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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의 이유, 1월2일

기타 조회 수 12546 추천 수 30 2005.01.02 23:56:43
성경본문 : 에베소서 1:3-14 
2005.1.2        
찬양의 이유
엡 1:3-!4

세 번의 찬양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들이 거의 반복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좀 장황한 듯 보입니다. 찬양, 영적 축복, 거룩하고 흠 없는 자, 은총, 죄, 용서, 하나님의 계획, 희망, 복음, 성령, 약속, 상속, 하나님의 백성, 완전한 자유 등등, 여기에 나온 단어들만 깊이 있게 새겨보려고 해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대개의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말씀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접근하기 힘들기 때문에 좀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말씀을 대하면서도 별로 깊은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개의 신자들은 “좋은 말씀이겠지!” 하는 생각에 머물고 맙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비유라든지 병 고치신 이야기, 또는 사도행전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일단 우리에게 쉽게 다가올 뿐만 아니라 재미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같은 말씀인데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가 쉽게 다가가거나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본문에 비해서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은 신학적인 요소가 훨씬 강하게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흡사 사도신경처럼 상당히 오랫동안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신학적 논의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학적 성격이 강한 텍스트를 읽을 때 우리는 당연히 그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겉돌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본문을 대할 때는 훨씬 세밀한 관찰이 필요합니다. 이런 관찰은 본문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여러분들이 본문을 읽을 때 눈치 챘는지 모르겠지만 본문은 세 구조로 짜여졌습니다. 3-6, 7-12, 13-14이 그것입니다. 다른 본문에 비해서 이 텍스트의 구조가 우리의 눈에 쉽게 들어오는 이유는 각각의 단락마다 “우리는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는 문장으로 마무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 단란의 마지막 구절인 6절은 이렇습니다.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단락의 마지막 구절인 12절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맨 먼저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14절도 보십시오. “성령께서는 우리가 받을 상속을 보증해주시고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신구약성서 곳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진술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시편은 아예 모든 내용이 이런 찬양입니다. 모세오경과 예언서도 구체적으로 찬양의 형식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내용을 담은 대목이 많습니다. 도대체 성서가 말하는 찬양은 무슨 뜻입니까? 찬양이라는 낱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대상을 칭찬하거나 높이는 우리의 태도가 찬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그분과 그분의 행위를 칭찬하거나 높인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바로 이런 찬양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형식 안에 찬양이 제법 많습니다. 요즘은 그런 정도로도 부족해서 거의 찬양 중심의 예배가 드려지기도 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열정이 뜨겁다는 의미에서 일단 좋은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찬양의 토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좀더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도 교회에서 찬양을 많이 불렀습니다. 준비찬송이라는 게 있어서 주일공동 예배를 드리기 전에 보통 두, 세 곡 정도, 많으면 다섯 곡 정도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부흥회 같은 모임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 심했습니다. 한 시간 이상 찬송을 반복적이고 열광적으로 불렀습니다. 아마 그 당시에는 찬송을 많이 부르면 부를수록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찬송가 가사를 생각하고 곡조를 음미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는 것 같지만 반복되면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따라 부르기만 합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찬양하는 사람들이 결국 자기감정에 빠져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감정, 자기연민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찬양할만한 내용이 없어도 얼마든지 찬양하는 듯한 포즈를 취할 수 있습니다. 흡사 한 맺힌 과부들이 안면부지의 장례 집에 가서도 통곡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배용준의 꾸며진 이미지에 일본 아줌마들이 감동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찬양은 사람의 심리와 감정이 아니라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에 집중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찬양해야 하는지 매순간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을 때만 우리의 찬양은 참된 찬양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론적인 찬양
성서의 찬양은 결코 사람들의 자기 연민이나 열정이 아니라 매우 분명한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창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임재 같은 내용을 통해서만 찬양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세 번의 찬양이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기독론적인 구조를 띠고 있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첫 찬양의 내용은 하나님이 천지창조 이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4). 그런데 그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합니다(5).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인식하고, 믿고 있던, 그래서 찬양할 수밖에 없었던 이 사실을 여러분은 얼마나 또렷하게 인식하고, 믿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무조건 믿는다고 말할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믿기지는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둘째 찬양의 내용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오한 뜻을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8,9).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선택과 예정, 그 뜻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바로 찬양의 내용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인식행위마저 주체적인 능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태도를 종교적 열광주의라고 낮추어보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인식능력이 얼마나 촌스럽고 유한한지 아는 사람들은, 그리고 우리의 인식행위에 어떤 힘들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이런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작곡가들은 자기의 자기가 작곡하는 게 아니라 소리 자체가 작곡한다고 생각하며, 위대한 미술가들은 자기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다른 힘이 그린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셋째 찬양의 내용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표로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13). 오늘 본문에서 가리키는 성령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을 ‘방언’이나 세계선교로 보기도 하고,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자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더 넓은 의미로 본다면 성령은 이 세상에 생명을 불러오고 유지하고 완성시키는 영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자신들을 끌어가는 어떤 신비한 힘을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방언으로, 때로는 치유로, 이방선교로, 교회 안에서의 사귐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다르게 표현될 뿐이지 결국은 거룩한 생명의 힘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셋으로 구분된 찬양의 내용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됩니다. 하나님의 선택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것이며, 우리의 인식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발생한, 또한 발생하게 될 사건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도 역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표였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는 “그래,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 그건 우리가 쉽게 따라갈 수 없는 기독교 교리에 불과한 거 아니냐?”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가르침은 교리이지만 일방적인 교리가 아니라 어떤 삶과 세계를 담고 있는 교리입니다. 이런 교리를 아무런 생각 없이 무조건 믿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신의 삶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도대체 에베소서는 이런 교리적인 내용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찬양할 내용이 겨우 세 가지뿐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늘 반복해서 듣고 있는 교리를 또 한번 들은 것에 불과한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건조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 극적인 이야기나 웃음거리를 곁들여만 하나요? 그런 게 조미료처럼 음식의 맛을 돋을 수는 있지만 음식은 조미료가 아니라 재료와 또한 만드는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의 핵심으로 파고들어야 할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세 번이나 찬양할 이유가 있다는 오늘 본문이 핵심적으로 전하려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
우리는 위에서 본문이 말하는 찬양의 세 가지 이유를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그 세 가지 항목이 근원적으로 말하려는 핵심은 훨씬 본질적인 데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12절과 14절은 똑같이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표현합니다. 6절은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우리의 인식, 성령의 임재가 모두 한결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마틴 루터 번역본은 이 영광을 ‘Herrlichkeit’라고 번역했습니다. 말 그대로 신의 영광, 주권, 통치권 등의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이 은총은 바로 하나님만의 결정 사안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되었다는 사실도 역시 하나님만의 자유입니다. 특히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든 것을 뜻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따라 우리를 미리 정하시고 택하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 구절에 하나님의 영광이 의미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인 이유는 모든 것을 자신의 자유에 의해서 자신의 뜻하신 대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선택이 우리의 모든 삶을 완전하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찬양해야 한다는 이 에베소서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에 동의하십니까?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면 우리의 의도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했지만 조금 더 심층적으로 생각하면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의도를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성탄절 다음날 발생한 남아시아의 지진과 해일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사건과 힘들이 압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사건을 만날 때마다 당황하고, 또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지만 크게 본다면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지진과 해일을 일으킨 지구의 판운동은 바로 지구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판운동이 없다면 지구는 생명을 존속시킬 수 없다고 합니다. 어쩌면 먼 훗날 인류의 후손들은 이번의 지진으로 인해서 지구의 생명운동이 훨씬 활성화했다고 분석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오염시킨 대지를 이런 판운동을 통해서 완전히 뒤바꿔놓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이 고백은 바로 이 세계, 우주 전체,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동물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를 궁극적으로 긍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우리에게 큰 시련과 허무처럼 보이는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의 세계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가 간혹 숙명주의에 빠질 수 위험성이 있긴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이 자칫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모든 주체적인 생각과 행동을 마비시킬 수도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게 하나님의 뜻이야!” 하면서 역사로부터 벗어나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이 고백은 결코 비관적 숙명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어두운 부분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빛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어떤 상황 앞에서도 결코 우울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폐쇄적이거나 숙명적이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찬양할 마음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삶과 이 세상에서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그런 하나님이 영광이 스며들고 있습니까?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매일 찬양하고 싶으십니까? 금년 한해가 그렇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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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권현주

January 12, 2005
*.149.7.196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기때문이 아니라
기꺼이
그렇기때문에 긍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찬양과 긍정의 세계가 궁금합니다.
가노라면 열릴거라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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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1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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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3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269
652 성탄절 종이냐, 자녀냐 [26] 2008-12-29 12266
651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12263
650 사순절 다윗과 여호와의 영 (삼상 16:1-13) [5] 2014-03-30 12241
649 부활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9-26) [7] 2016-03-27 1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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