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8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마 16:21-28)

성령강림절 조회 수 13300 추천 수 0 2014.08.31 22:57:59
설교듣기 : https://youtu.be/WQVlE8tbktk 
성경본문 : 마태복음 16:21-28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16:21-28, 성령강림후 제12, 2014831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오늘 설교 제목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예수님이 제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나옵니다. 16:23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아무리 비유라고 하더라도 모욕적인 발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강한 어조로 어떤 사람을 책망한 일은 드믑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사람을 미혹하게 해서 시험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시험한 마귀가 바로 사탄입니다. 베드로가 일부러 예수님을 넘어지게 했을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한다는 일이 오히려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제자로 인정받고 있는 베드로를 예수님이 옆에서 듣기에 민망할 정도로 책망하신 이유를 알려면 이 말씀에 앞서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문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또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 또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열거된 인물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고봉에 섰던 이들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상당히 높이 평가한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인류의 운명을 바꾸게 될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앞에서 열거된 인물들과 차원이 다른 겁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고 제자들의 입단속을 시키고, 이어서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제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설교 본문의 첫 구절인 마 16:21절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반론을 펼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로 되어 있는데,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문장은 하나님이 당신께 자비를!’이라는 표현에 가깝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안타까운 마음이 거기에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베드로를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일단 예수님께서 가야 할 인류 구원의 길을 말렸다는 게 베드로의 잘못으로 보입니다. 21절에 나오는 고난, 십자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베드로가 이걸 부정했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고난과 십자가는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부활까지 부정한 것처럼 묘사된 본문 이야기는 이상해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저 말씀을 들었다면 아멘과 할렐루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세상의 악한 세력에 의해서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시지만 결국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 승리를 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부활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 선지자들이 내세에 보상을 얻는다는 암시쯤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제삼일에...’라는 표현은 당시 이런 의미의 관용어였습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도 부활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지만 여전히 시대의 아들입니다. 그 시대의 생각을 완전히 뛰어넘어 모든 것을 다 아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 스스로 그걸 인정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마 24:36절에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에게 닥쳐올 무시무시한 운명을 피하게 해달라고, 그러나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했습니다. 만약에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부활을 예수님이 미리 내다보셨다면 이런 기도를 드릴 까닭이 없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부활이 전제된 것이라고 한다면 십자가 사건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단순히 컴퓨터에 프로그래밍 된 것을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베드로가 항변한 것은 예수님에게 닥칠 고난과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고난과 십자가는 당연히 예수님에게 나쁜 것이니까 제자로서 말리는 게 당연했고, 부활은 당시 아무도 알지 못했으니 베드로만의 책임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왤까요?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다가올 운명에 대해서, 즉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세 번에 걸쳐 예고한 것으로 보도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그런 위기를 느끼셨을 겁니다. 그런 조짐이 이미 앞에서 여러 번에 걸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유랑 설교자로서 활동을 시작하신 곳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상당히 거리가 먼 갈릴리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자유롭게 회당에 출입하면서 제자들을 부르고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회당 출입이 거부되었습니다. 회당 책임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유대교 정통과 배치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가톨릭에서도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비판적인 사제들은 인사 상의 불이익을 당합니다. 개신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이나 법조계도 비슷합니다. 정부에 비판적인 검사는 한직으로 밀려나고, 좀더 심해지면 퇴출당합니다. 이게 권력의 메커니즘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이 유대교에서 볼 때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회당 출입을 막았습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은 회당 밖에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예수님에게 많이 쏠렸습니다. 때로는 수천 명씩 몰려들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들수록 유대교 당국에서는 예수님을 더 적대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6:1-5절에 따르면 당시 최고 종교 권력자들이 가야바 대제사장의 관저에 모여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 치명적인 위기를 예수님이 왜 눈치 채지 못했겠습니까?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수님은 이제 가부간의 결정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걸어왔던 그 길을 계속 가야 하는지, 아니면 일단 작전상 후퇴를 해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두 가지의 길은 다 근거가 있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잠시 갈릴리로 피했다가 때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략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싸움에는 상대가 있는 법이라서 무조건 강경책을 쓰는 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인도의 간디는 목숨을 건 단식을 통해서 영국과 싸워 대다수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만약 간디가 일제와 그런 방식으로 싸웠다면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국은 국제 여론에 신경이라도 쓰는 정권이지만 당시 일본은 깡패 국가나 마찬가지여서 단식으로 죽든 말든 나 몰라라 했을 테니까요. 예수님은 분명히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갈릴리로 돌아갈 것인지, 정면충돌을 감행할 것인지, 우회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전자를 선택했습니다. 그걸 제자들에게 몇 번에 걸쳐서 알렸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입성을 결정했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계획과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맡기겠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계획이 바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말씀하신 사람의 일입니다. 이런 사람의 일은 합리적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도 원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평생 그런 일을 학습하면서 살아갑니다. 공부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건강해야 하고, 친구들이 많아야 하고, 나름으로 노후 설계를 잘해야 합니다. 제가 당시 베드로의 입장이라고 하더라도 그와 똑같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을 말렸을 겁니다. 지금은 예루살렘 종교권력과 맞설 때가 아니라고 설득하는 겁니다. 갈릴리 호수 근처의 가버나움에 멋진 수도원을 짓고 책도 쓰면서 예루살렘 성전의 권위를 상대할 정도의 영적인 카리스마를 확보하고, 인적 물적 토대를 안정적으로 구축할 필요도 있습니다. 이게 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고난과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즉 하나님의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잘한 판단일까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경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기도하면 자동응답처럼 답을 얻을 수 있는 거도 아닙니다. 신학공부가 깊어져도 완전한 해결책을 찾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를 떠나거나 선택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저 사람과 결혼할 것인지 아닌지도 손금 보듯이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시도 때도 없이 무조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은 아닙니다. 7장에 따르면 예수님의 형제들이 초막절을 맞아 예수님에게 와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라고 조언했습니다. 갈릴리에 숨어서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에게 아직 자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냥 갈릴리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언제인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분간하기는 힘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이런 실수는 반복하게 될 겁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일일이 따져가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도덕주의자,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다시 잘 보십시오. 메시아가 고난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그동안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되는 일이었습니다. 고전 1:23절에 따르면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베드로의 언행은 정당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의 상식과 경험과 판단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즉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고 멀리 하고 싶어 하는 그것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고난과 십자가가 오히려 구원의 길이라니, 그게 하나님의 일이라니, 이게 말이 될까요

 

이 질문은 마태공동체가 처한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왜 고난당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오히려 잘살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현대 기독교인들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부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힘든 삶을 피하고 싶은 겁니다. 그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마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도 오늘 우리와 똑같이 고난을 멀리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던 그들을 향해서 마태는, 베드로를 책망한 다음 제자들에게 주신 고난과 십자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16:24,2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무조건 고난 받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좀더 냉정하게 이 말씀과 우리의 현실을 보아야 합니다. 고난과 십자가 자체는 우리의 삶을 파괴합니다. 장애와 난치병 자체는 일상을 파괴합니다. 가난에 찌들면 삶의 질도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학적으로, 금욕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평소에도 예수님은 일상을 부정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이 가능하면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게 살고, 건강도 좋았으면 합니다. 문제는 고난과 십자가를 무조건 적대시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인생의 실패를 무조건 저주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위 본문은 고난과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을 자기 자신이 성취해보려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태도입니다. 그것을 본문은 정확하게 규정했습니다.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잃으면, 즉 주님께 자신의 생명과 운명을 맡기면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어서 천하를 얻어도 그것이 자기 생명을 얻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생명은, 즉 구원은 하나님의 배타적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초석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싶지만,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만 실제로는 잘 되지 않을 겁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따라서 생명을 얻는 것도 쉬운 게 아닙니다. 이해는 되지만 동의가 안 됩니다. 이는 마치 비행기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알고 있어도 비행기를 탈 때마다 고소공포증으로 인해서 두려움에 떠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사람은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공포증이나 트라우마를 앓고 있어서 삶의 온갖 두려움을 떨치지 못합니다. 여기서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자기 운명을 온전히 맡기지 못합니다. 걱정을 머리에 이고 삽니다. 그게 사람의 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제가 해결해드릴 수 없습니다. 설교자로서 저는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그와 하나 되라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빠를 신뢰하는 어린아이는 아빠가 자기를 공중에 던져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빠가 자신을 안전하게 받아줄 거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중에 던져 졌을 때 그 아이가 위험을 느끼고 자기가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면 정말 위험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고유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그 믿음, 그 확신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사실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살아가십시오.


profile

[레벨:20]문전옥답

September 05, 2014
*.194.68.169

요 몇 달간 제가 다니는 교회에 안좋은 쪽으로 큰일이 벌어졌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옮겨야 되는거 아닌가 고민이 많았는데

아, 대구에 살았다면 주저하지 않았겠네요...

아뭏튼 몇 달간 담임목사 자리가 공석으로 있다가 이번 주부터 새로운 목사님이 오십니다.

이 기간을 지나는 동안 교회와 사람에 대해 충격과 배신감을 받았지만

그렇기때문에 하나님께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고유한 방식으로 생명의 깊은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목사님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며 일상과 교회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September 05, 2014
*.94.91.64

그동안 신앙생활로 근심이 많으셨겠군요.

교회에 안 좋은 일로 큰 일이 벌어졌어도

아주 해결이 안 되는 경우라면 모를까

가능한대로 교회에 머무는 게 좋습니다.

새로운 목사님이 오게 되었다니, 잘 됐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영적인 시인의 감수성으로

예민하게 느끼면서 살아가도록 합시다.

좋은 추석 명절 보내세요.

profile

[레벨:6]푸른별

October 21, 2014
*.224.246.3

정목사님. 그간 잘계셨는지요,

수년전 포항Y에 오셔서 많은 감명과 도전을 주셨는데, 연락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최근, 한동대에 오셔서 말씀전하신다는 소식 듣고 반가웠습니다.

 

전 요즘, 여러가지 어려움속에서 목사님의 메시지로 힘을 얻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열심히 살아온 삶에 회의도 들고,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사회를 보며 절망하기도 하며, 그래도 가슴속 깊이 터져나오는 슬픔을 감추고  거짓웃음으로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50대의 짊이 무거웠습니다.


솔직히 "성서와 기도"가  아니었다면, 오늘 여기까지 버텨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의 설교말씀은 참 좋습니다.

목사님의 메시지에서 '인간 실존의 적나라한 모습을 노출시키면서 성서의 세계,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진지한 탐구의 영성"을 느끼며  다비안이 이 시대의 참 샘터라고 늘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저도 목사님이 자주 언급하신 '하나님 경험'을 지속적인 어려움에 놓여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임을 조금씩 경험되어집니다.  앞으로 자주 사이트에 들려서 "다비안"으로서 의견을 나누며 활동을 해볼 생각입니다.

목사님 허락해주시는 거죠. ^^

profile

[레벨:100]정용섭

October 21, 2014
*.229.55.93

푸른별 님,

반갑습니다.

요즘도 여전히 포항 와이에서 일하시는지요.

2008년도 포항 와이에서 갈라디아서를 공부했는데,

벌써 세월이 6년이 흘러버렸군요.

그때의 공부를 계기로 한동대 선생님 세 가정이

대구샘터교회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푸른별 님이 당하는 어려움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저의 설교가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고,

힘을 내보자는 말씀을 드립니다.

다비아 글쓰기 운동에 적극 참여해주신다면

저로서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부인과 가족 모두에게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profile

[레벨:6]푸른별

October 23, 2014
*.224.246.3

정목사님. 감사합니다.

전 아직도 포항와이에 그대로 있습니다.

인생후반에 다른길을 가려고 시도 했지만, 녹록치 않았습니다.

인생이 제 뜻대로 되는 것이 없네요.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20년전부터 신학교에 오라고 재촉하셨던 모신학교 학장님을 찾아뵈었더니

단적으로 오지 말라고 막으시고 최근에 쓰신 신학책만 몇권 주시더라구요.(ㅎㅎ)

당신께서 은퇴를 앞두고 계셔서 그랬는지,

아니면 아무런 대책없는 저를 보고 어이가 없어서 그랬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여전히 새로운 진로에 대한 다양한 고민은 지속되지만,

이젠 그만, 하나님께 맡기고 주어진 상황을 회피하거나 도망하지 않으렵니다.

어떤 비바람이 몰아쳐도 제가 서 있어야 할 자리라면,

조금이라도 주어진 역할(미션)이 있다면, 마다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 마음대로 행하지 말고, 정의를 당연히 행하고,

  가능성속에서 동요하지 말고, 현실적인 것을 대담하게 붙잡아라.

  자유는 생각의 도피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행동속에 있다. "

  (본회퍼, 자유의 도상에서 中)


정목사님. 이번 가을 낙엽이 다 떨어지기 전에 한동대에서 한번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늘 건승하십시오.

새벽에 목사님의 주옥같은 메시지를 읽으며.


푸른별 올림.

profile

[레벨:13]진인택

January 24, 2015
*.176.175.230

아빠를 신뢰하는 어린아이는 아빠가 자기를 공중에 던져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아빠가 자신을 안전하게 받아줄 거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중에 던져 졌을 때 그 아이가 위험을 느끼고 자기가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면 정말 위험한 일이 벌어집니다.

위의 말씀이 모든것을 나타냅니다. 아빠가 밑에서 받으려 손벌리고 있는데 옆으로 움직이면 지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가슴을 쿵 뚫고 들어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품에 있음을 오늘도 목사님의 말씀으로 확인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24, 2015
*.94.91.64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가 무한 신뢰를 보낼 수 있는 분이십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47
748 성령강림절 악령으로부터의 해방 (눅 8:26-39) [15] 2013-06-24 13591
747 창조절 헛되고 무익한 것 (렘 2:4-13) [16] 2013-09-01 13528
746 기타 거룩한 두려움, 7월9일 2006-07-09 13528
745 성령강림절 생명의 날 [17] 2009-06-15 13510
744 창조절 예레미야의 눈물 (렘 8:18-9:1) [8] 2013-09-22 13504
743 사순절 실패의 길을 가자! [9] 2007-03-04 13485
742 대림절 임마누엘은 예수다 (사 7:10-16) [8] 2013-12-22 13476
741 성령강림절 영과 구원 file [9] 2010-10-24 13429
740 성령강림절 에서와 야곱 이야기 (창 25:19-34) [4] 2020-07-12 13419
739 기타 예수의 권위 (막 1:21~28), 2003.6.1 2004-07-02 13393
738 성령강림절 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14] 2011-07-10 13377
737 성령강림절 믿는 자는 성전이다 [13] 2009-08-03 13362
736 창조절 심판의 하나님 (출 12:1-14) [12] 2011-09-05 13353
735 성령강림절 나의 자랑 예수의 십자가 [13] 2007-07-15 13325
734 기타 야훼 찬양! (욜 2:21-27) [3] 2006-11-19 13312
»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마 16:21-28) [7] 2014-08-31 13300
732 기타 해방과 자유 [2] 2006-03-05 13290
731 주현절 하늘이 열리다! [5] 2008-01-13 13285
730 부활절 죽음을 무너뜨리리라! [7] 2009-04-13 13272
729 성령강림절 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17] 2013-06-16 13257
728 성령강림절 예수와 유령 사이에서 [9] 2008-08-03 13234
727 기타 하나님의 자녀, 4월30일 [1] 2006-04-30 13229
726 주현절 캄캄한 땅을 비추는 빛 [4] 2008-01-27 13212
725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얼굴 [8] 2008-07-27 13210
724 기타 믿음의 실체 [6] 2006-03-12 13203
723 부활절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분 [4] [1] 2010-04-18 13191
722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이다 (요 10:22-30) [8] 2013-04-22 13181
721 기타 생명을 얻는 길 [1] [1] 2004-07-02 13172
720 성령강림절 율법과 사랑 [9] 2008-08-31 13132
719 성령강림절 인자가 오리라! (눅 12:35-40) [5] 2013-08-12 13115
718 창조절 바디매오의 구원 이야기 (막 10:46-52) [4] 2018-10-28 13080
717 기타 하나님 나라의 감춤과 드러남, 2월12일 [3] 2006-02-12 13061
716 기타 살아계신 주님 [5] 2006-04-16 13058
715 성령강림절 예레미야의 소명 (렘 1:4-10) [9] 2016-08-21 13048
714 주현절 주는 영이시다 [3] 2010-02-15 13015
713 창조절 광야에서 만나를 만나다 (출 16:2-15) [4] 2014-09-21 13014
712 대림절 메시아 질문 (마 11:2-11) [17] 2013-12-15 13000
711 성령강림절 승리주의를 넘어 생명으로 [20] 2009-07-20 12989
710 성탄절 나사렛 사람 예수 (마 2:13-23) [6] 2017-01-01 12983
709 사순절 축제의 능력 [5] 2010-03-15 12982
708 기타 삶의 중심 2004-07-02 12981
707 부활절 몸의 부활 (눅 24:36-48) [12] 2015-04-19 12970
706 주현절 시몬의 하나님 경험 [21] 2007-02-04 12968
705 성탄절 솔깃한 말, 터무니없는 말 [7] 2006-12-31 12943
704 부활절 빈 무덤과 예수 부활 (요 20:1-18) [10] 2014-04-20 12940
703 기타 세례 요한의 증언, 1월16일 [1] [1] 2005-01-17 12921
702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눅 9:37-43) [8] [2] 2013-02-10 12912
701 기타 하나님의 나라와 영의 나라 [4] [1] 2004-07-02 12903
700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 15:21-28) [7] 2017-08-20 12883
699 부활절 평화의 복음, 부활의 능력 [4] 2007-04-08 12883
698 사순절 마리아를 가만 두라! (요 12:1-8) [16] 2016-03-13 12841
697 사순절 그날이 오리라! [12] 2009-03-30 12809
696 기타 예수님을 먹다 [1] 2004-07-02 12781
695 성령강림절 닫힘과 열림 [21] 2009-09-21 12780
694 창조절 복음은 싸움이다! [6] 2011-09-19 12762
693 성령강림절 벌과 복 [3] 2007-07-01 12762
692 기타 기도란 무엇인가? (8월8일) [2] 2004-08-08 12756
691 기타 영원한 구원의 근원 2006-04-02 12747
690 기타 행복한 삶과 신앙, 1월1일 [1] 2006-01-01 12747
689 창조절 명령하시는 하나님 (출 20:1-11) [16] [1] 2011-09-26 12732
688 성령강림절 형제관계의 자리로! [11] 2008-10-26 12710
687 대림절 마지막 ‘때’ [11] 2008-12-01 12701
686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하나님 찬양 [6] 2007-06-17 12678
685 성령강림절 마리아의 영성 [8] 2007-07-29 12657
684 창조절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 (민 11:4-15) [6] 2018-09-30 12642
683 창조절 그리스도교 윤리의 근거 (마 18:21-35) [6] 2011-09-11 12640
682 부활절 희망은 기다림이다 (벧전 1:13-21) 2005-04-10 12640
681 창조절 낮춤과 높임의 역설 (마 23:1-12) [14] 2017-11-05 12623
680 성령강림절 생명이란 무엇인가? [25] 2008-10-05 12607
679 기타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 10월30일 [2] 2005-10-30 12600
678 기타 영적인 인식론 [2] [1] 2004-07-02 12592
677 성령강림절 윗자리와 끝자리 [13] 2007-09-09 12592
676 창조절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렘 8:18-9:1) [9] 2016-09-18 12586
675 기타 낯섬의 출처 2004-06-30 12585
674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7] 2013-02-18 12559
673 부활절 상호내주의 비밀 (요 17:20-26) [5] 2013-05-12 12553
672 기타 찬양의 이유, 1월2일 [1] [1] 2005-01-02 12547
671 기타 자유로움의 세계로! [2] [1] 2004-07-02 12547
670 사순절 떠돌이 아람인의 후손 [15] 2007-02-25 12526
669 성령강림절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구원신비 [4] 2008-08-10 12509
668 성령강림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22] [1] 2009-11-16 12500
667 기타 풍요로움의 근거, 11월20일 [4] 2005-11-20 12477
666 부활절 믿음과 희망 (벧전 3:13-22) [4] 2017-05-21 12476
665 성령강림절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 [5] 2008-11-02 12474
664 사순절 만나가 멎는 날 [11] 2007-03-18 12460
663 창조절 신앙과 소금 (막 9:38-50) [6] 2015-09-27 12438
662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2] 2008-01-20 12436
661 주현절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2] 2007-02-18 12435
660 부활절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 일치 [3] 2010-05-17 12422
659 성탄절 크게 기뻐하라! [11] 2009-01-05 12411
658 기타 비뚤게 보기와 바로 보기 [1] [1] 2004-07-02 12367
657 부활절 예수는 참 포도나무다 (요 15:1-8) [8] 2015-05-03 12324
656 창조절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 (출 17:1-7) [4] 2017-10-01 12306
655 성령강림절 예수 그리스도 송영 (골 1:15-23) [2] 2013-07-21 12299
654 기타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1] 2004-07-02 12273
653 성탄절 마리아의 노래 (눅 1:46-56) [1] 2004-07-02 12272
652 성탄절 종이냐, 자녀냐 [26] 2008-12-29 12272
651 기타 새로움의 원천, 2월19일 [2] 2006-02-19 12266
650 사순절 다윗과 여호와의 영 (삼상 16:1-13) [5] 2014-03-30 12242
649 부활절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19-26) [7] 2016-03-27 12240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