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기타 조회 수 10367 추천 수 35 2005.07.10 23:27:39
성경본문 : 로마서 8:1-11 
http://wms.kehc.org/d/dabia/ENCO-006.MP3http://wms.kehc.org/d/dabia/ENCO-006.MP32005. 7.10.          
롬 8:1-11
총체적 구원의 길

율법의 요구
바울은 롬 7장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 안에서 두 세계가 다투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마음 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롬 7:21-23).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이며 신비주의자인 사도 바울이 자기의 내면적 삶에서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좀 의외입니다.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바울이라고 한다면 도덕적인 면과 영적인 면에서 완전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의 진술만 놓고 본다면 그는 평범한 우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는 사람 같습니다. 우리의 삶은 양쪽 바퀴의 크기가 다른 마차처럼 늘 뒤뚱거리고 있습니다. 어떤 날은 그럴듯한 모양을 갖추지만 어느 순간에 그런 게 허물어집니다. 마음의 평화가 어느 정도 주어지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에 불안에 휩싸입니다. 어떤 때는 친구나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지만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 속으로 빠져듭니다. 바울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런 삶의 갈등을 지적하고 있는 걸까요?
여러분, 바울의 가르침을 우리의 교양이나 도덕심 정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바울은 율법 문제와 투쟁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제시되고 있는 그런 법이 과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는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바울을 비롯해서 모든 유대인들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이 인간을 구원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가장 모범적인 인간으로 만들어가는 율법에 전력투구 했지만 거기에는 서로 다른 정신세계의 대립이 계속될 뿐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입니다. 이런 한계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입니까?”(롬 7:24).
지금 우리의 삶도 역시 이런 율법과 밀착되어 있습니다. 즉 모범생 만들기에 모든 것을 걸어두는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게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는 내가 여기서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모든 삶의 형식들이 다른 사람보다 잘난 사람을 만드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공부 잘하는 것도 좋고, 돈 잘 버는 것도 좋고, 착한 사람 되는 것도 좋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우리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단지 죽은 다음에 하늘나라에 간다, 못 간다 하는 차원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볼까요? 우리나라 학생들은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3등을 한 학생은 2등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고, 1등을 한 학생은 앞으로 계속해서 그 1등을 유지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습니다. 1등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학생을 이겨야 한다는 욕심을 버릴 수 없습니다. 자기와 경쟁하는 학생이 실수하는 게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한다면 겉으로는 체면을 살려서 점잖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속으로는 그 학생이 실수하기를 바랄 겁니다. 이런 자기의 중심을 예민하게 생각하는 학생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괴로워할 것이고, 무딘 학생이라고 한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훨씬 심각하게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세상일에 관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율법적인 상태에서는 세상일이나 교회일이나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게 마련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무언가 잘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까? 교회끼리 경쟁하고, 신자들끼리 경쟁합니다.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당을 건축하기 위해서 비정상적인 방법이 동원되기도 하고, 세상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월등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위선에 치우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율법을 성취하기 위한 몸부림인데, 이런 몸부림은 아무리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바울처럼 자기 내부의 충돌이 일어날 뿐입니다. 우리의 선한 의지에는 늘 악한 의지가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려고 한다면 결국 자기 삶을 파괴하거나 자기 착각에 빠지게 된다는 건 불을 보듯 뻔한 결과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의 성취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전력투구했던 바울마저 두 손 들었다고 한다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 실존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인식했지만 우리는 그런 사실도 눈치 채지 못하고, 저 잘난 것처럼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바울의 그런 영적인 고민을 모른 채 정상적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무슨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진술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룩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롬 8:3,4).
바울의 논리는 아주 분명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바로 율법의 성취입니다. 우리가 자주 들었던 이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여러분은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의미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게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좀더 실질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사셨던 예수님은 율법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해야 할 율법이 인간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법인 율법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이제는 율법이 더 이상 하나님의 법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게 끝났다고 한다면 결국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영원히 막혀버리고 말았을 겁니다. 예수님까지 죽음에 이르게 한 율법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에 의해서 죽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제 전혀 새로운 구원의 빛이 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너무 교리적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너무 뻔한 소리로 들리든지, 아니면 너무 낯설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풀어서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구원은 인간이 성취해야 할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다. 구원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일으키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이미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이제 인간이 할 수 없었던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율법 해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있는 우리에게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을까요? 이 말은 곧 우리가 실제로 모범적인 인간으로 변화되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고, 이제 더 이상 남과 경쟁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본이 될 정도로 괜찮은, 아니 완벽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율법의 요구가 바로 그런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삶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가 그렇게 변화되지 못했다는 데에 고민이 따릅니다. 우리는 여전히 세속적인 이해타산에 빠릅니다. 아무리 정의로운 일이라고 하더라도 나에게 손해가 올지 모른다고 판단되면 그런 일에 잘 나서지 못합니다. 이런 마당에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여러분, 바울이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좀더 정확하게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4절). 여기서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졌다는 것은 율법이 더 이상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생활태도와 마음이 완전히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에 올라서는 게 아니라 아예 율법 자체가 소멸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컨대 군인들이 제대하면 군법과 아무런 상관없는 것이나, 옛날에 노예에서 해방되면 더 이상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들이 바로 성령을 따라 사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바울의 가르침을 듣고 있지만 여전히 율법의 요구에 귀를 기울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하다못해 기도라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지기 일쑤입니다. 실제로 교회가 그런 것을 많이 요구합니다. 헌금으로부터 전도와 여러 봉사활동에 이르기까지 율법의 요구가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율법 이후의 세계에 살면서도 여전히 율법의 요구를 따르는 이유는 율법 자체가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따라가다 보면 누구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성취감도 발생합니다. 평생 노예로 살아온 사람은 해방되었어도 여전히 노예근성이 남아있듯이 율법의 요구가 해체되었지만 우리는 그 근성 자체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완전하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이런 요구는 영원히 우리를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  

성령을 따르는 삶
여기서 말하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는 곧 육체적인 삶으로부터 영적인 삶으로 옮기는 데서 주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4절 이하에서 육체를 따르는 삶과 성령을 따르는 삶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옵니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하느님의 율법에 복종하지도 않고 또 복종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의 원수가 됩니다.”(6,7절). 바울은 8,9절에서도 계속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의 이런 설명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설교자들이 술, 담배 하지 말고, 정직하게 살고, 교회에 열심히 나오는 게 바로 성령을 따르는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기독교인이 건전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성서는 이런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육체를 따르는 삶은 그가 앞서서 설명했던 율법을 통해서 의로움을 얻으려는 태도이고, 성령을 따르는 삶은 그것이 해체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8절)는 바울의 진술에서 “육체를 따라”는 곧 “율법을 따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이 구절을 자칫 육체적 본능을 따라 부도덕하게 사는 것에 관한 충고로 해석하게 되면 ‘영육이원론’에 빠져듭니다. 육체는 천하지만 영은 귀하고, 우리의 몸은 세속적이지만 영은 거룩하다고 보는 생각은 결코 성서적이지 못합니다. 인간은 영과 육이 신비한 방석으로 완전히 하나로 결합된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영이 거룩하다면 육도 거룩하며, 육이 타락했다면 영도 타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1b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준다고 진술합니다. 우리의 현실적인 삶 전체를 다시 살리신다니,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그는 결코 인간의 육체와 영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우리의 몸을 포함한 우리의 인격 전체가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무언가 그럴듯한 것을 달성하지 못해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런 모든 그럴듯한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 그 효력을 상실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생명의 세계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몸과 영혼이 포함된 총체적인 구원이 일어납니다.



profile

[레벨:3]김경태

July 17, 2005
*.151.73.176

안녕하세요. 저는 통합측 목사입니다.
목사님의 설교 비평 잘 듣고 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고 자신을 많이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점이 있는데
설교비평은 잘 읽히지만 설교 자체는 잘 안읽혀진다는 점입니다.

집중해서 읽으려고 해도 -사무실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
중간정도에서 너무나 논리적이고
교리적인(조직신학적인) 주제들이 전개된듯해서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결국 읽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이 너무나 그동안 제대로 된 설교를 듣거나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면
앞으로 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려고 노력해야겠죠!).
최근(2000년대)에 번역된 책들 중에는(크레독, 위어스비 등등)
설교/설교자에 대해 강조하기를
- 말씀의 '통로(하수관)'가 아니라 '예술'로서 그림그리 듯,
개념 설명이나 설득보다는 참여와 경험을,
조직과 주제에 맞추기 보다는 사건의 흐름에 대해
많은 말들을 하고 있는데
목사님의 설교나 설교비평에서는 이런 부분들
- '귀납적' 또는 '이야기체'설교가 무시되는 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소개된 크레독의 귀납법적 설교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실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 목사님의 성실하신 답글들을 보면서 저도 답글 받을 희망으로 가득해서
이글을 올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ly 18, 2005
*.249.178.21

김경태 목사님,
대구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함께하고 있는 통합측 후배 목사님 중에서
똑같은 이름이 있습니다.
혹시 그분이 그분은 아니겠지요?
김 목사님이 정확한 걸 짚어주셨군요.
설교비평은 그냥 읽히는데, 설교는 읽히지 않는다구요.
기본적으로는 그게 나의 한계라는 것 말고는 다른 설명은 없습니다.
남의 설교는 곧잘 그럴듯하게 비평하는 데
설교는 그에 따르지 못한다는 건
내가 그만큼 청중들을 끌어갈만한 역량이 부족한 것이죠.
약간 변명 비슷한 쪽으로 설명한다면,
설교비평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생각을 일관되게 끌어나가는 글이지만
설교는 내 생각을 가능한대로 줄이고 텍스트 자체에 집중해 나가는 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설교에서도 역시 부분적으로 내 생각이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내 생각을 늘 뛰어넘은 텍스트와 내 생각이 정확하게 일치하면 괜찮지만
그게 그렇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설교의 흐름이 그렇게 매끄럽지 못합니다.
또 한가지는 내가 생각하는 설교론이 다음과 같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청중으로부터 텍스트로!"
물론 텍스트는 민중의 삶과 그 역사에서 형성된 것이지만
일단 정경화 이후에는 그것이 늘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거든요.
아직도 나는 그 경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텍스트와 청중의 삶 사이의 경계입니다.
지금 공연히 내가 고상한 척하면서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게 바로 설교자로서의 내 실존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텍스트를 따라가기에도 벅차다는 것입니다.
청중을 뒤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보아야지요.
아마 나는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가야갈 것 같습니다.
텍스트와 청중의 소통이 설교의 핵심이기는 하지만
내 경우에는 텍스트 따라가기가 핵심입니다.
목사님이 중요한 점을 지적하셨네요.
개념설명보다는 참여와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참여와 경험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건 각각의 청중들에게 맡겨두자는 것이죠.
왜냐하면 청중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경험을 구체적으로 말하기에는
나의 하나님 경험이 너무 일천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의 작은 경험을 말할 뿐이지
그것을 따라오라고 감히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귀납적 설교'라구요?
연역적이거나 귀납적이거나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설교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물론 전달 방법론으로서 '귀납적 설교'는 나름으로 타당성이 있을 겁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인지 나는 잘 모릅니다.
현재 설교를 듣는 사람의 상황에서 출발하는 설교,
청중들의 종교적, 영적 요구에 부응하는 설교라는 정도로 윤곽을 잡고 있을 뿐입니다.
결국 이 말은 내가 청중들과 소통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뜻이겠지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아마 설교자로서 자격이 부족한 건지 모르겠지만
텍스트가 나를 엄습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군요.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설교와 연관해서 나의 관심은 '언어존재론'입니다.
하이덱거와 장자가 여기서 내 스승들입니다.
대충 할말이 정리된 걸까요?
혹시 내가 더 설명할 부분이 있으면 나중에라도 말씀해주십시요.
좋은 지적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의 은총이.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9698
551 창조절 욥의 운명, 욥의 믿음 (욥 1:1, 2:1-10) [14] 2015-10-04 10915
550 성령강림절 지혜와 평화 [9] 2009-10-05 10878
549 대림절 하나님이 오신다 (사 35:1-10) [7] 2016-12-11 10861
548 기타 생명 상실의 두려움을 넘어서 [2] 2009-01-01 10861
547 성령강림절 우리는 하나다! [9] 2007-08-12 10838
546 부활절 회개, 세례, 성령 (행 2:36-41) [8] 2014-05-04 10807
545 창조절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눅 19:1-10) [9] 2019-11-03 10801
544 성령강림절 축귀 능력자 예수 (눅 8:26-39) [6] 2019-06-23 10792
543 부활절 저 분은 주님이십니다! [8] 2007-04-22 10788
542 기타 믿음의 토대, 1월15일 [3] [1] 2006-01-15 10775
541 기타 삶의 지혜를 넘어서 [1] 2004-07-02 10771
540 주현절 복과 화 (눅 6:17-26) [4] 2019-02-17 10765
539 기타 약속과 순종의 상호성, 6월5일 [1] [2] 2005-06-05 10754
538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747
537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9] 2009-01-25 10732
536 주현절 구원의 현실화 (눅 4:14-21) [9] 2019-01-27 10727
535 성령강림절 성령 가득한 삶 (엡 5:15-20) [10] 2015-08-16 10727
534 기타 민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통치 [2] 2006-06-25 10717
533 기타 삶과 행위, 7월3일 2005-07-04 10716
532 기타 영에 속한 사람, 5월15일 [3] 2005-05-17 10713
531 창조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전 4:13-18) [8] 2014-11-09 10701
530 성령강림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4] 2018-06-03 10682
529 성령강림절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골 3:1-11) [10] 2013-08-04 10667
528 창조절 '예수 따름'의 문제 (막 10:17-31) [8] 2015-10-11 10648
527 기타 언어의 한계와 존재론적 능력 (행 2:1-13) [8] 2004-07-02 10640
526 대림절 기뻐하고 노래하라! (습 3:14-20) file [10] 2015-12-13 10615
525 대림절 그는 목자시다 (사 40:1-11) [2] 2014-12-08 10611
524 성령강림절 일상의 종말론적 지평 [10] 2007-10-07 10610
523 주현절 상을 받는다는 것 (고전 3:1-9) [8] 2017-02-13 10604
522 성령강림절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 [4] 2007-11-25 10599
521 성령강림절 말씀을 수호하라! [9] 2007-10-28 10597
520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마 21:23-32) [6] 2014-09-28 10596
519 대림절 물 세례와 불 세례 (마 3:1-12) [5] 2016-12-04 10595
518 주현절 법과 자유 (마 5:13-20) [18] 2014-02-09 10592
517 기타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 (고전 1:22-25) 2004-07-02 10578
516 성령강림절 '달리다굼' 말씀하시다 (막 5:21-24, 35-43) [10] 2015-06-28 10570
515 기타 숨어있는 평화의 왕 [7] 2006-04-09 10547
514 기타 새 하늘과 새 땅 12월4일 [1] 2005-12-04 10538
513 창조절 예수는 머릿돌이다 (마 21:33-46) [6] 2014-10-06 10529
512 기타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신가? 4월24일 2005-04-24 10512
511 창조절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26] 2016-11-06 10501
510 성령강림절 하나님도 생각을 바꾸시는가? [5] 2007-09-23 10494
509 기타 희망의 눈, 2005. 8.15. [1] [1] 2005-08-14 10493
508 기타 요셉의 침묵, 8월7일 [1] 2005-08-07 10493
507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90
506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480
505 기타 야곱의 두려움, 7월17일 [4] 2005-07-17 10438
504 주현절 하나님은 생명이다! (신 30:15-20) [5] 2014-02-16 10421
503 부활절 사랑함이 사랑받음이다. (요 14:15-21) [14] 2014-05-25 10419
502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415
501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410
500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눅 23:33-43) [4] 2013-11-24 10405
499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390
498 기타 생존과 번성의 토대, 5월1일 [4] 2005-05-01 10379
497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 (사 52:7-10) file [4] 2015-12-25 10377
496 부활절 예수 부활 이후 (요 20:19-29) [8] 2014-04-27 10368
»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10367
494 대림절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 5:16-24) [6] 2014-12-14 10362
493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10320
492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89
491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78
490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232
489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10229
488 기타 가족공동체를 넘어서, 5월8일 [2] 2005-05-08 10225
487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1-9) [3] 2014-01-19 10212
486 부활절 승천과 재림 사이에서 (행 1:8-14) [2] 2014-06-02 10207
485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10200
484 기타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2] [2] 2005-05-22 10166
483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155
482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143
481 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1] 2005-03-13 10129
480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120
479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106
478 성령강림절 그날의 평화 공동체 [9] 2009-08-17 10103
477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084
476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10044
475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043
474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10026
473 기타 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1] 2005-04-04 10019
472 성령강림절 성령과 은사 (고전 12:4-13) [8] 2014-06-08 10017
471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10016
470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10015
469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10012
468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10006
467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9994
466 성령강림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20] 2016-05-29 9988
465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79
464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9976
463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9969
462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9958
461 대림절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전 3:9-13) [9] 2015-11-29 9936
460 부활절 "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16] 2016-05-08 9935
459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931
458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31
457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928
456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908
455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82
454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78
453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66
452 성령강림절 여호와를 찬양하라! (렘 20:7-13) [2] 2014-06-22 9863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