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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신가? 4월24일

기타 조회 수 10432 추천 수 22 2005.04.24 20:19:08
성경본문 : 요한복음 14:1-14 
2005.4.24.          요 14:1-14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신가?

고별설교
요한복음 14-17장은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직전에 행하신 ‘고별설교’입니다. 이 고별설교는 흡사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처럼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텍스트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죽음 앞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긴 설교를 하실 수도 있긴 하지만, 이런 장문의 텍스트가 실제로 행해진 설교라고 한다면 공관복음에서 다루지 않았을 까닭이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요한의 독특한 신학에 의해서 고별설교가 이 대목에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입니다. 요한신학의 특징은 서두에 ‘로고스’를 언급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사변적이고 대화 중심이고 변증적입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이런 특징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길, 진리, 생명(14:6)은 무엇일까요?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9)이라는 말씀은 또한 무슨 뜻인가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있다(10)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매우 철학적 변론처럼 들리는 이런 말씀은 그 뒤로 17장 끝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을 ‘고별설교’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이 3년 가까운 공생애를 끝내고 이제 제자들과 헤어져야 할 그 순간에 행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난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사람이 한번 세상에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운명을 가리키는 걸까요? 물론 한 인간의 죽음이라는 건 본인에게는 두말할 것도 없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자기 가족 중의 한 사람이 늙어서, 또는 병이 들어서, 사고를 당해서 죽는 일은 우리 주변에 흔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런 일과는 별로 상관없는 것처럼 일상생활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준비 없이 살다가 그런 일을 닥치면 정신적으로 큰 혼란에 빠져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단지 가까운 사람과 헤어지기 때문에 당하게 되는 슬픔을 위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단순히 선생, 친구, 아는 사람, 또는 가족이 아니라 전혀 다른 대상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고별설교를 듣고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가족을 버리고, 친구를 버리고, 직업도 포기했습니다. 일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그런 모든 것을 버리고 좇았던 예수님이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상황이 닥쳤습니다. 모든 것을 걸었던 그 대상이 없어진다면 결국 자신의 존재 의미마저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제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고별설교는 단지 제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말씀은 아닙니다. 제자들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은 요한공동체, 또는 초기 기독교,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도 역시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과 3년 동안 함께 살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없는 세상에서도 역시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하듯이 오늘 우리도 예수님이 없는 세상에서 그런 신앙을 유지해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없지만 영적으로 함께 하신다고 말을 합니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충분하게 해석되지 않으면 무의미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런 주장은 단지 자신의 주관적인 신앙에 도취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흡사 사랑하던 아내, 혹은 남편이 죽었지만 자신의 마음에 살아남아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여자, 혹은 남자가 생기면 이런 마음은 사라질 겁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무 것도 없으면서 마음속에 무언가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훨씬 근원적인 리얼리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없는 상황에서 살아야 한다는 이 엄청난 현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한 기독교 신앙의 깊이와 그 신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고별설교는 우리 기독교 신앙의 실존을 적나라하게 변증하고 있습니다.

도마와 빌립보의 질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문을 여셨습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만일 거기에 있을 곳이 없다면 내가 이렇게 말하겠느냐?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 제자들의 걱정이 어디 한 두 가지였겠습니까? 자신들의 운명을 맡겼던 그 분이 없어지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모든 희망이 물거품이 되는 거니까 걱정이 태산 같았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일단 그들에게 걱정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도마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5). 이 도마의 질문은 매우 정직합니다. 예수님이 떠나간다는 말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도마로서는 제자들이 이미 ‘길’을 알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선생이 한 마디 하면 열 마디를 알아듣는 제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제자들은 이미 제자가 아니라 또 다른 선생입니다. 그런데 선생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 건 훨씬 큰 문제입니다. 간혹 기독교는 무조건 믿는 것이지 질문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건 광신이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도마가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지 않고 직접 질문했다는 건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신앙적 자세입니다.
도마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뵈었다.”(6,7). 도마의 질문은 ‘길’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길은 곧 하나님에게 이르는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미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답변이 제자들에게 그렇게 명쾌하게 들린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예언자도 아닌 자신들이 하나님을 알고 보았다는 건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가 구체적으로 이렇게 요구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8). 제자들도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이런 요구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실증적으로 확인해야만 참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원한 것도 역시 이런 일반적인 욕망입니다. 사람 사이의 사랑도 역시 무엇을 통해서 확실하게 확인하려고 합니다.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게 우리의 세상살이 방식입니다. 사랑은 결코 그런 방식으로 증거를 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은 사랑하는 시늉일 뿐이지 사랑 자체는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도 역시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보의 요구와 비슷한 차원에서 어떤 절대적인 것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든지, 매머드 교회당 건축 같은 것들을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건 아무런 증거가 될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요구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빌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9). 예수님의 이 대답은 빌립보가 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훨씬 엄청난 사건, 훨씬 신비로운 일들, 그 어느 누구도 다른 소리할 수 없을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예상외의 대답 앞에서 아마 제자들은 당황하거나 불편하게 생각했겠지요. 예수님이 떠나는 이 고별의 순간에 어떤 결정적인 대답이나 증거를 받고 싶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경천동지할만한 걸 제시하지 않았으니까 실망했겠지요. 과연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이 대답은 별 볼일 없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이 예수님의 대답은 기독교의 존재 근거입니다. 어떻게 보면 시시한 대답인 것 같지만 여기서만 우리의 신앙은 유지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대답은 바로 예수님과 하나님이, 즉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동일성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9). 이 말씀은 단지 빌립보만을 향한 대답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와 오늘 우리를 향한 대답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곧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과연 이 예수님의 말씀은 옳은 걸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시면서 그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하나님은 구별된다는 게 틀림없습니다. 서로 구별되는 인격이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말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둘이면 둘이지 어떻게 둘이면서 하나라는 말인가요? 이건 말장난이 아닐까요?
우리 인간의 삶에서 그 유비를 찾아본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긴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두 사람은 서로 같은 마음을 품고 있고 성격도 비슷해서 한 사람만 보아도 다른 사람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의 경우가 있습니다. 쌍둥이라면 이런 느낌이 훨씬 강하게 들 겁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아무리 서로 비슷한 관계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따라서 죽을 수도 없고, 설령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동반 자살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배타적이며 반생명적이라는 점에서 일치할 뿐이지 세계를 향해서는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이 되신다는 말씀인가요? 그렇다고 하니까 그냥 믿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여봅시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11).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라는 말은 곧 서로가 서로의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안’에 있다는 말은 단순히 서로를 생각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의 심리상태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어떤 근원적인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자신을 완전하게 의존시켰다는 뜻입니다. 자기 개인의 생각은 철저하게 부정하고 완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만 자기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로 자기도 그렇게 살아간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건 착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에 자기를 의존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 하나님의 생각을 정확하게 인식해야만 하는데, 우리는 그런 인식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혼동합니다. 자기의 짧은 생각, 혹은 자기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신학 공부를 하거나 교회를 개척했으면서도 그것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었다고 우깁니다. 우리는 예수님만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을 완전하게 인식하고 그 생각에 완전하게 순종하신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만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말은 앞의 명제를 뒤집어 표현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가 임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통치를 온전하게 행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말이 맞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국 믿기 힘들면 “내가 하는 일들을 보아서”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행위, 그의 운명이 곧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심으로써 하나님과 하나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이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예수님을 본 사람은 곧 하나님을 본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된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된다면, 결국 우리도 역시 하나님과 하나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삶이 진리라고 믿고 사는 게 곧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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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878
458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875
457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9871
456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9861
455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9851
454 성령강림절 여호와를 찬양하라! (렘 20:7-13) [2] 2014-06-22 9840
453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9837
452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32
451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26
450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824
449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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