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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부활절 조회 수 9847 추천 수 0 2015.04.12 19:39:07
설교듣기 : https://youtu.be/pWrUNLb5n2A 
성경본문 : 요한복음 20:19-31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20:19-31, 부활절 둘째 주일, 2015412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들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가끔 그런 이야기를 간증 식으로 퍼뜨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천국에 다녀왔다는 식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기도 합니다. 단테의 <신곡>처럼 문학적인 상징으로 말하면 가능하지만 실질적인 것으로 말하면 잘못입니다. 그런 이들은 뭔가 다른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든지, 또는 심리적으로 치료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성경에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기는 합니다. 구약은 접어두고 신약만 해도 다섯 군데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관계 된 것은 세 가지입니다. 1) 회당장 야이로의 딸(5), 2) 나인성 과부의 아들(7), 3)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11). 고대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사 상태에 빠졌던 이들을 모두 죽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착오가 일어나곤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린 아이가 병들거나 다른 이유로 숨도 쉬지 않고 심장이 멈춰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포대에 말아 윗목에 놓아두었는데, 하룻밤 자고 나니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흔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그런 사건 중의 하나인가, 하고 궁금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나사로도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나 되어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날 정도였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니까, 비슷해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 사건은 기자들의 취재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제자들도 미처 그 실체를 다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로운 생명 경험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어떤 사건에 연루되는지도 종잡기 힘들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에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꾸미지 않고, 거칠지만 있는 그대로 증언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그들의 증언 중에서 한 대목을 여러분들에게 다시 전해드릴까 합니다.

 

도마 이야기

요한복음 20:19절에 따르면 안식 후 첫날, 요즘의 요일 계산으로 일요일 저녁 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닫고 꽁꽁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당시에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는 모든 이들이 기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불똥이 자신들에게까지 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처형당할 때 생긴 상처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앞에 나타난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도마는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전해들었지만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딱 끊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 도마의 이런 발언은 초기 기독교 당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이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대표합니다. 믿음이 없어서 그런 말을 한다고 도마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고 근거로 없이 무조건 믿는다고 해서 좋은 신앙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자칫 광신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 26절부터 도마에게 반전이 일어납니다.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머물러 있던 그 자리에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도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첫 번째와 똑같은 축복의 말씀을 주신 다음에 도마에게 당신의 손을 보고 옆구리에 손을 대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 난 몸에 손을 댔을까요? 본문은 그것을 확인해주지 않습니다.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추정한다면, 도마는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을 겁니다. 바로 앞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할 때 예수님은 당신의 몸에 손을 대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목격한 도마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의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본질입니다. 요체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대로 복음서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베드로의 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반석이라는 뜻의 이름을 주시면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고백으로 큰 명예를 얻은 겁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베드로를 교회의 수장, 즉 초대 교황으로 내세웁니다. 이에 반해 도마에게는 의심 많은 제자라는 별명 아닌 별명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런 평가는 정확한 게 아닙니다. 도마의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수준이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외경으로 도마복음서가 있을 정도로 도마는 초기 기독교에서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나의 주님이라는 말은 원래 로마 황제에게 따라다녔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퀴리오스, 즉 주님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당대의 최고 권력을 손에 쥐고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던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퀴리오스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도 이런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현실성 있는 이야기인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실제로 퀴리오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대기업의 총수가 오늘의 퀴리오스는 아닐까요? 실제로 이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굴러갑니다. 오늘 우리의 삶과 생각과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는 힘이 무엇인지를 보면 대답은 간단히 주어집니다. 현대인들은 세속적인 힘, 즉 경제만능주의, 승리주의, 제국주의, 황제숭배, 권력숭배라는 세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처한 상황도 실제로는 그랬습니다. 로마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의 질서가 사람들과 세상을 구원하는 중심 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퀴리오스로 고백했습니다. 이게 옳은 주장일까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뭔가 비현실적인 몽상에 빠져 있는 건 아니었을까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근거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그리고 이런 경험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은 무의미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종말론적이고 궁극적인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거대한 제국을 이끌고 있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이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혼의 무게를 감당하는 이야기가 되려면 예수님의 부활이 왜 생명의 근원인지를, 왜 부활의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대답을 대다수 교인들은 압니다. 최근 설교에서 제가 몇 번 짚기도 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한 죄와 죽음의 극복이 그 대답입니다. 죄는 자기 스스로 자기 생명을 완성시켜보려는 욕망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 전승도 아담과 이브가 눈이 밝아진다는 유혹에 넘어간 것이라고 말합니다. 눈이 밝아지면 지식이 늘고, 그러면 사회 리더가 되고 선생이 될 수 있고, 존경받고, 돈도 많아집니다. 이런 걸 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명을 성취해보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런 것을 통해서 만족과 행복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떨까요? 헛수고일 뿐입니다. 이런 욕망들이 충돌하는 와중에서 삶을 파괴하는 악순환이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오는 목요일인 416일은 세월호 침몰 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 250명과 일반인 54명을 포함해서 304명이 목숨을 잃은 대재난이었습니다. 이런 대재난이야 아무도 원하지 않지만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일어납니다. 문제는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입니다. 이런 참사를 통해서 많은 걸 배우면서 구성원들의 마음이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로의 마음만 분열되고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느 쪽일까요? 저는 사고 당시만이 아니라 지난 일 년 동안 벌어진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대한민국 정부가 이처럼 무기력하고 몰염치할 수 있는지, 화가 치밀고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또는 교묘하고 세련된 편법을 통해서 자기 성취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게 하는 시대정신에 우리가 굴복당한 겁니다. 그것을 기독교는 죄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당신이 설명하는 복잡한 교리는 손에 잘 잡히지 않으니까 모르겠고, 그냥 세상에서 남에게 욕먹지 않는 선에서 열심히 노력하면서 행복하게 살면 충분한 게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로서 그런 생각이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아니며, 더 나가서 그런 게 행복한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상대적인 만족감에 불과합니다. 참된 행복과 참된 만족을 모를 때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상대적인 것에 매달립니다. 바둑을 비유로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바둑 동호회가 두 군데 있다고 합시다. 한쪽은 모일 때마다 점심 내기나 돈내기 바둑을 둡니다. 이기면 기분이 좋고, 지면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다가 서로 싸우고, 실망하거나, 잘난 척 거들먹거립니다. 바둑 실력은 매일 그 자리고, 꼼수만 늡니다. 다른 동호회는 바둑 전문 기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정석을 되풀이 배우면서 바둑의 세계 깊이로 들어갑니다. 바둑이 개인과 공동체를 기쁨으로 채웁니다. 어느 쪽이 바둑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일까요? 앞의 동호회에 속한 사람들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게 다투는 것을 바둑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와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사실을 경험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제국의 질서와 권위가 제공하는 삶의 안전한 토대가 허상이며, 그것의 절대화가 죄라는 사실을 눈치 챘습니다. 그래서 그 질서와 권위를 온 영혼으로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선배들이 걸어온 길입니다 

 

믿는 자의 복

나의 주님이라는 도마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본문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런 말씀은 듣기에 따라서 도마에 대한 책망처럼 들립니다. 도마의 신앙은 결국 눈과 손이라는 감각적인 수준에 떨어진 것이니, 그걸 초월하는 믿음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도마에 대한 책망이 아닙니다. 도마의 믿음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베드로의 믿음과 동일한 차원입니다. 이 말씀은 부활의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이해해야합니다. 요한복음은 기원후 90-100년 어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과 여러 증인들이 모두 세상을 뜨고 없을 때였습니다. 믿음이 흔들릴만한 상황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신앙에 비해서 자신들이 뭔가 1% 부족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렇지 않다고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처럼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도 보고 믿은 사도들과 똑같이 복 있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부활을 직접 보았느냐 보지 못했느냐 하는 게 핵심이 아니라 믿는 자가 되는 핵심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에는 사도들처럼 부활의 주님을 보고 믿는 자도 있고,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처럼 보지 못했지만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인으로 산 이들과 지금 우리들도 모두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믿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의 영적인 권위를 우리가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앞에서 주눅들어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나 우리나 모두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도 없고, 더 이하도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나의 주님이라는 신앙고백에 이미 부활의 주님에 대한 경험과 확신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도마를 비롯한 사도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그런 경험과 확신으로부터 나의 주님이라는 신앙고백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부활을 직접 목격한 이들의 신앙고백과 보지 못한 이들의 신앙고백이 다른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찬송과 기도와 성찬식과 세례와 예배 등을 통한 모든 신앙의 표현에는 부활의 주님에 대한 경험이 녹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의 친교도 부활 신앙을 뿌리로 합니다. 우리가 함께 예수님의 부활생명에 참여한다는 희망이 없다면 교회는 세상의 친목 단체 수준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부활공동체입니다. 그걸 정체성으로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보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궁극적인 생명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신앙고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사도들처럼 보고 믿는 자는 아니지만, 사도들의 전통에 근거해서 보지 못하고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퀴리오스라는 사실을 믿는 저와 여러분 모두 사도들과 똑같이 믿는 자로서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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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주안

April 15, 2015
*.69.199.48

나의 주님!
다비아를 통하여 빛, 진리, 생명이신 주님을
점점 더 밝히 깨닫고 알아, 보지 못하고도

확실히 믿게하여 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곳에서 주님을 만나는 모든 이들이
주님만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며
주님안에서 사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진실과 정의, 평화를 이루는 도구로 살아가게
하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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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15, 2015
*.94.91.64

저희 다비아를 위해서 기도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아멘!

profile

[레벨:43]웃겨

April 18, 2015
*.252.49.18

깊은 밤에 목사님 설교를 들었어요.( 목소리는 그리 미성이 아니신 건 확실한듯..ㅎ)

빵집 알바를 끝내고 들어온 늦은 시간에.. 혼자 조용히 듣다보면

홀로 앉아 음미하며 마시는 차 처럼

영혼의 골수 깊숙이 파고 듭니다.

이제서야 목사님이 그 오랜 시간을 힘주어

말씀해 오신 그 세계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조금씩  열리는 듯합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무게를,

세상과 다른 패러다임으로 사는, 차원이 다른 의식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정체감을 다시 한 번 되새김니다.

별로 눈에 확 띄는 반찬이 없는 평범한 식탁같이 보이면서도

 영양가 있는 오가닉 유기농 음식을 먹는 듯한

 목사님의 설교에 조금씩 저도 입맛이 길들여지나 봅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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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18, 2015
*.94.91.64

그동안 저의 설교에 입맛을 느낄 수 있도록

인내하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ㅎㅎ

제가 나름으로 전해보려고 했던 '그 세계'는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리고 오늘 확연하게 경험되는 것 같다가

내일이면 다시 묘연해져버리는 것이라서 

우리가 집중하면서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라 우리가 부르는 그분이 그런 분이니까요.

거기에 이르는 최선의 길은,

더 정확하게 말해

그 세계가 가까이 왔을 때 알아먹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앞서 그 길을 갔던 신앙 선배들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그들은 성서기자들과 신학자들인데, 

우리의 영적인 촉수가 예민해지는 것이겠지요.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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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송정공

April 19, 2015
*.112.106.152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너무나 감사하신 말씀

도마 같은 의심(?) 많고

가룟 유다 같은 저 같은 것을

내치지 않으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중략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 주님은 손도 옆구리도 상하셨고

목소리도 쉬셨고... ㅠㅠ

목자되신 나의 주님!!

제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주님을 버리고

또 버리고, 또 버리고 했던 나를

내치지 않으시다니...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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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19, 2015
*.94.91.64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이

주님의 제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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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June 25, 2015
*.176.175.19

어렵습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주시고 생명으로 인한 기쁨, 고통을 경험하면서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을 알게 됩니다.

내가 살아있음에 주님이 살아 게심을 믿습니다.

증거와 근거를 눈으로 보고 믿는 게 피곤한 인생이 란걸 알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온 날들은 주님께서 생명을 주신 날들이라 믿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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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ne 25, 2015
*.94.91.64

생명은 종말까지 이어질 영적인 화두라서

우리에게 사유의 인내심을 요구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방식으로 생명을 은총으로 받았고,

죽음 이후에는 잠 자는 방식으로 생명에 참여할 것이며,

마지막 심판 후에는 완전히 변화된,

그래서 지금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생명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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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 창조절 '예수 따름'의 문제 (막 10:17-31) [8] 2015-10-11 10602
524 성령강림절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 [4] 2007-11-25 10583
523 성령강림절 일상의 종말론적 지평 [10] 2007-10-07 10583
522 성령강림절 말씀을 수호하라! [9] 2007-10-28 10563
521 주현절 법과 자유 (마 5:13-20) [18] 2014-02-09 10561
520 주현절 상을 받는다는 것 (고전 3:1-9) [8] 2017-02-13 10556
519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마 21:23-32) [6] 2014-09-28 10556
518 성령강림절 '달리다굼' 말씀하시다 (막 5:21-24, 35-43) [10] 2015-06-28 10538
517 기타 언어의 한계와 존재론적 능력 (행 2:1-13) [8] 2004-07-02 10507
516 창조절 예수는 머릿돌이다 (마 21:33-46) [6] 2014-10-06 10485
515 성령강림절 하나님도 생각을 바꾸시는가? [5] 2007-09-23 10478
514 창조절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26] 2016-11-06 10441
513 기타 숨어있는 평화의 왕 [7] 2006-04-09 10441
512 기타 새 하늘과 새 땅 12월4일 [1] 2005-12-04 10441
511 기타 희망의 눈, 2005. 8.15. [1] [1] 2005-08-14 10433
510 기타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신가? 4월24일 2005-04-24 10429
509 기타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 (고전 1:22-25) 2004-07-02 10428
508 대림절 그는 목자시다 (사 40:1-11) [2] 2014-12-08 10423
507 기타 요셉의 침묵, 8월7일 [1] 2005-08-07 10415
506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02
505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397
504 대림절 기뻐하고 노래하라! (습 3:14-20) file [10] 2015-12-13 10388
503 주현절 하나님은 생명이다! (신 30:15-20) [5] 2014-02-16 10371
502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363
501 부활절 사랑함이 사랑받음이다. (요 14:15-21) [14] 2014-05-25 10362
500 기타 야곱의 두려움, 7월17일 [4] 2005-07-17 10362
499 대림절 물 세례와 불 세례 (마 3:1-12) [5] 2016-12-04 10358
49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눅 23:33-43) [4] 2013-11-24 10354
497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323
496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312
495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10296
494 기타 생존과 번성의 토대, 5월1일 [4] 2005-05-01 10290
493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 (사 52:7-10) file [4] 2015-12-25 10252
492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10251
491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50
490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47
489 부활절 예수 부활 이후 (요 20:19-29) [8] 2014-04-27 10219
4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1-9) [3] 2014-01-19 10182
487 부활절 승천과 재림 사이에서 (행 1:8-14) [2] 2014-06-02 10167
486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10166
485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165
484 기타 가족공동체를 넘어서, 5월8일 [2] 2005-05-08 10164
483 대림절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 5:16-24) [6] 2014-12-14 10098
482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085
481 성령강림절 그날의 평화 공동체 [9] 2009-08-17 10082
480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080
479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071
478 기타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2] [2] 2005-05-22 10066
477 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1] 2005-03-13 10052
476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043
475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010
474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001
473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9997
472 성령강림절 성령과 은사 (고전 12:4-13) [8] 2014-06-08 9986
47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9961
470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9957
469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9945
468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34
467 성령강림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20] 2016-05-29 9926
466 기타 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1] 2005-04-04 9925
465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9920
464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9918
463 부활절 "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16] 2016-05-08 9911
462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07
461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9900
460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9893
459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878
458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874
457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9870
456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9861
»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9847
454 성령강림절 여호와를 찬양하라! (렘 20:7-13) [2] 2014-06-22 9840
453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9837
452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31
451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25
450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824
449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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