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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따름'의 문제 (막 10:17-31)

창조절 조회 수 10601 추천 수 1 2015.10.11 23:19:32
설교듣기 : https://youtu.be/hHQDjnZ5HSU 
성경본문 : 마가복음 10:17-31 

예수 따름의 문제

10:17-31, 창조절 여섯째 주일, 20151011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지금부터 15년 전 쯤 아이엠에프 이후 수년간에 걸쳐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아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금도 그런 로망을 품고 있을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이런 점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교회가 그런 풍조를 부추기는 경향까지 있습니다. 겉으로는 예수만이 그리스도라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부자 되는 것을 구원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그런 방식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불행한 일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경험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깊이에서는 부자 되는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절정의 기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동의하든 않든, 관심이 있든 없든 그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막 10:17절 이하에 어떤 부자 한 사람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에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도 똑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7).

 

이 부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영생을 꿈꿉니다. 죽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죽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어서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에 끊임없이 불안을 느낍니다. 하이데거는 사람을 불안으로 몰아가는 죽음의 성격을 세 가지로 규정합니다. 하나는 독자성입니다. 아무도 죽음의 길을 함께 갈 수 없습니다. 혼자만 가는 길을 사람들은 무서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무연관성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맺었던 모든 연관이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가족, 재산, 명예, 교우들과의 연관이 없어집니다. 셋째는 불능가성입니다. 죽음 이후에 어떤 존재가 될지 아무도 모르고, 그것을 아무도 극복할 수도 없습니다. 죽어 있는 자기 시체를, 또는 시간이 지나 썩고 있는 자기 시체를 상상해보면 이 불안이 얼마나 심각할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이 부자도 이런 불안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재산이 많아도 불안이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부로 인해서 불안이 더 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즉 무엇을 해야 죽음 앞에서의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지를 물은 겁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세 단계로 주어집니다. 첫 단계부터 앞으로 나가면서 답변의 강도가 점점 더 강렬해집니다. 첫째, 예수님은 이 부자가 언급한 선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수정합니다. 예수님은 선하다는 호칭이 하나님께만 해당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과 행동의 토대를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께만 두었다는 뜻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십계명 중에서 여섯 항목을 열거하셨습니다. 그 항목들은 십계명 중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 관한 것인데,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부자의 질문에 상응하는 겁니다. 이처럼 행위에 대한 질문은 유대인들에게 신앙적인 화두였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윤리 도덕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자는 예상 문제를 맞힌 것처럼 이 계명은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부자이면서도 행동거지가 반듯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신앙도 좋고 인격도 훌륭하고 재산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뭐 하나 부족할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부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자의 아킬레스건을 치신 말씀입니다. 19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만이 아니라 이를 읽는 우리의 마음도 불편하게 합니다. 불편할 뿐만 아니라 자칫 시험에 떨어지게도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재산을 처분해야 한다면 예수 믿을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간혹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1181-1226)는 지중해 대무역상의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아버지로부터의 상속권을 포기하고 평생 가난하게 살았고, 탁발수도를 원칙으로 하는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창설했습니다. 그런 전통이 수도원 영성이 기초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간혹 눈에 띄지만 일반적인 일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게 이 말씀을 적용시키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더 나가서 불합리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재산을 다 팔아 처분하면 가정생활은 물론이고, 당장 생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왜 이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말씀을 하신 걸까요? 그게 아니라면 이 말씀에 다른 뜻이 있는 걸까요?

 

부자가 슬픈 기색으로 돌아간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유명한 낙타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입니다(25). 아주 단호한 말씀입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적용시킨다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떠날 것입니다. 특히 부자들이 비교적 많이 분포되어 있는 서울의 강남 지역 교회가 대혼란에 빠질 겁니다. 다른 구절들은 문자적으로 믿으면서도 이런 구절은 교묘하게 틀어버리거나 외면해버리는 건 성경 앞에서 정직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어쨌든지 부자가 아닌 사람들의 눈에도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부자라는 사실만으로 하나님 나라로부터 배척당한다면 이보다 더 불공정한 일은 없습니다. 이 말씀은 부자들에 대한 종교적 배척이라기보다는 더 근원적인 것을 지시합니다. 그것은 이미 부자와의 대화에서 암시되어 있듯이 재물, , 자본이 영생(하나님 나라)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옳은 말씀일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입니다. 돈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구조입니다. 1990년대의 현실사회주의 실패 이후 온 세계가 신자유주의로 포장된 천박한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대한민국은 다른 그 어떤 나라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이런 영향을 심하게 받는 나라입니다. 이런 사회 구조에서 개인과 사회는 돈을 절대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의 논리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킵니다. 교육, 노동, 예술, 문화가 모두 돈의 논리에 떨어집니다. 한 예로 지금 인간의 병을 고치는 거룩한 행위인 의료가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국가가 나서서 영리병원 설립을 유도합니다. 돈 많은 환자들을 특별 대우하는 병원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 특별대우를 받겠다는 것이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현상이 고착화되면 결국 돈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의료 행위는 열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기업 임직원들이 턱없이 높은 연봉을 받으면 결국 중소기업의 직원들의 연봉이 줄어드는 거와 같습니다. 오늘날 이런 사회 현상이 고착화되면서 대한민국 사람들이 경험하는 삶의 질은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한 국가의 경제와 노동 문제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려는 게 아닙니다. 돈이 영생에 왜 방해가 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를 든 것뿐입니다. 소유한 것을 다 처분하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실망한 부자처럼 오늘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돈의 막강한 논리에 영혼의 상처를 받아 이제 정의, 인간성, 사랑, 평화에는 아무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회도 그런 현상에 매몰되어 있어서 할 말이 없긴 합니다.

 

낙타와 부자의 비유를 듣고 놀랐던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가 나서서 자신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자랑스럽게 말하자 예수님은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위 구절에서는 재산만이 아니라 가족까지 다 버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와 연관된 모든 것을 버려야만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재산을 처분하고 예수를 따르라는 말씀보다 더 극단적이어서 비현실적인 것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고 인간 운명을 직관할 수 있다면 이 말씀이 삶과 운명에서 정곡을 찌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집, 형제, 자매, 어머니와 아버지, 자식, 전토를 다 버릴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옵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모든 걸 잃는 것이 우리 삶의 마지막 지점입니다. 그게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런 일이 끔찍스러워서 피해보려고 온갖 방책을 세우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할 순간의 목표를 미리 당겨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걸 외면하거나 거리 멀게 살면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더 초라한 상태로 떨어집니다.

 

제가 60을 넘었으니 상당한 정도로 나이를 먹은 셈입니다. 저는 주변에서 저보다 나이가 더 든 분들도 보고 적은 분들도 봅니다. 제가 직접 아는 분들도 있고, 간접적으로 아는 분들도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신앙과 삶이 더 깊어지고 유연해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더 궁색하고 천박하고 고집스러워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80, 90의 나이가 되었는데도 욕심이 그치지 않습니다. 더 많은 걸 소유하고 싶어 하고, 더 많은 대우를 받고 싶어 합니다. 자녀들 위에 군림하려고 합니다. 모든 걸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재단합니다. 그런 삶의 태도는 일종의 노욕이자 퇴행입니다. 기독교인인데도 이런 삶의 태도에 떨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평소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평소에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신앙의 깊이를 추구하지 않으면 모든 걸 손에서 놓아야 할 순간이 다가오면서 영혼이 더 빈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하루아침에 교정되는 게 아닙니다. 젊었을 때부터 죽을 때 일어날 일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혼의 공부이며, 영생을 추구하는 거룩한 훈련입니다

 

재물과 소유와 가족을 비롯한 모든 것을 버리는 삶을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여러분들도 뭔가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들 겁니다. 그러나 자기가 버린 것보다 더 큰 것을 받는 게 확실하다면 말이 달라질 겁니다. 예수님은 3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핵심적으로 두 가지 받을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는 버린 것을 현세에서 백배로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말씀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1억원을 버렸다고 해서 100억원을 실제로 돌려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마음은 사행심이지 신앙은 아닙니다. 이 말씀의 영적인 차원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1억원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은 실제 돈이 아니라 돈보다 더 귀한 것을 이 세상에서 얻게 됩니다. 형제와 자매를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은 백배로 형제와 자매들을 이 세상에서 얻게 됩니다. 나무와 새와 하늘과 구름과 꽃이 다 그 사람의 가족이 되며, 재산이 됩니다. 지구와 우주 전체와 친구가 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면 이런 삶의 태도는 자연스러운 겁니다. 제가 살고 있는 원당의 집터는 200평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이 말은 곧 그 땅 앞의 더 큰 2천 평, 또는 2만 평의 땅이 다 내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내 것이 됩니다. 정말 큰 선물을 받은 겁니다. 코엘료는 <연금술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연금술을 배우고 싶어 찾아온 소년에게 연금술사는 납으로 금을 만드는 게 연금술이 아니라 세상을 다 금으로 볼 줄 아는 시각이 바로 연금술이다.’라고 말입니다. 모래 한 알을 손가락으로 잡은 채 이것이 바로 우주다.’라고도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으신가요? 자기 것, 자기 가족, 자기 재산, 자기 업적에만 매달린 채 죽음을 맞고 싶으신지, 그것을 버림으로써 백배의 재산과 백배의 가족과 백배의 친구들을 얻고 싶으신지, 어느 쪽인가요? 원하는 쪽을 선택하십시오

 

다른 한 가지는 앞에서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실망해서 돌아간 부자가 열망하던 영생을 내세에서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영생이 불가능합니다. 모두 죽기 때문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들도 다 죽습니다. 영생은 차안이 아니라 피안의 차원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영생은 이미 현세에 비밀한 방식으로, 은폐의 방식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그게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지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구원은 다른 말로 영생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고 할 때 영원한은 단순히 이 세상의 유한과 대립하는 무한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무한히 반복되는 것을 참된 생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생명, 즉 하나님 나라와 영생은 예수와의 일치를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예수가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다.’(2:20, 고후 5:17)고 말했습니다. 예수와의 일치는 예수 안에서 자기가 무화(無化)되는 것입니다. 무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온전히 따른다는 뜻입니다. 그에게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에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맡기면서 살기 때문에 자기는 무가 됩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바로 재물과 가족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볼 수 있는 영생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모든 세상살이를 실제로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열심히 세상에서 투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삶의 중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는 겁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는 여러분이 스스로 찾아봐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젠가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할 순간을 맞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 순간이 속히 올 것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약간 지체될 뿐이지 아무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 순간을 앞당겨서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 그런 사람만이 내세에, 더 나가서 이미 현세에서 영생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 11:25,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즉 예수를 따르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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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은빛그림자

October 12, 2015
*.108.104.33

목사님.

내 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내 것이 된다, 는 말씀을 하셨을 때의

예배실 그 공기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ㅎㅎㅎ

워낙에 리액션 큰 저도 저 멘트 앞에선 양심 상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어요.

'나'라는 인식 체계가 가동이 되는 한 욕망의 완벽한 거세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더불어, 어제 신학 공부 강의(제20강 종말에 관하여)를 들으면서

스스로에게 자문해보았습니다. 과연 종말을 기대하고 기다리는가.

사실 이 땅에서 기대할 것이 없다, 사는 게 괴로워죽겠다, 등등 말들을 많이 하지만

당장 '나'라는 개체가 이 땅에서 해체되는 그 순간을 지금 곧 맞이하겠는가, 라는

생생한 질문 앞엔 좀 머뭇거리게도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안정성에 조금만 위협받아도 스트레스 지수가 확 올라가는 저로서는

밭에 감춰진 보화를 기대하며 전 재산(거의 없음 ) 다 팔아 그 밭을 살 엄두가 안 납니다. 

'예수 따름"의 문제는 이토록 어렵지만 기왕지사 여기까지 왔으니 또 걸어가봐야쥬....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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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3, 2015
*.94.91.64

은빛 님의 영적 수준과 나의 그것 사이에

차이가 하나도 없다는 걸 위 대글을 읽으면서 확인했습니다.

나는 다만 신학적인 정보를 좀더 아는 것뿐이고,

실제 삶에서는 거기서 거기에요.

'예수 따름'을 포기하지 않겠다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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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October 13, 2015
*.125.153.176

근심하며 돌아간 청년과

갈등속에 양다리 걸치며 사는 우리와 무엇이 다르길래

늘 부자청년 구절을 대할때면

구원받지 못했을 그 청년을 향한 측은지심이 발동하는 걸까요?

우리의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걸까요?

 

비록 우리 영혼이 깨어나

자식과 전토에 집착하며 살것인가, 그것을 버리고 당신을 좇을것인가

예수님의 냉혹한 부르심 앞에 서긴 했지만

세상 것에 대한 미련과 집착의 끈을 여전히 놓지 못하고 갈지 자를 걷는건

구원이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크다는걸

아직 실감하지 못한채 사는 탓이겠죠?

 

태어나면서부터 수십년간을 보고, 듣고, 배운 세상 가치관이

핏속까지 가득 채워진채 살던 우리가

그것을 버리지 않고는,

그것과 거슬러살지 않고는 영생을 얻을수 없다는 엄위한 선언 앞에서

로마서 7장 말미에 바울이 설토한

영혼이 깨어난자의 갈등, 충돌, 대립...

그 싸움을 죽을때까지 하면서 살되

결국 아는 만큼 자식과 전토를 버릴수 있음을 새삼 절감하며

오늘도 그분 알기를 타는 목마름으로 나아가야겠다 싶습니다.

도전받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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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3, 2015
*.94.91.64

부스러기 님의 고민이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설교 중에서도 말했지만

버림의 삶이 출가 수도사가 되는 것만이 아니에요.

그걸 현실에서 불가능한 겁니다.

저 사람이 모든 걸 버렸는지는

아무도 판단하기 어려워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고전 13:3)는 바울의 말처럼

버림을 객관적인 수치로 판단할 수는 없어요.

더 우선적인 것은 '예수 따름'이에요.

세상의 것이 따름을 방해하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지

버리기 위해서 버리는 것은 아니에요.

부스러기 님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짚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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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October 13, 2015
*.237.104.169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말고

달을 보아야 하듯이 예수님말씀은

인간운명의 근원적인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그사실을 알아듣도록 목사님께서 말씀해주시는군요.

우리삶은 우리가 신중하게 생각했던 모든걸

잃는것이 마지막 지점이며 그순간을 당겨서

사는것이 영생을 얻은사람이라는 것을요.


예수그리스도만을 온전히 따르는

그날이 오도록 예수님 안에서 무가 되도록, 주님 이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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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October 13, 2015
*.94.91.64

에스더 님이 핵심을 잘 짚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모든 걸 손에 놓아야 할 순간을 맞게 된텐데,

그걸 미리 당겨서 살아내는 게 정말 지혜로운 것이겠지요.

구체적인 방법은 각자가 다 다르니

그때마다 잘 판단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예수와 그의 사건이 화염처럼 우리를 감싸는 것,

그것이 곧 우리가 그분 안에서 무가 되는 것입니다.

무가 된다고 해서 무기력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성령 안에서 역동적인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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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진인택

January 24, 2017
*.222.51.58

원숭이가 작은 항아리속의 쌀 한줌을 놓지 못해서 손을 못빼는 모습이 제 모습인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제대로 볼 줄 모르니 쉽게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옆으로 고개를 조금만 더 돌리면 보이는 데.

누가 와서 어디를 꼭 눌러서 고개가 조금더 돌아가게 해 주소서


얼른 놔 버리는 나 자신을 위해

영원한 생명, 부활의 생명이 예수님께 있음을 보는 눈을

가지도록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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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24, 2017
*.164.153.48

'얼른 놔 버리는' 태도가

'백천간두 진일보 시방세계현전신'이 가리키는 바인데,

쉽지 않겠지만 가보는데까지 가봐야지요.

나도 가는 줄 하나에 몸을 맡기는 거미처럼

공연한 것을 손에서 더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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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 기타 약속과 순종의 상호성, 6월5일 [1] [2] 2005-06-05 10674
533 기타 마술과 신앙 2004-07-02 10672
532 주현절 구원의 현실화 (눅 4:14-21) [9] 2019-01-27 10668
531 성령강림절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골 3:1-11) [10] 2013-08-04 10636
530 기타 영에 속한 사람, 5월15일 [3] 2005-05-17 10636
529 창조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살전 4:13-18) [8] 2014-11-09 10632
528 기타 삶과 행위, 7월3일 2005-07-04 10630
527 기타 민중의 소리와 하나님의 통치 [2] 2006-06-25 10623
526 성령강림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4] 2018-06-03 10605
» 창조절 '예수 따름'의 문제 (막 10:17-31) [8] 2015-10-11 10601
524 성령강림절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 [4] 2007-11-25 10582
523 성령강림절 일상의 종말론적 지평 [10] 2007-10-07 10582
522 성령강림절 말씀을 수호하라! [9] 2007-10-28 10563
521 주현절 법과 자유 (마 5:13-20) [18] 2014-02-09 10561
520 주현절 상을 받는다는 것 (고전 3:1-9) [8] 2017-02-13 10556
519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마 21:23-32) [6] 2014-09-28 10555
518 성령강림절 '달리다굼' 말씀하시다 (막 5:21-24, 35-43) [10] 2015-06-28 10537
517 기타 언어의 한계와 존재론적 능력 (행 2:1-13) [8] 2004-07-02 10506
516 창조절 예수는 머릿돌이다 (마 21:33-46) [6] 2014-10-06 10485
515 성령강림절 하나님도 생각을 바꾸시는가? [5] 2007-09-23 10475
514 창조절 죽음 이후에 대한 질문 (눅 20:27-38) [26] 2016-11-06 10440
513 기타 새 하늘과 새 땅 12월4일 [1] 2005-12-04 10440
512 기타 숨어있는 평화의 왕 [7] 2006-04-09 10436
511 기타 희망의 눈, 2005. 8.15. [1] [1] 2005-08-14 10431
510 기타 종교와 철학을 넘어서 (고전 1:22-25) 2004-07-02 10426
509 기타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신가? 4월24일 2005-04-24 10426
508 대림절 그는 목자시다 (사 40:1-11) [2] 2014-12-08 10421
507 기타 요셉의 침묵, 8월7일 [1] 2005-08-07 10413
506 기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2월19일 [2] [1] 2004-12-20 10400
505 기타 본질의 변질 2004-07-02 10396
504 대림절 기뻐하고 노래하라! (습 3:14-20) file [10] 2015-12-13 10384
503 주현절 하나님은 생명이다! (신 30:15-20) [5] 2014-02-16 10370
502 창조절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빌 4:4-9) [9] 2016-11-20 10362
501 기타 야곱의 두려움, 7월17일 [4] 2005-07-17 10361
500 부활절 사랑함이 사랑받음이다. (요 14:15-21) [14] 2014-05-25 10360
499 대림절 물 세례와 불 세례 (마 3:1-12) [5] 2016-12-04 10357
49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눅 23:33-43) [4] 2013-11-24 10352
497 기타 운명과 자유 2004-07-02 10322
496 기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 2004-07-02 10309
495 기타 총체적 구원의 길, 7월10일 [2] 2005-07-10 10293
494 기타 생존과 번성의 토대, 5월1일 [4] 2005-05-01 10288
493 성탄절 하나님의 위로 (사 52:7-10) file [4] 2015-12-25 10252
492 성령강림절 예수는 불이다! (눅 12:49-56) [18] 2016-08-15 10249
491 기타 죄를 어찌할 것인가? 9월4일 [1] 2005-09-04 10248
490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8] 2008-08-17 10246
489 부활절 예수 부활 이후 (요 20:19-29) [8] 2014-04-27 10215
4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 1:1-9) [3] 2014-01-19 10182
487 부활절 승천과 재림 사이에서 (행 1:8-14) [2] 2014-06-02 10165
486 기타 카리스마 공동체, 8월21일 [1] 2005-08-21 10163
485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10162
484 기타 가족공동체를 넘어서, 5월8일 [2] 2005-05-08 10160
483 대림절 초림과 재림 사이에서 (살전 5:16-24) [6] 2014-12-14 10094
482 성령강림절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2017-08-13 10084
481 성령강림절 그날의 평화 공동체 [9] 2009-08-17 10081
480 성령강림절 만나 전승에 관해서 [9] 2008-09-14 10076
479 기타 제자도의 본질, 10월17일 [1] 2004-10-17 10070
478 기타 삼위일체의 신앙, 5월22일 [2] [2] 2005-05-22 10064
477 기타 하나님의 영광의 신비, 3월13일 [1] 2005-03-13 10049
476 기타 기쁨과 사랑의 역학관계 [1] 2004-07-02 10042
475 창조절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수 3:7-17) [2] 2020-11-01 10007
474 부활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요일 5:1-6) [6] 2015-05-10 10000
473 창조절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막 8:27-38) [8] 2015-09-14 9994
472 성령강림절 성령과 은사 (고전 12:4-13) [8] 2014-06-08 9986
47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5] 2017-06-25 9960
470 기타 묵시와 현실 사이에서 2004-07-02 9953
469 창조절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 13:8-14) [3] 2014-09-07 9944
468 창조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신 8:7-18) [6] 2014-11-16 9932
467 기타 부활의 증인 공동체, 4월3일 [1] 2005-04-04 9924
466 성령강림절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왕상 18:20-39) [20] 2016-05-29 9923
465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9917
464 기타 자유를 향한 부르심 [4] 2006-04-23 9913
463 부활절 "속히 오리라." (계 22:12-14, 16-17, 20-21) [16] 2016-05-08 9907
462 성령강림절 믿음의 길 (히 11:1-3, 8-16) [19] 2016-08-07 9906
461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9897
460 기타 열린 삶, 닫힌 삶 2004-07-02 9892
459 주현절 변형 (마 17:1-9) 2017-02-26 9878
458 성령강림절 예수 따름의 위급성 (눅 9:51-62) [9] 2016-06-26 9873
457 기타 신앙의 현실과 삶의 현실, 4월17일 [2] [2] 2005-04-18 9868
456 대림절 "은혜를 받은 자여!" (눅 1:26-38) [2] 2020-12-20 9854
455 부활절 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 20:19-31) [8] 2015-04-12 9842
454 성령강림절 여호와를 찬양하라! (렘 20:7-13) [2] 2014-06-22 9840
453 성령강림절 야훼의 불 [5] 2007-06-10 9837
452 사순절 약속의 하나님 (창 9:8-17) [2] 2015-02-22 9829
451 기타 제자의 길, 9월19일 [1] [1] 2004-09-20 9823
450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9822
449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9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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