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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자유

기타 조회 수 10323 추천 수 32 2004.07.02 16:27:25
성경본문 : 마가복음 10:32-34 

운명과 자유
막 10:32-34

예수님의 공생애를 연대기식으로 요약한다면 갈릴리 호수 근방에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전하며 제자들을 불러모으는 것을 시작으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들어가
서 체포당하시고 심문이 있은 후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스라엘의 변방
인 갈릴리 호수부근으로부터 예루살렘까지가 곧 예수님의 공생애 일정입니다. 물론 그
사이에 여러 일들이 그분에게 일어났습니다. 병자를 고친다든지, 하나님 말씀을 설교하
거나 전혀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으며,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의 격렬한 논쟁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열두 제자들이 선정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게서 구원의 희망을 발견하고 뒤따르기도 했고, 때에 따라서는 실망하고 흩어지기도 했
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차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거기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서 예수님이 유대교의 거점인 예루살렘 성전
에 가서 그들 지도자들과 진리 논쟁을 대판 벌이기 위해서 올라갔다고 볼 수도 있습니
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쫓은 사건으로
인해 제사장들의 심사가 뒤틀린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합니다. 또 어떤 사
람은 이미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부활할 것이라고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런 길을 따라간 것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관된 모든 사건을 큰
틀에서 하나님의 섭리이며 예정이라고 말한다면 이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서
에 이런 단서가 될만한 문구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보도를 무조건 예수님에게 일
어난 사실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성서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형
성된 공동체에 의해서 전승되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객관적인 사실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가능한대로 정확하게 구분하면서 해석해나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까요? 가장 단순하고 정확한 대답은 예수님도 그
당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월절을 맞아 '성지순례'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평범한 사건이라면 복음서 기자들이 이 사건을 무엇 때문에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고 있
는지 궁금하게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예루살렘 순례가 아주 일반적인 일이긴
했지만 이 일의 내면에 아주 특별한 의미가 들어 있으며, 또한 그런 것으로 인해서 결국
인류 역사에 유일회적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오늘은 이 특별한 의미에
대해서 설교하겠으며, 유일회적인 인류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 두 주일에 걸쳐서 설
교하겠습니다.

제자들의 불안
32절 말씀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올
라가는 길이었다. 그 때 예수께서 앞장서서 가셨고 그것을 본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불안에 싸여 있었다. 예수께서 다시 열 두 제자를 가
까이 불러 장차 당하실 일들을 일러 주셨다." 예수님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과 어울려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자 제자들이 어리둥절했으며, 그 뒤를 따라가던 사람들도 불안에 싸였다고 합니다.
어리둥절하다는 것이나 불안에 싸인 것이나 비슷한 현상입니다. 이들은 왜 그렇게 불안
에 싸인 걸까요?
성서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지만 이들 일행이 예루살렘 순례에 관해서 상당한 설왕설
래가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오는 길에서도 이미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한 많은 종
교 지도자들과의 마찰이 있었으며, 예루살렘 지도자들로부터 크고 작은 압력이 가해졌기
때문에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은 아주 큰 모험이었습니다. 가능하면 이번 유월
절에는 그만두고 다음 기회를 도모하자, 또는 예루살렘에 은신처를 마련해두자, 이렇게
저렇게 끈이 닿는 유력인사들의 의견을 들어보자 등등, 의견들이 분분했을 것입니다. 개
중에는 자신들에게 가해질지 모르는 불이익을 두려워했을 것이며, 또는 예수님의 보호하
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마당에
예수님이 '앞장서서' 가시니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들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너무나 많은 가능성을
생각하다가 '앞장서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한 가지 사실만 생각하니까 '앞장서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깊어서 어떤 사태를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야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대개의 경우에 우리의 불안은 쓸데없이 좌고우면 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어
떻게 해야 우리 자신에게 최대한으로 이익이 되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머리를 굴리다보
면 아무런 대답이 나오지 않고 불안에 싸이기만 합니다. 아마 이런 일을 여러분도 일상
에도 자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게 쉽지 않습니다.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게 곧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머리를 굴리다가 불안과 두려움에 빠지는 우리의
삶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마음과 인격의 도야에서만 찾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과의 일치에서만 가능하다는 뜻이 아닐까요? 일반
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을 하는 게 자유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것은 소극적인 자유에 불과합니다. 그런 자유는 아예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
람은 온 세계를 소유하더라도 만족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오늘 본문
에서 제자들과 일행의 불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자기 자신의 일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기껏 노력해서 자유로운 것 같다는 착각을 하고 있
을 뿐입니다.

수난 예고
예수님은 불안에 싸인 사람들 중에서 제자들만 가까이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일행 모두에게 말씀하지 않고 제자들만 따로 가까이 불렀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렇게 기
분 나빠하지 마십시오.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기는 하지만 어떤 사명(mission)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사
명 때문에 예수님은 이 미묘한 순간에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의 손에 넘어 가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이방인의 손에 넘어 갈 것이다. 그러면 그
들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마침내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밝히는 작업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제자들
이 불안해하고 있는 이 순간에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미 앞서 8:31, 9:31에 두 번이
나 수난을 예고하셨으니까 이번이 세 번째가 됩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 때는 베드로가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펄쩍 뛰었으며, 두 번째 예고 때는 제자들이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했고 묻기조차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세 번째 예고에서는 제자들
의 반응이 없습니다. 세 번의 반복 학습에 의해서 정확하게 이해된 것인지, 아니면 반복
에 의해서 오히려 그 주제에 대해서 둔감해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순간에
세 번째의 수난 예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이유는 예루살렘이 가까워오면서 제자들의
불안이 더 심해지는 것을 보고 무언가 확실하게 짚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라
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앞의 예고보다 이번의 예고가 훨씬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보도되고 있
습니다. 앞서의 예고는 예수님이 잡혀서 죽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핵심만 다루고
있지만, 이번의 예고는 이방인들에게 넘겨진다거나 조롱받고 채찍질 당한다는 내용이 아
주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교육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학습 시간이 경과하면서
내용의 심화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입니다.

수난의 운명 앞에서
몇 번에 걸친 예수님의 수난 예고로 인해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을
것이며, 아마 그 이후로도 실랑이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수난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
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놓인 운명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이해시키
고 설득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반복해서 그 수난을 예고하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이런 죽음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모든 것
을 알고 있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
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분의 모든 구원론적 행위의 진정한 의미가 훼손됩니다. 초능력
적인 인식과 능력이 천부적으로 주어진 분의 십자가 죽음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
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체포당하고 급기야 죽게 될지 모른다는
예감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런 예감은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만 인식할 수 있는 게 아닙
니다. 사태의 전개를 세심하게 들여다보기만 하면 대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이 십자가형을 당할 것으로까지 생각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세 번에 걸친 수난 예고
의 내용에는 단순히 수난 받고 죽는다고 했지 십자가로 죽는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만
약 예수님이 종교적인 이유로 죽는다면 당연히 십자가가 아니라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
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러한 운명 앞에서 예수님이 도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는 사실을 똑같은 목소리로 전하고 있습니다. 잡히시던 날 밤에 가능하다면 이 '잔'을
마시지 않겠다는 순간적인 갈등이 보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완전히 운명에 맡
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운명과 예수님의 자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우리
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운명 앞에서 우리가 무력한 존재가 되는
지, 아니면 그 엄청난 운명의 힘 앞에서도 역시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지에 대한 문제입
니다. 아무리 우리가 발버둥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운명을 전혀 교정할 수 없다는 점에
서 우리의 삶은 철저하게 운명의 노예처럼 생각됩니다. 예컨대 이라크 전쟁 1년 동안 얼
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이라크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 운명 앞에서 무력했습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들도 역시 그렇
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일상에는 그런 운명적인 힘
들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이런 힘들에게 철저하게 예속 당하게 되면 우리는 운명론자가
되고 말겠지요.
그러나 그 운명의 힘이 아무리 폭력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자유를 송두리째 파괴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밀려드는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운명론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운명에 떠밀리는 게 아니라 그 운명을 선택했습
니다. 이게 곧 자유가 아닐까요? 운명을 억지로 거부하거나, 또는 어쩔 수 없이 운명에
빠져서 사는 것과 운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한쪽의 삶은 운
명의 악한 힘에 의해서 파괴되는 반면에 다른 한쪽은 그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유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약간 극단적으로, 장애의 운명에 의해서 삶이 파괴되는 사람도 있
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유로운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자유의 근원
수난 예고는 끝마디에 '부활'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읽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예지의 능력이야말로 예수님의 초월적인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이 있습니다. 만약 자기의 부활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면 그가 죽음 앞에서 보인
두려움이 해명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극구 반대한 제자들의
태도도 역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더라도 사흘 후에 부활하는 게 확실
하다면 그 죽음을 아쉬워할 필요는 하나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
후에 보인 제자들의 태도를 미루어 볼 때 예수님의 부활 예고는 전혀 다른 뉘앙스로 전
달된 게 틀림없습니다.
이미 구약성서에는 이런 부활을 예고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에 구약성서와 연결해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관한 구약의 증언은 여전히 미래의 가능성으로만 제시되고 있지 실증적이거나 현실적인
것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런 증언들은 구약 전체와 비교할 때 매우 미미한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34절)라는 예수님의 예고도 역시 이
런 구약성서의 테두리 안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사흘 후에 반드시 살
아난다는 확신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어쩔 수 없이 죽더라도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새
로운 방식으로 생명을 허락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예수님에게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제자들에게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부활 예고를 마음에 새기지
도 않았고, 또한 실제 부활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도 믿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은 믿음 안에서 자기에게 밀려드는 십자가의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믿음이 곧 자유의 토대입니다. 죽음 이후의 생명이 아직 손에 잡히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불안하기는 했지만 결국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운명을 맡김으로써 그는 자유로운 존재가 되셨습니다. 죽음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운명으
로부터도 자유로운 존재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하나님을 참되게 믿었던 유일한 분인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비참하게 죽어야 할 운명 앞에 놓여 있지만
다시 생명을 얻는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감당해야 할 운명이 무엇인가
요? 예수님의 운명보다 더 험한 것은 아니겠지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기 머리로 계
산해서 피해가려면 결국 운명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에게 우리의 미
래를 맡깁시다. 거기서 우리의 운명은 아무리 험하더라도 극복되고, 우리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2004.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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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071
478 기타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2] [2] 2005-05-22 10066
477 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1] 2005-03-13 10052
476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043
475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010
474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001
473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9997
472 성령강림절 성령과 은사 (고전 12:4-13) [8] 2014-06-08 9986
47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9960
470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9957
469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9945
468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34
467 성령강림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20] 2016-05-29 9925
466 기타 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1] 2005-04-04 9925
465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9920
464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9918
463 부활절 "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16] 2016-05-08 9911
462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07
461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9900
460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9893
459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878
458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874
457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9870
456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9860
455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9846
454 성령강림절 여호와를 찬양하라! (렘 20:7-13) [2] 2014-06-22 9840
453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9837
452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31
451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25
450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824
449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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