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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에서 평화까지

성령강림절 조회 수 11168 추천 수 27 2007.11.18 15:21:33
설교듣기 : mms://wm-001.cafe24.com/dbia/071118.mp3 
성경본문 : 빌립보서 4:4-9 
mms://wm-001.cafe24.com/dbia/071118.mp3기쁨에서 평화까지
2007.11.18. 빌 4:4-9

<기뻐하십시오!>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4절이 가장 핵심적인 구절입니다. 다시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바울이 빌립보 교우들에게 이렇게 기뻐하라고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기독교 신자들에게 기쁨이 가장 중요한 신앙적 덕목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기뻐해야 합니다. 수능 점수만 잘 나와도 기뻐하고, 원하는 사람과 결혼해도 기뻐하는 마당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의 비밀을 알고, 그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 중에도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경험한 사람들이, 즉 구원받았다는 확신으로 기쁨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이런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 두 손을 들고 복음 복음을 부르는 모습을 기독교 티브이 화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그런 기쁨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이런 분들을 세분하면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처음부터 신앙의 기쁨을 알지 못하는 분들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에는 기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시들해진 분들입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대개 모태신앙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다는 특별한 경험을 하기 어렵니다. 뜨겁지도 차갑지 않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지요. 후자의 사람들은 친구나 친지의 권유로 예수님을 믿게 되어 신앙의 기쁨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세상살이에 지치거나 신앙의 성장이 없는 탓에 그 기쁨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어느 쪽이 옳은가요?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무조건 기쁘게 살아야 하나요? 아니면 그런 삶은 이상일 뿐이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가요? 이 질문에 결정적인 대답을 찾기는 힘듭니다. 양쪽 다 일리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기쁨을 모른다면 말이 안 되는 거고, 항상 기쁘게 살기에는 이 세상살이가 너무 험악합니다. 우리가 천사가 아니라 몸을 갖고 사는 인간인 이상 이 세상의 어려운 형편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실제로 사는 게 불편하고, 더 나아가 마음까지 위축됩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이런 문제들이 당장에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항상 기뻐만 할 수는 없습니다.
고후 8:2절에 따르면 마케도니아 지역의 여러 교회들이 극심한 가난에 쪼들렸다고 합니다. 그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회에는 당연히 오늘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빌립보 교회도 포함됩니다. 빌립보 교회는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핍박을 받기도 했고,(빌 1:28) 바울을 적대하는 사람들이 들어와 거짓된 교리를 가르쳤고(3:2), 교회 내부적으로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자가 크게 다투었습니다.(4:2) 빌립보 교우들은 오늘 우리와 마찬가지로 힘들게 세상을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힘들어 하듯이 빌립보 교우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외친 바울도 빌립보 교우들이 기뻐할 수 없는 형편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의 어려운 형편을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그가 처한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합니다. 그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입니다.(1:13)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난 것도 아니며, 보증을 잘못 섰다가 덤터기를 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사회질서를 문란케 한다는 누명을 쓴 것입니다. 억울한 일이지요. 그 당시 감옥생활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인지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건 접어두더라도 바울의 건강이 원래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더 긴 설명이 필요 없겠지요.
감옥생활 자체도 어려웠지만 선교기금이 끊겼다는 사실이 그 어려움을 가중시켰습니다. 먼 곳을 여행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에게 돈이 떨어진다는 것은 곧 생존이 위태로워졌다는 뜻입니다. 그가 피혁세공 기술이 있어서 자비량 선교 원칙을 지켰다고는 하나 그것으로 재정적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꾸준히 보내준 돈이 큰 힘이 되었는데, 빌립보 교회의 도움이 오랫동안 끊겼습니다. 앞서 지적한대로 빌립보 교회도 재정적으로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이 빌립보 교회는 오랜만에 다시 바울에게 선교기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맡은 사람이 에바브로디도입니다. 그는 선교기금을 가져오면서 빌립보 교회의 소식도 갖고 왔습니다. 그 소식들은 별로 반가운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형편도 어렵고, 자기를 기억해준 빌립보 교우들의 형편도 어려운 가운데 편지를 쓰는 중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기뻐하십시오.” 하고 권면했습니다.

<기쁨의 길>

저는 앞에서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늘 기뻐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을 요구하는 건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뻐하라는 말은 옳은데, 우리는 실제로 기뻐할 수 없다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하나요? 늘 기쁜 마음이 되도록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그 해결책인가요? 아니면 매일 아침저녁으로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다. 나는 사랑을 받고 있다. 나는 구원받았다. 그러니 나는 지금 말할 수 없이 기쁘다.” 하고 자기암시를 하면 좋을까요? 이런 방식으로라도 우리의 일상이 기쁨으로 채워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은 것보다 낫겠지요. 사람에 따라서 그런 방법으로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신앙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실제로 큰 유익도 없습니다. 잠시 기쁜 것 같아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허무한 사람은 계속 허무할 것이며, 짜증이 나는 사람은 계속 짜증이 날 것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말했는지 잘 보십시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잘 안되지요? 잘 안되는 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늘 주님과 함께 하는 게 잘 안 되듯이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 없다는 건 결코 이상한 게 아닙니다. 저도 그게 잘 안 됩니다. 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게 잘 안됩니다. 당연히 항상 기뻐하지도 못합니다. 여러분도 아마 저와 비슷할 겁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긴 합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현실을 완전히 초월한 도사든지, 아니면 사이비 기쁨에 스스로 속는 사람입니다. 실제로는 기쁘지 않으면서도 기쁜 척하고 사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여러분이 항상 기뻐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충격을 받거나 좌절하지는 마십시오. 항상 기뻐하라고 외치는 바울도 아마 실제로 그렇게 살지는 못했을 겁니다. 물론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신앙으로 살기는 했겠지만요.
바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다시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무슨 말인가요? 그 길을 가라는 가르침입니다. 현재는 그게 안 되겠지만 바로 그것이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길입니다. 그 삶은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빌립보 교우들이 현재는 많은 어려움으로 기쁘게 살기가 힘들겠지만 거기에 주저앉지 말고 기쁨의 삶으로 꾸준히 진보하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미래에 우리는 주님과 온전히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궁극적인 미래에 우리는 항상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종말론적 미래에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삶은 분명히 미래이지만 지금 여기서 그쪽을 향해서 길을 가는 게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의 길이 그쪽을 향하기만 했다면 아직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라도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미 그런 기쁨을 맛본 사람들이 기독교 역사에 많습니다. 우리도 그들 중의 한 사람들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맛본 기쁨은 비록 퍼즐의 한 조각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전체 그림에서 없어서 안 될 조각입니다. 퍼즐 조각을 맞추면서 그림을 완성해나가듯이 우리가 기쁨의 길을 가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이미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는 삶에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관용과 기도>

‘기쁨의 길’이라는 말에 다시 귀를 기울이십시오. 길은 진행 중이라는 뜻입니다. 기쁨의 길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삶의 길을 꾸준히 가야만 합니다. 길을 가다보면 기쁨이 충만해지는 순간도 있지만 바람 빠진 풍선처럼 가라앉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길을 가야 합니다. 만약 가라앉는 순간에 길을 멈추면 그는 결국 참된 기쁨의 세계에 이를 수 없을 겁니다. 기쁨의 길을 간다는 것은 지금 당장 실제로 기쁘냐, 아니냐에 구애받지 말고 기쁨의 끝에 이른 것처럼 앞으로 나간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바울은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관용으로 대하는 것입니다.(5절) ‘똘레랑스’라는 프랑스어로 유명한 관용은 기쁨의 열매입니다. 실제로 기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게 됩니다. 기쁨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인색하게 대하겠지요. 가족 사이에도 관용이 필요할 겁니다. 저에게는 이 관용이 많이 부족합니다.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을 보면 아주 쉽게 저 사람은 왜 저래, 할 때가 많습니다. 기쁨이 부족한 탓이겠지요. 신학적으로 아무리 깊은 세계를 안다고 하더라도 기쁨을 모르면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기도입니다.(6절)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아는 사람은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아뢸 수 있습니다. 기도는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미래를 온전히 맡긴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무엇인들 아뢰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부끄러움까지 그분에게 아뢰겠지요. 부모를 신뢰하는 아이들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모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아이는 비록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아도 크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기에게 결국은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길을 가는 사람은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건 의무가 아니라 기쁨의 길 자체입니다. 그것이 바로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

관용과 기도로 기쁨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죽을 때까지 관용과 기도만 붙들고 있으라는 말인가요? 힘든 일을 무조건 참으면서 감당하라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영성의 대가인 바울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십시오. 7절 말씀입니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기쁘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과 생각이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괜찮은 생활조건인데도 짜증을 내거나 우울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면 결국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관건이라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지요. ‘에이레네 투 데우’, 하나님의 평화는 그 어떤 조건이나 형편에 따라서 오락가락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생산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평화가 무엇인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전쟁이 일어난 곳에 가서 전쟁을 막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분적으로만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수능은 전쟁과 같습니다. 청소년들이 이런 전쟁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찾은 평화의 방법은 별로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염려와 걱정을 없애는 사람들의 방법은 돈을 벌거나 건강을 찾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우리가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은 없겠지요.
하나님의 평화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뛰어넘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이런 경험이 여러분에게 있을 겁니다. 완전히 죽을 지경이라고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평화로워지는 경험 말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 평화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그렇게 하십니다. 그럴 때는 참으로 신기하다고 느낄 겁니다. 그런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버텨낼 수 없습니다. 저도 저 자신에게 실망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의 평화가 저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만 본다면 그런 순간들이 흔하지는 않습니다.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힘든 순간이 없었던 사람은 이런 경험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삶이 너무 평탄한 것도 무조건 좋은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우리 삶의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이런 놀라운 경험이 자주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경험이 아주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면 더 좋겠지요.
다시 빌립보 교회를 돌아보십시오. 빌립보 교회와 바울의 형편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그 형편에서도 바울은 기뻐하라고 외쳤습니다. 이건 낭만적 신앙도 아니고 광신적 신앙도 아닙니다. 우리 인간 삶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근거해서 제시된 진리의 말씀입니다. 저도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쁨의 길을 가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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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November 18, 2007
*.167.175.60

아멘!
오늘 하루가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기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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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자

November 19, 2007
*.7.13.27

아멘~
기뻐하라는 말씀을 늘 실천할수는 없어도 기억하며 그 길을 갈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그 길이 열려지고 보여지고 갈수 있도록 인도하심에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큰 힘이 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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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청년예수

November 19, 2007
*.205.39.27

퍼즐한조각에 비유된 기쁨,그 조각은 그림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고...
탁월한 묵상에 깊은 은혜를 받습니다.
영혼의 겨울밤을 지나고 있는 저를 포함한 많은 순례자들에게 오늘 이말씀이 위로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그네의 삶은 지치고 힘들어 때론 쓰러져도 가야하지요.
그걸음 걸음에 본향을 향한 소망과 기쁨이 동반되고 성령의 만지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를 신뢰함으로 그의 궁극적인 기쁨의 은혜에 들어갈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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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0]anne

November 19, 2007
*.168.1.250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것입니다,

교회에 가려면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다시 고쳐야 되겠습니다.
인생의 그 큰파도속에서도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셨기에 이렇게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니다.
다비아로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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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돌파구

November 19, 2007
*.105.34.15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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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9, 2007
*.181.51.42

위의 분들에게 이 설교가 도움이 된 듯하여,
저도 기쁩니다.
사실 내용은 별 거 아니지만요.
이미 바울이 다 말한 거를
그냥 따라가면서 설명한 거에 불과하지요.
문제는 우리가 성서기자들의 말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열린 마음으로
따라가는가에 있습니다.
그게 잘 안 되거든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영성이,
즉 우리의 영적 시각이 거칠다는 겁니다.
클라식 음악을 처음 들을 때 소리가 잘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이요.
다른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은 경험이
우리를 꽉 붙들어매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평화가 무엇인지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합니다.
그게 들어서 아는 것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 다르 거든요.
모든 분들에 좋은 한 주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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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광야

November 19, 2007
*.129.191.49

힘들고 지겨운 월요일 펌프같은 힘이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관용과 순전한 기도로 기쁨의 길로 계속 행군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습니다
귀한 말씀 값없이 들어서 죄송합니다.
추운날씨에 목사님 건강챙기시고 기쁨의 한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 가지고 있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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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November 19, 2007
*.64.66.99

감사합니다 관용과 기도, 제 후임병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게 기도해주세요
profile

[레벨:0]자작나무

November 19, 2007
*.154.80.16

어제 귀한 목사님의 설교 말씀 중에서도 7절 성경 구절인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라는 성경구절이
한 주를 시작하는 오늘까지도 생생하게 전해 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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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주님의 종

November 20, 2007
*.81.138.27

아멘...

사랑의 본질이 구체적인 방법에 있지 아니하듯
기쁨의 근원도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 견지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오직 주님의 존재 자체에
머물러 있을 때 참된 사랑과 기쁨은 자연스레 흘러
나오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신비에 기인하여 오늘
또한 함박웃음 짓는 행복한 시간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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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달팽이

November 20, 2007
*.152.178.158

우리는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나라 사이에서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군요. "고난을 기뻐하라"는 이 역설적인 말앞에 우리의 믿음의 행보가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기쁨으로 이겨나가는 승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셨네요. 오늘도 삶에 대한 긍정으로 모든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평화가 우리 삶의 길에 등불로 이 어려운 세대를 이길 수 있는 힘임을 고백합니다.
profile

[레벨:6]LVCF

November 21, 2007
*.229.41.170

말씀 감사합니다 고민하고 있었던 일이였는데 완전히 깨달아진것은 아니지만 많은 것을 느낄수있었고 전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늘 항상 정 목사님 의 설교에서 말씀의 참된 진리를 깨달으면서 내안에 자리잡고 있는 잘못된 신앙의 선입견 들과 또한 잘모르는 것들을 잘아는 것처럼 우격다짐으로 꾸겨넣어서 성도들에게 전해 준것이 항 상 마음속에서 죄송 했습니다 성도는 이땅에서 무조건 기뻐해야 하고, 또 복을 받아야 하고, 건강 해야 하고 하는 이러한 세상속에서 우리가 추구하고 누리는 것들에 대한 대안책이 과연 진정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있고, 빠지고는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성도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가 /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는 것이 정말 무엇일까 지금 도 고민 해봅니다 신앙에대해서 코드가 있듯이 무수히 쏫아놓는 정보처럼
전하는 것에 는 생명이 없다는 것을 항상 느끼면서도 성도들에게 고난을 기뻐하라고 감히 이야기 할수 없는 나 고난이 축복으로 올것이기 때문에 기다리라고 이야기하는 상투적인 나의 생각들 이러한 모든 것들 안에는 생명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분명히 확신 하는 것은 제자신이 먼저 많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우리안에 잘못된 선입견에 되한 신앙 관과 무수한 정보의 코드로 가득차 있는 가운데 예수님을 포장하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해결될 일은 아니지만 오늘 진리가운데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항상 다비아 식구들과 그리고 진리가운데 고민하는 여러분들에게 감사합니다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를 칠려니까 엄청 오래 걸리는군요 ) - 샬롬-
profile

[레벨:100]정용섭

November 21, 2007
*.181.51.42

LVCF 님,
젊은 목사님이신 것 같군요.
반갑습니다.
저의 설교비평 및 모든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독자는
바로 한국 교회를 이끌어갈 젊은 목사님들이십니다.
성서의 세계와 치열하게 투쟁하는 영성이 아니라면
설교자의 길을 갈 수 없다고 보기에
아주 작은 깨우침이지만 뭔가를 이렇게 외치고 있답니다.
목사님의 대글에 진정성이 느껴지네요.
앞으로 가 보십시다.
독수리 타법은 느리지만 날카롭지요.
고생해서 친 거 날라가지 않도록
일단 복사한 다음에 저장을 누르는 것 잊지 마세요.
주의 은총이.

뒤에 대글을 주신 분들의 마음을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평화가 무언지
우리의 삶에서 조금씩 경험하고
그 영역을 넓혀갔으면 합니다.
아자.
profile

[레벨:4]주향한

November 21, 2007
*.142.180.226

가입하고 처음글입니다
기쁨에서 평화까지 이군요
내게 기쁨을 주는것들이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때
좋은 물건을 살 수 있었을때
다른 사람들이 나의 말을 잘 들어줄때
운동으로 좋은성적을 받았을때
집에 아이들이 말을 잘듣고 나를 공경해줄때
등등등
평범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으로 여러가지 기쁘고
그로인해 평화를 누릴 수 있는일이 수만가지 이겠지만

문득 신앙생활이 외롭고 힘들다고 느껴질때
주위에 나와 동질감을 가진 동역자가 보이지 않아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깨닫고 있고
신앙생활이 잘못가고 있지 않는가 회의 속에 빠졌을때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확신의 길에 들어서게되고
말씀의 새로운 깨달음에 기쁨을 얻고
한순간이나마 평화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온라인을 통한 교회의 장을 마련해 주신 목사님께
감사의 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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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8 부활절 세례 받으라! [3] 2008-04-06 12027
637 대림절 하나님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 [7] 2008-12-22 12006
636 주현절 무죄한 피 흘림에 대해 [9] 2009-02-02 11994
635 주현절 바울의 두려움 [12] 2009-02-16 11991
634 기타 말의 구원론적 능력 [1] 2004-07-02 11989
633 기타 일꾼을 위한 기도, 6월12일 [3] [2] 2005-06-13 11986
632 성령강림절 두려움과 믿음 [6] 2008-09-07 11972
631 성령강림절 귀신 이야기 (눅 8:26-39) [43] 2016-06-19 11970
630 대림절 알곡과 쭉정이 (마 3:1-12) [6] 2019-12-08 11954
629 기타 종말론적인 삶 (벧전 4:1-11) [1] 2004-07-02 11901
628 사순절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자! [8] 2007-04-01 11891
627 성령강림절 혁명은 시작되었다. [27] 2007-08-19 11889
626 사순절 원망에서 생명으로! (민 21:4-9) 2018-03-11 11880
625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11] 2014-12-22 11874
624 기타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10월23일 [6] 2005-10-23 11855
623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인 [9] 2007-07-08 11806
622 주현절 복음에 참여한다는 것 (고전 9:16-23) [4] 2015-02-08 11800
621 사순절 아브라함의 하나님 (롬 4:1-5, 13-17) [5] 2014-03-16 11800
620 부활절 목마른 사람을 위한 복음 [8] 2007-05-20 11789
619 성령강림절 광야의 복된 삶 [14] 2008-11-17 11780
618 기타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1] 2006-05-14 11765
617 성령강림절 씨 비유 (막 4:26-34) [13] 2015-06-15 11743
616 기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4] 2006-03-26 11740
615 성령강림절 두려움의 대상 (막 4:35-41) [4] 2018-06-24 11703
614 성령강림절 의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7] 2007-10-14 11687
613 성령강림절 참된 생명의 길 [14] 2007-06-24 11685
612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를 통한 만물의 화해 [17] 2007-08-05 11670
611 기타 두려움을 넘어서 [3] [2] 2004-07-02 11667
610 기타 창조계를 벗삼기 [3] [2] 2006-10-22 11662
609 기타 경건주의의 함정, 9월25일 [1] 2005-09-25 11659
608 기타 세례를 베풀라 [8] [2] 2011-06-20 11641
607 성탄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갈 4:4-7) [7] 2014-12-28 11636
606 기타 흔들리지 않는 터전 [1] 2004-07-02 11634
605 기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11월13일 2005-11-13 11624
604 기타 은폐와 노출 [3] 2004-07-02 11620
603 성령강림절 예수와 표적 이야기 (요 6:1-15) [12] 2015-07-26 11619
602 부활절 구름 타고 오십니다! [10] 2007-04-15 11592
601 성령강림절 성령, 진리의 영 (요 16:12-15) [11] 2016-05-22 11583
600 기타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 1월8일 [1] 2006-01-08 11583
599 기타 야훼의 진노와 모세의 기도 [1] 2004-07-02 11556
598 기타 금송아지와 야훼의 노, 10월9일 2005-10-09 11534
597 주현절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다. (출 24:12-18) [14] 2014-03-03 11530
596 기타 자기 의와 은총 [1] 2004-07-02 11523
595 기타 이사야의 구원신탁 2004-07-02 11516
594 성령강림절 믿음의 위험성 [9] 2008-09-21 11514
593 기타 하늘나라와 일상, 7월24일 [2] 2005-07-24 11509
592 사순절 영원한 생수는 예수다! (요 4:5-26) [10] 2014-03-23 11508
591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11] 2016-10-23 11480
590 주현절 무화과 나무와 하늘 [9] 2009-01-19 11466
589 주현절 하나님 나라와 제자도 (마 4:12-23) [4] 2014-01-26 11457
588 주현절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4] 2017-01-22 11448
587 기타 세계, 계시, 하나님 (겔 39:25-29) [1] 2004-07-02 11426
586 기타 영혼의 노래, 12월18일 [1] 2005-12-18 11422
585 성령강림절 인간화해의 길 [9] 2007-09-16 11416
584 기타 오시는 구원의 하나님, 12월25일 [1] 2005-12-25 11408
583 기타 구름 타고 오십니다. 2004-07-02 11393
582 창조절 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 (마 22:1-14) [7] 2017-10-16 11381
581 부활절 죽임과 살림 (행 5:27-32) [14] 2013-04-07 11371
580 기타 야훼의 자기 증거 2004-07-02 11371
579 기타 높은 곳에서의 부르심, 10월2일 2005-10-02 11319
578 성령강림절 교회와 성령 충만 (행 2:1-13) [11] 2017-06-04 11304
577 기타 그리스도의 얼굴의 빛 [5] 2006-02-26 11275
576 기타 땅을 묵혀라! 2004-07-02 11263
575 기타 죄로부터의 해방, 6월19일 [2] 2005-06-20 11253
574 창조절 왜 복음인가? (롬 1:8-17) [7] 2017-10-29 11247
573 성령강림절 이스라엘과 브니엘 (창 32:22-31) [12] 2014-08-04 11228
572 창조절 삶과 죽음의 경계 (눅 20:27-38 [8] 2013-11-10 11221
571 창조절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출 33:12-23) [4] 2020-10-18 11215
570 창조절 죄의 심연 (딤전 1:12-17) [6] 2013-09-15 11198
» 성령강림절 기쁨에서 평화까지 [14] 2007-11-18 11168
568 기타 예언 전통 앞에서, 1월19일 2006-01-29 11130
567 창조절 서기관과 과부 (막 12:38-44) [14] 2015-11-08 11129
566 대림절 "너는 누구냐?" (요 1:19-28) [4] 2020-12-13 11122
565 기타 평화의 은총, 6월26일 [1] 2005-06-26 11118
564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2020-12-06 11115
563 기타 예수의 길, 요한의 길, 12월5일 [1] 2004-12-05 11111
562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절망 (사 5:1-7) [1] 2013-08-18 11072
561 대림절 "깨어 있으라!" (막 13:24-37 [5] 2017-12-03 11054
560 기타 일상의 영성 안에서, 1월30일 [1] 2005-01-30 11047
559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계명 [4] 2007-07-22 11026
558 기타 모세의 하나님 경험, 8월29일 [8] [2] 2005-08-28 11021
557 성령강림절 정의로운 안식일 [6] 2007-09-02 11011
556 창조절 하나님의 평화, 평화의 하나님 (빌 4:4-9) [15] 2013-11-18 11004
555 성령강림절 하나님과 정의 [6] 2008-09-28 10969
554 성령강림절 성령의 도우심(롬 8:22-27) [14] 2015-05-24 10947
553 기타 자유를 향한 길에 서서 [1] 2004-07-02 10947
552 창조절 끝까지 견디는 자 (마 24:1-14) [5] 2014-11-03 10922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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