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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토대

기타 조회 수 12118 추천 수 36 2004.07.02 16:23:36
성경본문 : 골로새서 1:15-20 

세계의 토대
골 1:15-20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일정한 형식으로 불려진 송가
중의 하나입니다. 골로새서나 다른 서신의 일반적인 내용은 교회 안에서 벌어진 어떤 구
체적인 사안을 다루고 있는 반면에, 그리고 신앙적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발신자와 수신
자 사이의 어떤 사안을 전제하고 있지만 이런 종류의 송가는 교회 회중이 함께 읽거나
음률을 넣어 부르는 일정한 형식으로 구성된 신앙고백입니다. 아마 초기 기독교에는 이
런 종류의 송가가 제법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예배 때 불려지는 찬송으로 발전
하거나 또는 사도신경 같은 신앙고백문으로 발전했습니다. 흡사 우리나라에도 전래 민요
가 있듯이 말입니다. 이 본문이 비록 일반 서술문이 아니라 매우 깊은 신앙적 깊이를 담
보하고 있는 송가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접
근하면 우리에게 새로운 차원의 영성을 제공해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세계
이 송가의 핵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곧 세계 창조 및 그 존립의 토대라는 사실
입니다. 15,1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
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
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17절은 이렇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 일단 우리는 이런 주장의 기초가 얼마나
타당한지 꼼꼼하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서의 진술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대충 '그러려니...'하고 넘어가는 것은 별로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성서가 진리라는 사
실을 실제로 믿고 있다면 그 어떤 비판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비판의 첫걸음
은 상식적인 기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세상, 또는 이 우주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하게 밝히기는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지구를 비롯해서 아홉 개의 행성을 거느리고 있는 태양계는 대충 45억년 쯤
되었다고 합니다. 간혹 기독교 근본주의에 속하는 사람들이 구약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
해서 지구의 나이는 6천년으로 삼고 있기도 하지만 그런 주장은 아예 상대할 필요도 없
습니다. 우주는 그것보다 훨씬 오랜 120억년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도 우리의 물리
학적 측정이 가능한 우주에 제한되는 것이지 앞으로 훨씬 정밀한 관측 기술이 발전하게
된다면 이것보다 더 오래된 우주의 영역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거시의 세계는
접어두고 일단 지구만 두고 말하더라도 지구의 나이 45억 년과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살
았던 2천년 전의 시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석가모니나 노자보다
훨씬 후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
계가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자연과학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일까요? 또는 그들이 모든 소종파의 특성인 열광주의에 빠졌기 때문일까요? 어쨌든
지 오늘 우리의 상식에 비추어보더라도 이런 시간 계산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처럼 보
입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깊은 영적인 세계를 체험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과연 그들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일까요?  

세계와 창조
구약성서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약성서 기자들도 이 세계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게 바로 이 세계를 바라보는 성서의 눈과 다른 종교 및 철학의 눈이 다른
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세상은 저절로 그렇게 존재하게 되었고,
저절로 그렇게 존립하고 있나요? 아니면 우리 기독교 신앙의 전통대로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을까요? 이미 기독교 신앙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
는 물어보나 마나한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닫아버리면 안 됩니다. 그런 질문의 순간과 그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에게 훨씬 깊은 차원에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
는 이 존립의 근거인 세계와 연관된 주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선 이 세계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인식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중요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경험하고 인식하는 이 세계를 매우 당연한 어떤 대상으로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이 세상을
봅니다. 아침에 태양이 뜨고 저녁에 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보면 태양이 뜨거나 지는 게 아니라 지구가 자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
동설을 발견하기 전까지 사람들의 인식에 천동설이 진리로 작동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
무도 천동설을 믿지 않습니다. 이런 간단한 논리가 말하려는 바는 이 세상은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는 그 모양대로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모든 사물, 이 모든 우주가 우리에게 비쳐지는 것과는 원래 다를 수 있습
니다. 우리의 일상과 약간 먼 이야기이지만 이런 부분을 생각해보십시오. 태양과 가장
가까운 별은 2-4광년의 거리에 있습니다. 만약 그 별의 행성 중에서 한 곳에 인간보다
훨씬 지능이 발전한 생명체가 있어서 우리 지구를 관측한다고 합시다. 그들이 보는 우리
지구의 모습은 2,4년 전입니다. 조금 더 먼 세계로 들어가 볼까요? 지금도 우리 눈에 들
어오는 별들은 바로 이 순간이 아니라 100억년 전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거시적
인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있는 사소한 사물 자체도 역시 100광년 떨어진 별과 마
찬가지로 우리가 잘 모릅니다. 그만큼 이 세계의 구성은 신비하다는 말씀입니다.  
성서기자들이 비록 우리의 물리적 지식을 모르긴 했겠지만 이 세계의 신비에 대해서
는 우리 못지 않게 큰 충격과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도저히 잡아
낼 수 없는 이 세계의 신비 앞에서 성서기자들은 하나님의 창조 사건을 말할 수밖에 없
었습니다. 창세기, 시편, 잠언, 이사야, 예레미야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구약성서는 이
세계에 대한 그런 신비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욥기서는 가장 명시적으로 그런 내용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렇게 세상물정
을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했느냐? 그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
냐? 어디에 땅을 받치는 기둥이 박혀 있느냐? 그 누가 세상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네
가 바다속 깊이 더듬어 내려가 바닷물이 솟는 샘구멍까지 찾아 가 보았느냐? 너는 죽음
의 문이 환히 드러나는 것과 암흑의 나라 대문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을 본 일이 있느
냐?"(욥 38:4...17).
성서기자들이 이 세계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이 세계의 신비를
철저하게 인식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계가 그렇게 움직여가지 않을 수 없게 이끌어 가
는 그 분이 없다면 이 세계는 결코 해명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서가 기록되던 시대
에 비해서 오늘 우리가 엄청난 물리학적 발전을 이룩하긴 했지만 이 세계와 사물의 신비
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그런 정보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신
비는 더 은폐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무언가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서 기자들과 마찬가
지로 오늘도 우리는 이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믿고 그렇게 고백합니다. 즉 세계와
사물의 신비 속에 바로 하나님의 창조능력이 숨어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가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진술함으로써 하나님
ㅁ의 창조가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논증합니다.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가 바로 창조자 하나님과 하나이기 때문에 이 세계가 곧 그리스도에 의해서 창
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곧 하나님과 세계를 새로운 차원과 새로운 깊이에서 인식하
는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입니다.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하나님의 형상'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해명하려면 책 한 권을 써
도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형상이 플라톤의 '이데아'와 비슷한 것인지, 아리스토텔
레스가 말하는 '형상과 질료'의 한 부분인지, 아니면 창세기의 기록대로 하나님이 인간
을 만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바로 그 형상인지 곰곰이 생각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굳이 전문적인 신학 개념 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 본문 자체의 도움을 받아서 이 '형상'이라는 단어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9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이 본문에 따라서 형상을 본질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식을 뛰어
넘는 이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의 본질이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면 그리스도가 모든 세계
와 사물보다 먼저 존재했으며, 이 세계와 사물이 그를 통해서 창조되었다는 진술은 옳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완전한 본질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그 완전한
본질이 무엇일까요? 초능력인가? 18절 중반절에 보면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
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습니다"라고 합니다. 부
활의 생명이 곧 완전한 본질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 이전의 예수님은 결
코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도덕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게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역
사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지만
생명으로부터 단절되지 않고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심으로써 그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본
질이 주어졌습니다. 이 부활은 곧 참된 생명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참된 생명의 단초가 시작되었다면 비록 그가 시간적으로 120억 년이라는 우주의
시간보다 늦은 분이었지만 실제로는 모든 사물, 이 세계보다 앞선 분이었다고 할 수 있
습니다. 왜냐하면 생명 없이 단지 사물로서만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수 천 억개의 별이 있어도 단지 불덩어리인 별로만 남아 있다면, 그
리고 생명이 실현되기 이전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참된 생명을 발
견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도 가르침이지만 그분에게서 발생한 부활 사건에서 이를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생명 세계에 들어간다
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곧 구원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성취할 수 있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생명의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개시되었습니다. 그
런 의미에서 예수는 곧 메시아이며, 그리스도이셨습니다.

하나님과 세계의 화해
오늘 본문은 이 세상이 모든 세계와 사물의 근거이며 목표인 참된 생명의 세계로 들
어갈 수 있도록 그리스도가 감당하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20절에 기록
된 대로 그것은 곧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 세계가
하나님과의 반목으로 인해서 구원을, 즉 참된 생명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
해서 그 일을 해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써
이 세계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게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기본적인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성서의 진술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친구
와의 화해, 또는 부모와의 화해는 이해하기 쉽지만 하나님과의 화해는 너무 추상적인 것
같습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과 화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
님이 누구인지, 그분의 정체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그분과 화해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은 예수님에게만 주어진 사명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계가 하나님과 화해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아마 어떤 분은 그런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 우리 기독교인의 인식과 믿음의 경계선이, 일종의 긴장이 놓여 있습니
다. 이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어느 부분이 우리의 이성적 인식과 관계되며, 또 어떤
부분이 우리의 신앙적 결단에 관계되는가 하는 미묘한 문제입니다. 때로는 이 경계선이
명백한 때가 있지만 어떤 경우는 중복되거나 약간의 비약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그런 경험과 인식이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정당하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일은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계와 하나님 사이의 반목을 허무시고
화해를 이루었다는 객관적인 사실의 실체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아직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편으로 성서와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바를 객관적으로 인
식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며, 동시에 아직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광신으로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과학자들이 아직 증명되지 않은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충분한 근거를 갖고 추
정한 그 사실을 신뢰하고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사실을 실제로 발견해내듯이 우리 기독교
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 사건을 믿음으로써 결국 그것이 모두에게
확연하게 드러나고 증명될 날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물리학자들의 세계 인식도 우리 기독교인의 세계 이해보다 앞서
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이 세계와 사물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기 때문입니
다. 전자 망원경을 통해서 우주의 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전자 현미경을 통해서 물질
의 미시세계를 연구하는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성서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이
세계가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이 세계의 길
입니다. 그가 이 세계의 시초이며, 미래이며, 궁극적인 토대입니다. 이런 믿음과 희망을
안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세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갑시다.
<2004.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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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5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7] 2013-02-18 12586
674 부활절 상호내주의 비밀 (요 17:20-26) [5] 2013-05-12 12582
673 사순절 떠돌이 아람인의 후손 [15] 2007-02-25 12562
672 기타 풍요로움의 근거, 11월20일 [4] 2005-11-20 12542
671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539
670 성령강림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22] [1] 2009-11-16 12514
669 부활절 믿음과 희망 (벧전 3:13-22) [4] 2017-05-21 12510
668 성탄절 크게 기뻐하라! [11] 2009-01-05 12498
667 창조절 신앙과 소금 (막 9:38-50) [6] 2015-09-27 12497
666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497
665 사순절 만나가 멎는 날 [11] 2007-03-18 12489
664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457
663 주현절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2] 2007-02-18 12454
662 부활절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 일치 [3] 2010-05-17 12443
661 기타 비뚤게 보기와 바로 보기 [1] [1] 2004-07-02 12443
660 성탄절 종이냐, 자녀냐 [26] 2008-12-29 12386
659 부활절 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 15:1-8) [8] 2015-05-03 12382
658 기타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1] 2004-07-02 12381
657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375
656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12367
655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12325
654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 송영 (골 1:15-23) [2] 2013-07-21 12318
653 부활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9-26) [7] 2016-03-27 12297
652 기타 사울의 어리석음 [1] 2004-07-02 12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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