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8

예수 부활 이후 (요 20:19-29)

부활절 조회 수 10223 추천 수 0 2014.04.27 20:54:06
설교듣기 : https://youtu.be/yGijwWtBIsg 
성경본문 : 요한복음 20:19-29 

예수 부활 이후

20:19-29, 부활절 둘째 주일, 2014427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 부활을 건성으로 대하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부활을 그저 소문 정도로만 여기는 겁니다. 그럴 수 있겠다 싶습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을 감당하는 데만도 정신이 없습니다. 세상에 살아남으려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온갖 귀찮은 일도 마다할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세상에서 살기에 예수 부활을 가깝게 느낄 수가 없습니다. 좋은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에 있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이들도 모든 삶의 에너지를 거기에만 쏟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조류가 극심한 바다 속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 부활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게 뭐지?’, 또는 그래서 어떻다는 건데?’ 하고 반응합니다. 그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부활 신앙으로 사는 기독교인으로서 이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부활을 믿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도마입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했지만 그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20:25절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손으로 만져서 확인해야만 믿을 수 있겠다는 도마의 주장은 도마만이 아니라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정신이 말짱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부활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요즘도 가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이 들리기는 하나 그것은 실제 죽음이 아니라 임사체험입니다. 죽음에 가까이 갔을 뿐이지 죽은 거는 아닙니다. 죽음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한계를 넘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에 우리 기독교인들의 딜레마가 놓여 있습니다. 서로 충돌하는 두 사실 사이에 끼여 있는 겁니다. 하나는 죽어 무덤에 묻혔던 예수님을 실제로 다시 만났다는 제자들의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자연과학적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를 배격합니다. 어느 한쪽이 부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딜레마에서도 기독교 신앙이 성립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사실을 깊이 있게 아는 게 그 대답입니다. 이어지는 도마 이야기도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과 깊숙이 연관됩니다.

 

본문 설명에 따르면 팔일이 지나고 도마를 비롯한 열 한 명의 제자들이 어떤 집에 모였습니다. 팔일 전 도마가 없을 때도 문이 닫혀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팔일 전과 마찬가지로 제자들에게 평화를 인사를 한 뒤에 도마에게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대한 이야기는 요 20:20, 25, 27,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이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부활체로 나타난 그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논란에 휩싸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란은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되었고, 지금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죽은 뒤에 그의 말씀을 제자들이 생생하게 기억한 것을 가리킨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제자들의 마음에 다시 살아난 것이지 예수가 살아난 게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요한을 비롯한 초기 정통 기독교는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못 자국이 있는 손과 창 자국이 있는 옆구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경험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믿든지, 아니면 단순히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기억으로 믿든지 별 차이가 없는 거라고, 그러니 지금 여기서 예수님의 제자로 성실하게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는데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각각 작은 예수가 되어서 사랑을 실천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 자체를 믿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가 그리스도라는 사실 자체를 믿습니다. 이 사실이 흔들린다면 기독교 신앙 자체가 흔들립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는 부활의 주님이 실제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줄기차게 주장했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직접 만져보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본문은 말이 없습니다. 20:17절에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아직 승천 이전이니 자신을 붙들지 말라고 말씀하신 걸 보면, 아마 도마도 예수님의 몸에 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부활체로 현현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으니 손으로 확인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향해서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고 고백합니다. 도마의 영적인 눈이 열린 겁니다. 그의 고백은 도마 한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모든 사람들의 고백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 말씀은 도마를 향한 책망처럼 들리겠지만 그게 아니라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을 향한 격려이자 인정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제2 독서인 베전 1:8절이 말하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라는 말씀도 당시 상황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1세기 어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십시오. 기원후 100년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들, 즉 제 1세대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을 때입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이후 최소한 두 세대가 흘러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제2 세대, 또는 제3 세대 기독교인의 말을 전해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은 그런 편지를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활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에게서 듣는 거와 한 다리 두 다리 건너 전해 듣는 거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점점 흐릿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반응은 신자들마다 다 달랐을 겁니다. 크게 보면 두 종류의 신자들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믿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으니 믿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본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의 관계를 잘 알아야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직접 보아야만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인도를 가서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인도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다릅니다. 그렇지만 가서 본다고 해서 늘 그 대상을 정확하게 아는 게 아닙니다. 인도의 겉만 보고 와서 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실제로 아는 거와는 다릅니다. 그런 사람보다는 오히려 인도에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인도에 대한 책을 잘 읽고 생각을 깊이 한 사람이 인도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그렇다면 신앙의 세계는 훨씬 더 그렇지 않겠습니까.

 

구약에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갈맬산에서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다 태웠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 기적이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는 표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서가 기본적으로 말하는 것은 그런 기적과 표적이 많이 일어났다고 해서 유대인들의 믿음이 무조건 좋아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메시아라는 증거를 보이라고, 기적과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말할 게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놀라운 기적과 표적을 보았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기적과 표적은 일시적인 겁니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도 이벤트만으로 사랑을 확인할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도마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복되도다.” 도마나 제자처럼 보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보는 거가 아니라 믿는 겁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보고 믿는 게 아니라 믿어서 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그제야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보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시겠지요?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과 소수의 추종자들만 경험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변화된 생명으로 현현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고, 또한 제자들의 말을 직접 듣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그런 믿음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믿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게 그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 않으면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지식과 상관없습니다. 인격과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믿음은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그 사실을 얼마나 예민하게 느끼고 있는지는 차치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걸 광신이나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부활 이후의 시대를 살기에 그 부활을 직접 볼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부활의 주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복은 마 5장의 팔복에서와 같이 구원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본 제자들이나 1세기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영적 지위를 인정하기는 해야 하나 부러워 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동일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서 복과 구원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은 예수님을 도마의 고백처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이 세상에서 그 믿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 부활 이후를, 즉 예수 부활을 보지 못한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삶에 나타나야 할 부활 신앙의 열매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초기 기독교 당시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정치 영역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도미티안은 이것을 황제 칭호로 사용했습니다. ‘dominus et deus noster’, 즉 로마 황제는 우리들의 주이시며 신이라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가 통치하던 시대에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이게 신약성서 전체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신앙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베드로는 마 16:16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사도 바울은 롬 10:9절과 고전 12:3절도 예수님을 주라는 뜻의 퀴리오스라는 헬라어 단어로 고백합니다. 오늘 도마의 고백과 통하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며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부활의 예수님 밖에는 구원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고백이 당연한 것처럼 들리겠지만 이걸 고백하면서 살기가 어렵습니다. 실제로 불편한 게 많습니다. 이 고백대로 살려면 거부해야 할 것들이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를 받은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황제를 퀴리오스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21세기 오늘도 황제숭배를 강요받는 로마 시대와 똑같습니다. 자본을 절대적인 능력으로 섬기라고 강요받습니다. 그런 강요와 타협하지 않으면 실제로 사는 게 불편합니다. 기독교인들도 교회에 와서는 부활의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신에게 절하면서 삽니다. 거기서 몸부림치지만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오늘이 벌써 열 이틀째입니다. 배가 전복되었다는 첫 소식이 들렸을 때만 하더라도 소수의 인명 피해가 생길지 몰라도 대부분의 승객들이 구조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망망대해도 아니고 야밤중도 아닌 때 일어난 사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이는 후진국 형 사고라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번 일은 후진국에서도 일어날 수 없는 사고입니다. 시스템도 작동되지 않았고, 관계된 분들의 직업의식도 없었고, 사고 후 정부의 대처도 미숙하기가 짝이 없었고 진정성도 없었습니다. 스스로 뛰쳐나온 이들 외에 구조대가 선체에 진입해서 구조한 이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게 단적인 예입니다. 화재가 났을 때 소방대원들이 불길로 뛰어들듯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침몰 사고 당일 생존자 구조를 시도했어야만 합니다. 국민이 위험에 처했을 때 정부가 해야 할 일이 그것입니다. 이 대참사 앞에서 우리 모두는 지금 망연자실입니다. 더구나 이번 사건에 기독교의 한 이단 종파인 구원파가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어서 기독교인으로서 부끄럽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단은 정통의 이면이기에 우리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총체적 부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이번 대재난은 현대판 황제숭배가 몰고 온 저주가 아닐는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부활 이후의 현실 역사는 여전히 혼란스럽습니다. 우리를 주눅 들게 하기도 하고, 망상에 사로잡히게도 합니다. 이 혼란은 예수 부활 이후와 그것의 완성인 종말 사이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안주하지도 마십시오. 요한복음 기자가 전해주듯이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의 복과 사명에 충실하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profile

[레벨:20]굶주린 늑대 

April 28, 2014
*.38.50.9

저는 가끔씩 가롯 유다와 빌라도가 부러워지고는 합니다.
단지 그들이 예수님을 직접보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는 이유로요.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도 말이죠.


마치 제 신앙의 수준(?)을 보여주는 도표처럼 생각됩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 라는 찬송가 545장과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라는 찬송가 542장.


보이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에 볼 수 있는 것.
정말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실감하면서도
또한 광신이나 맹신의 갈림길에 서는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절망이 '믿는데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같습니다.

이 딜레마가 해소될때 생명의 환희를 누릴 수 있을 것이란 소망을 품고
그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April 28, 2014
*.94.91.64

ㅎㅎ 재미있는 표현이군요.

'믿는데도 보이지 않는다.'

음,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요?

어딘가 오해가 있는 거지요.

믿는 척 할 뿐이지 믿는 게 아니거나

아니면 이미 보았는데도 못 본것처럼 느끼는 겁니다.

이 문제는 참 복잡한 건데

여기서 더 길게 말하기가 어렵겠네요.

한 가지만 말합니다.

본다는 것은 실증적인 어떤 것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믿음의 심층을 가리킵니다.

즉 믿음 자체가 보는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재미있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믿음의 심층으로 들어간 사람은

더 이상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믿음 안에 봐야 할 것이 들어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면(믿으면)

상대에게 다른 것을 더이상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랑과 믿음의 힘에 자기를 맡길 뿐이지요.

 

profile

[레벨:20]문전옥답

April 29, 2014
*.194.68.54

지난주 설교에 질문 드렸어야 하는데 이번주에도 잠깐 언급하셔서 여쭤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승천하기 전이니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잘 이해가 안되서...

붙들지 말아야하는 이유라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인지...그래서 물리적으로 붙들 수 없다는 말인지 궁금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April 29, 2014
*.94.91.64

내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주셨군요.

주석책을 찾아서 답변을 드리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걸 이해해주세요. ㅎㅎ

그냥 상식적으로 한 마디만 드리지요.

부활 현현의 예수님이 혼령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상에서 경험하는 그런 육체를 가진 분도 아니라는 사실을

'붙들지 말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profile

[레벨:11]갈매나무

May 02, 2014
*.51.94.7

죽음아, 뽐내지 마라, 비록 어떤 이들은 네가

억세고 무섭다 했지만, 넌 안 그렇기 때문.

네가 쓰러뜨렸거니 하는 자들은

죽지 않으며, 가련한 죽음아, 너는 날 죽일 수도 없기 때문.

네 영상에 불과한, 휴식과 잠으로부터,

많은 쾌락이라면, 너에게선 반드시 더 흘러나오리라.

그리고 가장 선한 자들이 가장 일찍 너와 함께 가노니,

이는 육체의 안식이며 영혼의 구원이니라.

너는 운명과 기화(奇禍)와 군주들과 절망자들의 노예,

그리고 독약과, 전쟁과, 질병과 동거하는데,

아편이나 마약도 우리를 똑같이 잠들게 할 수 있고,

네 타격보다 좋도다, 그런데 너는 왜 으스대느냐?

잠깐 한잠 자고 나면, 우리는 영원히 잠 깨어,

죽음은 이제 없으리라, 죽음아, 네가 죽으리라.

                                                            - 존 던의 시

 

부활절 절기를 보내고 있지만, 죽음의 절망과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부활이 무엇인지 더 진지하게 묻게 됩니다.

톰 라이트의 글에서 위의 시를 읽었는데, 톰 라이트는

이 시를 신약성경이 말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와 부활을 잘 보여준 것으로 설명하더군요.

톰 라이트의 설명을 따라, 지금 우리 사회가 죽음에 대해 말하는 언어를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혼란스러우면서도, 대체로 '공허한 위로'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 참담한 죽음 앞에서 부활의 언어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와 같은 문제일텐데요.

이 죽음 앞에서 부활의 리얼리티를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궁극적인 생명의 완성을 고대하는 신앙이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어떻게 새롭게 하는지..

감당할 수 없는 물음이 마구 떠오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y 02, 2014
*.94.91.64

예, 갈매나무 님이 말한 대로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물음입니다.

 

1) 부활의 리얼리티에 대한 경험-

그것은 경험하는 게 아니라 믿는 거고 희망하는 겁니다.

아무도 부활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어요.

예수 부활은 유일회적인 것이었고,

그를 믿는 자가 부활 생명에 이른다는 것은

약속으로 주어진 것이지 실증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거든요.

믿음이며 희망이라고 해서 근거가 없다는 뜻은 아니고요.

근거를 역사에서 변증해나가는 게 신학의 사명이겠지요.

 

2) 부활 신앙, 또는 희망과 오늘의 삶-

특히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부활 신앙이 공허하게 들릴 수 있겠지요.

그걸 믿고 희망하는 자가 공허하지 않아야만

전달도 공허하지 않게 될 겁니다.

공허하다는 것은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는 생명에 비해서

부활이 말하는 생명은 멀게 느껴진다는 거겠지요.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는 생명이 소중하기는 하되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해야 합니다.

어딘가 훼손된 생명이지요.

그걸 기독교는 죄로 설명합니다.

이런 말을 하기 시작하면 너무 멀리 가니까 줄입니다.

부활은 생명의 완성이니까 그걸 실제로 믿고 희망하는 사람은

그 완성의 순간을 간절히 기다릴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이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말과 행동과 삶으로 전하게 될 겁니다.

여기서 관건은 결국 생명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은 사람의 경험과 인식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종말의 힘을 행사하시는 하나님께로 개방되어 있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세월호 사건으로 죽음의 경계를 넘어버린 이들의 영혼을

우리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기를 빌며...

profile

[레벨:13]진인택

December 22, 2014
*.206.242.56

목사님, 우리는 특별히  기적을 요구할 상황이 아닌 삶을 살고 있다고 봅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기적속에 살다보니 하나님께서 주신 기적에 무감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극에 점점더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삶이 기적으로 이어지는 걸 안다면 더 이상 무얼 자꾸 요구하겠습니까. 

 기적중의 기적을 마지막으로 부활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알지 못하는 기적, 보지 못한 기적을 우리는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종말에 나타날 주님의 또 다른 기적을.

우리의 삶은 힘들고 자주 걱정스런 일들로 하루하루가 가고 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 고통스런 우리의 삶속에 많은 기적을 주시고 지나 가셨습니다.

해변에 발자국을 남기고 가셨듯이.

반드시 지나가셨으니까 그 발자국이 남았겠죠.


profile

[레벨:100]정용섭

December 22, 2014
*.94.91.64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

말씀이 육신을 입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야말로

정말 기적 중의 기적이겠지요.

좋은 성탄을 맞으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80
548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2020-12-06 10802
547 성령강림절 우리는 하나다! [9] 2007-08-12 10801
546 대림절 "너는 누구냐?" (요 1:19-28) [4] 2020-12-13 10768
545 부활절 회개, 세례, 성령 (행 2:36-41) [8] 2014-05-04 10766
544 부활절 저 분은 주님이십니다! [8] 2007-04-22 10746
543 창조절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눅 19:1-10) [9] 2019-11-03 10739
542 성령강림절 축귀 능력자 예수 (눅 8:26-39) [6] 2019-06-23 10733
541 기타 생명 상실의 두려움을 넘어서 [2] 2009-01-01 10730
540 대림절 하나님이 오신다 (사 35:1-10) [7] 2016-12-11 10726
539 기타 믿음의 토대, 1월15일 [3] [1] 2006-01-15 10707
538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9] 2009-01-25 10706
537 주현절 복과 화 (눅 6:17-26) [4] 2019-02-17 10699
536 성령강림절 성령 가득한 삶 (엡 5:15-20) [10] 2015-08-16 10694
535 기타 삶의 지혜를 넘어서 [1] 2004-07-02 10683
534 기타 약속과 순종의 상호성, 6월5일 [1] [2] 2005-06-05 10679
533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678
532 주현절 구원의 현실화 (눅 4:14-21) [9] 2019-01-27 10673
531 기타 영에 속한 사람, 5월15일 [3] 2005-05-17 10642
530 창조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전 4:13-18) [8] 2014-11-09 10639
529 성령강림절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골 3:1-11) [10] 2013-08-04 10638
528 기타 삶과 행위, 7월3일 2005-07-04 10635
527 기타 민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통치 [2] 2006-06-25 10626
526 성령강림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4] 2018-06-03 10611
525 창조절 '예수 따름'의 문제 (막 10:17-31) [8] 2015-10-11 10604
524 성령강림절 일상의 종말론적 지평 [10] 2007-10-07 10586
523 성령강림절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 [4] 2007-11-25 10584
522 주현절 법과 자유 (마 5:13-20) [18] 2014-02-09 10565
521 성령강림절 말씀을 수호하라! [9] 2007-10-28 10563
520 주현절 상을 받는다는 것 (고전 3:1-9) [8] 2017-02-13 10557
519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마 21:23-32) [6] 2014-09-28 10556
518 성령강림절 '달리다굼' 말씀하시다 (막 5:21-24, 35-43) [10] 2015-06-28 10540
517 기타 언어의 한계와 존재론적 능력 (행 2:1-13) [8] 2004-07-02 10514
516 창조절 예수는 머릿돌이다 (마 21:33-46) [6] 2014-10-06 10488
515 성령강림절 하나님도 생각을 바꾸시는가? [5] 2007-09-23 10478
514 기타 숨어있는 평화의 왕 [7] 2006-04-09 10445
513 창조절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26] 2016-11-06 10444
512 기타 새 하늘과 새 땅 12월4일 [1] 2005-12-04 10443
511 기타 희망의 눈, 2005. 8.15. [1] [1] 2005-08-14 10435
510 기타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신가? 4월24일 2005-04-24 10432
509 기타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 (고전 1:22-25) 2004-07-02 10429
508 대림절 그는 목자시다 (사 40:1-11) [2] 2014-12-08 10426
507 기타 요셉의 침묵, 8월7일 [1] 2005-08-07 10420
506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05
505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399
504 대림절 기뻐하고 노래하라! (습 3:14-20) file [10] 2015-12-13 10389
503 주현절 하나님은 생명이다! (신 30:15-20) [5] 2014-02-16 10372
502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367
501 부활절 사랑함이 사랑받음이다. (요 14:15-21) [14] 2014-05-25 10363
500 기타 야곱의 두려움, 7월17일 [4] 2005-07-17 10363
499 대림절 물 세례와 불 세례 (마 3:1-12) [5] 2016-12-04 10361
49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눅 23:33-43) [4] 2013-11-24 10360
497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323
496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313
495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10298
494 기타 생존과 번성의 토대, 5월1일 [4] 2005-05-01 10290
493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 (사 52:7-10) file [4] 2015-12-25 10253
492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51
491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10251
490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50
» 부활절 예수 부활 이후 (요 20:19-29) [8] 2014-04-27 10223
4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1-9) [3] 2014-01-19 10183
487 기타 가족공동체를 넘어서, 5월8일 [2] 2005-05-08 10169
486 부활절 승천과 재림 사이에서 (행 1:8-14) [2] 2014-06-02 10167
485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10167
484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165
483 대림절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 5:16-24) [6] 2014-12-14 10102
482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090
481 성령강림절 그날의 평화 공동체 [9] 2009-08-17 10084
480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082
479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072
478 기타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2] [2] 2005-05-22 10069
477 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1] 2005-03-13 10054
476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044
475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014
474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006
473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10001
472 성령강림절 성령과 은사 (고전 12:4-13) [8] 2014-06-08 9987
47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9961
470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9958
469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9947
468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36
467 기타 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1] 2005-04-04 9927
466 성령강림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20] 2016-05-29 9926
465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9922
464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9920
463 부활절 "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16] 2016-05-08 9912
462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07
461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9901
460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9897
459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878
458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875
457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9872
456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9864
455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9856
454 성령강림절 여호와를 찬양하라! (렘 20:7-13) [2] 2014-06-22 9841
453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9838
452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32
451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27
450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825
449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23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