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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에 속한 사람, 5월15일

기타 조회 수 10641 추천 수 98 2005.05.17 18:36:57
성경본문 : 민수기 11:24-30 
2005.5.15.          
민 11:24-30
영에 속한 사람들

떼죽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보기에 따라서 매우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또는 우리의 이해를 벗어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관한 이야기니까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그 현상에 얽혀있는 사연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특히 72명의 장로들이 영에 심취해서 황홀경에 빠진 사건을 놓고 여호수아가 그런 행동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모세에게 조언한다거나, 그 조언을 들은 모세가 보인 냉소적 반응은 분명히 여기에 복잡한 사연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 사연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출애굽의 이스라엘이 40년을 보낸 광야생활은 시내산 사건이 하나의 분기점을 이룹니다. 이들은 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율법을 완성시켰습니다. 이는 곧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가나안 이방민족들에게 밀리지 않을 만큼의 정신세계의 토대를 확보했다는 뜻입니다. 그 시내산에서 있었던 사건이 출 19장부터 레위기 전체, 그리고 민 10:10에 진술되어 있습니다. 이제 명실상부한 법전 공동체로서의 위상을 갖춘 이스라엘은 다시 지루한 제2의 광야생활을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런 분기점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11장 1절은 오늘 본문의 배경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백성들이 괴로워하며 불평하는 소리가 야훼의 귀에 다다랐다. 그 소리를 들으시고 야훼께서는 몹시 회가 나시어 불을 떨어뜨려 진지의 변두리를 살라 버리셨다.” 우리는 출애굽의 이스라엘이 광야생활 40년 내도록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물과 먹을거리에 궁핍을 느끼면 즉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과거를 기억한다면 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할 그들이 먹을 게 좀 없다고 불평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건 매우 당연한 행동입니다.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벗어났다는 사실이나 미래에 약속으로 주어진 가나안의 삶보다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그들에게 현안이었습니다. 민중신학자들은 역사의 주체가 민중이라고 합니다만 그 말은 부분적으로만 옳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을 받을 때 정의와 평화를 위한 주체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 거꾸로 먹고 마실 것 때문에 정의와 평화를 팔아버립니다. 개인이나 민중이나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한 발등에 떨어진 불에 모든 정신을 팔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불평을 듣고 모세는 하나님께 하소연했습니다. “이 많은 백성을 저 혼자서는 도저히 책임질 수 없습니다. 너무나 무거운 짐입니다. 진정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과히 밉지 않으시거든 이런 꼴을 더 이상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민 11:14,15). 모세의 부담감이 그만큼 컸기 때문인지, 아니면 야훼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그만큼 분명했기 때문이지 모세는 좀 어린애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계속 불평을 듣게 하려면 자기를 죽이든지, 아니면 좀 어떻게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직접 이렇게 하소연했다기보다는 성서기자가 그런 식으로 모세의 마음을 해석한 것이겠지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야훼 하나님이 해결해주셨습니다. 고기를 먹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백성들에게 구역질이 날 정도로(11:20) 고기를 먹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1절 이후에 보면 야훼 하나님이 바람을 일으켜 메추라기를 몰아다 그들에게 배불리 먹게 해주셨습니다. 고기를 먹이겠다는 약속은 그대로 지켜졌지만 그날 야훼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합니다. 아마 광야에서 고기를 잘못 먹고 떼죽음 당한 사건이 이렇게 그들에게 전승된 것 같습니다. 함께 출애굽 하고 광야를 거쳐 온 이웃이 떼죽음 당한 그 참혹한 사건을 그들은 ‘키브롯하따아와’라는 장소와 함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34).

72명의 장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그들의 떼죽음 사건 사이에 오늘 본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하소연을 들은 야훼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말씀과 함께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장로 70명을 ‘만남의 장막’으로 집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16절). 오늘 본문은 그 명령대로 장로들이 모였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장로 70명이 장막 주의에 둘러섰습니다. 야훼께서 구름 속으로 내려 오셔서 모세와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내리셨던 영을 그들에게도 나누어주셨다고 합니다(25절). 영이 임하자 그들은 입신(황홀경)에 빠졌고, 그런 현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번역되었지만 원래는 그 반대의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본문에는 70명 이외의 두 사람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장로 명단에는 올라있지만 ‘성막’으로 가지 않았던 두 명, 엘닷과 메닷에게도 영이 내렸습니다. 이를 본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이런 일을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너는 지금 나를 생각하여 질투하고 있느냐? 차라리 야훼께서 당신의 영을 이 백성에게 주시어 모두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29). 이 두 장로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지금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70명과 구별된다는 사실, 그리고 성막으로 오라는 모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모세를 반대한 일단의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이들의 황홀경 체험을 말리려고 했겠지요.
하나님의 영이 이들에게 내렸다는 이 이야기는 신약시대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행 2장)과 비슷합니다. 만약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게 임했던 성령과 이 광야시절에 유대인 장로 72명에게 임했던 성령이 바로 야훼 하나님의 영이라고 한다면 성령의 활동은 오순절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은 그 근거가 없습니다. 또한 이 장로들에게 임한 영은 이미 모세에게 임했던 영이라는 점에서 영이 임재는 훨씬 이전의 사건입니다. 더 근원적으로 야훼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지으시고 자신의 숨(루아흐)를 불어넣으셨을 때의 그 숨이 바로 그분의 영이라고 한다면 창조 사건 때부터 이미 영이 활동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영은 곧 하나님의 존재론이며 활동의 능력인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임한 72명의 장로들에게 나타난 현상은 좀 특이합니다. 물론 사도행전의 성령임재에서도 바람소리와 불꽃, 그리고 방언이라는 특이한 자연현상이 일어났지만 오늘 본문의 사건에서도 역시 그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일견 타당합니다. 술 취한 사람들이 자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영에 취한 사람도 역시 자기를 완전히 초월하는 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무당들의 신들림 현상도 이것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어떤 힘이 사로잡혀서 자기의 육체적 능력을 뛰어넘는 행동을 저지릅니다. 밤새워 춤을 추며 굿판을 벌인다거나 작두 위를 걷습니다. 이런 자기 초월 경험은 종교만이 아니라 예술행위에서도 벌어집니다. 열광적인 콘서트 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 있는 몇 시간동안 자기를 완전히 초월하는 엑스타시의 경험을 합니다. 이런 현상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자해하거나 심지어는 집단적으로 자살하는 경우도 벌어집니다. 특히 엑스타시를 근본으로 하는 사이비 소종파에서 이런 일은 종종 벌어집니다.
과연 성서는 이런 엑스타시와 영의 임재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 걸까요? 영의 경험이라는 게 경우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성서에서 일목요연한 해명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성서에서도 자기를 초월하는 엑스타시의 경험이 인정되기도 하지만 그런 현상은 거의 주목받지 못합니다. 방언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필요한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지 핵심적인 현상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영을 받은 72명이 엑스타시를 경험했지만 그들보다 먼저 영을 받은 모세는 전혀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에게 임한 영은 모세로 하여금 율법을 받아 적게 했습니다. 결국 성서가 말하는 영의 임재는 ‘말씀’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
여호수아는 72명의 엑스타시 현상을 왜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을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모세의 대답에서 찾아야 합니다. “너는 지금 나를 생각하여 질투하고 있느냐?”(29). 여호수아는 모세의 권위가 손상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오직 모세만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영적인 권위가 선다고 생각했겠지요. 아마 광야생활 중에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사람들이 제법 많았을 겁니다. 심지어는 오늘 본문에 이어 나오는 12장에서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판하면서 야훼께서 모세에게만 말씀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주장했습니다. 모세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 곧 이스라엘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 여호수아가 72명의 장로들에게서 벌어지는 그런 영적 현상을 금지시키려고 한 것은 당연합니다.
마틴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서는 독문학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작업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독일 사람들이 이제 성서를 자기의 모국어로 읽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이전에 성서는 라틴어 번역본 밖에 없었기 때문에 평신도들은 읽을 수 없었고 단지 사제들의 해명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장단점이 다 있습니다. 성서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특수집단에게 독점된다는 사실도 문제이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됨으로써 성서가 오해될 수 있다는 사실도 문제이긴 합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 계통의 사이비 이단에 많은 이유는 바로 성서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출발합니다. 그런 장단점이 모두 있지만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독점보다는 오해의 가능성이 덜 위험합니다. 그 이유는 독점되면 영이 활동할여지가 폐쇄되지만 오해는 교정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차라리 야훼께서 당신의 영을 이 백성에게 주시어 모두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29). 여호수아는 모세의 권위가 훼손되는 것만 염려했지만 모세는 그런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호수아와 모세의 생각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여호수아가 단순히 모세의 권위 문제에만 집착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자칫 영이 왜곡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었을지 모릅니다. 이 대목에서만 본다면 모세의 영 경험과 72명의 영 경험은 분명히 다릅니다. 모세는 늘 말씀 중심으로 영적인 경험을 했지만 72명은 엑스타시에 머물렀습니다. 이런 방식의 영 경험은 어떤 점에서 매우 유치하고 부분적인 영 경험이지만 매우 열광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는 훨씬 강력한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비록 그런 위험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을 받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사건이 불거지게 된 사연에 놓여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시내산 사건 이후에 다시 광야생활을 시작한 이스라엘은 고기를 먹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일상의 불편을 견디지 못해서 공동체를 허무는 이런 사람들의 문제는 영을 통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습니다. 삶의 조건은 아무리 향상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불평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고기를 마련해 주시고 즉시 그들에게 징벌을 내린 이유도 그들이 고기를 먹는다고 이런 불편으로 가득한 삶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영의 경험만 우리의 내면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영의 경험, 또는 영이 내렸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영은 우리로 하여금 표면적인 삶에 머물지 않고 그 내면을 인식하게 합니다.  즉 우리의 삶이 단지 이 세상에서 표면적으로 잘 먹고 잘사는 것에 놓여 있는 게 아니라, 기쁨과 자유와 평화에 있다는 사실은 영적인 눈이 아니면 결코 볼 수 없습니다. 음악이나 미술, 또는 시를 공부할 때도 역시 겉으로 나타나는 소리, 그림, 언어 안에 놓여 있는 근원적인 세계를 경험하려면 영감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오래 교회에 다녀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해 있다는 사실을 또렷하게 인식하는 경험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내면의 세계는 영적인 인식론으로만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권위가 손상당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에 속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야만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영적으로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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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유희탁

May 20, 2005
*.85.180.56

귀한 말씀 잘 읽었습니다. 영을 경험해야 한다는 말 자체가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때가 있습니다. 영을 경험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 영은 우리가 원하는 때 얻어지는 것인가요? 아니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인가요? 즉 우리의 의지와는 별개의 문제인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y 26, 2005
*.249.178.25

유 목사님,
좀 늦게 대답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들은 대개 몰라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더구나 이렇게 터놓고 질문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아마 유 목사님은 진솔한 사람인 것 같군요.
영을 경험한다는 게 무얼까요?
더구나 우리의 의지와 영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어려운 질문이래서 내가 좋은 대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이건 근본적으로 성령론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를 다루려면 성령의 본질, 그 속성, 그 양태 등등,
여러 각도로 살펴야 할 것 같네요.
이 자리는 그런 정도까지 넓게 생각할 수 없으니까
요점적으로만, 그리고 직관적으로만 생각해보지요.
성령은 근본적으로 생명의 영입니다.
생명의 본질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대충 따라잡을 수는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 움직이는 것,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영은 무엇일까요?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기, 도와 비슷한 무엇일까요?
글쎄요.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영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겁을 주는 말은 아니구요.
외면적인 사물과 그 사태의 내면에서 활동하는 생명의 힘이 곧 성령입니다.
그런 성령을 경험한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 세계가 생명의 힘을 가득하게 된다는 뜻이죠.
사랑, 기쁨, 자유, 평화, 더 나가서 '존재'와 일치하는 경험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영인 루아흐를 '바람'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손에 포착되지 않고 자기의 자유로 움직이는 바람처럼
영은 스스로 생명을 일으키는 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힘에 우리가 사로잡히는 게 곧 성령경험입니다.
신약시대는 방언을 성령경험의 한 현상으로 생각했는데,
아마 그 당시에는 그런 열광주의적 현상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같습니다.
위에서 말한 사랑, 기쁨, 자유, 평화 같은 것들은 교회 밖의 사람들도 경험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생명의 힘들은 단지 자연적인 속성에 한정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연관해서 인식하고 경험합니다.
이런 경험이 깊어지는 게 곧 영성의 심화입니다.
이런 영을 경험하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까요?
기본적으로 영은 자기의 자유로 움직이지만
그런 자유로운 성령의 힘을 인식하고 경험하려면 우리에게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작곡가들은 음악성을 타고나기도 하지만 깊은 음악공부가 있는 것과 비슷하지요.
목사들에게는 신학 공부가 가장 중요한 준비입니다.
성서 텍스트의 지평에 들어가고, 신학의 역사를 이해하고,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는 그런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의 활동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학은 단지 정보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영의 리얼리티과 직결되어 있는 공부로서의 신학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자면 바독의 정석을 잘 알아야 바둑의 길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아직 말하게 많은데 이런 대글 형식으로는 좀 어렵군요.
다른 기회가 있으며 좀 자세하게 설명하지요.
이건 나에게도 신앙적 실존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의 영성이 깊어지려면 영의 현상을 실체적으로 이해해야하니까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을 경험하면 목소리를 부흥사처럼 낸다거나
남의 운명을 쪽집게 무당처럼 알아맞춘다거나
뭐가 외변적으로 화끈하게 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달라진다면 그건 하나님의 현존에 완전히 의존하는 변화겠지요.
우리가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목회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하나님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는 것은 인식한다면
그에게 영성의 경험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두서 없는 글이었습니다.
이렇게 결론을 내려야겠네요.
우리가 생명의 비밀에 들어간 만큼 우리는 성령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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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유희탁

June 01, 2005
*.225.129.79

댓글 감사합니다. 그냥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해야 겠죠..
간결하지만 핵심을 짚어주신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해야겠네요
그럼 오늘도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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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 (사 52:7-10) file [4] 2015-12-25 10253
492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10251
491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50
490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50
489 부활절 예수 부활 이후 (요 20:19-29) [8] 2014-04-27 10221
4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1-9) [3] 2014-01-19 10183
487 기타 가족공동체를 넘어서, 5월8일 [2] 2005-05-08 10169
486 부활절 승천과 재림 사이에서 (행 1:8-14) [2] 2014-06-02 10167
485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10167
484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165
483 대림절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 5:16-24) [6] 2014-12-14 10101
482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090
481 성령강림절 그날의 평화 공동체 [9] 2009-08-17 10083
480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082
479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071
478 기타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2] [2] 2005-05-22 10068
477 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1] 2005-03-13 10054
476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043
475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012
474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005
473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9999
472 성령강림절 성령과 은사 (고전 12:4-13) [8] 2014-06-08 9987
47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9961
470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9957
469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9946
468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36
467 성령강림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20] 2016-05-29 9926
466 기타 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1] 2005-04-04 9926
465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9921
464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9919
463 부활절 "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16] 2016-05-08 9912
462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07
461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9901
460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9897
459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878
458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875
457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9872
456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9862
455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9855
454 성령강림절 여호와를 찬양하라! (렘 20:7-13) [2] 2014-06-22 9841
453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9838
452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32
451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27
450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824
449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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