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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대림절 조회 수 11723 추천 수 0 2014.12.22 09:53:41
설교듣기 : https://youtu.be/bDz7qt9Aitw 
성경본문 : 누가복음 1:26-38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1:26-38, 대림절 넷째 주일, 20141221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우리 개신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 사이에는 동질성이 많을까요, 아니면 이질성이 많을까요? 물론 동질성이 많습니다. 형제, 또는 자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정교회도 포함됩니다. 개신교 신자들 중에서는 로마가톨릭교회를 이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단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뭔가 불편한 집단으로 느끼기도 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마리아 숭배입니다. 가톨릭 교인들은 실제로 마리아에게 기도를 바치기도 합니다. 마리아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세 가지입니다. 1)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하나님의 어머니이며, 동시에 항상 처녀’(semper virgo)이다. 2) 마리아는 하나님이 공로 없이 값없이 주신 은총에 의하여 거룩하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한 은총에 의하여 원죄에서 면제되었다. 3) 마리아는 육신과 영혼이 모두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 이것을 가톨릭신자들이 흔히 쓰는 두 가지 용어로 바꾸면 무염시태(無染始胎), 즉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와 몽소승천(蒙召昇天), 즉 마리아의 승천입니다. 이에 대해서 로마가톨릭과 정교회와 개신교회의 입장이 각각 다 다릅니다. 어쨌든지 마리아 문제에서 우리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이야기는 마리아가 남자와의 관계 없이 처녀로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성경구절은 생각보다 훨씬 드물게, 딱 두 군데 나옵니다. 오늘 제3독서인 눅 1:26-38절이 그중의 하나입니다.

 

본문 이야기

본문 이야기는 수많은 화가들의 영감을 자극할 정도로 빼어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대단한 이야기꾼으로 보입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됩니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여기서 여섯째 달은 마리아의 친족인(사촌)인 엘리사벳의 임신 기간을 가리킵니다. 엘리사벳은 가임 기간이 훨씬 지날 때까지 아이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남편인 제사장 사가랴가 성전에서 제사를 집전할 때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당신 아내가 아기를 낳을 것인데 이름을 요한으로 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 요한은 훗날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입니다. 요한의 출생과 예수님의 출생은 생리학적으로 초자연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요한은 늙은 부모로부터 태어났고, 예수님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당시 마리아는 요셉이라는 남자와 약혼 중에 있었습니다. 약혼은 법적으로 부부가 된 거지만 아직 동거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당시에 마리아는 12-15세였을 거로 추정됩니다. 조혼 풍습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고대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상식적으로 볼 때 이해가 가지 않아서 34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그러자 가브리엘은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을 거론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전합니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러자 천사가 떠나갔다고 합니다. 동화처럼 신비롭기도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느낌, 또는 어떤 생각이 듭니까? 각각 다르겠지요. 어떤 분들은 이 이야기를 사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예수님이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신 것이야말로 초자연인 기적으로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증거라고 말입니다. 거꾸로 또 어떤 분은 이 이야기를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할 겁니다. 성관계를 갖지 못한 마리아가 어떻게 임신하느냐고 말입니다. 시험관 시술이 없었던 당시 마리아가 요셉과 동침하기도 전에 임신한다는 것은 생리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들리는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경에 나왔으니까 믿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상식적으로 동의가 되지 않는 것을 무조건 믿기도 힘듭니다.

 

신학적인 해명

우리는 여기서 이 문제를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눠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객관적이고 실체적인 진실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신앙적, 또는 신학적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이렇게 나눠서 생각하는 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텍스트는 이런 두 차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동쪽에서 해가 뜬다.’고 말했다고 합시다. 이것은 실체적인 진실이 아닙니다. 해는 동쪽에서 뜨는 게 아니라 지구의 자전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서정주 시인이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실체적 진실은 아닙니다. 바람이 아니라 부모가, 또는 밥과 김치 같은 먹을거리가 그를 키운 겁니다. 그러나 시인의 영적인 감수성이라는 차원에서는 바람 이야기가 옳습니다. 성경도 언어와 문자로 기록된 것이어서 이를 해석하려면 두 가지 차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선 실체적 진실에 속한 문제를 따라가 봅시다.

 

동정녀 잉태 이야기는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한 차례씩 나옵니다. 그게 약간 이상합니다. 동정녀 잉태 이야기가 초기 기독교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면 다른 성경에도 당연히 나와야만 했습니다. 오히려 그걸 부인하는 뉘앙스의 본문이 있습니다. 바울은 갈 4:5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만약 바울이 마리아의 동정녀 잉태 전승을 알고 있었다면 여자라고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무슨 말인가요? 동정녀 이야기는 당시 기독교 전반에 알려진 게 아니라 부분적으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공동체 지역에만 알려진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이런 과정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신학적인 마인드가 약간 필요합니다. 제 설명을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의 출생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 직접 옆에서 보고 그걸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공생애 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도 신문기자가 옆에서 확인해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당시는 아무도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메시아 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질 뻔했던 예수님 이야기는 제자들의 부활 경험 이후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제자들은 십자가에 처형당해서 땅에 묻혔던 예수님을 살아있는 이로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의 현존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운명에서 그들이 구원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경험에서 핵심은 동정녀 출생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동정녀 이야기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일부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고대인들은 영웅을 전설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헬라 신화에는 그런 전설적인 영웅설화가 많이 나옵니다. 남성 신들과 인간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서 태어난 아이가 영웅이 됩니다. 헬라 신화를 잘 알고 있던 헬라파 기독교인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출생을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헬라 영웅들처럼 예수님에게도 출생에 얽힌 전설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제 설교를 조마조마하게 듣고 있을 겁니다. 동정녀 탄생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한다는 말인지, 그렇다면 한국교회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힐 텐데, 하고 염려할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동정녀 탄생, 무염시태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이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그대로 믿는 게 옳지 않느냐,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그렇게 믿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믿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저는 그런 소박한 믿음을 배격하려는 게 아닙니다. 현대 물리학과 생물학을 포기해야만 기독교 신앙이 성립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변증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본문의 신학적 진실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세계 신학계에서 이미 정리된 내용입니다. 조금 더 들어보십시오.

 

동정녀 마리아라는 표현에서 중요한 것은 동정녀가 아니라 마리아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갈 4:5절에서 바울이 말했듯이 예수가 여자의 몸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이 사실을 강조한 이유는 당시의 한 이단인 영지주의를 배격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리고 삼위일체의 차원에서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하다면 인간과 똑같은 속성을 그대로 지녔다고 보기 어렵다는 겁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33년 동안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았다는 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먹고 배설하고 숨쉬고, 울고 웃고, 병들면 아프고, 외로워하셨습니다. 인간이 지닌 모든 제한적인 요소를 그대로 지니셨습니다. 그런 분을 그대로 초월적인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그림자로 사신 것이라고 설명한 겁니다. 그걸 가현설이라고 합니다. 정통 교부들은 그런 주장을 배격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림자가 아니라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사셨다고 했습니다. 처녀 잉태 개념에서도 핵심은 마리아라는 여자, 그녀의 몸, 그녀의 자궁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고, 가짜 몸으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여자의 몸에서 열 달 동안 자라다가 세상에 왔다고 말입니다.

 

이런 신학적인 해석이 옳다면 결국 동정녀 출생이 무너지고,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라는 사실도 흔들리는 거 아니냐, 하고 걱정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동정녀 잉태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아닙니다. 그와 반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동정녀 잉태가 가능하다는 신학적인 표징, 표시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처녀 잉태 전승은 예수님이 처녀인 마리아에게서 출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처녀에게서 출생할 수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마리아의 믿음

오늘 본문의 마리아 이야기는 비록 고대인들의 신화적인 사고방식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훨씬 근원적인 세계를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리아는 바로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대변해주는 인물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을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면서 그가 누군지를 32, 33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이 구절은 태어날 아기 예수가 구약이 약속하고 있는 메시아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신학적 진술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세상의 왕이라는 사실이 부활 이후가 아니라 이미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될 때부터 확실한 것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나중에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성육신 개념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기독론 논쟁에서 성육신론과 양자론은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이단으로 판명된 양자론도 일리가 있긴 합니다. 예수님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십자가 처형은 있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통 기독교는 나름으로 합리적이라 할 양자론을 거부하고 예수의 존재 신비에 근거한 성육신론을 받아들였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마리아의 입을 통해서 바로 그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는 곧 예수의 성육신이 교회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이런 진술이 겉으로는 처녀 잉태 자체를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즉 예수님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겁니다. 이 성육신 사건이야말로 참된 기적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믿음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이 사실에 집중했습니다. 예수님이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기에 처녀의 몸에 잉태될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이런 신학적이고 신앙고백적인 차원에서 저는 처녀 잉태 이야기를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사도신경이 언급하는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도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단순히 신학적 유희에 불과한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마리아로 대표되는 초기 기독교의 이런 믿음을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경험주의적 합리성에 기울어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가장 궁극적인 것 앞에서 우리는 마리아가 말한 여종의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 사건을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건 광신도 아니고 미몽도 아닙니다. 이성과 지성의 포기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 신비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유일한 태도입니다. 그럴 때 처녀 잉태보다 더 크고 절대적인 기적을 경험할 것이며, 오늘 본문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말한 것처럼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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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0]문전옥답

December 23, 2014
*.194.68.54

말씀을 통해

경직되고 평면적인 저의 기독교 신앙 이해가

점점 유연해지고 입체적으로 살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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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3, 2014
*.94.91.64

저의 설교가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데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감사한 일이지요.

'입체적'이라는 표현이 좋아보이네요.

높이와 깊이와 넓이가 아득한 세계이지요.

그걸 느낀다는 것만 해도 기쁨입니다.

좋은 성탄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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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2]staytrue

December 24, 2014
*.72.188.140

우리 이전 할머니와 어머니들의 소박한 신앙들도 

따뜻하게 끌어안으시는 모습은 언제나 감동적입니다.


오늘도 인간으로써 나의 한계 앞에서 존재의 신비를 경험하며,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라는 고백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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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4, 2014
*.94.91.64

온전한 인간이자 온전한 신이신,

역사에 내재하면서도 역사 너머의 출처를 갖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신비가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랍니다.

기쁜 성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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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푸른별

December 25, 2014
*.224.246.3

성탄절 아침에 정목사님의 "예수 동정녀 탄생"에 관한 말씀을 들으니 참 좋습니다.

인간의 보편적 상식과 현대과학을 전면부정하고 무조건 믿으라는 한국교회의 저급하고 폭압적인 '정언명령'에 대해 당연히 당당히 맞서면서 올바른 신앙을 정립하기위해 하나님과 단독자로서 씨름하는 것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개인이 아닌 대다수의 교회공동체가  당연시 여기는 것에 대해 회의를 갖는 것은 교회 정통교리에 대한 도전, 신앙없음, 이단시 되는 경향으로 감히 입밖에도 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 판단됩니다. 그래서 상식적이고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들은 교회생활이 힘들고 불편하고 괴롭다는 분들이 주위에 많습니다.


최근들어 개신교인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너무나 단순합니다. 카톨릭은 상식적이다라는 겁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마리아 숭배사상에 대해서도 개신교인들이 너무 과도하게 카톨릭을 비판하는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즉,  마리아 숭배사상에 대한 프로테스탄티즘의 반격으로 카톨릭신학은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차근히 대응하여 미신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현재는(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매우 건전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 여인을 높이 경배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느냐는 주장입니다.   

이제는 개신교가 예수님이 인간이라면 당연히 모친이신 마리아를 존경하고 높이는 것을 개신교는 역으로 마리아를 애써 폄훼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을 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신앙은 상식적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비밀이 은폐된 신비의 세계, 생명의 세계라는 정목사님의 말씀을 매우 좋아합니다.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 예수에 있어 '성모마리아'는 신학적 해석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2014 주님의 성탄을 목사님의 말씀으로 시작할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건승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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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25, 2014
*.94.91.64

예, 귀한 설명을 잘 읽었습니다.

여전히 미몽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개신교회 일반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기는 하지만 그것도 우리의 자화상이니

일단은 그대로 인정하면서 꾸준한 개혁의 길을 가야겠지요.

푸른별 님에게도 성탄의 기쁨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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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닥터케이

December 30, 2014
*.24.55.53

목사님, 본문 내용중에 오류가 있습니다.

"무염시태" 를 그리스도의 동정녀 잉태와 같은 것으로 설명하셨는데, 천주교에서 말하는 무염시태라는 것은 예수님이 아닌 성모 마리아가 원죄없이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천주교의 이론은, 예수께서 원죄없이 깨끗한 육신으로 태어나시려면 그 몸을 담는 그릇인 마리아도 깨끗한 몸이어야 하므로 성령께서 이미 마리아가 잉태될때부터 무한한 은총으로 원죄없이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정교회에서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동정녀 잉태를 고지하는 그때에 성령의 은총으로 기존의 죄가 모두 사해졌다고 보기 때문에(이를 "무염수태" 라고 표현합니다) 성모의 무염시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및 원죄없으신 탄생은 정교회도 당연히 인정하는 것이지요~!)


성모의 승천에 대해서 천주교는 성모 마리아가 죽음 직전에 살아있는 상태로 사라지면서 승천했다는 전승을 그대로 받아들여 몽소승천이라는 교리로 확정했지만, 정교회는 이를 인정하지도 부인하지도 않는 애매한 입장을 취합니다. 쉽게 말해서 "그런 전승도 있더라" 는 정도의 모호한 입장이지요. 하지만, 성모승천교리를 거부하느냐라고 물으면 똑 부러지게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정교회의 입장은 "성모안식" 이라고 해서, 돌아가시기는 했는데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전승이 있으니 승천하셨을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정교회에서는 천주교의 성모승천축일대신 "성모 안식 축일" 이라고 하여 날짜만 같고 이름은 다르게 기념합니다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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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December 30, 2014
*.94.91.64

역시 날카롭게 짚어주셨네요.

고맙습니다.

나는 무염시태를 마리아가 원죄없이 예수를 잉태했다는 뜻으로,

닥터케이 님이 무염수태라 한 그 개념으로 받아들였는데요.

그게 아니라 마리아가 원죄없이 잉태되었다는 뜻이라는 말이지요?

나는 무염시태와 무염수태를 똑같은 거로 보고

그것이 결국 동정녀의 신학적 의미와 동일한 거라고 생각한 거지요.

설교 그 대목을 손좀 봐야겠습니다.

어쨌든지 닥터케이 님은 이런 거 어디서 다 공부하셨나요?

대단하십니다.

앞으로도 이런 오류가 눈에 띄면 말씀해주세요.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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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닥터케이

December 31, 2014
*.45.132.52

과찬이십니다... 이런 잡다한 지식은 기독교의 핵심에 비교하면 그저 곁가지에 불과한 것인데요... 늘 건강하시고 새해에도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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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March 04, 2015
*.206.242.56

경험주의 합리주의가 목사님의 말씀으로 유연해 졌습니다.

경험주의 합리주의가 안전한 장치인것 같지만 어둠음 밝히는 등불과 같습니다.

등불을 들이대면 비로소 안보이던게 보일진 몰라도

등불로도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모든 어둠은 하나님만이 단숨에 걷어낼수 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배운 작은 지혜가 크나큰 진리를 이해하고 누른다는 생각 자체가 참으로 어리석고 좁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부활의 과정보다 더 구체적이다라고 전 개인적으로 생각이 듭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동정녀에게서 사람이 잉태된다는 사실에 저는

 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알게 됩니다.

나의 생각이 바뀐다는게 정말 힘들군요.

그리고 그 생각이 바뀌고 나니까

새로운 시야, 새로운 기쁨이 생깁니다.

진리를 알고 마음이 넓어져서 뭔가 많이 얻은느낌입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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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March 04, 2015
*.94.91.64

진리의 성격이 바로 탈은폐,

즉 넓어지는 것인데,

바로 그걸 경험하셨다니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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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 창조절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눅 19:1-10) [9] 2019-11-03 10732
542 성령강림절 축귀 능력자 예수 (눅 8:26-39) [6] 2019-06-23 10726
541 기타 생명 상실의 두려움을 넘어서 [2] 2009-01-01 10725
540 대림절 하나님이 오신다 (사 35:1-10) [7] 2016-12-11 10720
539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9] 2009-01-25 10706
538 기타 믿음의 토대, 1월15일 [3] [1] 2006-01-15 10703
537 성령강림절 성령 가득한 삶 (엡 5:15-20) [10] 2015-08-16 10693
536 주현절 복과 화 (눅 6:17-26) [4] 2019-02-17 10692
535 기타 삶의 지혜를 넘어서 [1] 2004-07-02 10677
534 기타 약속과 순종의 상호성, 6월5일 [1] [2] 2005-06-05 10674
533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671
532 주현절 구원의 현실화 (눅 4:14-21) [9] 2019-01-27 10666
531 성령강림절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골 3:1-11) [10] 2013-08-04 10636
530 기타 영에 속한 사람, 5월15일 [3] 2005-05-17 10636
529 창조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전 4:13-18) [8] 2014-11-09 10632
528 기타 삶과 행위, 7월3일 2005-07-04 10630
527 기타 민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통치 [2] 2006-06-25 10621
526 성령강림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4] 2018-06-03 10605
525 창조절 '예수 따름'의 문제 (막 10:17-31) [8] 2015-10-11 10600
524 성령강림절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 [4] 2007-11-25 10582
523 성령강림절 일상의 종말론적 지평 [10] 2007-10-07 10581
522 성령강림절 말씀을 수호하라! [9] 2007-10-28 10563
521 주현절 법과 자유 (마 5:13-20) [18] 2014-02-09 10560
520 주현절 상을 받는다는 것 (고전 3:1-9) [8] 2017-02-13 10556
519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마 21:23-32) [6] 2014-09-28 10555
518 성령강림절 '달리다굼' 말씀하시다 (막 5:21-24, 35-43) [10] 2015-06-28 10537
517 기타 언어의 한계와 존재론적 능력 (행 2:1-13) [8] 2004-07-02 10506
516 창조절 예수는 머릿돌이다 (마 21:33-46) [6] 2014-10-06 10485
515 성령강림절 하나님도 생각을 바꾸시는가? [5] 2007-09-23 10475
514 창조절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26] 2016-11-06 10440
513 기타 새 하늘과 새 땅 12월4일 [1] 2005-12-04 10440
512 기타 숨어있는 평화의 왕 [7] 2006-04-09 10436
511 기타 희망의 눈, 2005. 8.15. [1] [1] 2005-08-14 10431
510 기타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 (고전 1:22-25) 2004-07-02 10426
509 기타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신가? 4월24일 2005-04-24 10425
508 대림절 그는 목자시다 (사 40:1-11) [2] 2014-12-08 10419
507 기타 요셉의 침묵, 8월7일 [1] 2005-08-07 10413
506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00
505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395
504 대림절 기뻐하고 노래하라! (습 3:14-20) file [10] 2015-12-13 10384
503 주현절 하나님은 생명이다! (신 30:15-20) [5] 2014-02-16 10370
502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362
501 기타 야곱의 두려움, 7월17일 [4] 2005-07-17 10361
500 부활절 사랑함이 사랑받음이다. (요 14:15-21) [14] 2014-05-25 10359
499 대림절 물 세례와 불 세례 (마 3:1-12) [5] 2016-12-04 10356
49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눅 23:33-43) [4] 2013-11-24 10352
497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322
496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309
495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10293
494 기타 생존과 번성의 토대, 5월1일 [4] 2005-05-01 10287
493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 (사 52:7-10) file [4] 2015-12-25 10252
492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48
491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10248
490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46
489 부활절 예수 부활 이후 (요 20:19-29) [8] 2014-04-27 10215
4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1-9) [3] 2014-01-19 10182
487 부활절 승천과 재림 사이에서 (행 1:8-14) [2] 2014-06-02 10165
486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10163
485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162
484 기타 가족공동체를 넘어서, 5월8일 [2] 2005-05-08 10159
483 대림절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 5:16-24) [6] 2014-12-14 10094
482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084
481 성령강림절 그날의 평화 공동체 [9] 2009-08-17 10080
480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075
479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069
478 기타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2] [2] 2005-05-22 10064
477 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1] 2005-03-13 10049
476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040
475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007
474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000
473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9994
472 성령강림절 성령과 은사 (고전 12:4-13) [8] 2014-06-08 9986
47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9959
470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9952
469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9944
468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32
467 기타 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1] 2005-04-04 9924
466 성령강림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20] 2016-05-29 9923
465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9916
464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9912
463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06
462 부활절 "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16] 2016-05-08 9906
461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9897
460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9892
459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877
458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873
457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9868
456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9853
455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9842
454 성령강림절 여호와를 찬양하라! (렘 20:7-13) [2] 2014-06-22 9840
453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9837
452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28
451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22
450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822
449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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