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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도 생각을 바꾸시는가?

성령강림절 조회 수 10477 추천 수 80 2007.09.23 15:18:16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070923.mp3 
성경본문 : 출애굽기 32:7-14 
mms://wm-001.cafe24.com/dbia/070923.mp3하나님도 생각을 바꾸시는가?
2007.09.23. 출 32:7-14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인 모세가 이스라엘 역사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출애굽이며, 다른 하나는 율법입니다. 출애굽은 정치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한 사건이라고 한다면 율법은 종교적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확보한 사건입니다. 출애굽과 율법은 이스라엘을 끌고 가는 마차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늘 순조롭게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출애굽 사건에서도 모세와 파라오의 싸움은 피를 말리는 듯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를 빠져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황량한 광야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먹을거리와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이집트를 빠져나온 지 석 달 만에 그들은 시내 산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출애굽의 명령을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이 산에 올라갔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비롯해서 여러 율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율법이 바로 이스라엘의 종교생활을 비롯해서 모든 삶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에 하무라비 법전이 있듯이 이스라엘에도 모세 법전이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역사를 지탱해주는 이 율법을 받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드는 이스라엘
야훼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제정해주시고 십계명을 새긴 돌판 두 개를 모세에게 준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장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서 데려 내온 너의 백성들이 고약하게 놀아나고 있다. 저들이 내가 명령한 길에서 저다지도 빨리 벗어나 저희 손으로 부어 만든 수송아지에게 예배하고 제물을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데려 내온 우리의 신이다.’ 하고 떠드는구나!”(출 32:7,8) 그리고 이어서 그들을 모두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되는 건가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일이 벌어지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모조리 쓸어버린다면 출애굽 사건도 무의미하며, 율법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도대체 시내산 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야훼 하나님이 이렇게 노를 품으신 걸까요?
그 이야기는 웬만큼 성서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오늘 본문의 앞 단락에 나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시내산 아래 평지에 머물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올 기색이 전혀 없자 그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모세가 정확한 날짜를 말하지 않고 올라간 것 같습니다. 그는 40일 동안 산에 머물러 있었으니 한시가 급한 백성들이 초조했을 거라는 건 짐작이 갑니다. 그들은 모세의 형인 아론에게 가서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어서 우리를 앞장설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온 그 어른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출 32:1) 백성들의 이 요구를 듣고 아론은 무척 당황했을 겁니다. 그런 문제는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의 요구를 무조건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자칫하면 백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고, 자중지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지면 모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아론은 백성들의 금귀거리를 모두 모아서 수송아지 상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상을 보고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 내온 우리의 신이다.” 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제물을 드리고 먹고 마시며, 정신없이 뛰놀았다고 합니다.
야훼 하나님은 이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시고,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모세에게 전했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당혹스럽습니다. 사랑 자체이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왜 저렇게 사람의 사정을 몰라줄까, 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그들이 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만들지 못하실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7장 이하에는 그 유명한 노아 홍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무리 세상이 악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노아 가족 이외의 모든 사람을 멸종시킨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이 세상에 막 태어난 어린아이들도 있는데, 그 아이들도 도매금으로 죽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입니다.
그런 일들은 지금 우리가 완전하게 해명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인식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만이 아니라 이유 없는 고통에 관해서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습니다. 동물이나 곤충들도 서로 잡아먹고 먹히면서 살아갑니다. 말벌 한 마리가 수천, 수만 마리의 꿀벌을 죽이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포식자들은 초식동물들을 잡아먹습니다. 사자 무리들이 병든 물소나 어린 물소를 잡아먹는 장면은 끔찍해 보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의 비밀은 이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때 드러나겠지요. 그 이전까지는 모르는 건 모르는 것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다만 전체적으로 그런 심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우리가 조금씩 배워나가야겠지요.
우선 하나님의 심판이 사랑과 대립한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아이의 종아리를 치는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아이는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는 어머니가 왜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지 그 순간에는 모릅니다. 나중에 어머니의 회초리는 어머니의 심판이지만 동시에 사랑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겠지요. 나중에도 모르는 철딱서니들이 있긴 하지만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상황은 사랑의 회초리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죽인 다음에 사랑의 회초리를 휘둘렀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이런 상황을 우리가 충분히는 아니지만 대략적으로라도 이해하려면 우선 하나님이 창조자이며,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전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것도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뜻이 근본적으로 훼손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떤 과학자가 빨래하는 로봇을 만들었는데, 그 로봇이 빨래를 더 더럽히기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해체해버려야겠지요.
그래도 우리에게 남아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제물을 바친 뒤 먹고 마시면서 정신없이 뛰논 것이 과연 죽을죄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것 자체는 죽을죄가 아닙니다. 그 당시에 대다수 근동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종교행위를 했습니다. 가나안의 바알숭배도 기본적으로 그렇고, 이집트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신을 느낄 수 있는 멋진 조형물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취해서 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보이는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건 단순히 종교의 차원만이 아니라 인간의 업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모든 문명을 가리킵니다. 대통령 선거도 그런 송아지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정신없이 뛰놀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취하는 사람은 교만해지고, 놓친 사람은 삶의 의미를 잃습니다. 저는 정치 무용론을 주장하려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유혹을 계속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그 당시 다른 민족들도 그런 금송아지를 만들었는데, 왜 그들은 멀쩡하고 이스라엘 백성만 전멸할 운명에 처했을까요?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신가요?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앞에 놓고 봐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시대부터 하나님과 깊은 계약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곧 그들이 감당해야 할 특별한 사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사명은 곧 야훼 하나님을 바르게 섬김으로써 이 세상에 야훼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명을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셨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이제 이들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특별한 훈련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위해서 율법을 준비시켜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런 광야생활을 시작하자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방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정신없이 뛰놀았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계약은 근본적으로 허물어진 것입니다. 사랑을 많이 베푼 대상에게서 실망스러운 일이 벌어졌을 때는 그 실망이 더 큰 법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판단하셨습니다.

모세의 탄원
모세는 당황스러웠겠지요. 천신만고 끝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든 바로 그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을 쓸어버리겠다는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하겠습니까? 다급해진 그는 피의자를 변호하는 변호사처럼 세 가지 논리로 하나님의 용서를 청원합니다. 첫째,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처벌을 받는다면 출애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무효가 되고 맙니다. 둘째, 이 일로 인해서 야훼 하나님은 이집트인들의 비웃음을 받게 됩니다. 셋째, 야훼 하나님이 맹세를 주셨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억해주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이 말을 듣고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내리겠다.” 하시던 재앙을 거두셨다고 보도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야훼 하나님께서 모세의 변론에 감동을 받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형에 처해질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변호사가 변론만 잘해서 판사의 마음에 감동을 주기만 하면 사형을 면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사람의 논리에 설득 당한다는 건 별로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우리의 깊은 속을 헤아리시는 완전한 하나님은 불완전한 판사와는 다릅니다. 야훼 하나님은 모세가 세 가지로 변론하기 전에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의 변론이 하나님의 생각을 바꾸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생각은 왜 바뀌었을까요? 이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질문은 하나님도 우리 사람처럼 생각이 오락가락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리는 이 금송아지 사건이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나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금송아지 사건은 출애굽 이후 즉시 일어난 것인데, 이와 아주 비슷한 사건이 한참의 세월이 지난 다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다시 일어납니다. 그 사건은 남북분열의 초기에 일어났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솔로몬 시대의 장군이었다가 이집트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여로보암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그는 다윗과 솔로몬 왕조를 대적하고 북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의 잘못이 크게 작용합니다. 어쨌든지 이제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서로 경쟁하게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국력은 남유다에 비해서 다섯 배가 컸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남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려면 솔로몬 성전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여로보암의 입장에서는 자기 백성들이 적국 지역인 예루살렘을 드나든다는 사실이 몹시 불안하고 언짢았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서 하나는 베델에, 다른 하나는 단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제사하러 올라가기란 번거로운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를 이집트에서 구해주신 신이 여기에 있다.”(왕상 12:28) 여로보암은 일반 백성들 중에서 자기 마음대로 산당의 제사장을 뽑아 임명했습니다. 성서기자는 여로보암이 이런 일로 죄를 얻어 지상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왕상 13:34)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의 왕조 역사에서 가장 악랄한 왕으로 묘사됩니다. 남북분열 왕조 역사에서 몇몇을 제외하고 모든 왕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앞선 사람은 여로보암이었습니다. 그가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치,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그는 성공한 왕이었습니다. 왕들에 대한 성서기자들의 판단 기준은 경제, 군사적인 능력이 아니라 신앙이었습니다. 왕이 백성들을 굶기면서 신앙만 좋으면 되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신앙이 좋다는 말은 그 나라를 정의롭게 다스린다는 뜻이 포함됩니다. 백성들을 돈벌이에만 빠져들게 하지 않고 삶의 참된 가치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정의, 평화, 자유, 연대, 나눔 같은 보다 본질적인 삶의 내용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오직 정치적인 목적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베델과 단에 세웠습니다. 야훼 하나님 보기에 그는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왕권은 다음 세대에 끊기도 말았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사건과 시내산 밑에서의 금송아지 사건은 깊이 연관된다고 합니다. 금송아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금송아지는 다만 조형물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그 조형물이 가리키는 삶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금송아지를 요즘 말로 바꾼다면 황금만능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라는 생각은 하나님 신앙과 극한적으로 대립합니다. 부자로 사는 게 죄라는 말이 아닙니다. 돈을 절대화하는 게 죄입니다. 거기에 자기의 생명을 거는 게 바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로보암 가문이 멸절된 것처럼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기초입니다. 그들 중에서 모세의 명령에 따라서 삼천 명만 죽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전멸만은 면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두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을 바꾸셨기에 그게 가능했습니다. 그것이 곧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설령 자신의 절대성에 손상이 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생각을 바꾸시기도 하십니다. 이런 사랑과 은총에 의해서 오늘 우리도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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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늘오늘

September 24, 2007
*.239.101.242

모세 이야기에서의 금송아지,
여로보암 이야기에서의 금송아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설명 앞에서는 뭔가 따지고 싶다가도,
역사의 심판을 돌아보는 시각에서는 입이 다물어지는 느낌입니다.

감당 못할 역사의 냉혹함을 경험한 이들이,
속수무책의 상황에서 결국 하나님께 눈길을 돌리면서,
그 책임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고,
변명이나 항의를 한다는 취지가 아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돌이켜야할 방향을 역설하는,,
그 까닭에, 성서 고유의, 계시로서의 통찰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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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삶에서..

September 26, 2007
*.106.177.207

오늘도 계속해서 주어지는 그 은혜로 인해 제가 살고 있음에 아멘이 나올 수밖에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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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月光

September 26, 2007
*.179.231.46

아멘!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의해서 오늘 저도 생명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부자로 사는 것이 죄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부를 축적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것을 내가 가지지 않고서는 부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부자로 살면서 부에 생명을 걸지 않고 살아도 부 그 자체는 죄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마르크스의 이론처럼 제 생각이 좌로 많이 치우쳤지만,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부의 상속도 죄악이요, 깨끗한 부(누군가 남의 몫을 제몫으로 만들지 않고는 부를 쌓을 수 없으므로)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추석인 어제 가족들이 모여서 대선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문국현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연봉이 10억이었을 때 세금이 3억5천, 가계 생활비 1억, 5억5천은 사회에 되돌리는 생활을 하였다고 하더군요.
아시아를 총괄하는 유한킴벌리 북아시아사장을 했던 그의 두 자녀가 비정규직의 직업전선으로 일하고 있다는 말에 저는 그냥 뻑이 가버렸습니다.(어느 누가 자기 자녀를 자기회사에만 취직시켜도 그만인 사람이, 어디 한 군데 청탁만 하면 그냥 정규직 엘리트코스로 갈 수 있는 자녀를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내게 하겠습니까?)
저는 문국현과 같은 사람이 정말 깨끗한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돈이나 재산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라,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것이 아닌 공동의 것이란 생각을 하는 생각이 참 부자의 생각이란 마음에서입니다.
남의 것으로 생색내는 사람이 아니라 내 몫을 내 몫이라 여기지 않는 문국현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 땅의 마지막 보루가 될 것 같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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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September 26, 2007
*.181.51.23

올리브 님의 정치적 스텐스는 나와 비슷하군요.
저도 개인적으로는 다음 대통령 감으로
문국현 씨가 유일한 대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그분을 다 아는 건 아니구요.
매스컴을 통해서 알려진 내용과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근거로만 보면 그렇습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그건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일일텐데,
그걸 기대해봐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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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October 01, 2007
*.64.66.99

그분은 저도 좋아합니다 유한킴벌리 회사도 좋아하구요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서도 절대성에 조금만 여유를 두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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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9 기타 창조계를 벗삼기 [3] [2] 2006-10-22 11524
598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11509
597 주현절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다. (출 24:12-18) [14] 2014-03-03 11497
596 기타 세례를 베풀라 [8] [2] 2011-06-20 11497
595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485
594 사순절 영원한 생수는 예수다! (요 4:5-26) [10] 2014-03-23 11473
593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468
592 기타 자기 의와 은총 [1] 2004-07-02 11459
591 기타 이사야의 구원신탁 2004-07-02 11453
590 기타 하늘나라와 일상, 7월24일 [2] 2005-07-24 11453
589 기타 금송아지와 야훼의 노, 10월9일 2005-10-09 11440
588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11] 2016-10-23 11433
587 주현절 무화과 나무와 하늘 [9] 2009-01-19 11421
586 주현절 하나님 나라와 제자도 (마 4:12-23) [4] 2014-01-26 11420
585 주현절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4] 2017-01-22 11399
584 성령강림절 인간화해의 길 [9] 2007-09-16 11381
583 기타 영혼의 노래, 12월18일 [1] 2005-12-18 11356
582 기타 오시는 구원의 하나님, 12월25일 [1] 2005-12-25 11342
581 부활절 죽임과 살림 (행 5:27-32) [14] 2013-04-07 11339
580 창조절 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 (마 22:1-14) [7] 2017-10-16 11332
579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324
578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290
577 기타 세계, 계시, 하나님 (겔 39:25-29) [1] 2004-07-02 11287
576 성령강림절 교회와 성령 충만 (행 2:1-13) [11] 2017-06-04 11268
575 기타 높은 곳에서의 부르심, 10월2일 2005-10-02 11246
574 창조절 왜 복음인가? (롬 1:8-17) [7] 2017-10-29 11208
573 기타 그리스도의 얼굴의 빛 [5] 2006-02-26 11183
572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182
571 창조절 삶과 죽음의 경계 (눅 20:27-38 [8] 2013-11-10 11180
570 기타 죄로부터의 해방, 6월19일 [2] 2005-06-20 11174
569 성령강림절 이스라엘과 브니엘 (창 32:22-31) [12] 2014-08-04 11172
568 창조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출 33:12-23) [4] 2020-10-18 11162
567 창조절 죄의 심연 (딤전 1:12-17) [6] 2013-09-15 11153
566 성령강림절 기쁨에서 평화까지 [14] 2007-11-18 11131
565 창조절 서기관과 과부 (막 12:38-44) [14] 2015-11-08 11060
564 기타 평화의 은총, 6월26일 [1] 2005-06-26 11050
563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047
562 기타 예언 전통 앞에서, 1월19일 2006-01-29 11039
561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절망 (사 5:1-7) [1] 2013-08-18 11035
560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계명 [4] 2007-07-22 10983
559 성령강림절 정의로운 안식일 [6] 2007-09-02 10975
558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0968
557 창조절 하나님의 평화, 평화의 하나님 (빌 4:4-9) [15] 2013-11-18 10965
556 기타 모세의 하나님 경험, 8월29일 [8] [2] 2005-08-28 10953
555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0945
554 성령강림절 성령의 도우심(롬 8:22-27) [14] 2015-05-24 10900
553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0878
552 창조절 끝까지 견디는 자 (마 24:1-14) [5] 2014-11-03 10874
551 성령강림절 지혜와 평화 [9] 2009-10-05 10857
550 창조절 욥의 운명, 욥의 믿음 (욥 1:1, 2:1-10) [14] 2015-10-04 10854
549 대림절 "깨어 있으라!" (막 13:24-37 [5] 2017-12-03 1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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