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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창조절 조회 수 9933 추천 수 0 2014.11.16 21:19:20
설교듣기 : https://youtu.be/3k75sVpaNHg 
성경본문 : 신명기 8:7-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8:7-18, 창조절 제 11(추수감사절), 20141116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11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는 오늘의 설교 제목을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에 다닌 경력이 어느 정도 되는 분들은 흔하게 들었던 문구라는 걸 아실 겁니다. 그래서 상투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믿음생활을 잘하고, 교회에 잘 나오라는 권고 정도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저 말씀은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삶과 죽음, 또한 생명 완성과 구원과 그 과정 전반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저 명령이 바로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이라고 말입니다. 정말 그런지 아닌지를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교만과 죽음

오늘 설교 본문인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40년에 걸친 미디안 광야생활을 거의 끝내고,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주신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모압 광야에 머무르고 있을 때 모세가 행한 연설 모음집입니다. 지금부터 34,5백년 전 이야기입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어땠을까를 생각해보십시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을 겁니다. 저들이 거쳐 온 미디안 광야의 40년은 그야말로 지긋지긋한 고생길이었습니다. 애굽에서의 삶과 비교해보면 광야생활은 노숙자나 피난민의 그것입니다. 먹을거리와 마실거리는 늘 부족했습니다. 언제 도둑떼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여러 부족들과 수없이 싸웠습니다. 많이 다치고 많이 죽었습니다. 늘 생존의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스무 살 이상 되는 사람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죽었을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습니다.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이들과 달리 모세는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애굽을 탈출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이제 40년 만에 광야의 유목민 신세를 면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모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편으로 노파심으로, 다른 한편으로 영성에 기초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면 무엇을 소중하게 여겨야 할지를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잊지 말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이런 표현이 본문만 해도 11, 14, 18에서 반복해서 나옵니다. 우선 11절만 읽겠습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이 말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잊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힘들 때는 하나님께 매달리다가 가나안에 들어가면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실제로 그랬습니다. 본문은 그것을 12-14절에서 소상하게 말합니다. 가나안에서 먹고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며, 소와 양이 많아지고 재산이 증식되고 소유가 풍부하게 되면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염려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소유와 교만과 하나님 망각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소유가 늘어나면 교만해진다는 게 옳은 말일까요?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요즘 한국은행이 발행한 오만 원 권이 어딘가로 숨는다고 합니다. 은행에 돈을 맡기기보다는 차라리 현금으로 자기 집의 금고에 넣어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는 뜻이겠지요. 비상장 주식이 상장이 되면서 갑자기 수십 억 재산가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부자가 되면 마음이 어떻게 될까요. 제가 그걸 헤아리기는 힘들지만 간접적으로 다음과 같은 경우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즘 갑을관계라는 말이 우리사회를 특징짓는 말이 되었습니다. 갑은 을을 우습게봅니다. 을은 어쩔 수 없이 갑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이런 관계에서 갑은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소유, 또는 권력이 많으면 자기중심성이 강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지금 이 세상은 철저하게 인간중심입니다. 조금만 편리하거나 돈벌이가 된다고 생각하면 강과 산을 마음대로 파헤칩니다. 원자력발전소도 무조건 지으려고 합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주변을 지배하려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어거스틴은 죄의 본질을 휘브리스’, 즉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아퀴나스는 아모르 수이’, 즉 자기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교만과 자기 사랑은 자기 집중, 즉 자기 안에 갇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기독교 신학은 이런 죄로 인해서 인간이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지성인들은 이런 기독교의 죄론을 짜증스럽게, 기분 나쁘게, 또는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을 공연히 죄책감에 빠뜨린다고 말입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기독교가 죄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죽음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독교 교리가 멀게 느껴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저는 여기서 기독교의 죄론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을 시도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거론하고 있는 교만이 왜 인간을 파멸로 끌어들이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교만(휘브리스)은 자기 안에 갇히는 것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여기 감옥에 갇힌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살아있기는 하지만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주변세계와 소통이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감옥 안에서는 그런 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생물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우리 몸을 보십시오.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는 계속해서 바깥세계와 순환됩니다. 피부도 숨을 쉬어야 합니다. 세포가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죽습니다. 그런 세포는 암세포입니다. 중풍에 걸려 누워있는 사람이 옆으로 돌아눕지 않고 그대로 누워만 있으면 욕창이 생깁니다. 세포의 질식사가 바로 욕창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밖으로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세계와 소통하지 못하고 자기 안에 갇혀 있으면 교회도 죽습니다. 우리의 영혼도 그렇습니다. 영혼은 하나님과의 소통으로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에만 집중하는 사람의 영혼은 결국 죽습니다.

그런 죽음은 실제의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거니까 일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교만한 사람들도 세상에서 멋지게 사는 걸 보니 교만과 죽음의 관계는 종교적인 의미일 뿐이지 실제적이지는 않다고 말입니다. , 겉으로 멀쩡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분들은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런 삶에 축적되는 온갖 욕망들과 허위의식들이, 그리고 세련미 안에 숨겨진 교만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아는 분들은 알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삶을 죽음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는 것만은 알아두십시오.

 

낮춤과 복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풍요로운 삶으로 인해 교만해지고, 결국 그런 교만으로 하나님을 잊어버릴까가 염려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잊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다는 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곧 생명과의 단절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기억하라고 반복해서, 귀가 닳도록 권면하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설명합니다. 고상한 철학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고 아주 간단한 사건을 짚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먹이신 분이라고 말입니다. 16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그 사실을 전합니다.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은 먹을거리입니다. 영양학적으로는 별로 뛰어난 게 아닙니다. 최소한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신앙의 핵심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들의 노력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통찰이자 인식입니다. 광야의 삶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돈도 벌어야 하고, 건강도 챙겨야 하고, 보험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보장된다고 해서 우리의 생존이 보장되지도 않습니다. 우리 생존의 근거가 우리 안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으로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밥과 사과도 우리 몸 안에서 자라는 게 아닙니다. 밖에서 자란 걸 우리가 먹을 뿐입니다. 좀더 크게 보면 지구도 스스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태양에 기대 있습니다. 태양도 더 근본적으로 우주에 기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께 의존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최소한의 먹을거리인 만나가 바로 우리 생존에 필요한 충분조건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그걸 경험했습니다. 물론 궁핍한 광야의 현실에서 애굽의 풍부한 먹을거리가 그리워지기도 했습니다. 겨우 굶주림을 면하는 상황에서 간혹 모세를 원망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만 그럴 때마다 그들은 그런 시험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최소한의 생존 조건에서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키신다는 사실을 희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지난 가을수련회에서 우리는 성찬 영성을 주제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성찬 때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 빵과 포도주가 우리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최소한의 먹을거리, 또한 충분한 먹을거리라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바로 그런 사실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먹이셨다고 선포했습니다.

16절 후반절을 좀더 세밀하게 보십시오. 거기에 더 놀라운 진술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나를 먹이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고 시험하시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세 가지 진술이 나옵니다. 낮춤, 시험, 복입니다. 교만은 죽음을 몰고 오는 반면에 만나로 인한 낮춤은 복을, 즉 구원을 줍니다. 만나 사건은 결국 하나님의 복에 대한 보중이라는 겁니다. 이게 옳은 주장일까요?

만나가 하나님의 시험이라는 말씀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이것, 만나 사건은 생존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시험입니다. 그 시험을 주시는 분은 태우는 불과 같습니다. 그 불을 통과하면 필요 없는 것들은 타버립니다. 여기서 필요 없는 것은 자기가 뭔가를 이루었다는 교만입니다. 그런 것들이 없어지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하나님만 신뢰할 때 사람은 복을 얻습니다. 그런 희망과 신뢰 자체가 복입니다. 이게 어떤 분들에게는 추상적으로 들릴 겁니다. 그걸 제가 억지로 이해시켜드리기는 힘듭니다. 한 마디만 보충하겠습니다. 만나 영성을 아는 사람은 이제 모든 삶의 조건을 풍요로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농사가 잘 되든지 않든지 상관없이 모든 조건이 만나보다는 좋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뚫어보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네 하나님...’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늘 만나만 먹고 생존의 최소 조건에 만족해서 살라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많은 것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걸 부정하거나 불편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도취되어서 광야의 삶을 망각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신자 숫자와 헌금, 그리고 예배 처소를 확장하는 것에 도취되어서 교만해지는 것이 문제이지 그것 자체를 터부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저는 우리 교우들이 가난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부자로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풍요에 집착하지 않고, 거기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는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이 바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라도, 또한 그 명령의 깊이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표현이 설교 제목에 나옵니다. ‘네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남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바로 너의 하나님입니다. 바르트는 <복음주의 신학입문>에서 하나님을 3인칭으로 하면 신학이 본래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2인칭인 당신으로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이 말하는 네 하나님이라는 표현과 일치하는 이야기입니다. 바르트는 이렇게 부언합니다. “신학 작업은 정말 진실하게 예전 행위의 형태에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를 향한 기도로서 실행되어야 한다.”(128). 여기서 예전은 교회에서 함께 예배에 참여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거기서 우리는 공동의 기도를 드리고, 공동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함께 찬송을 부릅니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 즉 하나님의 부르심과 우리의 응답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네 하나님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나의 하나님입니다. 즉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가 숨을 쉬듯이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분을 우리는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아직은 그렇게 부를 준비가 안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농사를 짓지도 않고 소와 양을 키우지는 않습니다. 최근 중국과의 FTA 체결로 인해서 농사는 점점 더 어렵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말만 추수감사절이지 별로 실감이 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자동차나 집 구입에 더 실감이 갑니다. 현대 도시인들에게는 이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가나안에 정착하여 영혼의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실존과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준 충고와 명령에 기대서 저도 오늘 여러분에게 똑같이 말씀드립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 마십시오. ‘네 하나님여호와를 기억하십시오. 그럴 때만 참된 의미에서의 복을 얻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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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은빛그림자

November 20, 2014
*.108.173.82

개인적으론 아주 스펙터클한 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뭐랄까..  그렇게 찾고 찾았던 어떤 문을 우연히 열었는데,

그래서 아 이제 살았다.. 했는데 문을 열고 보니 사방이

다 또 다시 열어야 하는 문임을 알았을 때 오는 그 멘붕..이랄까요.

이걸 정 목사님께서 이해하실 수 있으실지.. 이해 못하신다면 아직 한참 멀...었..ㅎㅎㅎㅎ


땅에 발 딛고 살아야 하니 아주 시시때때로 현실과 신앙이 상충되는 지점을 만나죠.

어느 땐 적당히 현실적 제약을 핑계로 신앙은 접고 들어가기도 하고

어느 땐 신앙을 핑계로 현실을 도피하기도 하고 뭐 그렇게 삽니다.

 

문제는 좀 중요한 선택을 해야할 때 그리고 그 선택이 나와 가족의 생존과 직결될 때..

크~~ 이때는 진짜 심각해집니다. 소위,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는 류의

나는 급해 죽겠으나 하나님 입장에서 절대 급할 리 없는 기도로 들어가는 거죠. ㅎㅎㅎ


이러다 금방 영성의 대가가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될 만큼 신앙의 비약적 성장이 있었다고

저 혼자서 확신하는 요즘이었는데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되고 보니 또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에

이 사람 저사람에게 의견을 묻고 또 묻고 또 묻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다 이 설교문을 읽었어요. 한 번은 크게 낭독하면서 읽고, 한 번은 깊이 생각하면서 묵독하고

한 번은 스마트폰으로 중요한 문장만 반복해서 봤지요.

그리고 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과연 생존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진다 해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사실 그 신뢰만 있다면 선택 자체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요. 

하나님만을 향한 신뢰와 희망이 가장 큰 복이라는 말씀을 이제는 '압니다'.

그 앎을 조금 더 견고하게 만들어 가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과 새로 채워야 할 것이 참 많은데

이 고단함이 예전처럼 죽도록 버겁지 않아서 정말 기쁩니다. (아-! 뭔가 오글거리는ㅋㅋ)


신앙의 길이 아주 조금 즐겁습니다.  기대도 되고요.

자, 정 목사님 분발하시고 긴장 좀 하십시오.

저, 진짜 금방 따라갈 거에요.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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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0, 2014
*.94.91.64

은빛 님의 글에 생동감이 넘치는군요.

'압니다.' 하는 강조가 과장이 아니라는 걸

전체 글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네요.

이미 나는 은빛에게 따라잡혔습니다.

앞질러 가지만 마세요.

스펙터클 한 게 뭔지 나에게 말할 수 있으면

메일로라도 알려주세요.

자, 가봅시다.

이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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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staytrue

November 20, 2014
*.72.188.140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고통에 차있다. 하지만 우리주님은 부활하셨다." 

며칠전 웹서핑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칼바르트의 두 문장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네요.

목사님의 설교 말씀처럼 오늘도 내 하나님을 기억하며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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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20, 2014
*.94.91.64

제 설교를 잘 읽어주셨으니

내가 오히려 감사해야지요.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의 깊이로

수도승처럼 들어가봅시다.

주님께서 힘을 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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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February 25, 2015
*.176.175.230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는 행위의 결과에 무감합니다.

전 그게 더 나를 힘들게 합니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힘을 키우고 연민을 가집니다.

차라리 남을 위로하고 사랑하는 건 결과가 착하다는 소리라도 듣는데 나를 사랑하고 나의 일을 계획하는 데

치중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내가 만든 나의 치장을 어디서 확 쎈 불로 한방에 털고 싶습니다.

아주 작은 나의 미련이 큰 믿음의 마지막 체결 볼트의 나사산에 끼여서 믿음이 묶이질 않습니다.

그 작은 나의 일들이 일상의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주어진 여유, 주어진 업무. . .  이 모든게 나를 위한 핑게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삶의 흐름속에서 목사님의 말씀이 오래된 성경말씀이지만 나의 미래를 이끌어 주시는 궁극적인

생명의 길잡이 역할을 하십니다.  뭐가 더 필요한지 알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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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February 25, 2015
*.94.91.64

일상에 얽힌 일들을 다 털어내고 싶은 순간은

누구에게만 많습니다.

그렇게는 살아갈 수 없고,

그게 능사도 아니지요.

그걸 안고 가면서

주님이 하신 일을 종종 기억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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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 성령강림절 말씀을 수호하라! [9] 2007-10-28 10563
521 주현절 법과 자유 (마 5:13-20) [18] 2014-02-09 10561
520 주현절 상을 받는다는 것 (고전 3:1-9) [8] 2017-02-13 10556
519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마 21:23-32) [6] 2014-09-28 10555
518 성령강림절 '달리다굼' 말씀하시다 (막 5:21-24, 35-43) [10] 2015-06-28 10537
517 기타 언어의 한계와 존재론적 능력 (행 2:1-13) [8] 2004-07-02 10506
516 창조절 예수는 머릿돌이다 (마 21:33-46) [6] 2014-10-06 10485
515 성령강림절 하나님도 생각을 바꾸시는가? [5] 2007-09-23 10475
514 창조절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26] 2016-11-06 10440
513 기타 새 하늘과 새 땅 12월4일 [1] 2005-12-04 10440
512 기타 숨어있는 평화의 왕 [7] 2006-04-09 10436
511 기타 희망의 눈, 2005. 8.15. [1] [1] 2005-08-14 10431
510 기타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 (고전 1:22-25) 2004-07-02 10426
509 기타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신가? 4월24일 2005-04-24 10426
508 대림절 그는 목자시다 (사 40:1-11) [2] 2014-12-08 10421
507 기타 요셉의 침묵, 8월7일 [1] 2005-08-07 10413
506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00
505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396
504 대림절 기뻐하고 노래하라! (습 3:14-20) file [10] 2015-12-13 10385
503 주현절 하나님은 생명이다! (신 30:15-20) [5] 2014-02-16 10370
502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362
501 기타 야곱의 두려움, 7월17일 [4] 2005-07-17 10361
500 부활절 사랑함이 사랑받음이다. (요 14:15-21) [14] 2014-05-25 10360
499 대림절 물 세례와 불 세례 (마 3:1-12) [5] 2016-12-04 10357
49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눅 23:33-43) [4] 2013-11-24 10352
497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322
496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309
495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10293
494 기타 생존과 번성의 토대, 5월1일 [4] 2005-05-01 10288
493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 (사 52:7-10) file [4] 2015-12-25 10252
492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49
491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10248
490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46
489 부활절 예수 부활 이후 (요 20:19-29) [8] 2014-04-27 10215
4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1-9) [3] 2014-01-19 10182
487 부활절 승천과 재림 사이에서 (행 1:8-14) [2] 2014-06-02 10166
486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163
485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10163
484 기타 가족공동체를 넘어서, 5월8일 [2] 2005-05-08 10160
483 대림절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 5:16-24) [6] 2014-12-14 10094
482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084
481 성령강림절 그날의 평화 공동체 [9] 2009-08-17 10081
480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076
479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070
478 기타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2] [2] 2005-05-22 10064
477 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1] 2005-03-13 10049
476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042
475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007
474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000
473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9994
472 성령강림절 성령과 은사 (고전 12:4-13) [8] 2014-06-08 9986
47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9960
470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9953
469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9944
»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33
467 기타 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1] 2005-04-04 9924
466 성령강림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20] 2016-05-29 9923
465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9918
464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9913
463 부활절 "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16] 2016-05-08 9907
462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06
461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9897
460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9892
459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878
458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873
457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9869
456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9855
455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9842
454 성령강림절 여호와를 찬양하라! (렘 20:7-13) [2] 2014-06-22 9840
453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9837
452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29
451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823
450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22
449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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