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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다!

성령강림절 조회 수 10834 추천 수 60 2007.08.12 16:40:09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070812.mp3 
성경본문 : 에스겔 37:15-28 
mms://wm-001.cafe24.com/dbia/070812.mp3우리는 하나다!
2007.08.12. 겔 37:15-28

8월28-30일에 제2차 남북정상 회담이 평양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남쪽의 노무현 대통령과 북쪽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회담입니다. 2000년 6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있었던 제1차 정상회담 이후로 7년만에 열리는 회담입니다. 이번의 회담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습니다만 여전히 군사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특히 금년 들어서 북한을 둘러싼 국제정치 상황이 좋은 쪽으로 풀려가고 있는 국면이라는 점에서 이번의 남북정상 회담이 더 이상 물릴 수 없는 남북 화해와 평화의 여정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현재 회담의 의제를 무엇으로 하는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최근에 발표된 청와대의 브리핑에 의하면 경제협력이 가장 중요한 의제가 될 것 같더군요. 현명한 판단입니다. 군사정치 문제는 너무나 미묘하기 때문에 섣불리 접근할 수 없습니다만 경제 문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북한도 남쪽의 경제적인 지원을 필요로 하고, 남쪽도 북한의 질 좋은 노동력을 필요로 합니다. 남북경협이 순항을 하면 나머지 군사정치 문제도 순리적으로 풀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많은 분들이 북한 문제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소위 레드컴플렉스를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집단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 기독교인지 모르겠군요. 여기에는 나름으로 그럴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8.15 해방 이후 남북이 갈리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북한 지역에는 기독교 세력이 왕성했습니다.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였습니다. 요즘 한국교회가 활기차게 벌이고 있는 ‘어게인 1907’ 운동도 평양의 부흥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3.8선 이북을 점령한 김일성 체제는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8.15 해방과 6.25 한국전쟁 어간에 북한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들이 남한교회 부흥의 견인차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남한교회는 어쩔 수 없이 북한을 적그리스도 집단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절 후 열한째 주일이면서 동시에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 주일’로 지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오늘 저녁 7시 30분 서울 명성교회에서 2007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주일 연합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교회 예배순서지 뒤쪽에 기도문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은 남한의 KNCC와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 연맹’이 매년 8월15일 직전 주일에 지키는 예배 때 드리는 공동기도입니다. 지금은 전혀 다른 체제에서 남북교회에 갈려 있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하나의 교회가 되겠지요. 그날을 위해서 오늘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드려야겠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늘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역사적 상황에서 살았던 한 예언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합니다. 그의 영적 혜안이 바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주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바벨론 포로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시기는 예루살렘이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함락되고 유대 왕족과 지식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을 때입니다. 기원전 6세기입니다. 그들이 당한 처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는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그들은 원래 선민으로 자처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제외하고는 별로 이렇다 할 국력을 자랑할 게 없었지만 그래도 출애굽 이후 가나안 정복의 과정에서 어엿한 독립 왕조로 이름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아들 대에 이르러 나라가 남북으로 갈린 뒤로는 주변의 강한 나라로부터 많은 시달림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미 기원전 8세기 중반에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함락 당했습니다. 그 백성들이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윗왕조의 정통성은 북이스라엘이 아니라 남 유다에 있었기에 체면을 유지한 셈입니다. 그런데 결국 남 유다도 무너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폐허가 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졌고, 유대 지역에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유대, 또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 같은 막다른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둔 시절에 에스겔은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예언을 모아놓은 책이 곧 에스겔서입니다. 겔 37:1-14절에서 에스겔은 이상한 환상을 봅니다. 벌판에 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에게 명령을 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른 뼈들아,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 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들판의 뼈들이 모두 살아나서 큰 무리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 마른 뼈들은 이스라엘 모든 민족을 가리킵니다. 희망을 잃었던 그들이 이제 야훼 하나님으로 인해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1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의 기운을 불어넣어 살려내어 너희로 하여금 고국에 가서 살게 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나 야훼가 한번 선언한 것을 그대로 이루고야 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이 말씀에 이어서 곧 오늘 본문이 나옵니다.
야훼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일종의 퍼포먼스를 시키셨습니다. 에스겔은 두 개의 나무 막대기를 준비했습니다. 하나의 막대기에는 ‘유다와 그와 한편이 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글씨를 써 붙이고, 다른 막대기에는 ‘요셉, 에브라임의 막대기와 그와 한편이 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라는 글씨를 써 붙였습니다. 이 두 막대기를 붙여서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야훼의 명령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주 야훼가 말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나 이제 뭇 민족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리라. 사방에서 모아 고국으로 데려오리라. 그들을 나의 땅 이스라엘 산악 지대에서 한 민족으로 묶고 한 임금을 세워 다스리게 하리니, 다시는 두 민족으로 갈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반으로 갈라져 두 나라가 되지 않을 것이다.”(겔 37:21,22)
이런 정도만 말씀을 드려도 여러분들은 오늘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는 것이 바로 야훼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아 그렇구나, 야훼 하나님의 뜻이 그런 것이구나, 에스겔은 그걸 선포한 것이구나 하고 그냥 밋밋하게 받아들일 겁니다. 이렇게 질문해보세요. 남북이 통일되며, 다시는 갈라지지 않을 거라는 게 야훼 하나님의 뜻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야훼 하나님이 그렇다고 말씀하셨으니까 분명하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야훼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니랍니다.
23절부터 나오는 말씀을 조금 더 읽어보십시오. 남북 이스라엘이 통일이 된 다음에 그들은 “역겨운 우상들을 섬겨 몸을 더럽히는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야훼가 내려준 법도와 규정에 따라 살 것이며, 야훼 하나님이 야곱에게 준 약속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에스겔의 이 예언대로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린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긴 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우상을 섬겼으며, 야훼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지도 않았고, 계속해서 주변 제국의 식민통치를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지역의 사람들과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끼리 반복도 심했습니다. 그들은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말할 줄 모르게 되었으며, 결국 기원후 70년에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런 역사가 2천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전제한다면 에스겔의 예언은 틀렸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정신 차리고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에스겔의 입을 통해서 선포된 야훼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정한 시점까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길이 살게 되리라는 에스겔의 예언이 지난 2천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하실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이 자기의 방식으로 이루어가십니다. 그런 약속이 성취될 때 야훼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거꾸로 그 이전까지 세상은 야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나, 조나, 잠을 자나, 하고 빈정거립니다. 예언자들은 야훼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님으로 증명되는 그 사건을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에스겔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볼 때 남북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통일이야말로 야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자료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받은 신탁에 따라서 막대기로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이 남북통일을 이루게 하신다고, 남북통일을 이루는 것이 곧 야훼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시각이 예언자의 영적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남북통일
여러분은 남북통일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에스겔의 예언은 당연한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군요. 남북통일을 바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냐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릴 때도 북의 사회주의와 남의 자본주의, 북의 전체주의와 남의 자유주의로 대립한 것처럼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립적이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다윗왕조의 정통성이 남 유다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의 사이가 틀어진 여로보암 장군이 반역을 일으켜서 세운 나라였습니다. 그 당시에 남 유다는 땅도 좁았고 지지하는 지파도 2-3개에 불과했습니다. 반면에 여로보암이 세운 북 이스라엘은 강한 국력을 자랑했습니다. 남과 북은 사이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150여년이 흘렀습니다. 아마 남 유다 사람들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북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왕조를 배신 사람들이니까 멸망해서 싸다고 말입니다.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정도로 국력이 쇄약해진 것도 아마 북 이스라엘의 탓이 크다고 생각했겠지요. 예수님 당시에도 유다 지역 사람들이 지난날 북 이스라엘 지역인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종하지 않는 것도 이런 오래된 원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예언할 당시에는 아무도 북 이스라엘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 자기들 발등에 떨어진 불이 시급한 문제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날만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미 150여 년 전에 망한 나라입니다. 그들은 나쁜 사람들입니다.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에스겔은 바로 그 북 이스라엘을 자신들 남 유다와 똑같은 위치에 올려놓는 예언을 했습니다. 모르긴 해도 이런 예언을 한 에스겔은 아마 주변으로부터 싫은 소리를 많이 들었을 겁니다. 쓸데없는 소리 집어 치우라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도 힘들어 죽는 마당인데 ‘웬 북 이스라엘’ 하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해방이 중요하지 통일이 중요하냐고 말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주장이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 나이가 든 기성세대는 레드컴플렉스가 강해서 북한 집단을 아예 불신하고, 젊은이들은 남쪽의 경제발전에 북한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해서, 가난하고 핵무기나 개발하는 북한이 귀찮다는 겁니다. 물론 북한은 우리가 이해하기 곤란한 체제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불량하게 보입니다. 김일성 주석에 이어서 아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권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왕조국가가 아닌 나라에서 이렇게 세습이 이루어진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이면서 군사비 지출에는 아낌이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여러분이 많이 들어서 저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에스겔이 처한 상황도 똑같았습니다. 에스겔 시대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미 역사에서 오래 전에 사라진 북 이스라엘은 동반자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에스겔 이외에 다른 한 사람의 예외를 찾는다면 에스겔보다 조금 일찍 예언자로 활동한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야훼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북 이스라엘 까지 확장시켰습니다. 에스겔은 남북통일에 관해서 예레미야보다 훨씬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남 유다가 북 이스라엘보다 더 정의롭다는 기존의 선입관을 부정했습니다. 북이나 남이나 똑같이 하나의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양쪽을 똑같이 생각하신다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적인 자세는 바로 이것이 아닐는지요. 우리 남한이 북한 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일단 접어두어야 합니다. 설령 우리가 도덕적인 점이나 경제적인 점, 국제적 위상에서 북한보다 우월하다고 하더라도 남북통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면 그런 생각을 일단 접어두어야 합니다. 사이가 틀어진 형제들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형이 동생을 업신여기고 자신이 잘났다는 걸 나타내려고 한다면 형제화해는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제가 남북통일에 관해서 몇 말씀을 드렸지만 그게 설교의 중심은 아닙니다. 본문 28b절이 가리키고 있듯이 야훼 하나님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게 된다는 사실이 설교의 중심입니다. 남북통일은 그것을 위한 수단입니다. 60년 이상 남북으로 갈라진 한민족이 통일을 이루게 된다면 세상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당장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큰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에스겔처럼 그런 영적인 통찰력을 놓치지 않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쏟아지는 햇빛처럼, 마른땅을 적시는 비처럼 생명 충만하게 될 날을 향해서 나갑시다. 이미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셨다는 믿음으로 나갑시다. 남과 북은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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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코람데오

August 13, 2007
*.247.154.145

설교말씀 잘 들었습니다.

몇가지 궁금하게 있습니다.

첫째로, 에스겔이 "북 이스라엘을 남유다와 똑같은 위치에 올려 놓는 예언을 했다"라고
본다면 본문의 핵심절인 24절의 에스겔의 예언은 다소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왜 하필 통일의 시대에 다윗이 왕이 된다는 점을 24절과 25절에 걸쳐
두번씩이나 다소 강조해서 예언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사실 이런 언급은 에스겔이 남유다의 정통성 위에 나라를 회복한다는류의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은연중 나타내고 있다고 볼수 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교수님 생각은 어떠신지.

두번째로, 본문의 예언이 여러 시점을 관통하는 예언으 이중성에 기초하면서 기술되고
있다고 본다 하더라도 그 핵심은 본문 24장 이후의 내용이나 본문 14절의 내용으로 볼때
초림의 메시아 왕국을 예언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나 생각 합니다만.
본문의 예언(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길이 살게된다는 예언)이
2000년이나 지나서 이루어진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의미 하시는
것인지 그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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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3, 2007
*.181.51.23

코람데오 님,
설교는 에스겔 신학을 전반적으로 다루는 게 아니에요.
물론 전체 에스겔 신학에 반하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지요.
설교자가 선택한 본문에서 어느 한 흐름을 해석하는 거지요.
1. 다윗 왕조를 강조하는 거야 모든 예언서와 구약성서 전체의 일관된 입장이니까
그것 자체를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시대에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북이스라엘을 통일왕국, 또는 다윗왕조의 새로운 시대에
함께 가야할 동반자로 내세운다는 것 자체가 혁명적인 발상이지요.
2. 설교의 중심은 다윗왕조의 재건과 메시아 왕국 도래 같은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지적한 그 부분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일을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에스겔의 예언이
실증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메시아 왕국에 대한 묘사도 실증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지요.
코람데오 님은 자신의 성서관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대목에
너무 집착해서 글을 읽으시는 것 같군요.
그냥 편하게 읽어보세요.
에스겔의 남북통일 예언과 오늘의 우리의 신앙적 태도에 관해서 말입니다.
감사.
profile

[레벨:3]코람데오

August 13, 2007
*.247.154.145

목사님 자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ㄲ ㅂ
profile

[레벨:1]

August 13, 2007
*.35.149.115

목사님 안녕하세요.
설교 잘 읽었습니다. 얼마전부터 목사님의 설교 비평을 흥미로운 마음으로 열심히(모니터만 보니 눈이 아파요) 읽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목사님의 금주 설교와는 상관없지만 한가지 귀한 답변 듣고자 합니다.
저는 장로교(합동) 교육전도사로 매주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에 사로잡혀 사역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설교를 하게 되면서 설교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반드시 선포되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항상 초점을 맞추게 하고 복음을 연결되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그러고 보니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을 보면 그들의 메시지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과 복음이 중심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예배에서 설교란 무엇이고,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설교는 왜 들어야 하는가? 등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종교적 덕담도 아니고 성경 이야기도 아니고 윤리적 강론도 아니고 철학 강의도 아니고 교양강좌도 아니고 개인의 사상을 전하는 것도 아니라고 들었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동안 설교를 어려서부터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설교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하니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설교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요? 설교를 통해 꼭 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얼마전 목사님의 설교 비평을 통해 듣기로는 설교를 통해 신앙의 세계로 예배자들의 눈이 열려지도록 도와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 말씀이 저의 질문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같네요.
제가 질문 하면서도 제 질문이 만족스럽지 못하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August 13, 2007
*.150.14.72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은폐의 방식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청중들을 끌어들이는 목사의 언어행위가 곧 설교이겠지요.
위의 문장도 많은 주석,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건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없겠지요.
좋은 신학 책을 많이 보는 게 설교자에게도 가장 바른 길입니다.
좋은 밤.
profile

[레벨:1]

August 14, 2007
*.35.149.115

목사님 금새 답변을 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통치'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그러고 보니 목사님께서 비평하시며 하셨던 말씀들이 항상 이것을 추구하며 일관성이 있었던 것같네요.
제가 간단히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드렸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심적인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특별히 요즘에는 복음서를 읽으며 예수님께서 줄곧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천국'에 대해 생각하며 연구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이 주제에 관해 책을 추천해 주실 수 있으시다면 몇권 추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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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ugust 14, 2007
*.181.51.23

각 님,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 관심이 많으시다구요.
좋은 현상입니다.
성서와 신학의 깊이로 들어가려는 욕구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이 몇 가지 신학 정보가 아니라
영적 실체로 다가오기를 바랍니다.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셨지요?
제가 검토를 좀 해야하는데, 일단 생각나는 책만 말씀드릴께요.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하나님 나라>를 읽어보십시요.
언제 기회가 되면 다비아에서 이런 책을 함깨 읽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군요.
좋은 밤!
profile

[레벨:1]

August 15, 2007
*.107.35.68

<신학과 하나님 나라>가 생각보다 오래된 책이네요. 대한기독교서회에서 77년도에 출판됬으니 저보다 형님이네요. 그래서 절판이 된듯한데 암튼 어떻게든 구해서 읽어보겠습니다. 가격이 5천원이라 마음에 드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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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September 16, 2007
*.126.124.165

오늘은 주일이지만, 근무라 두번째로 정목사님의 두번째 설교 음성을 들으며 본문의 내용을 찬찬히 읽었습니다.
한가지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남북공동 기도문이 없어 서운했습니다. ^^!
(우리 교회 목사님은 이러한 것에 별 관심이 없어서요)

그런데 정목사님의 남북관과 형제를 비유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평소에 제가 주위사람들과 논하는 것과 매우 유사해서 원조 시비가 일것 같습니다. ^^;
오늘 설교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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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1 성령강림절 귀신 이야기 (눅 8:26-39) [43] 2016-06-19 11964
630 대림절 알곡과 쭉정이 (마 3:1-12) [6] 2019-12-08 11921
629 기타 종말론적인 삶 (벧전 4:1-11) [1] 2004-07-02 11892
628 성령강림절 혁명은 시작되었다. [27] 2007-08-19 11889
627 사순절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자! [8] 2007-04-01 11887
626 사순절 원망에서 생명으로! (민 21:4-9) 2018-03-11 11873
625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11] 2014-12-22 11859
624 기타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10월23일 [6] 2005-10-23 11848
623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인 [9] 2007-07-08 11803
622 사순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롬 4:1-5, 13-17) [5] 2014-03-16 11799
621 주현절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 (고전 9:16-23) [4] 2015-02-08 11797
620 부활절 목마른 사람을 위한 복음 [8] 2007-05-20 11788
619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776
618 기타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1] 2006-05-14 11756
617 기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4] 2006-03-26 11736
616 성령강림절 씨 비유 (막 4:26-34) [13] 2015-06-15 11734
615 성령강림절 두려움의 대상 (막 4:35-41) [4] 2018-06-24 11693
614 성령강림절 참된 생명의 길 [14] 2007-06-24 11685
613 성령강림절 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7] 2007-10-14 11684
612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해 [17] 2007-08-05 11670
611 기타 두려움을 넘어서 [3] [2] 2004-07-02 11655
610 기타 경건주의의 함정, 9월25일 [1] 2005-09-25 11652
609 기타 창조계를 벗삼기 [3] [2] 2006-10-22 11651
608 기타 흔들리지 않는 터전 [1] 2004-07-02 11629
607 기타 세례를 베풀라 [8] [2] 2011-06-20 11625
606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갈 4:4-7) [7] 2014-12-28 11623
605 기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11월13일 2005-11-13 11618
604 성령강림절 예수와 표적 이야기 (요 6:1-15) [12] 2015-07-26 11612
603 기타 은폐와 노출 [3] 2004-07-02 11608
602 부활절 구름 타고 오십니다! [10] 2007-04-15 11591
601 성령강림절 성령, 진리의 영 (요 16:12-15) [11] 2016-05-22 11578
600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11572
599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548
598 주현절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다. (출 24:12-18) [14] 2014-03-03 11528
597 기타 금송아지와 야훼의 노, 10월9일 2005-10-09 11525
596 기타 자기 의와 은총 [1] 2004-07-02 11517
595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512
594 기타 이사야의 구원신탁 2004-07-02 11509
593 사순절 영원한 생수는 예수다! (요 4:5-26) [10] 2014-03-23 11506
592 기타 하늘나라와 일상, 7월24일 [2] 2005-07-24 11505
591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11] 2016-10-23 11474
590 주현절 무화과 나무와 하늘 [9] 2009-01-19 11458
589 주현절 하나님 나라와 제자도 (마 4:12-23) [4] 2014-01-26 11455
588 주현절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4] 2017-01-22 11443
587 기타 영혼의 노래, 12월18일 [1] 2005-12-18 11417
586 성령강림절 인간화해의 길 [9] 2007-09-16 11415
585 기타 세계, 계시, 하나님 (겔 39:25-29) [1] 2004-07-02 11414
584 기타 오시는 구원의 하나님, 12월25일 [1] 2005-12-25 11399
583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385
582 창조절 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 (마 22:1-14) [7] 2017-10-16 11380
581 부활절 죽임과 살림 (행 5:27-32) [14] 2013-04-07 11367
580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362
579 기타 높은 곳에서의 부르심, 10월2일 2005-10-02 11312
578 성령강림절 교회와 성령 충만 (행 2:1-13) [11] 2017-06-04 11302
577 기타 그리스도의 얼굴의 빛 [5] 2006-02-26 11270
576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258
575 창조절 왜 복음인가? (롬 1:8-17) [7] 2017-10-29 11246
574 기타 죄로부터의 해방, 6월19일 [2] 2005-06-20 11237
573 성령강림절 이스라엘과 브니엘 (창 32:22-31) [12] 2014-08-04 11225
572 창조절 삶과 죽음의 경계 (눅 20:27-38 [8] 2013-11-10 11219
571 창조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출 33:12-23) [4] 2020-10-18 11205
570 창조절 죄의 심연 (딤전 1:12-17) [6] 2013-09-15 11195
569 성령강림절 기쁨에서 평화까지 [14] 2007-11-18 11164
568 창조절 서기관과 과부 (막 12:38-44) [14] 2015-11-08 11126
567 기타 예언 전통 앞에서, 1월19일 2006-01-29 11121
566 기타 평화의 은총, 6월26일 [1] 2005-06-26 11110
565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01
564 대림절 "너는 누구냐?" (요 1:19-28) [4] 2020-12-13 11092
563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2020-12-06 11079
56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절망 (사 5:1-7) [1] 2013-08-18 11066
561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040
560 대림절 "깨어 있으라!" (막 13:24-37 [5] 2017-12-03 11029
559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계명 [4] 2007-07-22 11021
558 기타 모세의 하나님 경험, 8월29일 [8] [2] 2005-08-28 11013
557 성령강림절 정의로운 안식일 [6] 2007-09-02 11007
556 창조절 하나님의 평화, 평화의 하나님 (빌 4:4-9) [15] 2013-11-18 11001
555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0966
554 성령강림절 성령의 도우심(롬 8:22-27) [14] 2015-05-24 10941
553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0937
552 창조절 끝까지 견디는 자 (마 24:1-14) [5] 2014-11-03 10914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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