 목사님 지적하신대로
상대적인 것에 대한 집착과 미련,두려움이 여전함에 대한
자신을 향한 절망..

누군가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진리를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깨달은 진리대로 살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요.

죽기 전까지 갈등과 자책속에 사는게 신자의 운명인가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란 결국
진리를 깨달은 정도에 비례하는 것이겠지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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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08, 2013
*.94.91.64

부스러기 님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분이군요.
머리로는 되는데 몸으로는 잘 안 되는 거 맞습니다.
저도 비슷합니다.
앞으로 갔다가 다시 뒤로 미끄러질 때도 있어요.
부스러기 님이 위에서 기억난다고 하면서 하신 말씀이 딱이군요.
'깨달은 진리대로 살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구도자들은 출가할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
24시간을 온통 그것에 몰두해야만 어느 정도 이루어지는 경지일 테니까요.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없으니 답답하긴 하지만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을 희망할 수 있으니
절망하거나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다시 처음으로 환원되는 논리처럼 보이겠군요. 
그 믿음의 단계로 들어가서 자유를 누리는 게 힘든 거니까요. 
이건 단순히 환원주의는 아니에요. 
앞으로 나가는 거지요. 
이런 부분에 문제의식을 알고 있고 
나름 최선을 다해서 기독교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노력한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복음의 능력 안으로 끌어주실 겁니다. 
그러고 보니 부스러기 님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군요. ㅎㅎ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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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April 03, 2014
*.176.176.6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직후부터 계속 비가 내렸다면 지금의 우리는 없겠지요.

우리를 모두를 구해내신 것의 의미를 소돔과 고모라의 비유로 잘 알겠습니다.

인류는 그 십자가 사건 이후로 덤으로 사는 역사, 덤으로 사는 인생과 같은 은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왜 전 2,000년전 유대 젊은 사람의 죽음이 인류를 구원했는지 정확하게 의미를 알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실감이 납니다. 이런 상황 판단을 못하고 내가 잘나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내가 뭘 한참 몰랐었습니다.

찬송가의 많은 구절들이 귀에 잘 들려옵니다.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이 오히려 소돔과 고모라의 상황과 덜한지 더한지는 몰라도 생명의 소중함이 너무도 가볍게 여겨지는 때 입니다. 용서의 기간이 끝이 있는 건 아닌가요. 그게 아니면 여전히 모두를 용서해줄 만큼의 의인이 어딘가에 그래도 있기 때문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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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03, 2014
*.94.91.64

... 계속 비가 내렸다면... 운운이 무슨 뜻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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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April 04, 2014
*.220.104.49

죄송합니다.

요즘 미국에서 새로나온 영화 "노아"광고를 보다가 그 여파가 나한테 들어왔나봅니다.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용서대신에 "저들을 벌하소서" 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인류를 물로 심판하시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 본 것입니다.


앞, 뒤 다자르고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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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61
848 부활절 하늘이 열립니다! [4] 2008-04-20 15250
847 성탄절 예수는 예언의 성취! [5] 2007-12-30 15248
846 주현절 원수사랑, 가능한가? (마 5:38-48) [26] 2014-02-23 15234
845 기타 마른 뼈와 야훼의 영 [1] 2006-06-04 15209
84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몸’ [8] 2009-12-21 15183
843 기타 고난 받는 그리스도 [2] [2] 2006-10-01 15181
842 기타 빛과 어두움 [3] 2004-06-30 15154
841 부활절 '서로' 사랑하라. (요 13:31-35) [15] 2016-04-24 15136
840 성령강림절 믿음의 완성 [26] 2007-08-26 15133
839 기타 창조 영성 [4] [2] 2006-09-17 15102
838 성령강림절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다 [24] 2009-06-29 15098
837 대림절 주의 날을 준비하라. (마 24:36-44) [11] 2016-11-27 15089
836 부활절 환상을 보는 사람들 (행 16:6-15) [12] 2013-05-06 15089
835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좋은 선택 (눅 10:38-42) [15] 2016-07-17 15085
834 대림절 새로운 세상이 온다! [2] 2006-11-26 15015
833 기타 기도와 말씀 선포 [6] [2] 2004-06-30 15014
832 기타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 [1] 2004-07-02 14881
831 사순절 무엇이 구원의 표적인가? [13] 2009-03-16 14864
830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4860
829 성령강림절 우리의 주인은 한 분이다! file [5] 2010-09-20 14824
828 기타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1월22일 [2] 2006-01-22 14798
827 성령강림절 상을 받는다는 것 (마 10:40-42) [11] 2014-06-29 14787
826 기타 만나의 영적 의미, 9월18일 [6] 2005-09-18 14784
825 성령강림절 신앙과 위선 (눅 13:10-17) [6] 2013-08-25 14773
824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758
823 성령강림절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마 14:22-33) [18] 2014-08-10 14746
822 부활절 하나님의 영광이 답이다 (벧전 5:6-11) [15] 2011-06-07 14745
821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마 21:33-46) [8] 2011-10-02 14714
820 대림절 그 날과 그 때 (막 13:24-37) [8] 2014-11-30 14694
819 기타 욥의 하나님 경험 [6] [1] 2006-11-05 14685
818 성령강림절 “그는 누군가?” [18] 2009-07-06 14674
817 창조절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합 1:1-4, 2:1-4) [10] 2013-11-04 14670
816 성령강림절 종말과 생명 완성 (마 16:21-28) [16] 2011-08-29 14670
815 대림절 “사람의 아들”이 온다. [2] 2006-12-03 14644
814 사순절 아브람의 거룩한 두려움 [8] 2010-03-01 14580
813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576
812 성령강림절 재물과 하나님 나라 [22] 2009-10-19 14561
811 기타 마음의 장애를 넘어 [4] 2006-06-18 14527
810 사순절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6-11) [6] 2014-04-07 14519
809 창조절 약속의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 (렘 31:27-34) [10] 2013-10-21 14479
808 성령강림절 성령경험과 구원경험 [2] 2010-05-23 14471
807 성령강림절 다리 저는 야곱 [10] 2011-07-31 14467
806 성령강림절 울지 말고, 일어나라! (눅 7:11-17) [16] 2016-06-05 14459
805 대림절 두 여자의 만남 [1] 2006-12-24 14405
804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29] [4] 2009-03-09 14372
803 창조절 용서는 가능한가? (마 18:21-35) [24] 2014-09-15 14357
802 사순절 영적 긴장감 [18] 2007-03-11 14323
801 주현절 예수와 귀신 [44] 2009-02-09 14321
800 성령강림절 혼합주의 신앙을 혁파하라! [13] 2007-11-04 14304
799 부활절 새 창조와 새 생명 [4] 2010-04-05 14297
798 기타 신앙의 외면과 내면 (빌 2:14~18) [1] 2004-06-30 14281
797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라 [10] 2010-06-21 14277
796 대림절 영광과 찬양의 삶이란? [3] 2006-12-10 14272
795 성령강림절 천국식탁 이야기 (눅 14:1, 7-14) [22] 2016-08-28 14269
794 성령강림절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롬 5:1-5) [8] 2013-05-26 14239
793 부활절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다 [12] [3] 2010-05-09 14230
792 기타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막 9:14-29) [2] 2004-06-30 14221
791 성탄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요 1:10-18) [4] 2015-01-04 14216
790 성령강림절 아들을 바쳐라! [17] 2011-06-26 14212
789 대림절 거룩한 길이 열린다! [8] 2007-12-16 14198
788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145
787 대림절 광야의 ‘소리’를 넘어 [18] 2008-12-15 14116
786 성령강림절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8] 2007-05-27 14105
785 성령강림절 말의 주체, 말의 능력 [10] 2009-08-24 14085
784 대림절 영적 각성 [19] 2007-12-02 14077
783 대림절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8] 2008-12-08 14049
782 성탄절 성육신의 신비 (요 1:1-14) [12] 2013-12-25 14045
781 성령강림절 죽음, 삶, 하나님 file [13] 2010-11-07 14043
780 성령강림절 복음을 위한 진리 싸움 (갈 1:1-10) [9] 2013-06-02 14019
779 기타 그 날과 그 시간, 11월6일 2005-11-06 14012
778 성탄절 태초의 말씀 (요 1:1-14) [5] 2016-12-25 14006
777 성령강림절 악을 대하는 태도 [20] 2011-07-18 13981
776 대림절 희망의 하나님 (롬 15:4-13) [10] 2013-12-08 13968
775 부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14] 2010-04-11 13961
774 기타 평화와 두려움 [1] 2004-07-02 13961
773 대림절 그 날이 오면... [4] 2006-12-17 13945
772 부활절 바울과 루디아 (행 16:9-15) [9] 2016-05-01 13917
771 창조절 하나님 앞에서 '옳음'의 문제 (눅 18:9-14) [8] 2013-10-27 13888
770 주현절 성령과 세례에 대한 질문 [6] 2009-01-13 13884
769 부활절 복된 믿음 [29] 2009-04-20 13879
768 기타 부자 이야기 [2] 2004-07-02 13876
767 성령강림절 구원의 차별성과 보편성 [20] 2011-08-07 13871
766 기타 수군대는 사람들 2004-06-30 13848
765 부활절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22] 2009-05-18 13813
764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802
763 부활절 부활은 심판이다 [12] 2011-05-29 13800
762 부활절 믿음은 가능한가? [30] 2007-05-06 13793
761 기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2006-06-11 13779
760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757
759 성령강림절 새로운 창조의 하나님 file [9] 2010-11-14 13754
758 기타 세례요한의 질문 [1] 2004-07-02 13731
757 사순절 구원의 신비와 선한 일 [11] 2009-03-23 13728
756 기타 율법의 길, 복음의 길 [1] 2006-10-29 13722
755 대림절 희망의 하나님 [8] 2007-12-09 13719
754 대림절 복음 (롬 1:1-7) [12] 2016-12-18 13707
753 기타 사랑의 계명과 기쁨 [1] 2006-05-21 13681
752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680
751 성탄절 시험받은 예수 그리스도 (히 2:10-18) [14] 2013-12-29 13666
750 기타 이스라엘의 고집 [1] 2004-07-02 13653
749 기타 사도 바울의 자유 [2] 2006-02-05 13626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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