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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 (렘 31:27-34)

창조절 조회 수 14479 추천 수 0 2013.10.21 00:5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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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예레미야 31:27-34 

약속의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

렘 31:27-34, 창조절 여덟째 주일, 10월20일

 

 

2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 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9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30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신구약성서를 관통하는 여러 중심개념들이 있습니다. 사랑, 생명, 구원, 평화 등등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약속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약속이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old testament)과 신약(neu testament)이라는 이름 자체가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약속은 우리말 성경에서 계약, 또는 언약으로 표기되기도 합니다. 성경 곳곳에 하나님의 약속이 나옵니다. 노아 홍수 후에 하나님은 더 이상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노아와 약속을 맺으십니다. 그 증거로 무지개를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의 약속은 후손을 하늘의 별이나 땅의 먼지처럼 많이 허락하시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세상 마지막 때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은 인격적인 사건입니다. 한쪽이 인격적이지 않으면 약속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람과 강아지 사이에는 약속이 불가능합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나 속이는 기질이 농후한 사람과도 약속은 불가능합니다. 한쪽이 다른 한쪽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경우에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약속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주인과 하인 사이에 약속은 이뤄지지 못합니다. 약속은 기본적으로 평등한 인격관계에서만 정상적으로 이뤄집니다. 원칙적으로만 본다면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는 약속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약속을 맺으셨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대등한 위치로 자신을 낮추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약속에 제한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성서 기자들이 인식하고 경험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약속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바로 이 약속의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본문 31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리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예레미야는 지금 자신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한다.’고 하지 않고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성경에 아주 흔하게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유독 이 표현을 자주 썼습니다. 렘 31장에서만 찾아봐도 다음과 같습니다. 1, 2, 7, 14, 15, 16, 20, 23, 27, 31, 33, 34, 35, 36, 37, 38절. 그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는 표현을 이렇게 자주 쓴 이유는 당시 사람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의 간접 증거입니다. 그 당시는 바벨론의 위협이 노골화되고 있었을 때입니다. 여러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라의 꼴이 풍전등화입니다. 자칫 나라가 완전히 망하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팽배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자신들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인데 왜 이런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무엇이 여호와의 뜻인지도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고, 또 무엇이 그분의 말씀인지 종잡기 힘들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당시 민중들의 그런 상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말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황이 그만큼 절박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후렴구처럼 반복해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에 기대서 예레미야는 ‘새 언약’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새로운 약속을 맺으신다는 겁니다. 새로운 약속을 맺어야 할 이유는 첫 번 약속이 파기되었기 때문입니다. 첫 약속은 출애굽 때에 맺은 것입니다. 출애굽은 이집트에 소수민족으로 살면서 어려움을 당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 특별한 능력으로 해방시킨 사건입니다.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홍해를 가르셨으며, 광야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해내신 이유는 그들로 하나님을 바로 섬기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계명을 바르게 지키면 그들을 지켜주신다고 말입니다. 구약은 바로 그 약속을 기초로 합니다. 한 군데만 인용하겠습니다. 신 6:3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잘 사는 것에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가나안의 토착 종교인 바알의 유혹에 솔깃해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약속 파기입니다.


어떤 분은 약속 파기가 이스라엘이 성전 제사를 똑바로 못 드리고,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할 겁니다. 요즘으로 바꾸면 교회생활을 열심히 못했다고 말입니다. 그런 것은 핵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사와 제물을 받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분이 아닙니다. 세상이 모두 하나님의 것인데 무슨 소와 양과 비둘기 같은 제물이 필요하겠습니까. 엄격하게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실 뿐입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의 효도를 받고 싶은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혼입니다. 즉 생명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겁니다. 그들이 우상을 섬겼다는 말은 생명의 가치를, 혹은 생명의 근거를 물질적인 데만 두었다는 뜻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둔 삶의 방식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물질적인 것이 우리의 삶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선량하다 아니다, 인격적이다 아니다, 하는 거를 떠나서 저절로 그렇게 살게 됩니다. 결과는 생명의 훼손입니다. 즉 죽음입니다. 겉으로는 살아 있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거기서 돌아서라고 줄기차게 외쳤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이 생명과 생존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지 못했다고 보았습니다. 약속의 파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유대를 지켜주고 싶어도 지켜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자신을 제한시키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패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영적 통찰, 즉 역사해석입니다.


성서의 이런 진술을 너무 종교적이라거나, 비현실적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유대가 망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라기보다는 군사력과 경제력 때문이라거나, 당시 외교정책을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겠지요.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공부하신 분들은 다 알겠지만 나라의 운명이라는 게 단순히 국력에만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게 계산대로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로마의 역사가 달라졌을 거라는 말이 있듯이 어마어마한 역사의 변화도 에피소드에 불과한 작은 일로부터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레미야를 비롯한 구약의 선지자들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이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에 충실할 때만 개인이나 민족이 살아날 수 있다고 역설한 겁니다.


출애굽 때의 약속은 이제 폐기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대 민족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모든 게 끝장난 겁니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것과 같습니다. 처음의 약속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약속을 맺으신다고 예레미야는 선포합니다. 그 약속의 내용을 3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 말씀만으로 본다면 새 약속이 출애굽의 약속과 다른 게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에서 법은 율법을 가리킵니다. 그 율법은 이미 출애굽 직후 이어진 광야시절에 주어진 겁니다. 모세는 광야시절 초기에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해서 각종 율법을 받았습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왜 출애굽 당시에 이미 주어졌던 율법을 다시 언급하면서 그것을 새로운 약속인 것처럼 말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구약성서에 대한 개론적인 공부가 필요합니다. 구약성서는 창조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씨족들과 부족들, 그리고 이집트 이민과 가나안 정복과 부족시대와 왕정시대를 연대기적으로 차례대로 기록한 게 아닙니다. 고대시대에는 사람들이 이런 걸 기록할 생각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역사가 무엇이냐?’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나오면서부터 기록된 겁니다. 역사에 대한 질문은 문명이 아주 크게 발전하거나 어떤 위기에 처할 때에 나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학자들이 왕조의 정통성을 찾기 위해서 역사를 검토하기 시작했고, 바벨론 포로 시절을 거치면서 다시 역사의 의미를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도 비슷합니다. 좀 복잡한 설명이었는데요. 시내산의 율법은 출애굽 이후 당시에 완성된 게 아니라 대략 천년 후에 일어난 바벨론 포로 전후의 역사 경험이 거기에 소급된 거로 봐야 합니다.


이런 신학적인 설명을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예레미야가 그런 정도의 사실을 새로운 약속이라고 말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완성도가 좀더 높을 뿐이지 율법은 그대로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34절 말씀이 어떤 힌트를 제공합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이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새로운 약속이 맺어지면 하나님이 너무나 확연하게 나타나기에 더 이상 알라거나 믿으라고 말할 필요도 없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이들의 악행을 용서하고 죄를 기억하지 않게 됩니다. 그게 새로운 약속입니다. 모양이 아니라 내용 자체가 새로운 겁니다. 율법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영적 인식이며 경험이자 고백이었습니다. 아주 놀라운 예언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제 예레미야의 이 선포가, 이 예언이, 이 메시지가 그대로 성취되었을까, 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파괴되고 지도자들은 모두 포로로 잡혀갈 수밖에 없다는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일정한 세월이 흐른 뒤에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는 예언도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될 것이라는 새로운 약속에 대한 예언은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포로 귀환 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새로운 약속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성전을 재건축하고 율법을 다시 강조하고 여러 종교의식을 복원하면서 반짝하고 뭔가 이뤄질 것 같았지만 결국 나라꼴은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신앙도 별로 진전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변의 제국에 계속 시달리면서 자기나라 말도 다 잊었습니다. 결국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한 상태에서 예수님 시대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레미야가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제시된 새로운 약속은 유대 역사에서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레미야의 영적 통찰을 헛된 거라고 말하면 곤란합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게 옳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대 역사의 미래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선포한 겁니다.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에 사로잡혀서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말하는 새로운 약속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저절로 다 알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이들에게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드러나심은 계시입니다. 그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님에게 이르러서야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걸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드러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본 새로운 약속은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새로운 약속의 두 번째 성격은 사죄입니다.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34b)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서 사람이 악과 죄를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출애굽 때 받은 약속인 율법을 기준으로 하면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새로운 약속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을 일방적으로 용서하십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일방적인 사죄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예레미야가 말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다는 사실은 다 아는 이야기래서 시시하게 들리시나요? 시시하게 들려도 저는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정말 알고 계신가요? 알고 계시다 해도 반복해서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머리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온 영혼으로 알고 믿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그렇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과연 그런지 아닌지 사죄 문제만 확인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의 조건 없이 용서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다는 그 사실 하나에 근거해서 우리의 부족함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공부 좀 못한 거, 게으른 거, 경쟁력이 없는 거, 가난 등등, 이걸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신다는 사실 하나로 우리의 삶은 완성된 겁니다. 그게 새로운 약속입니다. 그게 실제로 느껴지십니까?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우리 자신이 어딘가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남에게 부족한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노심초사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피곤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기억하지도 않으시는 일들을 굳이 일일이 기억하느라 지쳐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에 굳게 서서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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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잠자는회색늑대

October 22, 2013
*.105.156.243

"비밀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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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2, 2013
*.94.91.64

그렇네요.
우리가 너무 계산을 많이 하면서 사네요.
생각이 깊은 건 좋지만
그냥 복잡한 거니까 좀 우습지요?
뼈를 깎는 수행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믿음이 쉬운 거 같지만 아니거든요.
수행을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될지,
수행에도 수준이 있을지,
수행과 구원은 어떤 관계일지,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네요.
모르는 건 그냥 덮어두고
아는 것만 붙들고 사는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에 기대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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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여름비

October 23, 2013
*.182.17.150

목사님 궁금한게 있어 질문 드려요.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를 쓰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그럼 언제 어떻게 모국어를 회복했는지 궁금합니다.
.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한 이후 각지로 흩어지고 최근 건국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히브리어를 잊지 않고
사용하는 것을 보면 또 굉장히 신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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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3, 2013
*.94.91.64

좋은 질문을 하셨는데,
내가 정확하게 모르겠네요.
여름비 님의 대글에 단서가 있습니다.
2천년 동안 디아스포라로 살면서
그들이 히브리어를 쓰지는 않았겠지요.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으나 
시오니즘에 토대한 이스라엘 국가 설립을 계획하면서 
모국어 찾기, 혹은 모국어 쓰기 운동도 벌이지 않았을까요? 
일반 이스라엘 사람들은 히브리어를 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종교 지도자들은 학문적으로라도 히브리어를 썼을 테니 
그걸 대중들에게 전파하기로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게 없었을 겁니다. 
제가 추측하기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나라를 세우면서 
히브리어를 공영어로 채택하면서 히브리어가 살아났겠지요.
구약성서 언어인 고대 히브리어와
지금 그들이 쓰는 현대 히브리어가 어떻게 비슷하고 다른지
아마 어딘가 문헌에 나와 있을 거 같는데
혹시 찾게 되면 알려주세요.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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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길위의벗

October 23, 2013
*.76.181.73

 정 목사님 댓글에 숟가락만 얹어 보자면,
구어로서는 死語가 된 히브리어가 다시 되살아나도록
힘을 쓴 사람이 벤 예후다입니다.
예후다의 자세한 생애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시오니즘을 바탕으로 유대의 모국어를 살리고 싶은 열망으로
혈혈단신 히브리어를 살리는 데에 일생을 바쳤다고 들었어요.

현대 히브리어와 성서 히브리어의 차이 등은 일반 시중에 나온
대부분의 히브리어 교재에 간략하게나마 나와 있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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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여름비

October 24, 2013
*.182.17.150

2000천년여 동안 사어가 되다시피한 말을 되살려내어
한 국가의 모어로 정착시켰다니 놀랍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EnChristo 님 보충설명 고맙습니다.
profile

[레벨:3]거북도사

October 25, 2013
*.95.47.212

목사님의 설교를 매번 프린터해서 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입에서 ccm 가사가 생각이 나네요
 2절 가사가 마음에 다가 옵니다.

십자가 그사랑
십자가 그사랑 멀리 떠나서
무너진 나의 삶속에 잊혀진 주은혜

돌같은 내마음 어루만지사
다시 일으켜 세우신 주를 사랑합니다

주 나를 보호하시고 날 붙드시리
나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님의 자녀라*2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지 않고
이전에 행한 모든일 생각지 않으리

사막에 강물과 길을 내시는 주
내안의 새일 행하실 주만 바라보리라

주 너를 보호하시고 날 붙드시리
너는 보배롭고 존귀한 주님의 자녀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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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25, 2013
*.94.91.64

가사가 좋습니다.
나는 원래  ccm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이 노래는 뭔가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튜브에서 한번 찾아 들어봐야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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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April 07, 2014
*.220.104.49

목사님. 내가 가난의 고통을 겪어 봤지만 그 것보다 더 힘든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는 것입니다.  얼마전 우리 막내가 지갑에서 돈을 훔쳐서 친구들에게 이것 저것 사주고 신나게 학원도 안가고 놀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막내를 벌하려고 취조를 하는데 안타까운 사실들을 알았습니다.

그 친구들은 학교 마치고 학원을 안가고 놀러 다닌다고 했습니다.

집에가도 아무도 없습니다. 홈플러스 같은데 다니다 도벽이 발동하기도 하고 밤이 늦어도 가방을 매고 집으로 들어가지를 않았습니다.  엄마는 한국분이 아닌 애도 있었습니다. 그런 친구들과 막내가 3일동안 훔친 돈으로 펑펑쓰면서 다녔습니다. 전체적으로 흘러가는 이 돈의 쓰나미에 대부분 빠져나오질 못합니다. 교육열이 사람 잡는 것 같습니다. 스팩을 갖추는 뜨거운 전쟁을 제발 누군가가 식혀 주었으면 너무 좋겠습니다.  나도 애들에게 계속 열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더 뛰라고. 부끄러운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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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07, 2014
*.94.91.64

아이들의 문제는 다 어른들의 책임이겠지요.

힘 닿는데까지 그런 아이들을 보듬고 나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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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0 주현절 야훼의 영광과 빛 [11] 2008-01-06 14860
829 성령강림절 우리의 주인은 한 분이다! file [5] 2010-09-20 14823
828 기타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1월22일 [2] 2006-01-22 14797
827 성령강림절 상을 받는다는 것 (마 10:40-42) [11] 2014-06-29 14786
826 기타 만나의 영적 의미, 9월18일 [6] 2005-09-18 14781
825 성령강림절 신앙과 위선 (눅 13:10-17) [6] 2013-08-25 14773
824 사순절 살리는 영 [10] 2008-03-09 14758
823 성령강림절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마 14:22-33) [18] 2014-08-10 14745
822 부활절 하나님의 영광이 답이다 (벧전 5:6-11) [15] 2011-06-07 14744
821 창조절 하나님 나라의 열매(마 21:33-46) [8] 2011-10-02 14713
820 대림절 그 날과 그 때 (막 13:24-37) [8] 2014-11-30 14694
819 기타 욥의 하나님 경험 [6] [1] 2006-11-05 14684
818 성령강림절 “그는 누군가?” [18] 2009-07-06 14671
817 성령강림절 종말과 생명 완성 (마 16:21-28) [16] 2011-08-29 14670
816 창조절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합 1:1-4, 2:1-4) [10] 2013-11-04 14669
815 대림절 “사람의 아들”이 온다. [2] 2006-12-03 14642
814 사순절 아브람의 거룩한 두려움 [8] 2010-03-01 14578
813 성령강림절 하늘나라 주인의 셈법 [19] 2008-11-09 14573
812 성령강림절 재물과 하나님 나라 [22] 2009-10-19 14559
811 기타 마음의 장애를 넘어 [4] 2006-06-18 14526
810 사순절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6-11) [6] 2014-04-07 14519
» 창조절 약속의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 (렘 31:27-34) [10] 2013-10-21 14479
808 성령강림절 성령경험과 구원경험 [2] 2010-05-23 14471
807 성령강림절 다리 저는 야곱 [10] 2011-07-31 14463
806 성령강림절 울지 말고, 일어나라! (눅 7:11-17) [16] 2016-06-05 14457
805 대림절 두 여자의 만남 [1] 2006-12-24 14404
804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29] [4] 2009-03-09 14371
803 창조절 용서는 가능한가? (마 18:21-35) [24] 2014-09-15 14356
802 사순절 영적 긴장감 [18] 2007-03-11 14321
801 주현절 예수와 귀신 [44] 2009-02-09 14319
800 성령강림절 혼합주의 신앙을 혁파하라! [13] 2007-11-04 14304
799 부활절 새 창조와 새 생명 [4] 2010-04-05 14294
798 기타 신앙의 외면과 내면 (빌 2:14~18) [1] 2004-06-30 14281
797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라 [10] 2010-06-21 14276
796 대림절 영광과 찬양의 삶이란? [3] 2006-12-10 14268
795 성령강림절 천국식탁 이야기 (눅 14:1, 7-14) [22] 2016-08-28 14267
794 성령강림절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롬 5:1-5) [8] 2013-05-26 14238
793 부활절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다 [12] [3] 2010-05-09 14229
792 기타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막 9:14-29) [2] 2004-06-30 14219
791 성탄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요 1:10-18) [4] 2015-01-04 14215
790 성령강림절 아들을 바쳐라! [17] 2011-06-26 14208
789 대림절 거룩한 길이 열린다! [8] 2007-12-16 14194
788 부활절 보이지 않는 현실성 [19] 2008-03-30 14145
787 대림절 광야의 ‘소리’를 넘어 [18] 2008-12-15 14115
786 성령강림절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8] 2007-05-27 14105
785 성령강림절 말의 주체, 말의 능력 [10] 2009-08-24 14083
784 대림절 영적 각성 [19] 2007-12-02 14075
783 대림절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8] 2008-12-08 14046
782 성령강림절 죽음, 삶, 하나님 file [13] 2010-11-07 14043
781 성탄절 성육신의 신비 (요 1:1-14) [12] 2013-12-25 14042
780 성령강림절 복음을 위한 진리 싸움 (갈 1:1-10) [9] 2013-06-02 14017
779 기타 그 날과 그 시간, 11월6일 2005-11-06 14012
778 성탄절 태초의 말씀 (요 1:1-14) [5] 2016-12-25 14004
777 성령강림절 악을 대하는 태도 [20] 2011-07-18 13981
776 대림절 희망의 하나님 (롬 15:4-13) [10] 2013-12-08 13967
775 부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14] 2010-04-11 13961
774 기타 평화와 두려움 [1] 2004-07-02 13959
773 대림절 그 날이 오면... [4] 2006-12-17 13942
772 부활절 바울과 루디아 (행 16:9-15) [9] 2016-05-01 13916
771 창조절 하나님 앞에서 '옳음'의 문제 (눅 18:9-14) [8] 2013-10-27 13887
770 주현절 성령과 세례에 대한 질문 [6] 2009-01-13 13883
769 부활절 복된 믿음 [29] 2009-04-20 13876
768 기타 부자 이야기 [2] 2004-07-02 13874
767 성령강림절 구원의 차별성과 보편성 [20] 2011-08-07 13870
766 기타 수군대는 사람들 2004-06-30 13846
765 부활절 이방인에게도 세례를! [22] 2009-05-18 13812
764 부활절 부활은 심판이다 [12] 2011-05-29 13799
763 사순절 구원의 현실 [9] 2008-03-02 13799
762 부활절 믿음은 가능한가? [30] 2007-05-06 13792
761 기타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2006-06-11 13776
760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 [9] 2008-08-24 13756
759 성령강림절 새로운 창조의 하나님 file [9] 2010-11-14 13752
758 기타 세례요한의 질문 [1] 2004-07-02 13731
757 사순절 구원의 신비와 선한 일 [11] 2009-03-23 13727
756 기타 율법의 길, 복음의 길 [1] 2006-10-29 13720
755 대림절 희망의 하나님 [8] 2007-12-09 13716
754 대림절 복음 (롬 1:1-7) [12] 2016-12-18 13705
753 부활절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17] 2008-04-13 13680
752 기타 사랑의 계명과 기쁨 [1] 2006-05-21 13679
751 성탄절 시험받은 예수 그리스도 (히 2:10-18) [14] 2013-12-29 13666
750 기타 이스라엘의 고집 [1] 2004-07-02 13651
749 기타 사도 바울의 자유 [2] 2006-02-05 1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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