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8

성령과 은사 (고전 12:4-13)

성령강림절 조회 수 9986 추천 수 0 2014.06.08 21:21:36
설교듣기 : https://youtu.be/tHsguZk1NqI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2:4-13 

성령과 은사

고전 12:4-13, 성령강림절, 201468

 

 

오늘은 전 세계의 모든 교회가 성령강림절로 지키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승천 이후 유대인들의 여름추수 절기에 해당되는 오순절에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이 예루살렘의 마가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 자리에 불과 바람의 형태로 임한 사건을 기리는 절기입니다. 오늘 제1 독서인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성령강림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성령강림 이후로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성령의 피조물이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성령과 교회는, 그리고 성령과 기독교인은 불가분리의 관계라는 뜻입니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절감하지 못합니다. 그럴만합니다. 성령은 바람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마가다락방에서 나타났다는 불과 바람 현상을 지금 우리가 다시 똑같이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독교인들은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 합니다. 신유나 방언 등등이 그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성령의 증거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향은 주로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 강하게 나타납니다. 보통 은사주의운동이라고 합니다. 이런 집회는 열광적으로 진행됩니다. 찬송도 열광적으로 부르고, 기도도 열광적으로 합니다. 소위 주여, 삼창에 이은 통성기도는 보통이고, 집단적으로 방언기도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신앙 행태에 동의하시는지요? 아니면 동의하지 않으시는지요? 각각의 근거는 있는지요?

 

2천 년 전 고린도 교회에도 이런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와 관련된 주제를 세 장에 걸쳐서 언급했습니다. 고전 12-14장입니다. 12장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13장은 사랑에 대해서, 14장은 방언과 예언에 대해서 다룹니다. 12장의 중심 주제인 은사라는 단어는 헬라어 카리스마의 번역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저 사람은 카리스마가 있어.’라고 말할 때의 그 카리스마입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카리스마가 있다는 말은 다른 사람이 간섭할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 카리스마의 종류를 고전 12:8 이하에서 아홉 가지나 열거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이 그것입니다. 아홉 가지 은사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분류해서 보면 그 성격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은 성경을 바르게 잘 가르치는 능력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나 교사들이 주로 하는 일입니다. 이런 것이 다 은사입니다. 예언은 점쟁이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짚어내는 능력이라기보다는 설교에 해당됩니다. 영 분별은 설교가 참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설교라고 해서 모두 바른 게 아닙니다. 고대 선지자들 중에서도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잘못된 설교가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도 은사입니다. 이 네 가지는 다 성경의 가르침과 연관되는 은사입니다.

 

2) 특이하게 믿음도 은사의 목록에 나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믿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서는 믿음이 기적 행하는 능력과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위 목록의 다섯 번째에 나오는 능력 행함과 비슷한 겁니다. 병 고치는 은사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유라고 부릅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은 이것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신유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집회가 곳곳에서 열립니다. 불치병이나 난치병에 걸린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말에 무조건 솔깃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유집회를 통해서 일정한 정도로 병에 차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기도를 받지 않았다고 해도 일어날 수 있는 정도입니다. 성경에 기도로 병을 고쳤다는 말이 있다고 해서 지금도 무조건 그런 식으로 병을 고치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오늘날 치료 행위는 의사의 업무입니다. 의사의 능력이 바로 카리스마입니다. 어쨌든지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고, 바울이 그것을 성령의 은사라고 말한 것도 분명합니다. 그 시대의 특징입니다

 

3) 바울은 마지막으로 방언과 방언 통역을 은사로 제시합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가장 시끄러웠던 문제가 바로 방언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신자들끼리 갈등이 생기고, 예배의 질서가 흐트러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4장 전체를 이 문제에 대한 해명에 할애했습니다. 한 마디로 방언하는 사람들아, 좀 자중해라.’ 이겁니다. 여기서 다뤄지고 있는 방언은 남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라틴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키리에 엘레이송의 반복 발음을 들으면 방언으로 들릴 겁니다. 방언도 옳은 방언이 있고, 거짓 방언도 있습니다. 고도의 영적 경지에서 기도를 드리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다른 소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무당들도 어떤 단계에 들어가면 그런 현상을 보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비슷한 현상이 다 있습니다. 시인이나 음악가들도 어떤 경지에 들어가면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냅니다. 이런 방언은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반면에 어떤 방언은 흉내 내는 것, 또는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겁니다. 방언을 가르치고 배우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은 혼자 있을 때만 할 것이며, 회중 앞에서 할 때는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한다고 충고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다루는 고전 12장과 그중에 대표적인 방언을 다루는 14장 사이의 13장에서 사랑을 말합니다. 고전 13:1-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자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에도 여러 은사들이 열겁니다. 방언, 천사의 말, 예언, 믿음, 구제 등등입니다. 이런 것들이 중요하기는 하되 더 근원적인 것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더 근원적인 것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친절하게 대하고, 도와주고, 생일을 기억해주고, 이벤트를 벌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 은사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는 사랑은 그런 은사와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고전 13:4절 이하에 따르면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랑은 곧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생명의 힘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만이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은사와 방언이라는 주제를 거론하면서 뜬금없이 중간에 사랑을 언급한 이유는 고린도교회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방언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은사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문제로 다투기도 하고,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문제로 한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모습을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아주 과격하게 말한 겁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모든 은사는 말짱 꽝이라고 말입니다. 바울의 영적 통찰력이 놀랍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과 신앙생활의 본질을 정확하게 진단했습니다.

 

은사 문제에 대한 바울의 이러한 신학적 입장을 바탕에 놓고 오늘 설교 본문을 읽으면 그 의미가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 12:8-10절에서 아홉 개의 은사를 거론하면서 성령으로’, 또는 같은 성령으로라는 단어를 반복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은사 자체라기보다는 은사의 근원입니다. 은사의 근원은 성령입니다. 은사는 성령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강조입니다. 4-7절에서 바울은 이 사실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위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은사는 다양하지만 은사를 가능하게 하는 성령은 동일합니다. 그러니 신자들은 은사를 자랑하기보다는 성령에게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7절에 나온 유익하게 하려라는 표현을 루터는 공동의 유익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은사는 개인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개인의 은사는 교회 공동체의 질서와 유익을 파괴하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목사의 은사는 크게 나타납니다. 예배를 드릴 때 목사의 역할이 가장 커 보입니다. 예배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의 업무에서도 목사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사의 카리스마가 우월하다고 여깁니다. 반면에 주일학교 어린이를 가르치는 일이나 청소하는 일은 작아 보입니다. 겉으로 그럴듯하게 드러나지 않는 일은 교회에서 인정받기 힘듭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카리스마의 왜곡입니다. 목사의 일이나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나 청소, 이런 모든 일들은 동일한 성령에서 나온 것에 불과합니다. 뿌리가 똑같습니다. 성령이라는 뿌리에서 큰 가지가 나기도 하고 작은 가지가 나기도 합니다. 각각 모양과 역할은 다르겠지만 모두가 동일한 성령에서 주어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은사들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동일한 겁니다

 

무슨 말인가요? 각자의 은사가, 즉 일상을 포함한 모든 신앙적인 삶이 성령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뚫어볼 수 있다면 다른 사람과의 차이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삶이 성령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이 아쉬울 게 있겠습니까? 또한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은사도 똑같이 소중하게 여깁니다. 잘난 척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즉 성령론적인 차원에서 동일하다는 사실에 영혼이 휩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일상의 차원에서 설명하는 게 이해하기 좋을 겁니다. 사람이 하루에 밥을 몇 번 먹을 수 있는지를 보십시오. 부자나 가난뱅이나, 지식인이나 무식쟁이나, 미국 사람이나 북한 사람이나 똑같이 하루 세끼입니다. 숨을 몇 번 쉬는지 보십시오. 잘난 사람은 더 많이 쉬고, 못난 사람은 더 적게 쉬는 게 아니라 거의 비슷하게 20번 정도 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에 비해서 나머지들은 별 거 아닙니다. 이 사실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볼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그렇게 살아가는 게 잘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다투고, 잘난 척하고, 주눅 들고 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그런 방식으로 신앙과 삶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세상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성령의 피조물인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 한계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요?

 

성령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는 게 여기서 중요합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게, 즉 성령과의 관계를 맺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우선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 바로 앞 구절인 고전 12:3절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에 대한 두 가지 태도가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주라 하는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저주할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사람, 즉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전형적인 표현으로 나무에 달려 죽은 자라는 게 그걸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에게 저주할 자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그렇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런 세상의 평가와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아니면 안 됩니다. 성령을 받은 가장 핵심적인 증거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성령과의 관계가 깊어졌다는 것은 곧 예수에게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문제에서 이것 말고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 마지막 구절인 13절에서 다시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었든지 아니면 헬라인이었든지, 그리고 자유인이었든지 아니면 종이었든지 모두 똑같이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영적 통찰입니다. 민족의 차이, 신분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세례는 곧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았다는 사실에 대한 종교적 의식입니다. 이 세례는 앞에서 인용한 고전 12:3절이 가리키듯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함으로써 받을 수 있습니다. 결국 성령과의 관계는 예수와의 관계입니다. 이런 관계에서만 은사는 은사로서의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대는 교회 안이나 밖이나 은사주의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누가 잘났냐 하는 것에만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연봉의 차이가 인간을 구별합니다. 그래서 세상살이가 온통 다툼입니다. 은사를 개발하고 촉진하는 데만 정신을 파느라 은사의 원천을 놓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니, 잊지 마십시오. 은사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성령과의 친밀도가, 즉 예수님과의 친밀도가 우리의 삶을, 우리의 운명을 실질적으로 결정합니다.


profile

[레벨:20]문전옥답

June 09, 2014
*.194.68.54

소유와 존재에 대해 목사님께서 설명하신 내용을 다비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은사들이 존재론적으로 동일하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오늘 시편 34편을 공부했는데 말씀 중에 영적인 각성을 위한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신 부분이

근원에 집중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습니다.

그렇게 집중하다보면 자연히 삶의 열매로 나타나는 걸까요? 아득하네요...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사는 것이 성령, 예수님과 친근한 관계를 맺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사실 어제 교회에서 히브리서 11장 말씀을 들으면서 조금 불편했습니다.

천지창조, 노아의 홍수등 이런 사건들이 믿어지냐,

믿어지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것이고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열매가 나와야 하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죄인이다...이런 식의 설교였는데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 설교였습니다.

뭔가 좀 아니다 싶으면서도

삶의 열매로 내놓을 만한게 나한테 없어서 자기 변명하려는 마음이 생겨서 불편한건지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09, 2014
*.94.91.64

각종 은사의 존재론적 동일성이 마음에 와 닿았다니

그동안 공부가 결실을 맺는 것 같습니다. ㅎㅎ

그리고 삶의 열매라는 건 일단 생각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자신의 영적 실존이 무언지 알지도 못한 채

삶의 열매를 기웃거리다가는 죽도밥도 안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출발도 예수와의 관계이고,

마지막도 예수와의 관계입니다.

주의 평화.

 

 

profile

[레벨:20]신짱구

June 09, 2014
*.37.100.185

"바울이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은사 자체라기보다는 은사의 근원이며,  은사의 근원은 성령이라는 사실,  

은사는 개인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뜻,

성령을 받은 가장 핵심적인 증거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  

성령과의 관계가 깊어졌다는 것은 곧 예수에게 집중한다는 뜻.

은사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성령과의 친밀도가, 즉 예수님과의 친밀도가 우리의 삶을,

우리의 운명을 실질적으로 결정한다는 것. "

목사님 주안에서 평안하셨지요.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저의 삶속에서 예수님과의 친밀도가 더 깊어지길 소망합니다.

점점 더워지는 여름날씨에 건강유의하세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09, 2014
*.94.91.64

신짱구 님이 설교를 확실하게 요약해주셨네요.

설교 시간의 제약으로

예수와의 관계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을

설명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전달이 되었지요?

이건 종말론적인 구원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구체적인 삶에도 해당되는 겁니다.

그분은 진리이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니까

그 자유에 근거해서 오늘의 삶이 결정되는 거지요.

오늘은 시원하군요.

주님의 평화가.

profile

[레벨:4]파란하늘지붕

June 11, 2014
*.129.38.94

아아, 매일밤 들어오는 다비아는 늘 저를 기대하게 만듭니다. 오늘도 은사와 성령이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어렴풋하게 나마 알아가는것같습니다. 중간에, 예언이란 설교를 영분별이란 설교의 진위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목사님께서 지적하신대로 많이들 오해하는 부분인것같습니다. 그렇게 해석하신 근거나 보충설명을 좀더 자세히 부탁드려도 될까요?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것은 거의 모든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진다, 그 나머지것들은 사실 그리 큰 부분이 아니다.'라는 통찰은 또한 헉소리나도록 놀랍습니다. 이런 깨우침이 있는 사람이라면 교만할수도, 또한 초라해지지도 않을텐데 말입니다. 성령의 친밀함보다 얼마나 은사의 크기와 능력만을 서로 비교하는지요, 이것을 안만큼 성령과, 예수와 더욱 친해질수있기만을 바랍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11, 2014
*.94.91.64

파란하늘 님이 다비아를 좋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위 설교의 엑기스를 정확하게 파악하셨네요.

저도 제 설교를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삶의 능력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예언은 앞 일을 미리 알고 말하는 것이라는 뜻이기는 하지만

사람은 근본적으로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능력일 뿐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순수하게 예언을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겁니다.

간혹 점쟁이처럼 말하는 경우가 성경에도 나오기는 하나

그건 아주 특이한 경우이고

성서의 중심에 거기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의 평화.

 

profile

[레벨:13]진인택

December 31, 2014
*.44.68.212

제가 받은 은사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사의 비교를 매일 합니다.

엉뚱한 눈금을 가르키는 저울과 자로 나의 은사를 이리저리 잽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주신 고귀한 은사를 제대로 못보는 것 같습니다.


놀라운 은혜가 나를 지금도 이끌고 있음을...

그 은혜로 목사님의 말씀을, 흐릿했던 눈에서 맑은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은혜가 커지고 말씀을 더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말씀을 틈틈히 보고 공부합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anuary 01, 2015
*.94.91.64

2015년에도 기독교 신앙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봅시다.

그 공부가 우리의 일상과 일치만 된다면

더 이상의 귀한 공부는 없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68218
548 성령강림절 우리는 하나다! [9] 2007-08-12 10799
547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2020-12-06 10790
546 부활절 회개, 세례, 성령 (행 2:36-41) [8] 2014-05-04 10764
545 대림절 "너는 누구냐?" (요 1:19-28) [4] 2020-12-13 10750
544 부활절 저 분은 주님이십니다! [8] 2007-04-22 10743
543 창조절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눅 19:1-10) [9] 2019-11-03 10731
542 성령강림절 축귀 능력자 예수 (눅 8:26-39) [6] 2019-06-23 10726
541 기타 생명 상실의 두려움을 넘어서 [2] 2009-01-01 10722
540 대림절 하나님이 오신다 (사 35:1-10) [7] 2016-12-11 10719
539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 [9] 2009-01-25 10705
538 기타 믿음의 토대, 1월15일 [3] [1] 2006-01-15 10703
537 성령강림절 성령 가득한 삶 (엡 5:15-20) [10] 2015-08-16 10693
536 주현절 복과 화 (눅 6:17-26) [4] 2019-02-17 10691
535 기타 삶의 지혜를 넘어서 [1] 2004-07-02 10675
534 기타 약속과 순종의 상호성, 6월5일 [1] [2] 2005-06-05 10673
533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670
532 주현절 구원의 현실화 (눅 4:14-21) [9] 2019-01-27 10665
531 성령강림절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골 3:1-11) [10] 2013-08-04 10636
530 기타 영에 속한 사람, 5월15일 [3] 2005-05-17 10634
529 창조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전 4:13-18) [8] 2014-11-09 10632
528 기타 삶과 행위, 7월3일 2005-07-04 10629
527 기타 민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통치 [2] 2006-06-25 10619
526 성령강림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4] 2018-06-03 10603
525 창조절 '예수 따름'의 문제 (막 10:17-31) [8] 2015-10-11 10600
524 성령강림절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 [4] 2007-11-25 10581
523 성령강림절 일상의 종말론적 지평 [10] 2007-10-07 10581
522 성령강림절 말씀을 수호하라! [9] 2007-10-28 10563
521 주현절 법과 자유 (마 5:13-20) [18] 2014-02-09 10560
520 주현절 상을 받는다는 것 (고전 3:1-9) [8] 2017-02-13 10556
519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마 21:23-32) [6] 2014-09-28 10555
518 성령강림절 '달리다굼' 말씀하시다 (막 5:21-24, 35-43) [10] 2015-06-28 10537
517 기타 언어의 한계와 존재론적 능력 (행 2:1-13) [8] 2004-07-02 10504
516 창조절 예수는 머릿돌이다 (마 21:33-46) [6] 2014-10-06 10485
515 성령강림절 하나님도 생각을 바꾸시는가? [5] 2007-09-23 10475
514 기타 새 하늘과 새 땅 12월4일 [1] 2005-12-04 10440
513 창조절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26] 2016-11-06 10439
512 기타 숨어있는 평화의 왕 [7] 2006-04-09 10435
511 기타 희망의 눈, 2005. 8.15. [1] [1] 2005-08-14 10430
510 기타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 (고전 1:22-25) 2004-07-02 10424
509 기타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신가? 4월24일 2005-04-24 10422
508 대림절 그는 목자시다 (사 40:1-11) [2] 2014-12-08 10418
507 기타 요셉의 침묵, 8월7일 [1] 2005-08-07 10412
506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399
505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395
504 대림절 기뻐하고 노래하라! (습 3:14-20) file [10] 2015-12-13 10378
503 주현절 하나님은 생명이다! (신 30:15-20) [5] 2014-02-16 10370
502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361
501 기타 야곱의 두려움, 7월17일 [4] 2005-07-17 10361
500 부활절 사랑함이 사랑받음이다. (요 14:15-21) [14] 2014-05-25 10359
499 대림절 물 세례와 불 세례 (마 3:1-12) [5] 2016-12-04 10354
49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눅 23:33-43) [4] 2013-11-24 10342
497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322
496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308
495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10292
494 기타 생존과 번성의 토대, 5월1일 [4] 2005-05-01 10286
493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 (사 52:7-10) file [4] 2015-12-25 10252
492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10248
491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47
490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46
489 부활절 예수 부활 이후 (요 20:19-29) [8] 2014-04-27 10215
4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1-9) [3] 2014-01-19 10181
487 부활절 승천과 재림 사이에서 (행 1:8-14) [2] 2014-06-02 10165
486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10163
485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161
484 기타 가족공동체를 넘어서, 5월8일 [2] 2005-05-08 10158
483 대림절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 5:16-24) [6] 2014-12-14 10090
482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083
481 성령강림절 그날의 평화 공동체 [9] 2009-08-17 10080
480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075
479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068
478 기타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2] [2] 2005-05-22 10063
477 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1] 2005-03-13 10046
476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040
475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006
474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000
473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9993
» 성령강림절 성령과 은사 (고전 12:4-13) [8] 2014-06-08 9986
47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9959
470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9951
469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9944
468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32
467 성령강림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20] 2016-05-29 9923
466 기타 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1] 2005-04-04 9923
465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9916
464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9911
463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05
462 부활절 "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16] 2016-05-08 9905
461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9896
460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9892
459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877
458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873
457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9868
456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9852
455 성령강림절 여호와를 찬양하라! (렘 20:7-13) [2] 2014-06-22 9840
454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9838
453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9836
452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28
451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22
450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822
449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16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